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림인과 맹수
당우형이 물꼬를 틀자, 자신이 있는 자들이 앞다투어 나서서 재주를 뽐냈다. 천근이 넘는 가산(假山 - 바위를 다듬어 산을 형상화한 조형물)을 들어 올리는 자도 있고, 술을 넘칠 정도로 부은 술잔을 머리와 어깨에 지고 빠르게 달리는 자도 있었다.
"왕야, 아무래도 무인을 상대하는 일은 군대보다 무인이 더 잘하지 않겠습니까. 무림맹을 움직여 담화궁을 벌하는 게 훨씬 나은 것 같습니다."
"사례태감, 어떤 일을 할 때 그 결과도 중요하지만, 그 결과로 이어지는 과정도 무척 중요하다오. 만약 무림맹을 움직여 담화궁을 벌한다면, 황제 폐하의 위엄을 어찌 알리겠소. 폐하가 역적을 멸한 게 아니라 그저 강호 무리의 다툼으로 알려질 뿐이오."
칠 왕야의 말도 도리가 없는 게 아니어서 사례태감은 침묵했다.
"내가 강호의 야인들과 가깝게 지내는 건 사실이오. 하나하나 따져보면 강호인들은 순수한 자들이오. 그들이 무공에 대한 열정은 마치 학사들이 성현의 말씀에 관한 탐구와 같아 그저 칼부림하는 자들이라고 치부하기 힘드오. 그러나 하나하나 흩어놓고 보면 순수한 개인이지만, 이들이 무리를 이루면 달라지오. 얽매이는 걸 싫어하는 자들을 한데 묶어두려면 뭔가 그럴듯한 명분이 필요하고, 그 명분은 시간이 갈수록 점점 변질해가기 마련이오."
칠 왕야는 술을 몇 잔 연거푸 마셨다.
"소림은 불가요. 이들은 부처에 대한 믿음으로 굳게 뭉쳐있고, 무공은 심신 수련의 수단이라고 하오. 그러나, 사례태감이 알고 있는지 모르겠소. 송나라 이전에 소위 고승이라 불리는 자들이 국정에 간섭하여 백성을 도탄에 몰아간 적이 한두 번이 아니오. 그리고 무당과 화산 등도 보시오. 도가에 속하는 자들이 태자의 스승이 되어 무위자연을 떠벌이고 있소. 황제는 천하를 다스리라 하늘이 내린 천자요. 그런데 천자에게 아무것도 하지 말고 세상이 순리대로 흐르게 하라니, 정말 웃기는 소리가 아니오? 순리에 따르다가 다시 북원의 말발굽에 중원의 땅이 짓밟히게 될 것이오."
목소리는 줄어들었지만, 칠 왕야의 말에는 더 많은 힘이 실렸다.
"백련교는 자기들의 신이 유일하다 하오. 그리고 자기들의 교주가 신의 대리자라고 하지. 그래서 놈들은 천자인 황제를 교주 밑으로 두려고 했소. 결국, 천자를 밑에 두지 못한 백련교가 어찌 되었소? 명분이 사라지니 그저 흩어진 것이 아니겠소. 무림맹이라는 작자들도 마찬가지요. 백련교를 상대하는 걸 명분으로 모였지만, 약해진 일월교를 공격할 생각도 하지 않소. 뭉친 힘으로부터 온 위세와 권력을 맛보고, 존속할 명분을 계속 살려두려는 것이 아니겠소?"
"담화궁이라는 작자들도 마찬가지요. 애달픈 삶을 사는 여인들을 보살피는 걸 명분이라고 하는데, 정작 본인들은 비단옷에 좋은 음식을 먹으면서 헐벗고 굶주린 자들은 쳐다보지도 않소. 거기에 더 큰 부귀영화를 탐내, 황실의 전복을 노리는 백련교의 무리와 야합하여 대낮에 역모의 구호를 외치고 있소."
칠 왕야가 힘을 주자 손에 든 얇은 술잔이 부서졌다. 무공을 익혀서가 아니고, 단지 손아귀 힘이 강한 것뿐이다.
"강호인들은 기본적으로 일반인보다 힘 있는 자들이오. 그런 자들이 무리를 이루는 것만으로도 경계해야 할 일이오. 여기 당문과 서문가를 보면, 다른 세가들과는 달리 제자를 받지 않고 혈족끼리만 모여서 살고 있소. 더 큰 힘을 가질 수 있는데, 그것을 마다하고 있는 것이오. 매일 폐하 만만세를 부른다고 충신이 아니오. 힘을 가진 자가 본분을 지키는 자체가 폐하에 대한 최고의 충성 아니겠소."
칠 왕야는 무림맹을 해체하고 담화궁과 백련교를 멸해야 하며, 세가가 제자를 받지 못하게 통제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소림이나 무당과 같은 문파들도 제자의 수를 제한해야 하고, 유명무실하다시피 된 병장기 소지 금지령을 살려야 한다고 침을 튀겼다.
"모든 세가는 여기 당문과 서문가를 본보기로 삼아야 하고, 모든 무림 문파는 화산을 기준으로 문파 인원수를 제한해야 하오."
화산은 위치와 주변 환경 때문에 소림이나 무당처럼 많은 제자를 보유하지 못했다. 오르기 힘든 화산보다 접근이 쉬운 종남산에 종남파도 있다. 절세고수가 목표가 아니라면, 검 위주인 화산보다 권각술 위주인 종남파가 훨씬 나은 선택이다. 종남파의 무공이 화산파보다 크게 부족한 것도 아니어서, 화산은 명성보다 규모가 꽤 작은 편이다.
"왕야의 고견은 돌아가는 대로 폐하께 꼭 전해드리겠습니다."
인상은 무척 냉엄한데, 목소리는 부드럽고 간드러진다. 하긴, 황제를 가까이에서 모시는 자라면 목소리가 듣기 좋아야 할 것이다. 만인지상에 무소불위인 황제가 귀에 거슬리는 소리를 매일 듣고 싶어 하지는 않을 테니 말이다.
"이 모든 게 다 폐하를 위한 충심에서 우러러나온 것이오."
칠 왕야는 무림인을 좋아하지만, 무리를 지은 무림인은 싫어하는 듯하다. 유신은 아까 당우형이 대신 나서서 장난 같은 재주를 부린 게 참 현명한 처사라고 느꼈다. 무림인을 잘 아는 칠 왕야는 몰라도, 사례태감은 당우형의 재주를 보고 별다른 경각심을 가진 것 같지 않았다.
### 快劍神龍 龍遊迅 ###
밤이 깊어서야 연회가 끝났다. 어릿광대들이 재주도 부리고, 이야기꾼이 옛날 장수들의 이야기를 풀기도 하고, 저녁에는 여인들이 나와 반주에 춤을 추기도 했다. 작별을 고하고 떠나려던 셋은, 칠 왕야의 만류를 이기지 못하고 하룻밤만 묵어가기로 했다.
밤이 깊었지만, 잠이 오지 않아 셋은 모여서 술잔을 기울였다. 왕부의 술이라 그런지, 향이 깊지 않은 술이 하나도 없다. 휘영청 밝은 달을 머리에 이고 정자에서 술을 마시니, 흥이 저절로 올랐다.
"형님, 왜 상아로 결정한 겁니까?"
사실 세 가지 선물을 준비했다. 당우형이 상아를 품에 넣었고 초현이 등에 금루의를 짊어졌다. 그리고 유신은 칠 왕야가 비수를 좋아한다는 소문을 듣고 당문의 야장이 심혈을 기울인 비수를 준비했다. 손잡이에 보석과 마노를 박은 비수는, 실용성과 관상용도 겸비한 데다 적당히 귀하기까지 해서 초면에 가장 적합한 선물이다.
"우선 손님들은 구색을 갖추기 위한 자들이 대부분이었다. 이 연회가 우리를 위해 연 것은 아니겠지만, 우리가 도착할 시간에 맞춘 건 틀림없다. 그렇다면 비수를 선물하는 건 우리가 실례하는 것이라고 할 수 있다."
"칠 왕야는 황제의 신임을 받는 황족으로, 원래는 금루의를 선물하며 호감을 얻어 비호를 받으려 했다. 마교와 담화궁이 제대로 일을 꾸미는 것 같고, 거기에 북원까지 가담하면 천하가 다시 난세가 될 테니, 적당히 의지할 수 있는 관계로 만드는 것도 나쁘지 않은 선택이다. 그러나 상석에 환관과 장수들이 모인 걸 보고, 칠 왕야의 야심이 작지 않음을 유추하고 금루의를 꺼내는 건 보류했다. 당문도 그렇고 서문가도 그렇고, 청운의 꿈을 품은 게 아니라서 칠 왕야의 줄을 잡고 모험할 필요는 없다는 생각이다."
"크게 배워갑니다."
당우형은 깊은 밤에도 호롱불로 밝은 왕부를 보며 술잔을 매만졌다.
"아무래도 무가나 무림 방파들이 더 힘들어질 것 같구나."
"칠 왕야가 그렇게 힘이 있습니까?"
"위촉오 시절에 보면, 장수가 갑옷을 차려입고 말을 타고 적진을 자기 집처럼 드나들었다. 좀 더 가까이 보면, 당이 멸망할 때 최고의 무장으로 불린 이존효는 십여 기의 부하를 이끌고 팔만 명의 대군을 향해 진격했다. 수하 하나 잃지 않고 식량을 다 태우고 안전하게 철거했지."
"그거랑 지금 상황이 무슨 관련이 있습니까?"
"예전에는 좋은 무기도 귀하고 갑옷도 귀하다. 그런 무기와 갑옷을 상대에게 빼앗기지 않으려면 당연히 강한 자에게 무기와 갑옷을 주어야 한다. 그래서 예전에는 강한 자들이 무척 대접을 받았다."
"그러나 송나라 때부터 심법이 널리 퍼지면서 무림인의 강함은 인간이 상상하던 그 한계를 벗어나기 시작했다. 강한 자가 한둘이면 서로 영입하려 경쟁하겠지만, 강한 자가 즐비하니 위정자(爲政者)들은 오히려 걱정한 것이다. 세상을 다스리는 건 힘만으로 되는 일이 아니지만, 강을 뒤집고 산을 흔드는 힘이 있다면 다른 얘기다."
유신과 초현이 입을 헤 벌린 모습을 보고 당우형은 겸연쩍은 표정을 지었다.
"가문 어른들한테 들은 말이다."
"먼 옛날에 사람들은 힘을 합쳐 맹수를 사냥했다. 용맹을 자랑하려는 게 아니고, 맹수가 위협되기 때문이다. 맹수는 사람을 해치기도 하고, 사람과 사냥감을 다투기도 한다. 맹수를 죽이면 생명을 위협하는 적을 제거하는 동시에, 사냥감을 다투는 경쟁 적수를 제거하는 것이 된다."
"홍이포가 나타나고 화총(火銃 - 화약총)의 위력도 점점 강해지고 있다. 이제 위정자들에게는 무림인이 맹수와 다름이 없다. 예전에는 쉽게 건드리지 못했지만, 일반인도 무림인을 상대할 수 있는 수단이 생겼다. 무림인은 이제 인간의 모습을 한 맹수로 취급되는 것이다. 생존하려면 알아서 이빨과 발톱을 뽑고 위정자의 비위를 맞춰야 한다."
"아까 칠 왕야는 당문과 서문가에 호의적인 것 같던데요."
"맹수도 두 가지 분류가 있다. 사람을 해치는 맹수와 사람을 피하는 맹수. 당문이나 서문가는 규모가 작아 역모에 연루될 가능성이 없다. 무림맹에 가입하지도 않았고 말이다. 모든 강호인을 다 없앨 수는 없으니, 일정한 기준을 만들어 공제(控制)하려는 것이다."
"다른 세가들도 바보는 아닐 텐데, 당문이 아는 이치를 왜 저들은 깨닫지 못할까요?"
"금루의로 맞바꾼 정보다. 성 한 채에 맞먹는 대단한 것이지. 눈치를 보니 칠 왕야도 황실의 생각을 모르고 있는 것 같다."
분위기가 무겁게 변했다. 침묵 속에서 술 몇 잔을 더 나눈 후 유신은 호운천의 이야기를 둘에게 들려주었다.
"호운천이 작별할 때 자신을 구해달라고 저한테 은밀히 요청했습니다. 이번 일이 간단하지만은 않은 것 같습니다."
"호운천이? 그자는 칠성문 문주의 친아들이 아닌가?"
"맞습니다. 아무래도 호운천이 뭔가 알아서는 안 될 일을 알고 있는 것 같습니다."
"청월 숙부를 찾아야 하는 우리는 꼭 알아야 할 테고?"
초현의 말에 유신은 고개를 끄덕였다.
"그리고 담화궁도 이 기회에 어떻게든 뿌리 뽑아야 합니다."
"바로 가서 담화궁을 들쑤시면 찾을 수 있지 않을까?"
"칠성문을 습격한 무리는 마교뿐이라고 합니다. 담화궁은 서호루와 지부대인의 습격에만 가담했습니다."
당우형이 술은 연신 입으로 쏟아 넣었다. 풀리지 않는 매듭이 있어 가슴이 답답했다.
"담화궁에 바보들만 있는 게 아닐 테고. 왜 버젓이 모습을 드러낸 후 역모로 몰릴 게 뻔한 짓을 저질렀을까? 버리는 말이라고 해도, 도무지 이해가 되지 않는구나. 마치 나라에서 군대를 움직여 찾아와주기를 바라는 것처럼 말이다."
"그러게 말입니다. 서호루야 모두 죽이려는 생각이었다고 쳐도, 지부대인을 납치하고 군영을 찾아가 협박한 건 백번 생각해도 이해할 수 없습니다."
그때 초현이 불쑥 떠오르는 생각을 입 밖에 냈다.
"그런데 호운천은 왜 정심활명단을 가지고 있었을까? 호운천이 살아남는 건 원래부터 계획된 게 아니었을까? 세가 연합에 끼워줄 생각도 없었던 칠성문이 모든 비용을 부담해서 항주에 회합을 연 것부터가 함정이지 않을까?"
짜릿한 뭔가가 등을 타고 흘렀다. 칠성문이 이 계획에서 중요한 역할을 담당하는 자들이고, 호운천은 서호루의 생존자로 미리 정해진 거였다면 이해가 된다. 아마 호운천은 버리는 말이고, 현재 알아야 할 것 이상의 것을 알고 있을 수 있다.
"내일 새벽이 밝는 대로 칠성문에 가서 호운천을 몰래 꺼냅시다. 진실을 알아내고 어떻게 할지 정하도록 하죠."
"그럼 이만 들어가서 잠이나 자자."
술기운을 날리고 바로 방에 들어가서 누운 유신은, 어릴 때 아비한테 했던 약속이 생각났다. 절세고수가 되어 비단옷을 입고 고기를 마음껏 먹게 해주겠다고 큰소리쳤는데, 누구 부럽지 않은 고수가 되어보니 세상은 그렇게 단순하지 않았다.
'그래도 할 줄 아는 게 무공밖에 없으니, 강해질 수 있을 만큼 강해지자.'
- 작가의말
제가 생각하는 강호는, 우리가 사는 세상에 무공을 얹은 것입니다. 최대한 그럴듯한 강호를 그려내는 게 이 글의 목표입니다.
비축분이 한 편도 남지 않았습니다. 동시에 연재하는 소설은 비축분 두 편이 있습니다. 비축분이 점점 소실되며 압박감이 심했는데, 어렵게 털어냈습니다. 글을 더 잘 쓰고 싶은 욕심을 누르고, 현재 수준에 맞춰 최선을 다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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