이것이 강호다
거센 바람이 바위를 흔들려 했다. 바위는 갈대가 되었다. 바람이 지나자 갈대는 대나무가 되었다. 바람의 힘을 한껏 머금은 대나무가 바람이 불어오던 방향으로 쏘아졌다. 바람은 물에 비친 달이 되었다. 대나무가 달을 후려쳤지만, 그저 물에 파문만 일으키고 말았다.
대나무는 곧바로 뱀이 되었다. 영사검법은 변(變)을 기반으로 하는 검법이다. 무수한 변화를 일으켜 좌요검법의 환(幻)을 깨려 했다. 그러나 달은 다시 소나무가 되었다. 계절이 어떻게 변해도 늘 푸른 소나무를 뱀이 천변만화(千變萬化)하며 공격했지만, 소나무는 불변(不變)으로 만변(萬變)에 응(應)했다.
일류에 이르고 눈썰미가 좋은 고수라면 둘의 대결에서 훨씬 많은 걸 엿보았을 것이나, 강호 경험이 일천하고 무공을 제대로 배운 적이 없는 유신은 그러지 못했다. 다만, 어린 시절부터 외공을 세 시진씩 단련하면서 길러진 집중력으로 조금 엿본 것을 확실히 각인하고 있다.
최근 배운 추구질행의 신법 영향으로 주로 보법이나 몸놀림에 많이 집중했다. 흑면야차의 두 발은 항상 팔자 혹은 역팔자를 그렸다. 너무 틀에 박힌 거 아니냐는 생각을 잠깐 했지만, 천하에서 다섯 손가락에 꼽히는 절정고수를 유신의 잣대로 재단할 수 있을 리 만무하다.
'왼발이 앞으로 나가면 왼쪽 어깨가 앞으로 가고, 왼손은 늘어뜨린다. 오른발이 앞으로 나가면 오른 어깨가 앞으로 나가고 왼손은 가슴까지 올린다. 어느 발이 앞으로 향하든 머리는 움직이지 않고 시선을 상대에게 고정한다.'
유신은 아는 글자가 이백 개 정도밖에 안 된다. 내공이 정체에 들면 글공부를 하자고 아비인 용철이 계획했었다. 그러나 용철이 죽고 오현사에 가서 살면서 그 계획이 틀어졌다. 그래도 자주 보는 글자를 다른 사람에게 물어서 대략 이백 글자 익혔다.
글로 적으면 두고두고 곱씹을 수 있다. 그러나 아는 글자가 적어서 지금처럼 머리로 기억할 수밖에 없다. 유신은 계속 속으로 중얼거리며 자신이 본 것을 암기하려 노력했다.
'베기를 할 때나 찌르기를 할 때나 손목을 전혀 사용하지 않는다. 변검이나 환검은 손목을 많이 사용한다 들었는데 내가 잘못 알고 있었던 건가?'
흑면야차는 변검을 사용할 때에도 손목을 전혀 사용하지 않았다. 손목은 큰 변화를 가져오지만, 손목으로 검을 움직일 때 상대의 반격을 받으면 위험할 수도 있다. 상대 역시 절정고수이기에 손목을 이용한 잡기술은 사용하지 않는 게 낫다.
'두 어깨의 움직이는 속도가 균일하다. 그리고 한쪽 어깨가 앞으로 가면 다른 어깨는 반드시 뒤로 가는구나.'
흑면야차는 전진 혹은 후퇴할 때 반드시 몸을 비틀었다. 왼쪽 어깨가 앞으로 가면 오른쪽 어깨는 반드시 뒤로 들어왔다. 오른쪽 어깨가 뒤로 후퇴할 때 왼쪽 어깨가 살짝 앞으로 나간다. 영사검법은 뱀의 움직임을 검법으로 만든 것이기에 전진하든 후퇴하든 항상 몸을 비틀었다.
'오른발과 왼발은 항상 수직 되어 있고, 오른발은 자주 움직이지 않는다. 왼발은 사선으로 움직이지 않고 항상 오른발과 수직 되게 움직인다.'
불천검의 좌요검법은 송풍수월이라는 쾌와 환을 기반으로 하는 검법을 불천검이 재해석한 것이다. 쾌와 환에 불천검이 단단함을 더했다. 청성파에서 쫓겨난 것이 한이 되어 불천검은 자신의 검법을 좌요검법이라 이름 지었다. 빛날 요를 써서 좌수검을 빛내려는 뜻을 품었다.
쾌와 환에 단단함을 부여한 것이 바로 시종일관 정(丁)자를 고집하는 보형(步形)이다. 쾌와 환은 검에 한정된 것이고, 보형은 단단하기 그지없다. 뿌리가 깊은 나무가 더 든든해지는 것처럼 좌요검법도 쾌와 환을 위주로 하지만 전혀 가볍지 않았다.
'내가 아는 쾌검은 다리부터 시작해서 어깨까지다. 팔꿈치와 손목은 단단히 버텨주기만 하면 된다. 그러나 독고거병의 쾌검은 어깨와 팔꿈치를 사용하는구나.'
유신이 아는 쾌검은 다리부터 시작한 힘이 엉덩이와 허리 그리고 등을 통해 어깨로 향한다. 거기에 어깨의 힘까지 더해지고 팔꿈치와 손목은 전달된 힘을 버텨낸다. 물론 검을 내지를 때 굽혀졌던 팔꿈치가 펴지기는 하지만, 그건 힘을 얻으려고 펴는 게 아니다. 힘의 전달을 원활하게 하려고 자연스럽게 펴는 것이다.
그러나 불천검의 찌르기와 베기는 달랐다. 하체의 힘을 전혀 사용하지 않고 어깨부터 힘을 썼다. 환검 역시 어깨 힘으로 사용했다. 흑면야차와 마찬가지로 손목은 전혀 사용하지 않았다.
'내공 때문인가? 아니면 내가 알 수 없는 또 다른 뭔가가 있는 것인가?'
어깨부터 힘을 사용하면 상대에게 미처 준비할 시간을 주지 않을 수 있다. 하지만 그만큼 쾌검에 실린 힘이 약해진다. 속도는 어느 것이 더 빠른지 판단이 서지 않는다. 쾌검을 사용하며 그 속도를 본인이 실감할 수 없기 때문이다. 열 번의 쾌검을 펼치고 가장 빠른 걸 골라내라면 대부분 고개를 저을 것이다.
'오른손은 시종 늘어뜨리고 있다. 아예 오른팔이 없는 사람처럼 움직이는구나. 오른팔을 배제하면 무슨 장점이 있는 거지?'
왼쪽 어깨가 뒤로 갔을 때 왼손을 가슴 높이로 올리는 흑면야차와 달리, 불천검은 오른팔을 축 늘어뜨렸다. 이해가 잘 가지 않아 우선 기억만 해 두기로 했다. 섣불리 결론을 내려 잘못된 길에 들어서면 아예 정체만도 못 하다.
더는 느껴지는 게 없자 유신은 안타까움을 느꼈다. 두 절정고수의 대결이다. 유신이 평생 노력해도 저 경지에 이를지 장담할 수 없다. 유신과 두 고수의 차이는 어마어마하다. 분명 더 많은 것을 느껴야 하는데 유신의 부족함으로 얻은 게 많지 않다.
'한 장면이라도 더 기억해두자.'
유신은 몰아의 상태에 빠졌다. 무의미해 보이는 작은 움직임이라도 눈에 담아두려 애쓴 결과다. 몰아의 상태에 빠지자 모든 주의가 둘에게 집중되며 아까와는 다른 느낌을 받았다.
아까 분석하며 볼 때는 두 고수가 똑같은 동작을 반복하는 것 같았다. 그런데 몰아의 상태에 빠지니 둘의 상호작용이 조금씩 보였다. 한 번의 찌르기나 베기는 허투루 사용하는 게 아니었다. 상대의 특정 반응을 끌어낸 후, 자신이 원했던 반응이 맞으면 더욱 매서운 반격으로 상대를 괴롭혔다.
유신에게도 눈에 익을 정도면 두 고수는 말할 것 없다. 상대의 눈에 익숙한 공격으로 함정을 파고 상대가 걸려들면 미리 준비한 후속 공격을 한다. 그러나 상대의 함정에 역으로 함정을 파고 상대의 후속 공격을 유도하기도 했다.
서로서로 속이고 속은 척하며 치열한 두뇌 싸움이 계속되었다. 그렇게 둘이 천 합 정도 주고받자 불천검이 천천히 약세를 보이기 시작했다. 실력의 차이는 상성이나 여러 가지로 극복할 수 있지만, 경험의 차이는 재능만으로 메꿀 수 있는 게 아니다.
흑면야차의 검이 불천검의 소매를 자르고 어깨를 살짝 베었다. 서로가 상대의 함정에 속은 척 함정을 파며 연속된 십수 개의 함정이 오고 가다가 결국 불천검이 파탄을 보였다.
"한 번만 기회를 더 달라."
불천검의 말에 흑면야차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전의 대결에서 일부러 불천검에게 져주기도 했다. 이기든 지든 진심으로 상대한 적이 없다. 그러나 오늘 천 합 이상을 겨루며 흑면야차도 흥분했다. 무의미한 싸움을 즐기지 않지만, 흑면야차도 피 구덩이에서 뒹굴던 강호의 무인이다.
대화하며 둘의 대결이 잠깐 멈췄지만 유신의 몰입은 깨지지 않았다. 오히려 대화할 때 둘의 발 모양과 자세에 더 집중했다. 고수들은 걸음걸이만 보고도 상대의 무공 경지를 안다고 한다. 일부는 움직임을 보고 내공 수위까지 알아낼 수 있다. 거지도 매화주를 먹은 후 유신의 내공이 늘어난 것을 바로 알아차렸다.
재개된 대결은 그 전보다 훨씬 흉험했다. 서로 암묵적으로 일 검으로 승부를 내기로 합의했다. 그 전의 대결은 장난이었다는 듯 더 빨라졌고 검에 실린 힘도 훨씬 강해졌다. 유신뿐 아니라 두 절정고수도 대결에 점점 몰입했다.
그때 흑의를 입은 신형 하나가 불천검의 등을 덮쳤다. 유신의 몰입이 깨졌다. 두 고수의 빠른 움직임에 적응된 유신의 눈에 불청객의 움직임은 느리게 보였다. 손에 든 귀두도가 불천검의 머리를 노리고 있다.
객점에서 보았던 흑랑도법을 사용하는 마교 무인이다. 어느새 갈아입었는지 옷에 핏자국 하나 없었다. 필살필사(必殺必死)의 각오로 펼친 초식은 무척 위력적이었다. 절정고수라도 대결에 정신이 팔려있는 한 피하기가 어렵다.
흑면야차와 불천검은 서로를 향해 회심의 찌르기를 펼쳤다. 상대의 찌르기를 피하고 자신의 찌르기를 성공시켜야 한다. 이 찌르기로 결판을 낼 속셈으로 둘 다 전력을 냈다.
흑면야차는 검 끝을 비틀었다. 불천검의 등을 덮치던 귀두도의 날이 흑면야차의 검 끝에 부딪혔다. 그야말로 바늘 끝으로 바늘 끝에 적중한 셈이다. 귀두도가 동강 났다. 불천검을 암습하던 사내는 피를 토하며 바닥을 뒹굴었다. 칼이 부러지며 대부분 충격을 완화했지만, 남은 힘만으로도 사내에게 내상을 입히기 충분했다.
불천검의 장검이 흑면야차의 왼쪽 어깨를 꿰뚫었다. 불천검은 흑면야차에게 다가가 어깨 혈도를 짚어준 후 장검을 뽑아냈다. 뽑아낸 장검을 정겹게 쓰다듬던 불천검은 손가락을 튕겨 자신의 장검을 부러뜨렸다.
"내가 졌다."
말을 마친 불천검은 경공을 펼쳐 훌쩍 사라졌다. 흑면야차는 검 끝을 비틀어 암습을 한 사내의 도를 정확하게 가격했다. 반면 불천검은 미처 검의 경로를 바꾸지 못하고 흑면야차의 어깨를 찔렀다.
흑면야차가 임기응변으로 암습자를 상대한 것이든, 미리 암습자의 존재를 알아차리고 대비한 것이든, 불천검이 패한 것이다. 변명할 여지가 없는 패배다.
"왜? 남 호법, 왜 나를?"
암습자는 이해가 되지 않는다는 듯 입을 억지로 열었다. 흑면야차는 자신을 남 호법이라 부르자 눈에 이채를 띠었다.
"교의 사람이라면 내가 대결에 끼어는 자를 용서하지 않는다는 것을 알 텐데?"
"홍면주귀, 서신."
홍면주귀(紅面酒鬼)는 마교 사대 호법 중 하나다. 술을 입에 달고 사는 자로 얼굴이 항상 붉은색이다. 세력을 이루지 않은 흑면야차와는 달리 강한 세력을 거느리기도 했다.
"그래, 다음번에 백면귀산을 만나면 바로 목숨을 취하도록 하마."
흑면야차는 사내의 목을 베어버렸다. 유신은 영문을 몰라 눈을 껌벅였다. 귀두도는 흑면야차와 마찬가지로 마교 소속이다. 그리고 불천검을 공격해 흑면야차를 도우려 했다. 왜 목숨을 취하는지 알 수 없었다.
"홍면주귀의 수하들은 홍 호법이라 부르지 홍면주귀라 부르지 않는다네. 누가 주귀라는 별호를 좋아하겠는가? 아무리 주정뱅이라 하더라도 말이지."
백면귀산(白面鬼算) 역시 마교의 호법이다. 역시 강한 세력을 이루고 있고 홍면주귀와는 거의 원수지간이다. 교주인 우문현성이 후계가 없기에 둘 다 다음 대 교주를 노리고 있었다.
흑의 사내의 몸을 뒤져 서신을 찾은 흑면야차는 대충 훑어본 후 내공으로 서신을 불태웠다. 전설처럼 여기던 삼매진화를 직접 목격한 유신은 침을 꿀꺽 삼켰다. 마음속에 강함에 대한 갈망이 솟구쳤다.
"소형제, 부탁 하나 들어줄 수 있는가?"
"편하게 말씀하십시오."
"용호산에 백의장(白衣庄)이라는 의원이 있다네. 나를 거기까지 데려다주세나."
말을 마친 흑면야차는 울컥 피를 토했다. 흑면야차의 피는 검었다. 피의 색으로 보면 중독된 지 꽤 오래되었다. 아마 백의장에 가서 해독하려 했는데 불천검이 자꾸 귀찮게 따라다녔던 듯싶다.
"내공을 과하게 써서 눌렀던 독이 또 터졌다네. 내 발로 움직이기 힘든 상황이니 부탁하네."
유신은 흑면야차의 피를 닦아준 후 등에 업었다. 예상외로 가벼웠다. 강호에 유명한 절정고수인 흑면야차도 결국에는 피와 살을 가진 사람이었다.
- 작가의말
주말에는 한 편씩 쓰겠습니다. 이 글은 일상물입니다. 강호의 다양한 일상을 보여드리는 게 주목적입니다.
Comment ' 9