원칙 있는 남자 당우형
청승맞게 가루눈이 흩날리기 시작했다. 일행뿐 아니라 당문의 독룡대도 얼어붙었다. 예측을 완전히 벗어나는 상황을 마주하자 일시적으로 판단력이 사라졌다.
'설마 형님이 당문 사람이 아니고 사실 당문과 원수 사이인데 당문 사람인 척 한 건가?'
이는 당우형에 대한 정보를 당우형 본인의 입을 통해서만 들은 유신이 부지불식간에 든 생각이었다. 아무리 가출했다지만, 당문의 독룡대라면 가까운 혈육일 텐데 고민도 없이 도망가라고 하니 별의별 생각이 다 들었다.
'당 대협은 가문에서 출도를 허락받은 게 아니고 잘못을 저지르고 도망 나온 모양이군.'
당우형을 우상으로 삼고 당우형에 대해 꽤 많이 알고 있으나 정작 중요한 건 하나도 모르는 서문초현의 생각이다.
'정말 멋지군. 당문에서 팔 년이나 당 대협을 잡아가지 못했다는 뜻이잖아.'
그리고 당우형을 향한 서문초현의 마음은 전혀 흔들림이 없었다. 수년간 쌓아온 존경과 믿음이 하루아침에 무너지지는 않았다.
'서문가의 이름을 대면 용 소협의 목숨까지 구할 수 있을까? 소림에서 누가 구하러 와줬으면 좋겠는데.'
서문초설은 무공도 익히지 않았고 여자라 강호의 일에 귀 기울이지 않았다. 강호에 대해 아는 거라면 누구나 다 알법한 것들과 어디에서나 통할법한 상식 같은 것들이다. 서문세가도 좀 그렇지만 당문은 상식이 통하는 가문이 아니다.
유독 서문청월만은 대략의 연유를 짐작하고 침착하게 사태의 추이를 지켜보았다.
'어떻게든 당문으로 잡아가서 예절 교육을 해야겠다. 숙부와 형들을 보고 인사도 올리지 않고 도망칠 궁리부터 하다니.'
당문의 독룡대는 당우형의 숙부 혹은 사촌이나 육촌 형들로 구성되었다. 만나면 인사를 꾸벅꾸벅 올려야 할 당우형이 인사도 없이 도망칠 궁리부터 하자 괘씸한 생각이 부쩍 들었다.
"난 이들과 단순한 동행일 뿐입니다. 인질을 잡아봤자 나는 태산처럼 굳건할 것입니다."
독룡대를 이끌고 나온 당무헌이 네 사람에게 포권했다.
"당문 독룡대주 당무헌이오. 가문의 일이니 세 분은 옆으로 비켜주시오."
유신의 오해가 풀렸고 서문초설의 걱정이 사라졌다. 다만 초현만은 더 깊은 상상의 나래를 펼쳤다.
'당 대협은 아마 어린 나이에 자의가 아닌 타의로 잘못을 저지르고 강호에 나온 것이 분명해. 가문의 추격을 팔 년이나 받으면서 시시각각 긴장을 늦출 수 없는 생활을 하며 절정에 가까운 고수가 된 것이겠지.'
독룡대의 '마수'를 피해 팔 년이나 도망 다니면 실력이 늘지 않을 수 없을 것이다. 당문 최고의 고수들이 소속된 건 아니지만, 가장 상대하기 어려운 무인들이 소속된 게 독룡대다. 누군가를 쫓고 찾아내고 죽이는 데 이들보다 전문적인 사람은 없을 것이다.
넷은 조심스럽게 포위망을 벗어났다. 유신은 당우형과 다르지만 비슷하게 생긴 독룡대의 무인들을 보며 신기한 생각이 들었다. 눈코입은 각자 다르지만, 얼굴 윤곽이나 오관의 구성이 비슷했다.
'독룡대는 보통 열 스물 이런 식으로 출동한다. 두 명이 분명 어딘가에 숨어서 함정을 파고 있다.'
넷이 천천히 포위망을 벗어나는 사이 당우형은 관찰하고 분석한 후 판단을 내렸다. 넷이 밖으로 나가고 독룡대가 기세를 끌어올리려는 순간 정면을 향해 경공을 최대로 펼쳤다.
경공과 침술에는 천부적인 재능을 가지고 있는 당우형이다. 유신에게 가르쳤던 연자삼점수를 펼쳤다. 많은 문파에 같은 이름으로 존재하는 경신법의 하나로 예상하지 못한 순간에 방향 전환을 한다. 당우형의 연자삼점수는 방향을 전환하는 시기도 기가 막히지만 숨 쉬듯 자연스러운 연결 동작도 일품이었다.
두 번의 방향 전환으로 가로막은 두 숙부를 차례대로 제친 당우형은 기쁜 마음을 억누르며 착지한 후 바로 내공을 끌어올리려 했다. 그때 당우형의 착지 지점에 남은 두 독룡대 대원이 나타났다.
"소질 삼 숙부에게 인사 올립니다. 소질 칠 숙부에게 인사 올립니다. 소질 십삼 당형에게 인사 올립니다. 소질 이십이 당형에게 인사 올립니다."
보통 포위를 당하면 가장 돌파하기 쉬운 곳으로 향한다. 그러나 미리 준비를 한 상대는 왕왕 허장성세하며 약해 보이는 곳으로 몰이를 한다. 그래서 당우형은 여섯 명이 막고 있는 소림의 방향 대신 무공이 가장 강한 두 숙부가 막고 있는 곳으로 돌파하려 했다.
문제는 독룡대의 사람들이 당우형의 잔머리를 너무 잘 알고 있다는 것이다. 그래서 은신이 가장 뛰어난 둘이 미리 당우형이 움직일 방향을 예측하고 함정을 파고 기다렸다.
집에만 갇혀 지내다가 혼례 날 처음 낯선 사람을 본 새색시처럼 당우형은 스무 명의 숙부와 당형에게 얌전하게 인사를 올렸다. 유신이나 초현으로서는 처음 보는 이색적인 모습이 아닐 수 없었다.
"네 나이도 이젠 어리지 않으니 가문으로 돌아와서 혼인하고 무공 수련에 열중해라. 형의 원수는 이미 다 찾아냈으니 복수는 가문에 맡기면 된다."
당우형은 결연한 눈빛으로 거절했다.
"부친의 복수는 제 손으로 합니다. 그리고 부친의 복수를 하기 전에 절대 혼인할 생각 없습니다."
당무헌이 등짐에서 두루마리 하나 꺼내 당우형의 눈앞에 펼쳤다. 내공으로 안력을 돋운 초현과 내력 없어도 눈이 좋은 유신은 조금 먼 거리지만 두루마리를 확인할 수 있었다.
월궁상아도에 나오는 상아처럼 생긴 여자의 그림이었다.
"화공이 화후가 부족해 그림으로 다 담지 못했다."
"제 마음은 바뀌지 않습니다. 다만, 약혼이라면 제가 양보하도록 하죠."
'당 대협은 정말 원칙을 칼같이 지키시는구나.'
초현은 저런 미인을 상대로도 혼인을 거부하는 당우형에게 탄복했다. 저런 절개를 자신도 닮아야겠다고 마음속에서 거듭 다짐했다.
'형님 복수를 도우려 했는데 당문에서 다 알아서 한다고 하니 내가 낄 자리는 없겠구나. 당문은 외인을 받지도 않으니 나는 어디에 가서 무엇을 하며 살아야 할까? 무공을 회복하고 내 혈도를 짚었던 자들을 찾아 복수해야 하나? 그자들의 뒤에는 세가가 있고 무림맹이 있는데 복수할 수 있을까?'
그때 당무헌이 당우형의 배낭을 집어 들었다. 배낭에서 침통을 꺼낸 후 위가 아닌 밑을 틀었다. 밑에서는 세 개의 붉은색 작은 호리병이 나왔다. 당무헌은 밀랍으로 보이는 뭔가로 호리병을 꼼꼼히 칠했다.
늘 당무헌과 말다툼하던 부대주 당고헌이 술단지 하나를 가져왔다. 세 호리병을 술단지 안에 잘 모신 후 당무헌은 참고 있던 숨을 몰아쉬었다. 당문도 무척 조심하며 다뤄야 하는 절독 세 개를 무사하게 회수했다.
"삼 숙부, 저기 용유신은 제 의제입니다. 팔을 다쳤는데 당문으로 데려가 치료해주면 안 되겠습니까."
당우형도 유신과 헤어지기 싫어서 부상을 핑계로 유신과 함께 가려고 했다.
"보름 안에 당문으로 돌아가려면 배에서 잠을 자고 항상 경공을 펼쳐야 한다. 보름이 지나면 이 혼사는 없던 일이 된다."
보름 뒤가 십 년에 한 번 있기 힘든 대단한 황도길일(黃道吉日)이다. 신랑이 굳이 당우형이어야 할 필요는 없지만, 당우형이 마음을 다잡고 가문에 붙어있게 하려고 당우형을 신랑으로 내세웠다. 만약 혼례식 날까지 당우형이 가문에 도착하지 못하면 혼사를 취소하거나 다른 사람이 신랑이 되어야 한다.
"동생, 천랑을 잘 부탁해. 아직 어리니까 두꺼운 뼈를 주지 말고, 얇은 뼈도 최대한 잘게 부숴서 먹여야 해. 너무 배불리 먹이면 야성이 사라지니까 적당히 먹여야 하고. 내가 먼저 당문에 가서 기다리고 있을 테니 꼭 천랑 데리고 당문으로 와야 한다."
'형님이 예전에 혼인을 거부했던 건 신부가 마음에 안 들었던 거였구나.'
초현과 달리 유신은 당우형을 정확히 평가했다. 당우형이 가출한 건 여러 이유가 복합적으로 얽힌 결과다. 가문에 느낀 배신감, 복수에 대한 열망, 혼인에 대한 거부, 강호에 대한 동경, 그 외에도 더 많은 자잘한 이유가 합쳐져서 충동적으로 가출하게 되었다.
절독 세 개나 몸에 지니고 있어 독룡대가 과감하게 손을 쓰지 못한 것과 정해진 곳 없이 늘 떠돌았던 것을 이유로 잡혀가지 않았다. 오늘도 당우형이 강하게 반항했으면 독룡대도 큰 어려움을 겪었을 것이다. 혹시라도 절독을 담은 호리병이 깨지면 큰일이기 때문이다.
"우형아, 이 비급의 출처를 밝혀라."
유신의 비급을 발견한 숙부가 엄숙한 얼굴로 질문하자 당우형은 손사래를 쳤다.
"군자호구(君子好逑) 취지유도(取之有道)라고 했습니다. 그 비급은 제 동생 유신의 가전 무공입니다. 제가 대신 보관하고 있었죠."
군자호구는 요조숙녀 군자호구라는 구절에서 나온 말로, 군자도 아름다운 여자를 좋아한다는 의미다. 취지유도는 군자애재 취지유도에서 나오는 말로, 군자도 재물을 좋아하지만 재물을 얻는 데 정당한 수단만 사용한다는 뜻이다.
당우형이 얼토당토않은 말을 내뱉었지만 당문의 사람들은 그러려니 하고 넘어갔다. 유신도 이런 유의 말에는 약해서 당우형의 잘못을 지적해주지 못했다. 당무헌의 시선이 유신에게 향하자 유신이 허리를 숙여 인사를 올렸다.
"당 대협을 의형으로 모시는 용유신이라 합니다. 그 비급은 저희 가문에서 전해져 내려오는 검술입니다. 제가 아는 글자가 적어 당 대협에게 독해를 부탁했습니다."
보통 포권만 해도 되지만 유신은 오른팔에 부목을 대서 포권을 할 수 없다. 당무헌은 비급도 보여줄 정도로 당우형과 친밀한 사이라고 하자 용유신을 다시 평가했다.
'내공이 느껴지지 않지만 지금 서 있는 자세나 아까 걷는 모습에 법도가 있는 걸 보면 외공 고수가 틀림없다. 말투에 꾸밈이 없고 진정성이 묻어나는 걸 보니 평소 거짓을 입에 잘 담지 않는 성격이다. 가전 비급을 보여줄 정도로 흉금이 넓고 아예 보관을 맡길 정도로 우형을 믿는구나. 우형이 강호에서 행실이 나쁘지 않았는가 보다.'
당무헌은 자기 짐을 뒤적거려 고약 한 덩이를 꺼냈다.
"호피어담고(虎皮魚膽膏)라고 외상 치료에 무척 좋은 약이다. 우형 의제면 내 조카나 다름없으니 초면 선물이라 생각하고 거절하지 말아라."
호랑이 가죽과 물고기 담을 함께 달여서 얻은 호피어담고는 근육과 뼈 그리고 힘줄의 회복에 무척 좋은 물건이다.
"호의에 감사드립니다. 사양하지 않고 감사히 받겠습니다."
유신은 거절하지 않고 받았다. 청죽단풍검 비급과 고약을 유신에게 건넨 후 당문 일행은 당우형을 데리고 경공으로 떠났다. 겨울이라 물이 줄어 배가 다닐 수 있는 구역이 무척 적다. 배가 다닐 수 없는 구역은 경공으로 움직여야 하기에 길을 급히 재촉했다.
"우리 서문가도 서문가지만 당문 역시 참 제멋대로구나."
웬만하면 서문가의 사람과 인사치레로 대화 몇 마디 할 법도 한데 당문의 사람들은 자기 볼일이 끝나자 작별 인사도 없이 훌쩍 떠나버렸다. 어차피 서문가도 예의를 개떡같이 여기는 건 마찬가지지만, 당문은 그 정도가 훨씬 심했다.
"숙부, 제 생각에 서문가 식솔이 수백이 되면 서문가가 당문보다 더 심했을 거예요."
서문초설의 말에 서문청월이 껄껄 웃었다. 소림에서 출발하기 전에 천산옹을 날려 가문에 초설이 완치되었음을 알렸다. 기분이 무척 좋아 초설에게 농을 걸었다.
"그럼 네가 빨리 혼인해서 아이를 많이 낳으면 될 거 아니냐?"
서문초설은 얼굴이 홍당무가 되어 고개를 푹 숙였다. 외인이라고 할 수 있는 유신이 있는 자리에서 하기에 적합한 농이 아니다. 눈치를 보지 않고 제멋대로인 건 서문가 역시 만만치 않다.
기분이 무척 좋은 서문청월은 술 생각이 간절해서 자꾸 발걸음을 재촉했다. 고운 눈가루가 세상을 하얗게 단장하기 시작했다. 눈가루가 일행의 발자국을 덮었다.
하얀 화폭과 같은 세상을 넷이 걸었다. 앞장선 서문청월과 뒤처진 초현 사이에서 유신과 초설이 어깨를 나란히 하고 화폭을 아름답게 수놓았다.
- 작가의말
외전은 글이 다 끝난 다음에 쓰는 게 낫겠죠? 이야기 흐름과 직접적인 연관은 없는 외전이라서 말이죠. 물론 천마처럼 그런 막장 외전이 아닙니다. 글에서 가볍게 언급만 하고 자세히 적지 않았던 것들을 상세하게 쓰려 합니다.
당문이 당우형을 불러들여 강호의 격변에 대비하려고 합니다. 소림과 같은 거물이 움직이면 그 연쇄반응이 장난 아니죠. 나비효과가 아니라 고래효과라고 해야 할 것 같습니다. 그리고 이 글의 부장르는 로맨스가 아닙니다. 로맨스에 거부감 있는 분들 걱정 안 하셔도 좋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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