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문현성의 꿈
계림산수 갑천하라는 말이 있다. 계림의 산과 물은 천하에서 으뜸이라는 뜻으로, 중원과 먼 광서 지역이 아니었다면 황산과 오악의 명성을 훨씬 초월했을 것이다.
그리고 광서는 민란이 가장 많았던 지역이기도 하다. 주원장이 연신 군대를 파견하여 반란을 진압했고, 반란에 연루되어 죽은 사람이 수백만 명이 된다. 수십만 규모의 대학살이 수십 년 전에 몇 번이나 벌어졌던 곳이다.
담화궁이 광서를 선택한 것도, 이곳 사람들이 황실에 커다란 불만을 품은 것이 주된 이유다. 외지인에 대해 경계가 심한 곳에서 담화궁의 흔적을 찾으려니 무척 힘들었다.
그러나 며칠에 걸린 추적 과정보다 더 일행을 힘들게 한 건, 갑자기 눈앞에 나타난 청수한 용모의 사내다. 문약해 보이는 얼굴에 서생 차림을 하고 있었지만, 손에 검을 잡은 모습이 전혀 어색하지 않았다. 유신이 아니었으면 그저 바위나 나무로 여기고 지나쳤을 정도로 존재감이 흐릿했다.
두 주먹이 네 손을 당할 수 없다는 말이 있다. 단합한 힘이 얼마나 무서운지 알려주는 말로, 많은 사람이 이에 동의하고 있다. 물론 노자의 말씀에 따르면, 이 세상에 절대적으로 맞는 말이 없다. 두 주먹으로 네 손을 당해낼 수 있는 자들이 강호에는 무척 많다.
전화표허는 유신이 최근에 얻어낸 초식으로, 새로운 초식이라기보다는 비상유사의 변식이라고 불러야 한다. 비상유사는 쾌검을 펼친 후 거둬들여야 하지만, 전화표허는 그 거두는 과정이 매우 간략화되어 거의 무시할 정도가 되었다.
하수나 어정쩡한 고수를 상대할 때 전화표허는 완벽한 초식이었다. 그러나 왕이라 불리는 자 앞에서 펼치니, 그 허점이 여지없이 드러났다. 찌르기와 찌르기 사이 찰나의 멈칫거림을 상대는 사정없이 파고들었다.
"오호, 구절신공(九節神功)을 익히셨군. 곤륜의 제자인가?"
모두가 공인하는 천하에서 다섯 손가락에 드는 남무천, 그 남무천이 화령초 열매를 먹기 전과 비슷한 무위를 자랑했던 전영득, 무공은 몰라도 내공은 화령초를 먹은 남무천마저 아래로 보는 유신, 백화수를 대성하고 독왕의 진전을 이어받고 있는 당우형.
이 넷에 강호 최고의 후기지수로 꼽히는 서문초현을 얹었는데도, 다섯이서 한 명을 어쩌지 못했다. 담화궁의 흔적을 쫓아가고 있는데, 갑자기 나타난 우문현성이 이들의 앞길을 막았다.
"교주, 지난번에는 실력을 숨긴 거요?"
내공은 유신이 더 깊지만, 여유는 남무천이 더 있었다. 유신은 아직 실전 경험이 부족하여, 무위나 내공에 비교하면 여유가 훨씬 부족하다.
"내가 사정이 좀 있어."
"혹시 달거리를 하는 거요?"
서문초현의 날카롭고 묵직한 찌르기를 왼손의 식지를 구부려 쳐낸 우문현성은, 남무천을 무시하고 유신에게 말을 걸었다.
"곤륜의 제자라면 목숨을 살려주마. 내가 곤륜에 빚이 좀 있거든."
"가전 무공이오."
몸이 죽도록 아프거나 정신이 부서질 정도로 힘들 때, 사람은 거짓말을 하지 못한다. 그런 상황에서 거짓말을 하는 사람은, 누군가를 속이려는 게 아니라 평소에도 자신을 속여왔던 사람이다. 경지가 낮으면 모를까, 재수 없이 무위지경에 이른 유신은 우문현성을 상대로 다른 사람보다 훨씬 큰 압박감을 느끼고 있다.
"곤륜은 속가와 도가 구분이 없거든. 오늘 널 살려서 빚을 조금이라도 갚아야겠다."
예전 같으면 화가 울컥 치밀었을 텐데, 운 좋게도 무위지경에 이르러 명경지수를 유지할 수 있었다. 무공은 남무천이 조금 앞서지만, 가장 강한 공격을 할 수 있는 건 유신이다. 남은 셋은 둘의 공격을 보조하는 역할을 자처했다.
유신의 찌르기를 검으로 쳐내고 남무천의 공격을 피하면서, 우문현성은 당우형이 던진 암기를 이로 꽉 물었다가 퉤 하고 뱉어버렸다. 이 세 가지 행위가 숨 쉬듯 자연스럽게 완성되어, 하나의 동작처럼 보였다.
"구절신공은 무슨 말이오?"
남무천이 궁금함을 참지 못하고 입을 열었다.
"천하에 네 개의 무공비급이 있다. 하나는 구음진경(九陰眞經)으로, 세상 모든 무학을 다 담았지. 무림인이 쓴 도덕경이라고 보면 된다. 다음은 구양진경(九陽眞經)으로, 달마가 썼다고 하는데 아마 거짓일 거다. 불가보다 도가의 것이 더 많이 들어있거든. 달마가 천재라고 하지만, 도가의 공부를 한 것 같지는 않다. 구양진경을 익히면 세상에서 가장 강한 내공을 얻을 수 있지."
"그리고 곤륜의 구절신공이 있는데, 이 무공은 구음진경과 구양진경을 합친 것과 비슷하다고 보면 된다. 무학 하나와 내공 하나만 따지고 보면 구음진경과 구양진경이 더 나은데, 무학과 내공의 결합을 따지면 구절신공이 최고다."
마른하늘에서 벼락이 내려 유신의 정수리를 때렸다. 정수리를 때린 벼락은 온몸을 관통한 후 용천혈을 통해 바닥으로 사라졌다.
'무슨 깨달음이지? 왜 아무 내용도 없어?'
뭔가 얻었는데 아무것도 남은 게 없다. 그저 유신을 스치고 지나가 버렸다. 분명 죽절공에 대해 뭔가를 생각했는데, 짜릿한 느낌이 몸을 관통하면서 잊어버렸다.
"마지막 하나는 풍류경(風流經)이다. 이름만 들으면 남 호법이 좋아하는 도색화첩과 비슷하지만, 심법(心法)을 서술한 최고의 책이다. 내공심법이 아닌 진짜로 마음을 다스리는 방법을 적었는데, 우행이 아마 풍류경의 전수자일 것이다."
"교주, 넷 중에 어느 것이 가장 강하오?"
"남 호법은 아직도 순수하군. 그러니 무공이 이렇게 강할 수 있겠지. 부럽다, 부러워."
우문현성이 남무천을 비꼬는 말에는, 진심으로 부러움이 깃들어 있었다. 잠을 줄여가면서 열심히 공부하여 과거에서 장원급제를 한 자가, 매일 놀러 다니다가 방안(榜眼 - 콩)을 한 자를 바라보는 심정일 것이다.
대화하는 사이, 우문현성은 백여 번의 공격을 막아냈다. 다섯이서 협공하면서도 남무천과 유신을 제외하면 입도 열지 못하는데, 우문현성은 긴 설명까지 곁들여서 사대 무공 비급이 어떤 것들인지 알려주었다.
"교주는 어느 무공을 익혔소?"
"구음진경 조금에 풍류경 조금. 구양진경은 소림에서 어디에 감춰뒀는지 찾지 못하겠고, 구절신공 역시 소문만 들었지. 단전이 여러 개인 걸 보고 구절신공이라고 알아봤을 뿐이다."
대화하는 사이 몇 번의 공격과 수비가 펼쳐졌다. 남무천은 질문을 하자마자 빠른 공격을 시도했는데, 거친 숨 한 번 안 쉬고 말하는 우문현성에게 가볍게 막혔다.
"그런데 교주는 왜 수비만 하는 거요?"
"공격하면 너나 저 곤륜의 아이에게 틈을 줄 거거든. 내가 사정이 좀 있어."
"그럼 한쪽이 지쳐서 물러갈 때까지 이러고 있겠다는 말이오?"
"너희 공격이 약해지는 순간, 하나씩 죽겠지. 어차피 끝까지 싸우면 너희 다 죽고 나만 살아남는다. 너희도 나한테 상처를 입힐 자신이 없으면 물러가겠지. 전 호법, 내 말이 맞지?"
유신과 남무천이 앞장서서 싸우고, 서문초현이 틈이라 생각되면 과감하게 찔렀다. 당우형은 우문현성이 공격을 펼칠 틈이 없도록 공격의 사이를 메꾸고 있고, 전영득은 모든 공격을 암암리에 조율하고 있다.
그런데도 전영득이나 당우형 그리고 서문초현은 입을 열어 대답하지 못했다. 손발이 늘 바쁜 건 아닌데, 마음에 여유가 없어 입을 열지 못한다. 우문현성도 대답을 바라고 한 것이 아니라서, 전영득의 무시에도 기분이 상하지 않았다.
"교주, 무슨 부귀영화를 누리겠다고 이리 바삐 사시오? 검을 내려놓고 나랑 술 마시며 여인네 궁둥이를 두드리면 훨씬 즐겁지 않겠소?"
"무위자연이라. 세상이 순리대로 흐르면 인간은 사라지게 되어 있다. 나는 인간이 지워지는 그 시점을 늦추려는 것뿐이다."
"무슨 개소리요?"
"인간은 욕심을 위해 싸우고, 싸우면서 발전한다. 천 년 전의 군대 백만을 불러서 지금의 군대 만 명과 싸우게 하면 누가 이길까? 만 명이 이겨. 그리고 인간이 전쟁을 멈춘 적이 몇 번이나 있지? 이쪽에서 화해하면 저쪽에서 싸우고, 저쪽에서 전쟁이 끝나면 이쪽에서 또 트집을 걸고. 이대로 가면 인간은 자기들끼리 싸우다가 다 죽어버릴 것이다."
"제길, 이긴 자는 살아남고, 살아남은 자는 인간이 아니오?"
우문현성은 껄껄 웃었다.
"산에 호랑이를 보아라. 암컷이 수컷을 못 만나면 결국 새끼를 낳지 못하고 늙어서 죽는다. 그러면 호랑이가 사라지는 것이지. 마찬가지로 인간도 숫자가 무척 적어지면, 결국 아이를 낳지 못하고 하늘 아래서 사라질 것이다."
"그 정도로 인간이 멍청하게 싸우지는 않을 것 같소."
"그건 네 생각이다. 나도 홍이포를 보기 전에는 너처럼 생각했다. 만약 홍이포보다 훨씬 강한 대포가 나오면? 나라가 무너진 자들이 목숨 걸고 상대를 죽여 복수하려 한다면? 물론 당장은 그런 날이 오지 않겠지만, 성화신이 말했다시피 언젠가는 멸망의 날이 다가올 것이다. 예전에는 신에 의해 세상이 멸망하나 생각했는데, 지금 생각해보면 인간을 멸망할 수 있는 건 인간밖에 없을 것 같구나."
"그걸 왜 교주 당신이 걱정하오? 짠 소금 먹고 싱겁게 굴기는."
"내게 주어진 숙명이 아닐까? 어릴 때부터 나는 세상을 위해 뭔가를 해야겠다는 생각이 머리를 떠나지 않았다."
"당신이 황제가 되면, 어떻게 인간의 멸망을 늦추겠소?"
"홍이포 따위, 화약 만드는 법 등을 다 없애버리겠다. 진시황이 분서갱유 했던 것처럼, 인간의 힘을 벗어난 모든 것을 없애고 천하의 누구도 다투지 못하게 통제하겠다."
다섯의 물 흐르듯 이어지던 연환 공격이 하마터면 깨질뻔했다. 우문현성은 대포나 화약뿐 아니라 무공도 다 없애겠다는 게 틀림없다. 일행은 생각만 해도 해낼 수 있을지 막막한 느낌이 드는데, 우문현성은 자신이 할 수 있다고 확신에 차 있다.
"절대고수가 미친 게 아니고, 미친놈이 절대고수가 되었군."
남무천의 말이 모두의 심정을 대변했다.
"나는 황제가 되어 천하를 평정해서 하나의 나라로 만들 생각이다. 그리고 황제를 제외한 모든 사람이 평등한 세상을 만들겠다. 일하지 않는 자는 강제로 일을 시켜서라도 먹고 살 수 있게 한다. 다투는 자는 잘잘못을 따지지 않고 똑같이 처벌할 것이다. 열심히 하면 남들보다 잘 먹고 잘 살수 있지만, 게으름을 피우는 자들도 강제로 일 시켜서 배곯지 않게 만들겠다."
"그게 가능하다면, 왜 지금까지 누구도 하지 않았겠소?"
"나는 할 수 있다. 그리고 어차피 게으름도 부모로부터 물려받는 것이고, 다툼도 부모로부터 물려받는 것이다. 게으른 자와 다투기 좋아하는 자들을 꾸준히 제거하다 보면, 언젠가는 부지런하고 상냥한 사람만 남을 것이다."
"인간이 개돼지요? 그게 사육이나 무슨 다름이 있소?"
전영득의 기운이 일행의 어깨를 부드럽게 만졌다. 흥분하여 공격 속도가 조금 빨라졌던 넷은 천천히 속도를 조절했다. 넷이 한꺼번에 속도를 늦춰도 파탄이 생기기에, 무척 조심해야 한다.
"지금 개돼지보다도 못한 삶을 사는 자들이 많다. 그자들은 무슨 죄를 지어 인간 이하의 취급을 받아야 하느냐? 나는 최대한 많은 인간이 인간답게 살게 만들려는 것뿐이다. 그 과정에 아무런 희생도 없을 수는 없다."
"당신 입맛에 맞춰 사는 게 어디가 인간답다는 거야? 세상의 입맛에 못 맞춰 개돼지처럼 사는 거랑 당신 입맛에 못 맞춰서 죽는 게 뭐가 달라?"
유신의 가슴속에서 불이 일었다. 왜 화가 났는지 정확히 모르지만, 아마도 무위지경에 이른 탓인 것 같다. 인간이 하는 모든 행동도 무위자연의 일부라고 생각한 지 며칠 지났는데, 그 생각에 완전히 반하는 말을 들으니 화가 치민 듯하다. 우문현성의 말은 유신의 깨달음을 전면적으로 부정하고 있다.
"세상은 마음이 없고, 나는 인간의 마음이 있다. 당연히 인간만을 위하지 않는 세상보다는, 인간의 마음을 가진 내가 꾸미는 세상이 더 살기 좋지 않겠느냐?"
전영득의 신호에 모두가 뒤로 훌쩍 물러섰다. 무척 집중하여 우문현성의 공격에 대비했지만, 의외로 우문현성은 좋은 기회를 그저 흘려보냈다.
"교주. 그런데 나랑 남 호법은 왜 예전부터 그렇게 죽이려고 했소?"
"전 호법. 너는 늘 인을 가지고 과를 계산하기 좋아한다. 인과 과가 서로 맞지 않으면 그 이유를 알아내려 애쓰고, 그 이유를 알아내면 그걸 이용해서 인과를 비틀려고 했지. 사실 너랑 나는 같은 부류다. 너도 자기 주변이 네 계산대로 흐르기를 바라지 않느냐?"
전영득은 말문이 막혀 입술만 달싹였다.
"그래서 너는 제거 대상이다. 나와 같은 자는 나 하나만 남아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나와 같은 자는 세력을 이루어 내게 대항할 게 분명하다. 내가 원하는 세상과 그자가 원하는 세상이 다를 테니 말이다. 내가 널 안 죽인다고 약속하면, 너는 이후 나를 방해하지 않을 셈이냐?"
전영득은 여전히 입을 열지 못했다. 우문현성이 하려는 일은, 전영득이라는 사람 자체를 부정하는 일이다. 그저 지켜보고만 있다면, 전영득은 전영득이 아니다. 그저 뿌리 박고 움직이지도 못하는 초목과 크게 다를 바 없다.
"남 호법. 너는 참 놀라운 자다. 흑혈기공에 검법 몇 개를 익히고 대단한 고수가 되었다. 강호에 네가 내 제자라고 소문난 것도, 네가 제대로 된 사부 없이 절대에 가까운 고수가 되었다는 사실을 누구도 믿기 싫었기 때문일 테지."
남무천이 우쭐한 표정을 짓자, 우문현성도 웃음이 새는 걸 참지 못했다.
"너 같은 자도 통제하기 힘들다. 마음 내키는 대로 해서 고수가 되었고, 그걸 바꾸는 순간 네 무공은 퇴보하게 된다. 지금 이른 경지를 보니, 하고 싶은 것만 하고 하기 싫은 건 안 하면서 산 게 분명하구나. 이런 자들은 내가 꾸미려는 세상에 필요 없다."
전영득은 통제하려는 경향이 강해서 제거하려 하고, 남무천은 통제받지 않으려는 경향이 강해서 제거하려 했다는 것이다. 물론 전영득과 남무천 같은 자가 천하에 한둘이겠냐만, 우문현성은 둘을 볼 때마다 눈에 거슬려 참기 힘들었다. 둘을 살려두는 게 자신이 부정당하는 것 같은 느낌이 들어서 살심이 계속 치밀었다.
"저 뒤에 있는 아이가 내상을 입었다. 빨리 치료하지 않으면 죽은 목숨이다. 사흘 후에도 광서의 땅을 밟고 있으면, 부상을 각오하고 너희를 모두 제거하겠다."
서문초현이 억지로 참고 있던 피를 입으로 토해냈다. 우문현성이 공격 한 번 안 했지만, 서문초현은 심맥에 타격을 받았다. 우문현성은 무위지경에 비견되는 심살(心殺)의 경지에 이르렀고, 심력이 가장 약한 서문초현이 거기에 당했다.
- 작가의말
콩 = 2등. 깔깔 유머였습니다.
우문현성이 왜 이렇게 혓바닥이 기냐고요? 다 이유가 있는 것 아니겠습니까? 떡밥을 회수하지 못하는 글쟁이는 하수고, 떡밥만 회수하는 건 중수고, 떡밥을 회수하며 새로운 떡밥을 던지는 게 고수라고 들었습니다. 누구한테 들었냐고요? 제가 꾸며낸 말입니다.
구음과 구양은 오마주입니다. 죽절공의 정식 명칭은 구절신공이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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