첫눈이 내리다
깊은 산속은 아니다. 그래도 산이라서 그런지 해가 더 빨리 떨어지는 느낌이다. 당우형은 품속에서 매화표 몇 개를 꺼냈다.
"네가 처음 절에 왔을 때 나는 네 몸에 무공비급이 없는 걸 확인했다. 그리고 곧바로 죽림에 갔지. 그러나 아무리 뒤져도 비급을 찾아내지 못했다. 그래서 우선 너를 감시하기로 했다."
누진은 청죽방이 유신을 찾는다는 소문에 직접 찾아가 전당호에게 경고했다. 전당호도 용주웅의 무공비급을 탐내는 것으로 생각했다. 비무를 명목으로 유신의 무공을 훔치려 했지만 유신은 초식을 일절 사용하지 않았다.
"그래서 나는 제자들에게 네 행적을 주시하여 보고하라고 했다. 네가 갔던 곳과 네가 머물렀던 곳을 모두 뒤져봤지. 그러나 아무리 뒤져도 무공비급을 찾을 수 없었다."
유신에게 글을 가르치려는 세명을 누진이 제지했다. 글을 익히느라 머릿속이 복잡해지면 무공을 익히는 데 지장을 준다는 구실이다. 무공비급이 그림만 있는 게 아니라면 언제든 도움을 청하리라 믿었다.
"네가 세명에게 묻는 글자는 모두 너무 간단한 글자였다. 어린 네가 심기가 그렇게 깊을 줄은 노납(老衲 - 중 혹은 도사가 자신을 겸손하게 칭하는 말)이 상상도 못 했다."
그렇게 시간이 허망하게 흐르자 누진은 급해졌다. 혹시 용철이 무공비급을 대가로 유신을 살린 게 아닌지 의심하며 용철을 죽인 자를 찾기 시작했다. 그러나 용호산 근처에서 활동하던 음혈도라 불리는 청부사가 흉수라는 것만 알아내고 다른 정보는 전혀 알아내지 못했다.
"나는 다시 용철과 네가 살던 집을 수색했다. 막은 아궁이까지 헐었지만 아무것도 발견하지 못했다. 그래서 나는 너를 강호로 내보내기로 했다."
누진은 비무에서 일부러 져주었다. 이류의 경지는 내공의 수발이 자유롭지 못하다. 유신은 자신이 잘 숨겼다고 생각했지만, 사실 누진은 유신이 내공을 이용할 수 있음을 이미 알고 있었다. 그래서 적절하게 유신에게 져주었다.
"나는 수염도 붙이고 죽립도 쓰고 네 뒤를 쫓았다. 그런데 너는 멍청하게도 마교 고수와 남궁가의 분쟁에 끼어들었다. 다행히 너는 빠져나왔고 나는 계속 네 뒤를 쫓았지."
누진의 오룡조는 일류 수준의 무공이다. 그러나 누진의 내공은 이류에 머물러 있다. 자질이 부족해서 일류에 이를 수 있는 무공을 익혔지만 이류에 머무른 게 누진의 가슴속에 박힌 응어리다.
일류 수준의 무공이라 함은 넘치는 게 없지만 모자람도 없는 무공이다. 오룡조에 포함된 보법 혹은 신법은 일류 수준이다. 내공이 부족하지만 이미 원숙한 경지에 이른 누진은 유신에게 들키지 않고 뒤를 따랐다.
"너는 역시 심계가 깊은 아이였다. 나는 네가 청죽방을 찾으리라 생각했는데 너는 배를 타더구나. 그리고 방향도 용호산과 반대로 잡았다. 추적자가 있다면 열에 아홉은 거기에서 떨어져 나갔을 것이다."
누진의 집착은 열에 아홉이 아닌 열에 하나가 되게 만들었다. 배를 타고 유신이 탄 배를 따랐다. 그러다 배가 수로가 복잡하게 엉킨 곳에 들어갔다.
"거기에 담화궁의 표식이 보이더구나. 강호인이 담화궁의 표식이 있는 곳에 마음대로 발을 들이면 목숨을 잃을 수 있다. 나는 배를 돌려 바로 용호산으로 갔다."
누진 덕분에 유신은 자신을 죽이려 했던 자의 정체를 알 수 있었다. 담화궁은 유신이 많이 들어보지 못했다. 사람들의 입에 자주 오르는 사천당문과는 달리 담화궁은 그 정체가 숨겨져 있어 사람들은 입에 담기 꺼렸다.
배를 타고 용호산에 가서 나름 음혈도를 수소문했지만, 누진은 아무런 성과도 얻지 못했다. 그러다 우연히 객잔에서 다시 유신을 보게 되었다. 누진은 죽립을 꾹 눌러쓰고 유신만 주시했다.
"그때 누군가 너를 개방이라고 하더구나. 추구질행의 신법을 배웠다고. 설마 네가 내 감시를 벗어나서 개방과 접촉했을 줄은 몰랐다. 그래서 나는 더욱 조심하게 되었다."
유신이 금강추를 얻어서 대장간에 가서 검으로 바꿀 때, 누진은 멀지 않은 곳에서 유신을 지켜봤다. 유신이 추적자에 대한 일말의 경계심도 없음을 눈치채고 대담하게 가까이 접근한 것이다.
"그런데 흑면야차와 불천검이 갑자기 나타나더니 불천검이 너를 데려갔다. 내 경신법으로는 따라갈 수 없는 빠르기였다."
속도의 차이도 있었지만, 누진은 뒤를 따르다가 해를 당할까 봐 겁이 나서 따라가지 못했다. 그렇게 며칠 기다리다 유신이 나타나지 않자 누진은 유신이 둘 중 하나에게 목숨을 잃었을 거로 생각하고 다시 오현사에 돌아갔다.
"내가 지금까지 본 너는 영악하고 심계가 깊은 아이였다. 그러나 타고난 영악함이 경험의 부족을 메꾸진 못한다. 내가 너라면 단칼에 내 목을 베었을 것이다. 진실이 뭐가 그리 궁금하더냐."
정문에서 한 명, 불상 뒤에서 한 명, 양쪽에 병풍처럼 세워놓은 죽막(竹幕) 뒤에서 각각 한 명씩 뛰쳐나왔다. 주저앉아 있던 누진이 이어타정(鯉魚打挺 - 잉어가 바늘 털듯)으로 몸을 허공에 띄운 후 원양각으로 유신의 가슴을 걷어찼다.
유신은 뒤로 물러서지 않고 오히려 앞으로 나갔다. 남무천의 보형(步形 - 걸음걸이)을 흉내 내 팔자와 역팔자를 반복하며 누진의 발차기를 손쉽게 벗겨냈다. 어느새 뽑아 든 검으로 내려치기를 펼쳤다.
누진은 황급히 두 손에 내공을 모아 유신의 검을 막았다. 이류는 내공을 마음대로 사용하지 못한다. 그러나 오룡조 덕분에 누진은 두 손에만 내공을 마음대로 모을 수 있다. 그러나 유신의 검 심룡척은 창졸간에 모은 누진의 내공으로 막아낼 수 없다.
거기에 팔을 뼈가 보일 정도로 베인 탓에 누진의 두 팔은 힘이 없었다. 유신의 심룡척은 작은 저항을 받아 힘이 약해졌지만 누진의 목을 반 이상 베었다.
"사부!"
가장 먼 정문에서 달려오던 자가 소리 질렀다. 목소리가 귀에 익다. 정면에서 오는 자도 낯익다. 팔 년 동안 자신을 속여왔다는 생각에 유신은 화가 났다.
누진의 목숨이 위험하여지자 불상 뒤에서 뛰쳐나온 자가 발걸음을 재촉했다. 그리고 저승사자도 재촉했다. 유신을 공격할 수 있는 거리까지 왔을 때 유신은 이미 누진의 목에 박힌 검을 가볍게 뽑은 후 엄청 빠른 찌르기로 다가오는 자의 목을 노렸다. 아직 이류에도 미치지 않은 듯 감히 손으로 막을 엄두도 못 내고 피하려던 자는, 목에 구멍 하나 얻고 저승길에 올랐다.
양쪽 죽막 뒤에서 나온 자들은 거의 동시에 도착했다. 유신의 두 발이 앞뒤로 현란하게 움직이더니 어느새 몸을 돌려 불상을 등지고 정문을 향했다. 전진과 후퇴를 거듭하며 제자리에서 빠르게 몸을 돌리는 데 성공했다. 남무천에게서 훔쳐 배운 보법이다.
왼쪽으로 접근하는 자는 손에 수투(手套 - 장갑)를 꼈다. 유신은 남무천에게 한 번도 성공하지 못한 찌르기를 펼쳤다. 목을 향해 정직하게 찔러오는 유신의 검에 수투를 낀 자는 속도를 줄이며 두 손으로 목을 방어했다.
빠른 찌르기였지만 전혀 내공을 사용하지 않은 찌르기다. 갓 잡아 올린 생선처럼 유신의 팔이 펄떡였다. 내공을 이용해 찌르기를 멈추었다. 내공이 없으면 상상하기조차 힘들지만, 내공은 불가능한 동작을 가능하게 만들어줬다.
찌르기를 억지로 멈춘 유신은 발목부터 회전하기 시작했다. 내공까지 머금은 유신의 몸뚱이는 일반인이 상상하기 힘든 속도로 움직였다. 유신의 빛살 같은 베기는 엉겁결에 올린 오른쪽 중의 팔뚝과 목을 한꺼번에 베어버렸다.
자신의 목을 방어하던 자는 사형제의 목이 바닥을 구르자 몸이 굳었다. 유신은 아직 몸에 내공이 남아있는 틈을 타서 다시 찌르기를 펼쳤다. 방금보다 배는 빠르고 다섯 배는 강한 찌르기가 수투를 낀 자의 목을 꿰뚫었다.
정문에서 달려오던 자는 지붕에서 당우형이 던진 매화표에 맞아 즉사했다. 독을 바르지 않았지만 정수리가 깨지면 독의 유무와 상관없이 즉사한다. 훌쩍 뛰어내린 당우형은 유신을 칭찬했다.
"끝까지 경각심을 늦추지 않았구나. 강호인이 다 되었다."
"이 초식의 이름은 수도동귀(殊途動歸)라고 하겠습니다."
길은 다르지만 목적지는 같다는 뜻이다. 나눠서 왔지만 저승길에 나란히 보낸 이 초식에 어울리면서도 안 어울린다. 검에 묻은 혈흔을 닦고 검집에 넣은 후 밖으로 나와보니 세명 스님과 동자승이 울먹이고 있었다.
"짐을 싸 들고 따라오세요."
세명 스님은 옷가지를 조금 챙겼고 동자승은 불경 몇 권을 품에 안았다. 유신은 둘을 데리고 청죽방의 염우를 찾아갔다. 세명 스님은 글을 잘 쓰고 문장도 잘 짓는다. 동자승은 무공에 정식으로 입문하지 않았지만 어려서부터 몸을 단련하여 또래보다 무척 튼튼하다.
염우에게 두 사람을 잘 돌보라고 으름장을 놓은 후 당우형과 유신은 술 몇 단지 사 들고 서호로 갔다. 이런저런 이야기를 하며 술을 마시다 흥이 식자 객점을 찾아 잠을 잤다. 잠을 푹 자고 일어난 둘은 그제야 지부대인의 장원에서 했던 약속이 생각났다.
"형님, 사흘 후라고 했습니까 사흘 째라고 했습니까?"
"나도 제대로 기억나지 않는다. 어차피 급한 일도 없으니 호심정으로 가보자."
동전 다섯 닢을 주고 호심정으로 가는 배를 구했다. 배에 앉아 가는 데 물 위에 삐죽삐죽 고개를 내민 돌로 된 조각물들이 보였다. 당우형이 의문을 표하자 뱃사공이 대답했다.
"소동파가 만든 겁니다. 호수 가장 깊은 곳이죠. 저걸 기준으로 수위를 가늠했다 합니다."
"시인 나부랭이가 별 걸 다 했네."
소동파가 유명한 관리 출신임을 모르는 당우형은 폭언을 뱉었다. 유신도 소동파가 항주에서 관리를 한 일을 모르고 있고 뱃사공은 손님이라 대꾸하지 않았다.
당나라 시인 백거이가 항주자사로 있을 때 제방을 지어 서호의 수량을 더 많게 만들었고 그 물로 관개하여 농지를 늘였다. 그리고 송나라 때 소동파가 이십만 명의 인부를 동원해 호수에 쌓인 퇴적물을 파내고 제방을 증축하여 지금의 서호를 만들었다. 물론 당우형 눈에는 둘 다 시인 나부랭이지만 말이다.
서호의 중심에 작은 섬이 있고 그 섬에 서로 이어진 정자가 있었다. 호심정에 도착한 둘은 주위를 살폈다. 아직 오전이어서 그런지 사람이 둘만 있었다.
남자는 눈처럼 흰옷을 입었는데 가을 옷차림이다. 여자는 솜옷을 껴입은 것으로 부족한지 피풍의로 몸을 감쌌다. 당우형은 선뜻 다가가서 말을 걸지 못했다. 그때 남자가 경공으로 훌쩍 뛰어와서 포권했다.
"혹시 사천당문의 당우형 대협입니까?"
"불초 당우형입니다. 여긴 내 의제 용유신입니다."
"서문세가의 서문초현(西門初炫)입니다. 당 대협을 찾아 강호에 나왔습니다."
서문초현은 용유신 또래로 보였다. 일류에 갓 이르렀는지 서릿발 같은 기세를 숨기지 못했다. 당우형은 과연 서문세가라 속으로 감탄했다.
"서문세가에서 찾는다니 겁부터 나는군요. 혹시 제가 서문세가에 실수한 게 있습니까?"
서문세가도 원한을 잊지 않기로 유명한 가문이다. 다만 본인 복수는 본인이 해야 한다는 원칙이 있어 가문이 개인의 은원에 개입하지 않는다. 그래서 당문에 비해 흉명이 부족하다.
"제 여동생이 괴질을 앓고 있습니다. 당 대협의 침술이 중원에서 으뜸이라 하여 애타게 찾았습니다."
경공으로 성급하게 날아온 서문초현과 다르게 서문초설은 무공을 모르는지 천천히 걸어왔다. 서호의 수려한 풍경이 순식간에 암담해졌다. 천지 사이에 빛나는 건 오직 하나뿐이다.
"소녀 서문초설(西門初雪)이라 합니다. 당 대협과 용 대협을 뵙습니다."
꾀꼬리가 들었으면 평생 지저귀지 않았을 것이다. 자기 목소리가 듣기 싫어 날개로 귀를 막았을 수도 있다. 먹으로 그린듯한 눈썹 밑에 서호를 담은 눈이 있다. 코는 오뚝했고 입술은 앵두 같았다.
그때 하늘이 흰 가루가 내렸다. 유신은 처음 첫눈(初雪 - 초설)을 보았다.
- 작가의말
로맨스 좋아하시는 분들은 유신과 서문초현, 많이 응원해 주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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