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류의 경지
심술궂은 하늘은 먹구름으로 해를 꽁꽁 감추고 땅을 향해 비를 쏟아부었다. 방울방울 비에는 반고(盤古)의 도끼질에 강제로 이별하며 슬펐던 하늘이 땅에 보내는 애틋한 그리움이 섞였다. 끊어지지 않는 빗줄기가 잠시나마 하늘과 땅을 다시 이어주었다.
"초설아, 너 평소 좀 많이 나와서 다녀라."
"네, 모친."
"그리고 뭐든 적당한 것이 중요해. 사위가 맨날 낮에 잠을 자니 밤에 안 자고 뭐 했냐고 말이 나오잖아."
초설의 얼굴이 확 붉어졌다. 그리고 억울함을 듬뿍 담아 호소했다.
"자는 건 내공 수련을 위해서라고 했어요. 그리고 요즘은 밤에도 잠을 자요."
말을 하고 나니 뭔가 이상했다. 귓불까지 빨개진 초설을 보며 소소군이 음흉한 미소를 지었다.
"날 잡아 포목점에 다녀오자. 너 가슴도 그렇고 엉덩이도 커진 것 같다. 나도 신혼이 어제 같은데 이젠 나이 들어서 다 시들해졌구나. 역시 젊음이 부러워."
"엄마!"
초설이 화를 내자 소소군은 작게 웃음을 터뜨렸다.
"얘가 시집보내줬더니 낭군 믿고 기가 살았어. 안방에 들어가서 금색 실이나 꺼내와라."
초설은 안방에 들어가서 실꾸리를 뒤졌다. 비가 억수로 퍼붓고 있지만 하나도 걱정하지 않았다. 수련을 끝낸 낭군이 직접 짠 대나무 우산을 들고 데리러 올 것이다.
"여보, 별일 없었지? 저녁거리를 가져왔으니 어서 먹고 오늘도 초현이 동생이나 만듭시다."
"소리 낮춰요."
"괜찮아. 비가 거세서 아무리 고수라도 우리 대화를 못 들어."
"옷 벗지 마. 초설이 왔어요."
금실을 든 초설은 최대한 음흉한 표정을 지으며 객청으로 나갔다. 어릴 때부터 어머니에게 변장술을 배우며 목소리와 표정을 바꾸는 법을 배웠다. 황급히 옷을 주워입던 서문청산과 목까지 빨개진 소소군은 초설의 눈을 마주 보지 못했다.
"나도 신혼이 어제 같은데 이젠 나이 들어서 다 시들해졌구나. 역시 젊음이 부러워."
소소군과 거의 똑같은 목소리와 말투로 아까 들었던 말을 그대로 했다. 소소군은 소주 태생이라 말투가 무척 부드럽고 듣기가 좋다. 형주의 거친 말투와는 달라 초설은 어려서부터 많이 따라 했기에 눈을 감고 들으면 소소군이 말한 것으로 오해할 정도다.
"나 뭐 두고 온 것 같소."
서문청산이 황급히 경공을 펼쳐 빗속으로 사라졌다. 두 모녀는 묵묵히 새로 만든 옷에 수를 놓았다. 그러다 소소군이 눈물을 머금고 초설에게 말했다.
"다 네 덕분이다. 네가 귀인을 집안에 들여서 네 아버지가 무척 밝아지셨어. 방금 경공 펼치는 거 봤지? 비가 많이 오는 날이면 팔이 아파서 얼굴에 주름이 펴질 새도 없었거늘. 지금은 경공까지 펼칠 정도로 몸이 좋아졌다."
"다른 좋아진 거 없어요? 뭐 금슬이라든가."
초설의 말에 소소군이 눈을 흘기며 바늘로 찌르는 시늉을 했다. 초설은 깔깔 웃으며 소소군의 바늘을 피해 간지럼을 태우려 했다. 소소군은 옆구리를 살짝 찔러도 자지러질 정도로 간지럼을 잘 탄다.
"장인 장모 두 분께 사위가 문안 올립니다."
"네 낭군이 데리러 왔구나. 마무리는 내일 하자."
수련을 마치고 별채로 돌아간 유신은 초설이 보이지 않자 우산을 들고 찾으러 나왔다. 빈손으로 오기 무엇해서 새벽에 뒷산에서 사냥한 토끼 한 마리를 들고 왔다.
"장인어른 안 계셔요? 수련 끝나고 가장 먼저 떠나셨는데."
초설은 손으로 입을 가리고 웃음소리를 막았다. 소소군은 살짝 달아오른 얼굴로 대답했다.
"일이 있어 잠깐 나갔어요. 들어와서 차라도 한잔하고 가요."
"아닙니다. 옷이 흠뻑 젖었습니다. 차는 다음에 얻어 마시겠습니다."
유신과 초설을 보낸 소소군은 부채를 꺼내 얼굴을 식혔다. 여름이라 그런지 소나기가 내리는데도 날씨가 좀 덥다. 소나기 하나 시원하게 내리지 못한다고 애꿎은 하늘만 원망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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초여름에 소나기가 연신 쏟아져 농사를 망치는 게 아닌가 걱정했는데 정작 여기저기 모두 풍년이었다. 소작농들은 겨울을 날 식량이 넉넉해서 웃음꽃을 피웠지만, 지주들은 쌀값이 떨어져서 울상을 지었다.
"부군, 청죽단풍검은 검의만 있고 초식이 없습니다. 초식은 직접 만드셔야 해요."
"아니오. 청죽단풍검은 초식이 없는 게 아니라 전체가 하나의 초식을 서술하고 있소. 앞뒤가 안 맞고 상관없는 듯 보이지만, 나는 하나로 융회관통한 이어짐을 느낄 수 있소."
제대로 된 가르침을 받지 못해 깊이가 부족하지만, 타고난 오성이 뛰어나 사태를 파악하고 핵심을 찾는 데 능하다. 만약 여러 가지 검의를 서술했다면 각자 핵심이 따로 있어야 하는데 유신은 비급의 핵심을 찾지 못했다. 그래서 혹시 하나의 초식이 아니냐는 가설을 세웠고 거듭된 검증을 통해 가설이 정확하다는 확신이 들었다.
"서문가의 검법은 잘 배우고 있나요?"
"아직 초식에는 입문하지 못했소. 자질이 부족해 기초 수련만 반복하고 있소."
비록 천검산장에 얹혀서 살지만 서문초설은 출가외인으로 서문가가 아닌 용유신의 사람이다. 초설이라고 친근하게 부르던 숙부 숙모들도 용 부인이라고 호칭을 바꿨다. 그래서 초설은 서문가라고 남 부르듯 불렀다.
겸손한 대답과는 반대로 비록 서문가의 검술 초식은 아직 배우지 못했지만, 기초 수련만으로도 유신은 많은 발전을 보였다. 강호에서 여러 무공을 경험한 후 기초 수련을 하니 왜 이 수련이 필요한지 더 절실히 느낄 수 있다.
남다른 집중력으로 기초 수련을 열심히 하니 생각 없이 시키는 대로 하는 수련보다 효과가 훨씬 좋았다. 배우는 사람이 잘 따라오니 가르치는 사람도 흥이 나서 자신의 경험을 아낌없이 전수한다. 이런 선순환을 통해 유신은 서문가 노강호들의 알찬 경험을 쏙쏙 빼먹고 있다.
"전에 모친께서 부군이 일류의 경지에 들었다고 말하는 걸 얼핏 들었어요."
"이젠 내기의 수발을 억제할 수 있소. 이류일 때는 내가 원치 않아도 내공이 움직일 때가 있고 내가 원해도 내공이 움직이지 않을 때가 있소. 이젠 내 뜻에 반하는 일이 없소."
삼류는 내공을 사용하지 못하는 무인을 칭한다. 이류는 자의든 아니든 내공이 움직이는 경지다. 일류는 내공의 움직임을 제어할 수 있는 경지다. 이류 때부터 내공을 나름 잘 움직인 유신은 일류에 갓 이른 지금 벌써 능숙한 일류 고수처럼 내공을 움직일 수 있다.
문제라면 경험과 수련이 부족해서 훨씬 자유로워진 내공의 수발을 초식과 결합하지 못한다는 것이다. 다행인 것은 아는 초식이 적어서 초식 수련을 처음부터 할 필요가 없다. 초현은 기초 검술에 내공을 싣는 수련을 열심히 하고 있는데, 기존의 습관이 남아 있어 무척 애먹고 있다. 유신은 그런 걱정이 없어 곧 검술로 초현을 추월할 것으로 보인다.
"일류의 경지가 참 궁금하네요. 저도 요즘 내공을 수련하고 있지만 잘하고 있는지 전혀 모르겠어요."
유신은 손으로 탁자를 탁 내리쳤다. 그러자 탁자 위에 놓여있던 바늘이 섰다가 다시 넘어졌다. 그 신기한 광경에 초설이 손뼉을 치며 아이처럼 기뻐했다.
"어떻게 하신 거예요? 저에게도 가르쳐 주세요."
"사실 나도 잘 모르오. 저 바늘에 집중하며 내공을 움직여서 탁자를 치면 내공이 바늘에 전달되어 잠깐 일어서는 것이오. 장인어른은 대나무 젓가락도 세울 수 있소. 난 아직 경지가 부족해 작은 쇠붙이밖에 안 되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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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문가는 가족회의를 열었다. 유신은 공식적으로 외부인이라 회의에 참석하지 못했고 초현은 아직 장가를 가지 않아서 회의에 참여하지 못했다. 서문청산이 회의에 참석하기 때문에 아직 한 가족인 초현은 발언권이 없다.
"강호에 몇 가지 큰일이 있다. 중요한 일이니 다들 알고는 있어라."
서문가는 대부분 자기 수련에만 집중하는 외골수가 많다. 그래서 가끔 이렇게 회의를 열고 중대한 사안들을 전달해야 한다.
"마교가 사대 호법 중 한 명인 홍면주귀 홍두명을 교주로 내세우고 다시 수하들을 끌어모으고 있다. 우리 서문가는 마교와 은원이 없지만, 소림이 무림맹주가 된 것과 마찬가지로 강호의 큰일이니 그 동향을 주시해야 한다."
마교에 대해서는 다들 별생각이 없는지 그저 고개를 끄덕이고 지나갔다.
"흑면야차와 백면귀산이 낙양 무림맹에 잠입하다 들켜서 큰 싸움이 났다. 그 일이 있고 두 달이 지나서 마교가 다시 뭉치기 시작했다. 이 사이 뭔가 연관이 있을 것 같은데 정보가 너무 부족하다."
이 일에는 다들 흥미를 느꼈지만, 역시 발언하는 사람은 없다. 대부분 흑면야차나 백면귀산과의 개인 대결에 흥미를 느꼈지 이 두 사람이 뭘 하는지에는 관심이 없었다.
"우리 서문가는 쾌검의 완성이 최우선 과제다. 그래서 이런 일들은 관심을 기울일 뿐 개입할 생각이 전혀 없다. 그런데 세 번째 문제는 우리 서문가도 간과할 수 없구나. 등봉현에서 시비가 붙은 적이 있던 무림맹 소속의 도화궁이 멸문당했다. 흉수는 불을 붙여 모든 흔적을 깡그리 태워버렸다고 한다."
서문청월이 으흠 목을 가다듬은 후 입을 열었다.
"가주께 말씀드립니다. 그날 그저 말로 잠깐 투덕거렸고 시비라고 할 것도 없습니다."
서문가의 기준으로는 그저 상대를 향해 침이나 뱉은 셈이다. 검을 꺼내지 않았고 피를 보지 않았으니 시비라고 할 것도 없다.
"그날 누군가가 도화궁을 멸문시킨다고 말을 꺼냈다고 하던데?"
"용 서방이 그랬습니다. 도화궁이라는 이름을 강호에서 지우겠다고. 하지만 용 서방이 우리랑 떨어진 적이 없잖습니까. 분신술을 사용할 수 있다면 몰라도 말입니다."
가주는 마뜩잖은 표정으로 청월을 노려보았다. 다음 대 가주로 점찍어 두었는데 저렇게 덜떨어진 말을 하다니 내심 실망했다.
"물론, 강호 사람들은 그렇게 생각하지 않겠죠. 그러나 우리 서문가가 언제부터 강호의 평판과 눈길을 따졌다고 그럽니까?"
"나도 이걸 받기 전까지는 너와 똑같이 생각했다."
아무런 무늬나 장식도 없는 평범한 청첩장이다. 펼쳐보니 윗면에 피다 만 꽃 한 송이가 있었다. 어디에 있는지 아는 사람이 없지만 강호의 누구나 다 안다는 담화궁의 표식이다.
"담화궁이 왜 이 일에 끼어든다고 합니까?"
"담화궁은 단일 세력이 아니라 무척 많은 세력의 연합체라고 다들 판단한다. 아무래도 도화궁이 담화궁의 일원이었던 모양이다."
"도화궁의 멸문에 서문가의 혐의가 무척 크니 시월 중순에 방문하겠다? 칼을 준비할지 차를 준비할지는 서문가가 정하시오? 이것들이 감히."
"가주, 올해 무당과의 친선 비무는 천검산장에서 하죠. 계속 찾아가서 폐만 끼치는 것도 예의가 아닌 것 같습니다."
서문청산의 말에 가주는 흡족한 표정을 지었다.
"청산이 네가 드디어 정신을 차렸구나. 십 년의 방황이 네게 나쁜 일만은 아닌 것 같다."
"무당의 위세를 빌어 담화궁을 물리치자는 말씀입니까?"
"아니다. 무당이 있는 자리에서 시시비비를 명확히 가리면 이후 담화궁이 함부로 나오지 못한다. 비록 담화궁의 실체는 모르지만 거기에 속해있을 것으로 짐작되는 세력들은 꽤 많지. 함부로 나온다면 그런 세력들과 전쟁하면 된다."
담화궁이라고 이슬만 먹고 사는 게 아닐 테니 강호에서 활동하는 손발이 필요하다. 손발을 다 자르면 더는 몸통을 숨기고 있을 수 없다. 은밀한 정체와 집요한 보복이 두려운 것이지 담화궁의 무력이 두려운 것은 아니다.
"무당과의 친선 대결에 용 서방도 내세울까요?"
"그건 안 된다. 가문의 검법을 가르쳐주는 것까지다. 대신 검법에 대해서는 숨김이 없이 제대로 가르쳐라."
추석이 지나고 가을이 되며 날씨가 점점 청명해졌다. 말들이 살쪘는지는 확인할 방법이 없지만, 하늘은 점점 높아졌다. 그리고 기초 수련을 통해 점점 완숙해지는 검술과 마찬가지로, 잠꾸러기 유신의 내공도 점점 깊어졌다.
- 작가의말
침 조금 뱉었다고 칼 들고 찾아오다니, 담화궁 참 실망입니다.
앞에 살짝 언급한 적이 있는데 담화일현이라고 잠깐 피고 지는 꽃이 담화입니다. 꽃이 피고 지는데 대충 4시간 정도 걸린다고 합니다. 4시간에 꽃이 피고 지는 과정을 전부 볼 수 있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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