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위지경
고르게 이어가던 숨이 갑자기 격렬해졌다. 코와 입은 숨을 들이쉬려 하고 폐는 밖으로 토해내려고 한다. 그 충돌에 목이 긁혀 컥컥대다가 현재 처지를 깨달은 초설이 손으로 입을 황급히 막았다.
"깨었소?"
'누구지?'
분명 온천에 누워서 잠들었는데 지금은 푹신한 곳에 몸을 뉘고 있고 옷이 물기 하나 없이 말랐다. 그리고 앞에는 유신을 닮은 남자가 모닥불에 고기를 굽고 있다. 키도 똑같고 덩치도 똑같고 얼굴도 똑같은데 분명히 초설이 알던 유신이 아니다.
"옆에 끓였다 식힌 물이 있으니 얼른 마시고 정신 차리시오."
나무를 파서 만든 그릇에 물이 담겨 있었다. 생나무 냄새가 강한 걸 보니 방금 만든 그릇 같다. 허리에서 덜렁거리는 심룡척을 확인하고 나서야 초설은 눈앞의 낯선 사내가 유신임을 인정했다.
"어찌 된 일이에요? 얼마나 잤나요?"
물을 마셔서 목의 간지러움을 해결한 초설이 질문했다. 유신은 지나가는 듯한 말투로 대답했다.
"하루 꼬박 잔 것 같소. 손발이 퉁퉁 부었더군. 그리고 무위지경에 발을 들였소."
초설이 강호의 일에 관심이 없다지만, 무가의 여식으로서 무위지경을 모를 리가 없었다.
"갑자기요?"
"제대로 된 경지는 아니고 억지로 들었다고 해야 할 것이오."
무위지경은 아무것도 하지 않아도 모든 게 자연의 순리대로 흘러가는 경지로, 억지라는 말과 거리가 십만팔천 리나 되는 경지다. 억지가 없어야 들 수 있는 경지를 억지로 들었다니 다른 사람이었다면 뭔 개소리냐고 욕하고도 남았다.
"정확히는 마음만 무위지경에 들었소. 내공이나 무공 그리고 육체는 오히려 더 멀어졌소."
"그게 가능한가요?"
"덕분이라고 해야 할지 탓이라고 해야 할지. 가전 심법 때문에 이렇게 되었소."
한숨 푹 자고 일어난 유신은 갑자기 많은 것을 깨닫게 되었다. 주화입마는 물론 유신의 목숨도 앗아갈 수 있었던 기세 문제가 잠자는 사이 해결되었다. 인간으로서의 감정이 사라진 건 아니지만, 유신은 삶을 다 산 사람처럼 무뎌졌다. 잠자는 사이 죽절공이 유신도 모르는 뭔가를 했다.
그러나 더 높은 단계로 도약한 건 아니기에, 얻는 게 있는 대신 잃는 것도 있는 법이다. 홍두명과의 일전에서 얻은 깨달음이 희미해지고 사라졌다. 이미 수습한 것들은 그대로지만, 훨씬 거대한 무언가의 실마리를 몇 달 동안 꼭 잡고 있었는데 그 손을 놓아버렸다.
'그걸 놓아버려서 이렇게 된 것일 수도 있고.'
역수행주 불진즉퇴. 세찬 강물을 거슬러 배를 몰 때 노를 젓지 않으면 뒤로 밀려난다. 알게 모르게 깨달음의 실마리를 잡고 열심히 전진하던 유신이 갑자기 손을 놓아버리는 바람에 오히려 뒤로 밀려나게 되었다. 초식의 위력이 서호에서 마교와 담화궁을 상대할 때에 비교해 무척 죽어버렸다. 대신 은접미천과 전화표허의 초식은 정교한 다스림으로 더 쓸모있는 초식이 되었다.
"괜찮은가요?"
호수 속의 사람을 보는 것처럼 흐릿한 유신이 푸근한 웃음을 지으며 괜찮다고 대답하자, 초설은 벌떡 일어나서 자신의 입을 유신의 입에 가져다 댔다. 안개 속에 감춰진 것 같던 유신이 끝내 세상으로 나왔다.
"갑자기 사라지는 줄 알았어요."
"걱정하지 마시오. 방금은 내 존재를 숨기는 수련을 하느라 그렇게 된 거요. 그나저나 부인 덕에 입맞춤에 약하다는 약점을 발견했소."
초설은 얼굴이 빨개졌지만, 유신의 시선을 피하지 않았다. 유신의 팔을 꼭 잡은 초설이 낮은 소리로 속삭였다.
"제 곁을 떠나지 마시고, 저보다 먼저 죽어도 안 돼요. 당신이 없는 지난 삼 년 귀소가 아니었으면 버티지 못했을 거예요."
서로 꼭 부둥켜안고 있던 둘을 뗀 건 고기 타는 냄새였다. 불바다에 들어가도 느긋하게 헤엄칠 정도의 경지임을 알면서도, 초설은 탄 부분을 맨손으로 떼는 유신을 걱정스러운 눈으로 바라보았다.
"나 혼자 간다고 해도 말을 안 들을 게 뻔하니 남으라는 말은 안 하겠소. 대신 당신이나 아이 중에 누구라도 문제가 생기면 난 미쳐버릴 것이오."
원래는 아이를 납치한 자들을 따라잡는 순간 모두 목을 베어버리고 귀소를 구할 생각이었는데, 마음이 가라앉은 후 아이에게 그런 모습을 보이지 않는 게 낫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렇지만 상상하기도 끔찍한 일이 발생한다면 유신은 세상을 원망하며 평생 마교와 담화궁과 관련된 자들을 찾아다닐 것이다.
### 快劍神龍 龍遊迅 ###
유신은 초설을 업고 평온하게 달렸다. 모든 감정에 무덤덤하게 되는 게 아닌지 걱정했는데, 조금씩 회복하는 느낌이 들었다. 물론 그 정도가 너무 미약해서 유신도 확신이 어렵다.
보이는 마을마다 담화궁 여인들이 지나갔는지 탐문하고 밤에는 쉬느라 며칠이 지난 지금에야 겨우 이들을 따라잡았다. 그러나 배에는 여인들만 보이고 아이는 종적도 없다. 유신은 이들에게 들키지 않을 정도 거리를 두고 천천히 따랐다. 첫날에 밤을 새우며 길을 재촉하던 것과 달리 이들은 무척 느긋하게 움직였다.
저녁이 가까워져 올 무렵, 여인들은 수만 명이 살 것 같은 작은 도시에 배를 멈추고 객잔에 방을 잡았다. 유신은 초설을 안고 여인들이 묵은 객잔의 지붕 위에서 이들의 대화를 엿들었다. 밤이 깊어서 이들이 꿈나라에 든 다음에야 유신은 객잔의 빈방 창문을 열고 안에 들어갔다.
"귀소는 지금쯤이면 이미 담화궁에 도착했겠소. 내일 최대한 빠르게 움직여서 담화궁에 도착한 다음, 그대를 안전한 곳에 숨기고 내가 아이를 꺼내 오겠소."
"아닙니다. 제가 담화궁 제자로 분장하고 안에 들어가 귀소의 행방을 찾겠습니다. 내가 귀소를 찾으면 그때 낭군이 구해내야 합니다."
"들키면 그대까지 위험하오. 나는 들켜도 몸 하나 뺄 자신이 있소."
"당신이 들켜서 귀소를 꼭꼭 숨기면 어떻게 합니까."
초설이 눈물을 떨구자 유신도 답이 궁했다. 유신이 발각된다고 해도 저들이 귀소와 연관시킬 가능성은 작다. 그러나 머리로는 분명히 들켜도 큰 상관이 없다고 생각하지만, 마음은 그게 아니다. 괜히 들켜서 귀소를 영영 못 찾으면 어떡하나 걱정이 끊임없이 치밀었다. 그리고 유신이 들켜서 저들이 경계를 강화하면 귀소를 구하기가 더 어려워지는 것도 사실이다.
"들키지 않을 자신이 있소. 담화궁에 내 경지에 이른 자가 없을 것이오."
그렇지만 초설을 모험시키는 게 싫어서 억지로 입을 열었다.
"혹시 있으면요? 강호에 수십 년 동안 악명을 떨친 담화궁이잖아요."
유신도 담화궁에 대해 잘 아는 게 아니라서 반박하지 못했다. 담화궁의 밑에 있는 소요궁 궁주 몽소요의 무공만 봐도 담화궁이 쉽기만 한 곳이 아님을 알 수 있다. 혹시 귀면암영 같은 고수가 있으면 확실히 유신도 장담하기 힘들다. 싸우면 유신이 이기지만, 숨바꼭질을 한다면 유신도 이긴다는 보장이 없다.
"그대가 잘못되면 난 복수에 미친 악귀가 될 수도 있소."
"걱정하지 마세요. 여인들만 사는 담화궁입니다. 잡혀도 위험하지 않을 겁니다."
'어미인 초설이 귀소를 생각하는 마음이 나보다 훨씬 더 크겠구나. 항주에 두기 걱정되어 데리고 왔는데, 괜한 짓을 한 것 같구나. 나이보다 꽤 경험이 쌓였다고 생각했는데, 정작 일이 터지니 뭘 어떻게 해야 할지 모르겠구나.'
유신이 대답이 없자 초설은 설득에 성공했다고 생각했다.
"검에 붉은 수실을 단 여자가 담화궁에 온 지 얼마 되지 않아 아는 사람이 거의 없습니다. 그 여인을 납치한 다음, 제가 그 여인의 신분으로 담화궁에 들어가겠습니다."
"당신은 처음부터 마음을 굳혔구려."
"제가 그 여인의 말투와 목소리도 이미 다 기억했습니다. 그리고 제가 위험에 처해도 낭군님이 구해주시면 되잖아요."
초설을 걱정하는 마음과, 초설이 조금만 위험을 무릅쓰면 귀소를 더 확실하게 구해낼 수 있다는 유혹, 서호루에서 괜한 호기심과 자만심에 시간을 지체한 데 대한 자책, 싸우러 가는 게 아니지만 분명히 강호의 행사임에도 가족을 대동한 자신의 실책.
"좋소. 당신 뜻을 따르겠소. 당신과 내가 힘을 합쳐서 우리 귀소를 구해내는 것이오."
유신은 부처님을 믿기로 했다. 사람을 적지 않게 죽였지만, 유신은 자신이 부끄럽게 살지는 않았다고 생각했다. 만약 부처님이 보살펴주지 않으면 세상을 증오하겠다고 마음먹었다.
### 快劍神龍 龍遊迅 ###
"선자님, 저 나쁜 놈이 제 뺨을 때렸습니다."
선자(仙子)는 지위가 높은 여자에 대한 호칭이다. 담화궁과 가까운 지역에서 담화궁의 젊은 제자들은 선자라고 불렸고, 나이가 많은 노파들은 선고(仙姑)라 불린다. 여인이 남편에게 얻어맞았다고 고자질하자 담화궁 여자는 다짜고짜로 남자의 뺨을 때렸다.
"시발, 너무 한 거 아니오? 저 여편네는 밥도 안 하고 빨래도 안 하고 청소도 안 하고. 그렇다고 일을 해서 돈을 버는 것도 아니오. 일 좀 시키면 불평만 늘어놓고 정작 하지도 않고, 뺨 하나 때린 게 무슨 대수라고 이러는 거요?"
"돈 버는 일은 원래 남자들 몫이다. 그리고 밥이나 빨래 그리고 청소는 여자가 꼭 해야 한다는 법이 어디에 있느냐. 그건 다 너희들 남자가 세운 법이 아니냐?"
"내가 저 돼지 같은 년을 데려다가 먹여주고 재워주고 돈도 벌어다 주고. 거기에 집안일까지 다 도맡아 하라고? 내가 멍청한 개새끼야? 정말 못 참겠다. 출처(出妻 - 남자가 일방적으로 통보하는 이혼)한다."
"담화궁이 출처를 금한다는 법령을 반포한 지 삼 년이다."
"너희들 역적이냐? 감히 황제 폐하가 정한 법을 마음대로 바꿔? 관아에 가서 시비를 가려볼까?"
화가 머리끝까지 치솟은 남자가 소리를 고래고래 질렀다. 빙 둘러서 구경하던 사람들이 고개를 끄덕거리자 마찬가지로 화난 담화궁 여인이 검을 뽑았다.
"관아에 가기 전에 내 검이 허락하는지 먼저 물어보아라."
웬만하면 검 앞에서 기가 죽을 법도 한데 남자는 물러서지 않았다. 담화궁이 뿌리를 내린 후부터 가슴에 쌓인 게 무척 많았다. 하늘 같은 남자가 여인네 시중을 들어야 한다니 원통하기 그지없다.
"죽여라, 이 화냥년아. 네년은 아비 없이 어미 혼자서 낳았냐? 너희 때문에 젊은 남자들이 장가를 안 가거나 다른 지역으로 도망가고 있다. 십 년 안 되어 이곳은 사람이 살지 않는 귀역(鬼域)이 될 것이다."
"남자들이 여인을 그렇게 핍박해도 여인이 없는 곳은 보지 못했다. 여인들은 참고 사는 데 너희 남자들은 왜 참지 못하느냐. 그렇게 죽고 싶다면 내가 깔끔하게 목을 베어주마."
담화궁 여인이 검을 든 손을 번쩍 치켜들자 기세등등하던 여편네가 갑자기 무릎을 꿇었다.
"선자, 비록 제 뺨을 때렸지만, 이 남자 없으면 저도 못 삽니다. 그저 혼만 내고 죽이지는 마세요."
화가 난 담화궁 여인이 발로 무릎을 꿇은 여자를 걷어찼다.
"내가 네 하녀야? 유모야? 네가 이렇게 해달라면 이렇게 해주고, 저렇게 해달라면 저렇게 해줘야 해? 담화궁 위세로 잘 먹고 잘사는 것이지 남편 덕분에 네가 이렇게 사는 것 같으냐? 이 배은망덕한 더러운 년 같으니라고. 너 같은 년이 남자보다 더 나빠."
담화궁 여인이 여편네를 걷어찼지만 남자는 못 본 척했다. 여자를 걷어차다 화가 안 풀린 여인이 검으로 남자의 팔을 베었다. 깊은 상처는 아니지만, 불로 지지는듯한 통증에 남자가 바닥을 뒹굴었다.
"네 놈도 마찬가지다. 좋게 말로 할 것이지 왜 손찌검을 한다는 말이냐. 말재주가 없어서 설득하지 못하면 현실을 인정하고 살아갈 것이지, 손찌검해서 일을 이렇게 크게 만드는 것이냐."
바닥을 뒹굴던 남자가 벌떡 일어났다. 여전히 통증에 몸이 부들부들 떨리지만, 이를 악물고 고래고래 소리 질렀다.
"시발, 나도 딴 데 가서 산다. 재산은 다 줄 테니 네년도 개소리하지 말아라. 어떤 남자가 너 같은 년을 데리고 사는지 보자."
남자의 기세에 검을 든 담화궁 여자도 움찔했다. 옷을 벗어 피가 흐르는 팔을 대충 동여맨 남자는 그대로 마을 밖으로 향하는 길로 걸어갔다. 정말로 이대로 떠날 기세다.
"내가 죽일 년이오. 시키는 대로 꼬박꼬박 잘 할 테니 가지 마시오."
여인이 허겁지겁 기어서 남자를 잡으려 했으나 남자는 잡는 여편네에게 발길질했다.
"썩은 나무에 이파리가 달리는 건 봤어도 썩은 고기가 다시 싱싱해지는 건 못 봤다. 나도 딴 데 가서 남자답게 살련다."
떠나는 남편의 발길을 잡지 못한 여인이 담화궁 여자에게 원망의 눈길을 보냈다. 그러나 담화궁 여자가 검을 쥔 손에 힘을 꽉 주자 바로 눈을 내리깔았다. 저벅저벅 걸어가던 남자도 마을 어귀에서 무릎을 꿇고 큰소리로 통곡하기 시작했다. 떠난다고 말했지만, 정작 혈혈단신으로 낯선 세상에 나가려니 겁이 더럭 났다.
"낭군, 만약 담화궁이 사라지면 여인들이 더 불쌍한 삶을 살지 않을까요?"
"그건 나도 모르겠소. 애초에 나라에서도 끼어들지 않는 남의 가정사에 끼어든 것부터가 잘못이라고 보오. 모든 게 인과응보인데, 인과 과가 제각각이고 응보를 다른 사람이 받게 했으니, 담화궁은 참으로 악이오."
"일반 여인들은 매우 힘든 삶을 산다고 들었습니다. 그래서 담화궁이 생긴 게 아닐까요?"
"담화궁 때문에 힘든 삶을 사는 남자들이 생겼소. 그럼 또 남자들을 위한 뭔가가 생기지 않겠소? 세상의 이치가 음양을 기본으로 하지만, 삼라와 만상이 서로 영향을 주면서 단순한 이분법으로 해석할 수 없소. 세상의 이치를 알지도 못하면서 세상을 바꾸고자 하니 점점 엉망이 되어가는 게 아니겠소. 도가에서 무위자연이 최고라 하는 게 괜한 소리가 아니오. 도가도 비상도, 옳고 그름을 따지기 시작한 순간 옳은 게 옳은 게 아니고 그른 게 그른 게 아니오."
한바탕 활극이 당사자도 구경꾼도 담화궁 여인들도 찝찝한 결말로 끝나버렸다. 어디서부터 잘못되었고 무엇이 잘못되었고 어떻게 해결해야 하는지 누구도 알지 못했다. 담화궁 여인들이 심란해진 바람에 유신과 초설의 미행은 더욱 순조롭게 되었다.
- 작가의말
무위지경은 굉장히 높은 경지인데, 유신은 억지로 잡고 있던 깨달음을 놓으며 살짝 발톱 끝을 담갔습니다. 현재 무위는 홍두명을 상대하기 전보다 조금 부족합니다. 물론 위력이 부족한 것이지, 경지는 조금 더 높습니다.
마지막 부분은 누가 옳고 그르다는 결론이 없습니다. 세상이 잘못된 것인데 굳이 누구의 잘잘못을 따지는 것도 의미가 없다고 생각합니다. 바른 세상을 만들겠다고 용기 있게 나서는 것도 좋지만, 자기 앞가림만 잘하는 것도 굉장히 성공한 인생이라 생각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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