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습
설산의 시원한 바람과 적당히 따뜻한 햇볕에 날씨가 무척 좋았다. 봄의 따사로움과 가을의 시원함을 동시에 느낄 수 있는 쾌청한 날씨지만 은무성의 기분은 전혀 상쾌하지 않았다.
자루는 짧고 도끼날은 큼직한 괴이한 병기가 은무성의 어깨를 노렸다. 날이 날카롭지는 않지만 실린 힘이 강해서 스치기만 해도 살이 갈라질 것 같다. 물론 은무성은 호신강기를 쓸 수 있는 경지이기에 스치는 게 아니라 똑바로 맞아도 큰 염려가 없다.
하지만 상대가 하나뿐이 아니어서 맞아주면 본인만 손해다. 한 걸음 뒤로 물러선 은무성은 곧바로 또 뒤로 물러서야 했다. 환도(環刀)라고 불리는 둥그런 병장기가 은무성의 목을 바로 노렸다. 팔찌처럼 둥그런 환인데 바깥쪽에 날을 세운 기형병기로 사용하는 사람이 극히 드물다.
두 병장기를 피하니 몸통만 한 손바닥이 밀려왔다. 실제로 몸통만큼 큰 게 아니라 은무성의 상체 어디라도 노릴 수 있어서 그만큼 크게 느껴질 뿐이다. 은무성은 피하지 않고 무극권의 초식에 우양장의 발경법을 결합해서 상대의 손바닥에 주먹을 부딪쳐갔다.
내공의 차이가 심한 데다가 은무성의 초식이 더 정교하고 발경도 능숙하다. 휘청거리는 놈을 바로 처리하고 싶지만 곧바로 따라 들어오는 육릉매화추에 어쩔 수 없이 뒤로 후퇴했다. 휘두르는 힘에 병장기 무게까지 실려 쉽게 대처할 수 없다. 특히 대가리가 큰 병장기는 그 균형점을 가늠하기 힘들어 부딪치면 손해 보기 일수다.
육릉매화추에 이어 곧바로 자루가 짧고 날이 큰 아귀부(餓鬼斧)가 은무성의 가슴을 노렸다. 연환 공격으로 은무성에게 쉴 틈을 주지 않는 넷을 제외하고도 몇몇이 밖에서 호시탐탐 기회만 노리고 있다.
[접니다.]
전음의 여운이 사라지기도 전에 한기가 장내에 내려앉았다. 묘설부운의 신법으로 허공에서 떨어지며 유신이 검을 펼쳤다. 유신의 몸은 흩어지는 구름처럼 종잡을 수 없었고 검은 하늘에서 내리는 눈꽃처럼 제멋대로 휘날렸다. 갑자기 나타난 유신을 향해 무거운 병장기들을 휘둘렀지만 어느 하나 유신의 검과 조우하지 못했다.
아귀부를 든 자는 손목 힘으로 도끼날을 돌려 검과 부딪히려 했다. 그러나 검이라고 생각해서 도끼날을 가져다 댄 곳은 허공이었다. 검과의 충돌을 생각하고 아귀부에 내공을 실었는데 그만 헛심을 빼고 몸까지 휘청였다.
환도는 공격 범위가 비수와 비슷하다. 병장기는 길면 길수록 강하고, 짧으면 짧을수록 흉험하다는 말이 있다. 육중한 아귀부와는 달리 환도는 다양한 변화를 보이며 하늘에서 떨어져 내리는 검 끝을 끊임없이 공격했다. 그러나 눈꽃처럼 휘날리는 검 끝은 단 한 번도 환도와 만나지 않았다.
육릉매화추는 아귀부와 달리 균형이 잘 잡힌 무기다. 아귀부는 도끼날과 도끼 등의 무게가 다르기에 휘두르는 각도에 따라 힘을 달리 줘야 한다. 그러나 육륭매화추는 막대기 끝에 초롱불 크기의 쇳덩이가 달린 것으로 휘두르기 훨씬 편하다. 그래서 육릉매화추는 주인의 내력과 타고난 팔심을 믿고 허공을 마구 헤집었다.
허공에 물샐틈없는 천라지망을 펼쳤다 생각했지만, 육릉매화추 주인의 생각과 다르게 무척 성긴 그물이었다. 몸을 허공에 띄운 유신의 눈에 육릉매화추의 심장으로 향하는 경로가 최소 세 개는 보였다.
주사장(朱沙掌)은 대수인의 아류 무공이다. 대수인을 익히다가 실패한 자들이 포기하지 않고 연마하다가 얻어걸린 수많은 무공 중에서 그나마 쓸만한 무공이다. 주사장을 익히면 손이 단단해져서 웬만한 병장기를 두려워하지 않는다. 상대의 몸짓이 표홀한 것을 보고 검에 실린 힘이 부족하다고 판단한 무인은 주사장으로 상대의 검에 부딪혀갔다.
하늘하늘 춤추던 눈꽃들이 갑자기 서릿발 같은 기세를 품고 소나기처럼 땅으로 쏟아졌다. 은무성을 물러서게 했던 네 무인은 은접미천에 고주일척을 섞은 유신의 찌르기에 속수무책으로 당했다. 아귀부를 든 자는 목이 뚫렸고 육릉매화추를 사용한 자는 심장이 쪼개졌다. 환도를 쓰는 자는 목과 심장을 수비하다가 두 팔이 잘렸다. 주사장으로 유신의 심룡척에 부딪쳐오던 자는 손바닥에 큼직한 구멍 하나 생겼다.
[뭡니까?]
넷을 베고 찌른 후 유신은 허공에서 곤두박질을 쳐 은무성의 곁에 내려섰다. 점심 먹으려고 모옥으로 돌아왔다가 영문도 모르고 싸움에 개입한 유신은 은무성에게 질문했다.
[나도 몰라. 갑자기 덮쳐와서 계성이랑 당 대협은 먼저 피신시켰네. 쫓아간 자들도 있으니 자네가 빨리 찾아보게.]
[이자들은 은 대협을 상대하려는 자들이군요. 제가 처리할 테니 은 대협께서 먼저 출발하십시오.]
맨손의 은무성을 상대하려고 중병기와 빈손인 자들만 남았다. 아마 경공 수준이 상대적으로 낮은 자들일 것이다. 일대일이면 심후한 내공으로 은무성이 불리함을 극복했을 것이나 은무성의 실력이 범상치 않음을 알자마자 이들은 연수로 은무성을 몰아붙였다.
"어디서 온 잡놈들이냐?"
비록 기습이라지만 네 명을 동시에 상대하여 둘이나 죽인 유신에게 기가 눌려 남은 자들은 은무성이 떠나는 걸 바라보기만 했다. 그러나 유신이 잡놈이라고 욕하자 울컥해서 나서는 자가 있었다.
"우린 뇌음사의 고수들이다. 네놈이야말로 어디 잡놈이냐?"
목적을 달성한 유신은 곧바로 은접미천으로 가장 앞장선 자를 공격했다. 유신의 검 끝에서 은색 날개를 가진 나비들이 쏟아져 나왔다. 유신은 다른 자들보다 두 걸음 앞으로 나온 자를 목표로 했지만, 뒤의 자들은 분분히 자신을 공격하는 줄로 여기고 방비부터 굳건히 했다.
날개를 팔락거리던 수많은 은색 나비 중 하나가 갑자기 이빨을 드러냈다. 고주일척이라고 부르기에 여유를 많이 둔, 수시로 은접미천으로 다시 변할 수 있는 찌르기가 펼쳐졌다. 뒤늦게 유신의 목표가 자신이 아님을 알고 동료를 도우려고 했지만, 유신의 찌르기는 마지막 순간에 검 끝이 꽃을 피우면서 목표로 한 무인의 목에 훤히 드러난 사혈을 베어버렸다.
당우형이 혈분매화(血噴梅花)라고 이름 지은 이 초식은 승냥이를 상대할 때 사용했던 초식이다. 검 끝을 미세하게 움직여 목의 사혈을 베면 피가 뿜어져 나와 꽃을 피운다. 유신은 연꽃 같다는 느낌을 받았는데 당우형이 매화라고 우기면서 결국 초식 이름을 혈분매화로 정했다.
승냥이의 목을 벨 때와 마찬가지로 뒤에서 구경하는 자들에게는 마치 유신의 검은 움직이지 않았는데 상대가 목을 검에 갖다 대는 듯한 착각을 주었다. 그래서 지켜보던 자들은 너나없이 죽은 자가 환검에 속아서 검을 제대로 피하지 못하고 오히려 검에 목을 가져다 댔다고 여겼다.
"환검이다. 힘으로 제압한다."
환검을 상대할 때 가장 직접적인 방법이 바로 힘으로 누르는 것이다. 유신의 검을 병장기로 맞추기 위해 이들은 허점을 더 크게 드러냈다. 여럿이 동시에 협공하면서 설마 유신이 반격할 여지가 있겠냐는 생각으로 동작이 커져서 너나없이 빈틈을 고스란히 노출했다.
'이건 고주삼척인가?'
검을 노리는 병장기를 신묘한 변화로 피하고 자신의 요해를 노리는 공격은 보법으로 피하면서도 유신은 여유가 있었다. 상대의 공격을 무위로 만드는 동시에 자신의 공격은 조금도 소홀히 하지 않았다. 셋이 심룡척을 노리고 둘이 유신의 목과 명치를 노렸는데 심룡척을 노린 셋은 목에서 피의꽃을 피우고 나란히 저승길에 올랐다.
"넌 누구냐?"
"우문현성이다."
유신은 깊이 생각하지 않고 아무 이름이나 주워섬겼다. 그러나 이미 유신의 실력에 겁먹은 뇌음사의 무인들은 깜짝 놀라 굳어버렸다. 이미 여섯이 죽고 둘은 싸우기 힘든 지경에 처했다. 멀쩡한 자는 다섯이 남았는데 하나같이 눈을 커다랗게 뜨고 유신의 말을 믿어야 할지 말아야 할지 갈등했다.
"우리 같은 편이오."
"난 이미 교의 사람이 아니니 내 편이 없다."
인제 와서 거짓말을 했다고 시인하기도 무엇해서 유신은 무작정 우겼다. 뇌음사의 무인들은 유신을 우문현성이라고 믿고 싶지 않은데 검을 사용하는 무인 중에서 이 정도 위력을 보일 수 있는 다른 자가 떠오르지 않았다. 어찌 생겼는지 전혀 강호에 알려지지 않은 우문현성을 제외하고 알려진 고수 중에서 저만큼 덩치가 큰 자가 없다.
그런데 우문현성이라고 믿으려니 눈앞이 캄캄하다. 왕이라는 절대적인 칭호를 뒤에 붙이려면 웬만한 실력으로 힘들다. 독왕은 독으로 누구든 죽일 수 있고 약왕은 약으로 누구든 살릴 수 있다. 그리고 검왕의 검 역시 누구도 피할 수 없다.
"개소리다. 우문현성이 아무리 강해도 반로환동했을 리 없다."
수염이 덮여 있지만 유신의 얼굴은 애티를 완전히 벗지 못했다. 거기에 진짜 우문현성이라면 도망쳐도 죽은 목숨이다. 중은 도망가도 절간은 도망가지 못하는 법. 우문현성이 뇌음사에 분풀이라도 하면 세력을 잃은 이들은 먹고살기 위해 마적으로 전락해야 할지도 모른다. 싸우는 걸 빼면 아무것도 할 줄 모르는 자들이기에 뇌음사가 없다면 굶어 죽을 수도 있다.
그래서 제발 우문현성이 아니기를 바라며 용기 내서 유신을 공격했다. 억지로 끌어올린 기세는 과할 정도로 강했지만, 은무성을 상대하며 보여주었던 정교한 합은 온데간데없이 사라졌다.
'이거 종종 써먹어야겠다. 효과가 정말 좋구나.'
유신은 잠깐이나마 당우형에 대한 걱정마저 잊고 속으로 쾌재를 불렀다. 경험이 많은 은무성이 추적에 더 능숙하다는 생각에 자신이 남았지만 반 시진 정도 악전고투할 각오를 했었다. 그런데 이미 태반을 쓰러뜨렸고 남은 자들도 오합지졸이 되었다.
고주일척이 곡선을 그렸다. 지금까지 직선 찌르기만 고집했는데 얼마 전에 얻은 깨달음으로 다양한 곡선으로 펼치고 있다. 덕분에 그간 괴롭혀오던 문제를 조금 해결하기도 했다. 속도를 줄여서 오히려 위력이 강해지는 문제 때문에 고민이 많았는데, 곡선의 기울기를 조절하는 것으로 검이 목표에 도달하는 시간을 제어해서 속도를 줄이지 않고 위력이 강해지는 효과를 얻었다. 속도를 미세하게 조절하는 것보다 검의 경로를 조절하는 게 유신에게는 훨씬 쉽다.
병장기들이 고주일척의 검로를 방해하려고 했지만, 중병기의 느린 움직임으로는 검이 지나가고 남긴 그림자마저 건드리지 못했다. 또 한 명의 무인이 검에 쓰러지자 남은 자들은 당황으로 실수를 남발했다.
뇌음사 무인들은 마지막 한 사람이 쓰러질 때까지 누구도 도망가지 않았다. 중원에서 우문현성은 그저 무공이 가장 강한 무인이지만, 이곳에서는 거의 신과도 같은 존재다. 교주 자리를 버린 것까지 신이 되기 위한 선택이라고 미화하고 있는 마당이니 유신의 검술에 놀란 자들은 판단력을 상실했다.
총 열셋의 목숨을 모두 거둔 유신은 피 한 방울 묻지 않았지만 조금 무거워진 듯한 검을 허리춤에 매달았다. 아까 은무성이 향하던 방향을 기억하고 있기에 당장 그쪽으로 몸을 날렸다. 그러나 계성이 무공을 수련하는 공터를 지나자 확실한 흔적이 없어 주춤하게 되었다.
그때 흰여우 한 마리가 나타나서 컹컹거렸다. 유신이 다가가자 여우는 짧은 다리를 빠르게 놀리며 달리기 시작했다. 가끔 뒤를 돌아보면서 유신이 잘 따라오는지 확인하기까지 했다.
지호는 가끔 멈춰서 코를 킁킁거리기도 했다. 유신은 여우가 개와 같은 동물이라는 당우형의 말이 그제야 믿음이 갔다. 가끔 확신이 서지 않는지 우왕좌왕하기도 했지만 결국에는 방향을 잡고 움직였다.
어차피 흔적도 못 찾는 자신보다는 낫다는 생각에 유신은 지호의 뒤를 부지런히 따랐다. 그러다 먼 곳에서 소란이 들려오자 경공을 펼쳐 뛰어갔다. 지호는 냄새를 따라가야 할지 유신을 따라가야 할지 갈팡질팡하다 결국 유신을 따랐다.
멀리에서 인영 여럿이 서로 교차하는 것을 확인한 유신은 속도를 줄이고 은밀하게 다가가며 손에 든 심룡척을 꽉 잡았다.
- 작가의말
뇌음사 고수들이 뇌음사 없으면 굶어 죽는다고 한 말.
토번은 사람도 적고 식량도 적은 곳입니다. 뇌음사가 사라지면 무공밖에 모르는 자들은 강도질밖에 할 일이 없습니다. 무공이 강하다고 대접받는 곳은 아니거든요.
사람이 사는 사회가 단순히 힘만 강하다고 마음대로 할 수 있는 곳이 아니지요. 예를 들어 마을 하나 차지하고 사람들을 노예처럼 부려먹는다면, 누군가가 음식에 독을 탈지도 모릅니다. 중원은 풍요롭고 다툼이 많아 무인이 꽤 필요하지만, 토번 같은 곳은 무인들이 먹고살기에 좋은 곳이 아닙니다. 그러나 외모 혹은 말투, 거기에 텃세 때문에 쉽사리 중원에 진출하지도 못합니다. 저때 중원인의 자부심은 세계 최고였죠.
무인이 맹수를 잘 사냥해서 마을을 보호해 준다면 쓸모가 있죠. 그러나 사냥꾼이 전문가로서 웬만한 무인보다 사냥을 훨씬 잘한다는 게 제 생각입니다. 맹수가 작정하고 도망치면 수준 낮은 무인은 아무것도 못 하죠.
물론 이건 제 이해와 설정입니다. 다른 견해를 가진 분들이 댓글로 의견을 피력하는 것도 환영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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