은접미천
하늘에서 수만 송이 눈꽃이 나풀거린다. 하나하나가 다르게 움직이지만 완연한 규칙이 있다. 인내를 가지고 기다리면 언젠가 모든 눈송이가 똑같은 춤을 출 것이다.
사막에 홀로 떨어진 사람이 한 방울 감로를 갈구하듯이 유신은 수만 송이 눈꽃이 보여주는 만변의 자태에서 불변의 진리를 탐했다. 저녁마다 초설이 부드러운 목소리로 읽어주고 해석해주던 청죽단풍검의 글귀가 머릿속에 떠올랐다 가라앉기를 반복했다.
어느 순간 눈꽃에 날개가 달리더니 은빛 나비가 되었다. 은접들은 두 개, 세 개, 네 개, 다섯 개 등 제각각 날개 개수가 달랐지만, 같은 자세로 같은 춤을 추었다. 수만 마리의 은접이 하늘을 꽉 채우는 순간 유신의 머리에는 네 글자가 스쳤다.
'은접미천(銀蝶彌天).'
은빛 나비가 하늘을 채웠다는 뜻이다. 심력의 소모가 심했고 독에 당하기까지 하면서 몸은 쓰러졌지만 자각몽을 꾸는 것처럼 유신의 의식은 시종 활발하게 움직였다. 하늘에서 내리는 눈을 보고 얻은 깨달음을 잡고 싶은 것이다.
'이건 변인가 환인가 아니면 기인가?'
변은 상대의 예측을 벗어나는 움직임이고 환은 상대를 속이는 움직임이다. 기는 상대가 아예 반응하지 못할 정도의 움직임을 말한다. 고주일척에 이어 새로 얻은 은접미천의 초식은 어디에 넣어야 할지 애매했다.
'변이나 환이나 기나 어차피 무인들이 달아준 이름이다. 이름에 얽매이지 말자. 이건 설(雪)이라고 이름 짓는다. 고주일척은 첫 초식이니 초(初)라 부른다.'
깨달음을 수습하니 그제야 유신의 의식이 천천히 가라앉았다. 몸과 마찬가지로 유신의 의식 역시 휴식을 취할 수 있게 되었다.
### 快劍神龍 龍遊迅 ###
"그때 말입니다. 담화궁의 절정고수가 악룡탐주(惡龍貪珠)의 초식으로 유신의 목을 노렸습니다. 소환도에 서리와 같은 내공이 실려서 스치기만 해도 살을 가르고 핏줄을 자를 수 있는 흉험한 초식이었습니다."
당우형은 초현의 이야기에 푹 빠졌다. 첫날 왔을 때 들은 이야기와 큰 차이가 있지만, 어차피 초식도 계속 수련하다 보면 형이 달라진다. 지금 이야기가 예전 것보다 훨씬 흥미롭기에 당우형은 작은 변화를 무시하기로 했다.
"그때 유신은 날아오는 도를 바라보지도 않고 고개를 들어 하늘에서 내리는 눈을 바라보았습니다. 아마 하염없이 쏟아지는 눈에서 인생의 무상을 느끼지 않았을까 생각됩니다. 도가 막 유신의 목에 닿는 순간."
내공이 절정에 이르렀지만 초현의 이야기에 푹 빠진 당우형은 부지불식간에 숨을 멈췄다. 초현도 이미 자신의 세계에 빠져서 절정에 이른 이야기 솜씨를 선보였다.
"그대의 칼이 빠르기는 하지만 내겐 너무 느리오. 당신 가슴을 보시오."
초현이 유신의 말투를 흉내 냈다. 소소군이 소주 사람이고 소주와 항주 말투가 차이는 있지만 비슷하기에 초현의 흉내는 나쁘지 않았다. 유신의 목소리에 있는 작은 울림까지 내공으로 흉내 내어 유신을 잘 모르는 사람은 속일 수 있을 정도였다.
"담화궁 고수의 칼은 정확하게 유신의 목 한 치도 안 되는 곳에 멈췄습니다. 그리고 유신의 검은 이미 담화궁 고수의 심장을 쪼갰죠. 그러나 너무 빠른 검이라 담화궁 고수는 자신의 심장이 이미 멈춘 것도 몰랐습니다."
당우형은 목이 타는지 대접의 술을 벌컥벌컥 들이켰다. 초현도 술이 먹고 싶었지만 이야기의 흐름을 끊을 수 없어 참고 말을 이었다.
"천하무공 유쾌불파. 이 쾌검신룡 앞에서 빠름을 논하지 마시오."
당우형은 무릎을 치고 술을 동이째 들고 마셨다. 초현도 이야기를 끝내자마자 대접의 술을 들이켜며 갈증을 풀었다. 이야기의 여운에 둘이 빠져있을 때 분위기를 깨는 한마디가 들려왔다.
"지랄하네. 아예 부채 들고 주루로 가지 그러냐."
어느새 깨어난 유신은 초현의 이야기를 처음부터 끝까지 들었다. 그날 생사투를 벌이며 몇 번 말한 적이 없고 했던 말은 정확히 기억나지 않지만 저렇게 멋있는 말은 한 적이 없다. 꾸며낸 이야기의 완성도는 주루에서 부채를 들고 이야기를 들려주는 이야기꾼도 초현에게 손색이 있을 정도다.
"형님, 사흘 후에야 깨어날 거라면서요."
무안해진 초현이 그새 형님으로 호칭을 바꾼 당우형에게 투정을 부렸다. 당우형은 자신의 예상보다 훨씬 빠르게 깨어난 유신을 보며 무릎을 쳤다.
"저놈이 특이 체질이었지. 내가 또 새옹지마 했구나."
"형님, 새옹지마 아니고 마실전제(馬失前蹄 - 말의 앞발이 버티지 못해 넘어지는 것)가 정확합니다."
"전음으로 하기에는 내공이 없겠구나."
억지로 몸을 일으킨 유신과 당우형은 격한 포옹으로 재회의 기쁨을 나눴다. 옆에서 초현이 둘을 부러운 눈으로 바라보았다.
"동생, 옷을 차려입어라. 독도 다 사라졌고 후유증도 전혀 없구나. 네 형수에게 가볍게 인사하고 술 마시러 가자."
유신의 맥을 짚은 당우형이 완치되었음을 알렸다. 유신은 당우형이 아내와 함께 왔다는 말에 깜짝 놀랐다.
"제가 그렇게 오래 쓰러져 있었습니까?"
"여기 뱃길로 닷새도 걸리지 않아. 돌아갈 때는 무척 시간이 걸리지만 말이야."
당우형은 소식을 듣자마자 경공을 펼쳐 사흘 만에 형주에 이르렀다. 그리고 당우형의 아내는 배를 타고 이틀 뒤에 형주에 도착했다. 지금 초설과 함께 차를 마시고 있다는 말에 유신은 세수하고 머리를 정리한 후 옷을 차려입고 인사를 올리러 갔다.
유신이 나타나자 초설이 달려와 품에 와락 안겼다가 실수를 깨닫고 얼굴이 빨개져서 구석으로 숨었다. 유신은 소림사 근처에서 그림으로 보았던 것보다 훨씬 아름다운 여자에게 넙죽 절을 올렸다.
"항주 태생 용유신이 형수님에게 인사 올립니다."
"강연원이라 합니다. 도련님은 어서 일어나세요."
달걀을 닮은 동그스름한 얼굴에 가는 눈썹과 커다란 눈이 무척 인상적이다. 아름다운 얼굴과 어울리지 않게 목소리는 약간 쉬었다. 혈색이 좋은 걸 보니 감기에 걸린 것은 아닐 테고 목소리가 원래 저렇다고 봐야 한다.
인사를 올리고 간단히 안부 몇 마디 주고받은 후 유신은 곧 작별을 고했다. 미리 준비된 자리가 아니고 다섯이나 앉기에 장소도 좁았다. 당우형은 셋이서 밖에 나가 술 한잔 마시겠다고 말했다.
"부군은 먼저 가서 천랑을 좀 살피세요. 주는 음식을 제대로 먹지 않고 투정을 부리더군요. 저는 마음이 약해 혼내지 못하니 부군께서 잘 가르치세요."
"부인이 걱정 없도록 내가 잘 훈육하겠소."
초현이 은자 가지러 가고 유신은 서문가의 어른들한테 깨어났다고 인사 올리러 갔다. 천랑을 위해 지은 집에 가보니 음식 그릇에 풀떼기가 잔뜩 있었다. 당우형은 머리를 절레절레 저으며 천랑에게 말했다.
"너 나를 위해 풀 좀 뜯으면 안 되냐? 진짜 먹으라는 건 아니고 그저 시늉만 좀 해줘. 부인은 책만 읽으면서 곱게 자라서 세상 물정 모른단 말이야. 그러니 뭘 주든 맛있게 먹는 척만 해줘."
뭔 개 풀 뜯는 소리냐는 눈빛으로 당우형을 바라보며 천랑은 입을 짝 벌리고 하품했다. 유신과 함께 매일 아침 산을 달리며 사냥을 해서 사지가 발달했고 잘 먹어서 덩치도 무척 커졌다. 예전의 귀여움이 전부 사라졌지만 대신 늠름함이 느껴져서 나쁘지 않았다.
"형님, 그런데 형님이 형수님 눈치 좀 보면서 사는 것 같습니다."
유신의 말에 초현이 엄청 놀란 표정을 지었다. 유신도 초현이 눈치가 무딘 걸 알았지만 이렇게까지 무딘 줄 몰라서 조금 놀랐다. 술을 쭉 들이켠 당우형이 서글픈 표정으로 말했다.
"예전에 가문에서 나에게 혼처를 잡아준 적이 있지. 그때 나는 가출을 결심했어. 절대 신부가 키 작고 얼굴이 동그래서 그런 건 아니고 아비의 복수를 하고 싶었던 것뿐이야."
슬픈 이야기가 시작되었다.
"강호에서 방랑하다 결국 가문의 성의에 감동해 독룡대를 따라 돌아가서 혼례를 올렸지. 그런데 이 당우형도 천려일실 할 때가 있었어."
유신은 하마터면 손뼉을 칠 뻔했다. 천려일실(千慮一失)은 아무리 총명한 사람도 천에 한 번은 실수한다는 뜻으로 정말 정확하게 사용했기 때문이다.
"부인이 예전에 내가 가출하면서 거절했던 그 혼약 상대였어. 내 가출 소식에 너무 울어서 목까지 쉬어버렸지."
당시 열네 살이었던 여인은 스물이 지나고도 시집을 가지 않았다. 참다못한 부친이 강제로 혼약을 맺었고 양가는 최대한 당우형을 찾아오고 그게 아니면 아무하고 혼인시키자고 정했다.
"그래서 나는 그간의 실수를 갚으려고 최대한 잘해주고 있는 거야. 부인 때문에 큰 싸움도 몇 번 했어."
여인은 당우형이 어디로 가든 늘 따라다녔다. 그래서 다루에서 차를 마시다가 부인을 은자 삼십 냥에 팔라고 하는 중놈의 팔을 부러뜨렸고 시장통에서 부인을 말로 희롱하는 일곱 잡놈을 모두 독이 발린 암기로 죽여버렸다.
"그래서 내겐 운종흑룡이라는 멋진 별호도 생겼어. 그런데 가문에서 내가 자꾸 사고를 친다며 폐관수련을 하라고 하는 거야. 그래서 지금까지 폐관수련을 하고 있어."
"형님, 폐관수련은 누구도 없는 곳에 혼자서 무공을 수련하는 걸 말합니다. 아무도 만나지 않고 외부 소식도 듣지 않으며 무공에만 집중하는 것이죠."
당우형은 큰 깨달음을 얻은 표정을 지었다.
"그래서 내가 가끔 밖에 나가면 폐관 끝냈냐고 그렇게들 물어봤구나. 내가 아직 안 끝났다고 하면 다들 이상한 표정 짓더라니."
셋은 술을 마시며 그간 있었던 일들을 서로 얘기했다. 당우형의 이야기도 재밌었고 서문가와 담화궁의 대결도 흥미진진했다. 유신은 비무가 시작된 후의 기억이 희미하고 초현은 양념을 너무 발라서 이야기가 많이 변질되었지만, 술안주로는 적당했다.
"제가 이번에 담화궁의 고수와 대결하면서 심득을 얻었습니다. 형님과 초현이 한 번 봐줬으면 해요. 초식 이름은 은접미천입니다."
술기운이 살짝 오른 유신이 젓가락을 들고 허공을 콕콕 찍었다. 내공이 없어 느리게 찔렀지만 맞은편에서 바라보던 당우형의 얼굴이 점점 심각해졌다.
"네가 만든 거야? 정말 엄청난 초식인데. 검로가 분명하고 속도도 느린데 어디를 노리는지 전혀 감이 잡히지 않아."
"형님과 다르게 나는 유신이 그저 아무것도 안 하고 가만히 있는 것처럼 느껴졌어요. 아마 저 초식으로 나를 찌르면 눈을 뜨고도 가만히 맞아줬을 것 같아요."
유신의 심득에 자극을 받은 당우형이 술잔을 내려놓고 두 손을 앞으로 내밀었다.
"당문의 절기 백화수, 절정에 이르러야 익힐 수 있는 수공이야."
"일흔세 개.","예순아홉 개."
"흐흐, 애송이들. 여든한 개야."
유신은 일흔세 개의 꽃을 보았고 초현은 예순아홉 개를 보았다. 그러나 당우형이 실제로 피운 꽃은 여든한 개다.
"문제는 이제부터 꽃 한 개씩 늘리는 데 무척 큰 공을 들여야 한다는 게지. 그리고 방금 유신이 초식 보고 꽃 두 개나 늘렸다. 역시 내가 동생 하나는 잘 두었어."
"형님, 섭섭합니다."
초현의 말에 당우형이 껄껄 웃었다.
"너 당우령이랑 혼약이 잡혀 있다면서? 걔 성격 엄청 드세거든. 초반에 성질머리 확실히 죽이지 못하면 너 고생할 거야."
"이 옥면검룡 앞에서 성질을 논하지 마라."
유신이 초현의 말투를 흉내 내자 당우형이 배를 그러잡았다. 확실히 서문초현의 얼굴 앞에서 성질을 부릴 여자는 드물 것이다. 덩치 크고 듬직한 유신과 다르게 초현은 오만한 백면서생의 느낌이 묻어나서 여인의 마음을 흔들기에 더 적합하다.
"형님, 이 초현이 은자를 넉넉히 챙겼으니 기루에 가서 밤새도록 놀아봅시다."
"안돼.","그건 좀."
유신의 빠른 거절과 당우형의 약간은 안타까움이 묻어나는 거절이 근소한 차이를 두고 초현의 귀에 꽂혔다. 혼인의 구렁텅이에 빠져 허덕이는 두 남자의 모습에 초현은 난생처음 떨었다. 몇 달 뒤면 자신도 같은 처지가 된다는 두려움에.
- 작가의말
고주일척은 여러 제약으로 제대로 사용하지 못하고 있습니다. 첫 깨달음이 너무 세게 왔거든요. 그런데도 내공만 절정인 어설픈 절정고수를 가볍게 처리할 정도의 위력입니다. 은접미천은 수준이 낮은 자들에게는 기(奇)이고 수준이 비슷하면 환(幻)이고 수준이 더 높은 상대에게는 변(變)으로 보입니다.
초식에 반응할 엄두도 나지 않는다는 서문초현은 현재 유신보다 낮은 수준이고 당우형은 내공이 절정에 이르렀지만 암기를 주로 다뤘기에 유신과 비슷한 수준이라 환으로 보인 겁니다.노 페인 노 게인, 저는 폐인도 아니고 게이도 아닙니다. 새로운 초식을 얻으려면 유신이 어떤 고난을 겪어야 할지 많이 고민하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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