싸움
칠성문의 하인과 하녀 그리고 무사는 전부 백련교도들이다. 하인과 하녀는 당연히 무공을 익히지 않았고, 무사들도 삼류 수준이 대부분이다. 백련교도가 아닌 호문식의 첩과 첩의 자식들, 그리고 재수 없게도 안 좋은 시기에 칠성장을 방문했던 사람들은 현재 엄중한 감시를 받으며 별채에 갇혀있다.
칠성장에는 포로들의 감옥으로 이용하던 지하 창고와는 달리, 거주의 목적으로 지은 다른 지하 밀실이 있다. 그곳에는 성화인의 부름을 받고 달려온 마교 고수들이 몸을 숨기고 있었다. 환기가 잘 되어 습하지도 않고, 적당한 곳에 유등과 횃불이 있어 어둡지도 않다.
백련교는 교주보다 대법왕이라는 말을 더 많이 사용한다. 제사를 책임지는 자를 대법왕이라고 하는데, 언젠가부터 교주가 겸임하게 되었다. 그러나 교주는 무공만 강하고 교리와 제사 과정에 대해 잘 모르는 자가 대부분이었다. 그래서 소법왕이라는 직책을 만들어 제사를 지낼 때 대법왕을 보조하는 역할을 맡겼다.
소법왕은 그 수가 정해져 있지 않은데, 무공이 강한 자도 있고 무공을 전혀 모르는 자도 있다. 그러나 무공의 강약을 떠나 그 권위가 대법왕을 제외하면 가장 높다. 이들의 권위는 힘이 아닌 교도들의 믿음에서 나오기에, 성화인의 권위를 지키는 데 병적으로 집착한다.
대법왕이 사라지고 그 후계자가 명확하지 않은 상황에서, 소법왕을 중심으로 교도들은 여러 무리로 흩어졌다. 이번에 부름을 받고 온 것은 두 무리로, 호심정에서 소법왕 하나가 목숨을 잃었다. 죽은 소법왕을 따르던 고수들은 바로 다른 소법왕에게 투신했다. 꽤 오랜 시간 따로 살았지만, 전혀 위화감 없이 한 무리가 되었다.
"소법왕, 밖이 너무 소란스럽습니다."
"우리 도움이 필요하면 호 형제가 자연히 사람을 보내 도움을 청할 것이다. 경거망동하지 말고 마음을 가라앉혀라."
굳이 무인이 아니더라도, 사내라는 족속은 힘을 가지면 쓰고 싶어 안달을 낸다. 모두 강호에서 꽤 오랜 시간 신분을 감추고 조용히 살아서 들킬 염려가 거의 없지만, 혹시라도 들키면 대사를 그르칠 수 있기에 밀실에서 때를 기다리고 있다. 좀이 쑤셨던 자 중에서도 참을성이 가장 부족한 자가 소법왕에게 출전을 암시했지만, 심계가 깊은 소법왕은 움직일 생각이 전혀 없었다.
그러나 병장기 부딪치는 소리가 끊어질 줄 모르고, 비명도 점점 잦아졌다. 심계가 깊고 참을성이 대단한 소법왕도 결국 궁둥이를 얌전히 붙이고만 있을 수 없었다.
"누가 나가서 사정을 좀 살펴보거라."
상황 판단이 빠르고 관찰력이 뛰어난 자가 자진해서 밖으로 나갔다. 그러나 밖으로 나간 자는 자신의 재능이 낭비되었음을 알아챘다. 바보만 아니라면, 밖에서 어떤 상황이 벌어지고 있는지 쉽게 알 수 있다.
"소법왕, 포로들이 풀려났습니다."
"다 죽인다. 이곳은 버리는 거로 하고, 형제들은 최대한 데리고 떠난다."
소법왕은 오래 생각하지 않았다. 고민하는 모습을 보이면 안 되는 자리에 오래 있었기에, 판단도 빠르고 결정도 빠르다. 원래 남궁용현이 구출해야 할 포로들은 전부 죽이기로 했다. 칠성문이야 어차피 버리기로 하고 재물도 이미 빼돌렸기에, 포로들을 다 처리한 후 사람만 빠지면 된다.
두 무리를 다 합치면 백 명이 훨씬 넘는데, 호심정에서 스무 명 정도가 죽었다. 그리고 몇 명은 서문가를 공격하는 데 차출되어, 현재는 백 명에 조금 못 미치는 숫자만 남아있다. 포로들보다 더 많은 수이고 일류가 아닌 자가 없어서, 소법왕은 승리를 전혀 의심하지 않았다.
무공이 절정에 이른 소법왕은 화륜창(花侖槍)을 들고 맨 마지막에 느긋하게 나갔다. 그러나 밖으로 나가자마자 바로 몸에 힘이 들어갔다. 칠성문의 형제들은 이미 태반이 피를 낭자하게 흘리며 쓰러져 있었고, 데려온 고수들도 힘을 제대로 쓰지 못하고 있었다.
"호 형제!"
교를 위해 자원하여 하찮은 장사꾼이 되었고, 교도들이 먹고살 수많은 식량과 의복을 지원해 준 호문식의 머리가 보였다. 자신의 목 위가 아니라, 첩이 낳은 자식의 품에 꼭 안겨 있다. 백련교도가 아닌 첩의 자식은, 호문식의 수급을 명줄이라도 되는 듯 꽉 안고 있었다.
그리고 그 첩의 자식 주변에 형제들의 시체가 꽤 많이 널려 있다. 얼굴만 보면 여인이라고 해도 믿을만한 미청년이, 빠르면서도 강한 검으로 접근하는 자들을 물리쳤다. 찌르기가 아닌 사각으로부터 오는 절묘한 베기는, 상대의 목숨을 취하기도 하고 상처를 입히기도 했다. 몸 성히 청년의 검 앞에서 물러나는 자가 없다.
빠르기도 하고 위력도 강한 검이지만, 결코 피하지 못할 수준은 아니다. 미청년의 검이 절대에 가까운 위력을 발휘할 수 있는 이유는 따로 있었다. 선이 굵은 얼굴에 오관이 단정한 청년이 있는데, 누가 봐도 귀하게 될 상이어서 인상이 깊이 남았다. 마치 바람에 흔들리는 갈대처럼 첩의 자식 주변을 맴돌던 청년은, 미청년의 공격에 맞춰 암기를 던졌다. 검보다 먼저 도착하는 암기를 겨우 막아내면 미청년의 검이 어느새 도착해 있었다.
들끓는 마음을 가라앉히고 살피니, 포로가 되었던 자들이 두 무리로 나뉘어서 데려온 수하들과 대치하고 있었다. 일대일로 싸우면 지친 포로들을 쉽게 처리할 수 있으나, 무리의 싸움이 되면서 누구도 누구를 쉽게 살상하지 못했다.
그리고 마지막 전장으로 고개를 돌린 소법왕은 숨이 막혔다. 가장 늦게 그곳을 바라본 것은, 그쪽에서 느껴지는 기운이 가장 약했기 때문이다. 묵직한 기세가 뭉쳐있는 청년과 서릿발 같은 기세가 사방으로 뻗는 미청년이 가장 주의를 끌었고, 세가 무인들이 모인 곳에서 경지가 높아 보이는 무인 몇이 느껴졌다.
그러나 별 볼 일 없을 것으로 생각했던 마지막 전장에서, 경지를 느낄 수 없는 무인을 보았다. 커다란 덩치가 위압적이지만, 얼굴은 아직 애티가 완전히 가시지 않았다.
'인간이 아닌 건가?'
마지막 대법왕인 한복명도 저 나이에 저 정도는 아니었다. 가장 안타까운 건, 수하들이 불나방이 들불에 뛰어들듯이, 자꾸 자기 목을 덩치의 검에 갖다 바쳤다. 보이는 게 진실이 아님을 알고 있지만, 보이는 건 수하들이 가만히 있는 덩치의 검에 목을 갖다 대는 장면뿐이다.
"다른 쪽을 지원해라. 내가 상대한다."
뭐에 홀린 듯 사내에게 이끌려 목숨을 던지는 수하들을 큰 소리로 깨웠다. 천만다행으로, 소법왕이 그간 쌓아온 권위가 덩치 큰 청년의 매력을 초월했다. 수하들은 고분고분 덩치에게서 멀어져서 세가의 무인 혹은 미청년이 있는 곳으로 향했다.
'내 말에 따랐다기보다는 겁에 질려 도망쳤다는 게 맞는구나.'
창을 쥔 손에 힘이 들어갔다. 소법왕의 화륜창은 아주 특별한 무기다. 사실 창이라는 말보다는 봉이라는 말이 더 어울리는 무기로, 창끝이 뾰족하지 않고 둥글다. 그러나 봉이라고 하기에는 사용법이 창과 별반 다르지 않다.
소법왕은 덩치 큰 청년을 향해 가벼운 찌르기를 펼쳤다. 살상이 아닌 견제와 탐색을 목적으로 펼친 찌르기로, 언제든 거둬들일 준비가 되었다. 그러나 덩치 큰 청년은 얄밉게도, 마지막 순간이 되기 전까지 아무런 대응도 하지 않았다.
극심한 갈등을 멈춘 소법왕은 결국 창을 거뒀다. 계속 찌르면 더는 창을 거둬들일 수 없다. 무기를 마음대로 할 수 없는 처지에 상대의 반격이 터지면 일 검에 당할 수 있다. 그러나 창을 거둬들인 소법왕은 갑자기 변화한 분위기에 자신의 실수를 깨달았다.
'내가 너무 경솔했구나. 분위기를 다 빼앗겼다. 어리지만 싸울 줄 아는 자다.'
모두 세 곳에서 대치하고 있지만, 당연히 소법왕과 덩치의 싸움이 핵심이다. 그래서 대치하고 있는 양쪽 모든 무인이 조금의 주의력을 이쪽에 할애하고 있다. 사정을 모르는 외인이 보기에는, 소법왕이 필살의 일격을 펼치다 제풀에 겁먹고 거둬들인 것으로 비친다.
포로들의 사기와 기세가 뭉게뭉게 피어올랐고, 소법왕의 수하들은 크게 작게 위축되었다. 그러나 소법왕 역시 백전의 노장이라, 흔들리지 않고 자신의 창술을 펼쳤다. 어차피 소법왕이 상대를 죽이면, 더 큰 격차로 기세가 뒤집힌다.
동그란 창끝은 허공을 가르며 쌕 소리를 냈다. 보통 찌르기는 소리를 작게 하는 방식을 추구한다. 소리가 작을수록 흐름을 잘 탄 것이고, 흐름을 잘 탄 찌르기는 속도와 위력이 당연히 더 강하다.
그러나 소법왕은 소리를 크게 냈다. 소리가 크게 날수록 뾰족하지 않은 창끝이 더 격렬하게 흔들리고, 흔들리는 창끝이 어디로 향할지는 소법왕도 자신할 수 없다. 공격하는 자도 어디로 향할지 모르는데 수비하는 자가 제대로 막아낸다는 건 무척 힘든 일이다.
그리고, 고수는 그 힘든 일을 쉽게 해내는 자를 일컫는 말이다. 창 길이는 검의 네 배가 넘는다. 그러나 상대는 무모하게 소법왕의 찌르기에 맞 찌르기로 응수했다. 여기서 소법왕이 또 피하면, 수하들의 피가 배는 더 흐를 것이다. 기호지세가 된 소법왕은 창을 거두는 대신 남은 내공을 아낌없이 쏟아부었다.
'용이다.'
상대의 검은 살아있는 뱀처럼 창을 타고 꿈틀거리며 다가왔다. 그러나 뱀이라고 부르자니 검에 실린 기세와 현묘함에 너무 미안했다. 소법왕은 이토록 빠른 찌르기에 변화마저 실을 줄은 꿈에도 상상 못 했다. 만약 상대가 자신의 찌르기를 보고 바로 따라 한 것임을 알게 된다면, 검이 몸에 닿기 전에 놀라 죽었을지도 모른다.
다행히 독심술을 익히지 않은 덕분에 소법왕의 목숨은 찰나라고 할 정도 더 유지되었다. 그리고 그 찰나의 시간은 소법왕이 죽기 전에 마지막 생각을 떠올릴 수 있도록 배려했다.
'신검합일!'
검이 소법왕의 목을 찌를 때, 소법왕의 눈에는 검만 보이고 상대의 몸이 보이지 않았다. 상대의 기세에 완전히 눌려 시야가 제한된 것일 수도 있지만, 소법왕은 무공과 내공이 모두 절정에 이른 고수만 펼칠 수 있는 신검합일임을 확신했다.
그 확신을 끝으로 소법왕은 이승을 떠났다. 그의 다음 도착지가 성화신의 곁인지 아니면 십팔 층 지옥일지는 그 자신만 아는 비밀이 되었다.
"튀어!"
소법왕의 화륜창이 바닥에 떨어지기도 전에 백련교 고수들은 뿔뿔이 흩어져 도망쳤다. 수십 년에 가까운 투쟁 경험으로 백련교 무인들은 진퇴의 시기를 기가 막히게 잘 잡아낼 수 있게 되었다. 소법왕이 너무 쉽게 죽어버리자, 누구 하나 주저하는 자 없이 바로 도망쳤다.
"이겼다!"
누군가 먼저 소리 지르자, 함성인지 비명인지 울음인지 구별하기 힘든 소리가 마구 뒤섞여 토해졌다. 상대는 이백 명이 넘게 죽었는데, 대부분은 칠성문의 무인들이고 고수는 스물이 조금 넘었다. 그것도 모두 유신과 당우형 그리고 서문초현이 처리한 자들이다.
바닥에 종이를 놓은 호운천은, 한 손으로 아비의 수급을 꼭 안고 남은 손으로 글을 적었다. 부들부들 떨리는 손으로 겨우 문장을 완성한 호운천이 당우형을 바라보았다. 자신과 남은 식솔들이 의탁해야 할 상대가 당문임을 그 짧은 시간 안에 깨달았다.
"열 명 이상씩 무리를 지어 빼앗긴 병장기를 찾읍시다. 우리는 호 공자와 함께 구금된 다른 사람들을 구하겠소."
당우형은 배분이 낮지만, 당문의 화수라는 감투를 쓰고 있다. 거기에 독왕의 진전을 이었다는 소문이 짧은 몇 달의 시간 안에 강호에 넓게 퍼져, 그 위세가 천하를 흔들고 있다. 그래서 은근슬쩍 말을 낮췄지만, 누구도 뭐라 하지 못했다.
다행히 무인들은 더 좋은 무기가 생겼다고 자기 무기를 바꾸지는 않는다. 실전에서 손에 익은 무기는 죽을 목숨을 다치는 정도로 그치게 해주는 고마운 존재다. 덕분에 몇몇을 제외하고 모두 자기 무기를 찾을 수 있었다.
당우형과 유신은 호운천과 함께 감금된 식구들을 구하러 갔지만, 시체만 구경하고 돌아왔다. 역모죄를 면할 소중한 근거가 되어 줄 아비의 머리를, 호운천은 바닥에 힘껏 팽개쳤다. 아비의 머리를 금의위에 바치며 목숨을 부지하려 했는데, 자신을 제외한 식구들이 다 죽어버렸다. 차라리 성을 버리고 이름을 바꿔서 사는 게 낫다는 생각에, 소중하게 품고 있던 수급을 내동댕이쳤다.
초현은 서문가 식솔들의 상처를 깨끗해 보이는 천으로 꽁꽁 동여맸다. 쾌검을 사용하는 서문가는 상대의 목숨도 쉽게 취하지만, 본인도 상처를 잘 입었다. 다행히 몇몇 죽은 자들 가운데 서문가의 사람은 없었다.
"우리는 이번 일의 또 다른 수괴인 담화궁을 처단할 생각이오. 혹시 뜻이 있다면 보름 후에 용호산에서 뵙겠소."
당우형의 말을 끝으로 서문가의 식솔들은 칠성장을 떠났다. 일행의 가장 뒤에는 피가 묻은 옷을 새것으로 갈아입은 호운천이 총기를 잃은 눈으로 따랐다. 유신이 청죽방에 몸을 숨기고 있으라 했지만, 호운천은 그저 고개를 저었다. 칠성문의 소문이 퍼지기 전에 담화궁에 도착하려고 배를 구해 새벽이 밝는 대로 출발했다.
- 작가의말
전영득과 남무천이 등장할 때면, 일부 비밀이 풀립니다. 그 시기를 지금 열심히 가늠하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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