옥면검룡
황금색과 진한 붉은색이 적절하게 어울려 무척 고귀해 보이는 옷을 입은 초설이 서문초현의 집 앞에서 서성거렸다. 원래 어릴 적에 네 식구가 함께 살았던 집인데 서문초현이 혼인하면서 부모님이 다른 집으로 이사했다. 익숙하다 못해 눈 감고도 걸을 수 있는 집이건만 초설은 대문을 선뜻 두드리지 못했다.
"어서 들어오세요."
초설을 발견한 당우령이 차가운 목소리로 말했다. 초설은 쭈뼛거리면서 조심스럽게 걸어 들어갔다. 손에는 직접 만든 보기 좋은 여자 옷과 아기가 쓸법한 귀여운 두건과 신발이 들려있었다.
"용 부인, 제 부군이 돌아온 지 보름도 안 되었어요. 심정은 이해가 가지만 자꾸 찾아오지 않으셨으면 해요. 저 지금 회임 중인데 남편이 계속 밖으로 떠도는 게 반갑지 않네요."
당우령의 말에 초설은 죄지은 사람처럼 움츠러들었다. 결국 원하던 말을 입 밖으로 꺼내지 못하고 눈물을 머금은 채 작별을 고했다. 초설이 떠나간 후 서문초현이 모습을 드러냈다.
"뭐 해요? 빨리 보따리 싸고 청해로 가보세요. 그곳에 쾌검신룡이 나타났다는 소문이 자자해요."
당우령의 말에 서문초현은 잠시 침묵을 유지했다.
"숙부나 아버지에게 부탁하는 건 어떻겠소. 회임한 당신을 곁에서 지키고 싶소."
"사내자식이 왜 그렇게 패기가 없어요. 나는 괜찮으니 가서 쾌검신룡이나 찾아오세요."
"그럴 거면서 왜 초설한테는 늘 그렇게 차갑게 대하는 거요?"
당우령은 기가 찬다는 표정으로 서문초현을 바라보았다. 눈치가 무딘 건 혼인을 올리고 얼마 지나지 않아 알게 되었지만, 이 정도면 병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내가 이렇게 해야 시누이가 조금이라도 덜 미안할 거 아니에요. 내가 시누이 편을 들어서 당신을 자꾸 밖으로 내보내면 시누이가 미안해서 아예 부탁도 못 할 거예요."
당우령은 원래부터 눈치가 빠르고 생각이 깊은 여자다. 눈치가 무딘 서문초현에게 시집와서 더욱 현명해졌다. 초설이 부랴부랴 여자 옷과 아기 옷을 만드는 걸 발견하고 미리 수소문해서 쾌검신룡의 소문을 알아냈다.
"역시 이 서문초현이 아내 복이 있구려."
태양보다 더 빛나는 서문초현의 얼굴을 바라보며 당우령도 똑같은 생각을 했다. 자신이 남편 복은 타고난 것 같다고 말이다. 비록 쾌검신룡의 소문만 들리면 집을 떠나지만 덕분에 신혼 분위기를 삼 년 내내 유지하고 있다.
### 快劍神龍 龍遊迅 ###
황토고원은 누런 흙모래가 두껍게 쌓여 있다. 그래서 많은 사람이 사막으로 오해하지만 사실 농사를 짓기에 적합한 토양이다. 황하의 물이 누런 게 바로 이 황토고원을 흘러 지나가며 모래가 물에 섞여서다.
그리고 황토고원만의 특별함이 따로 있다. 바로 황토를 파서 만든 요동(窯洞)이라고 이름 지은 집이다. 여름에 시원하고 겨울에 따뜻한 이 집은 나무가 부족한 황토고원에서 가장 많이 이용된다.
그렇게 토굴을 넓게 파서 만든 객잔에 잘 생긴 청년 한 명이 들어왔다. 흰옷을 입은 청년은 잘생긴 얼굴에 훤칠한 키를 하고 등에는 붉은 술을 드리운 검을 메고 있었다. 특이한 점은 객잔의 다른 사람들과 달리 옷과 신발에 먼지 한 톨 묻지 않았다.
"여기 고기 하나 소채 하나에 속없는 만두 두 개를 올려라. 그리고 술도 있으면 한 병 가져와라."
사천과 말투가 비슷했지만 억양이 조금 차이가 난다. 아마 호북이나 관중 쪽 말투가 아닌가 짐작되었다. 주문을 마친 청년은 객잔 안을 둘러보았다.
가장 눈에 띄는 건 한쪽 구석에 모래투성이의 옷을 입은 두 남자다. 아마 장사가 잘되는 객잔이라면 손님으로 들이지 않았을 정도로 행색이 초라하다. 음식을 시키면 값을 바로 치러야 하는 이곳의 규칙상, 그래도 밥 시켜 먹을 돈은 있는 모양이다.
그리고 창가라고 하기는 무엇하지만, 벽에 구멍이 있어 채광이 좋은 자리에 서른 좌우로 보이는 청수한 용모의 사내가 앉아 있었다. 도포의 천 재질이 나빠 보이지 않는 걸 보면 평범한 사람은 아닐 것 같다. 허리춤에 검을 찬 것으로 보면 노강호가 틀림없다. 어린 검수들은 검이 걸리적거려서 등에 메는 게 보통이다.
도사 차림의 사내 바로 옆에 두 번째로 좋은 자리에는 중년 사내와 열 살 정도로 보이는 아이가 있었다. 부자지간으로 짐작되는 둘은 무척 다정해 보였다. 그러나 생김생김이 너무 달라서 마누라가 바람 핀 게 아니라면 사제 간일 가능성이 크다.
그리고 가장 큰 식탁에는 비단으로 만든 옷을 입고 가쁜 숨을 몰아쉬는 뚱뚱한 중년이 앉아 있었다. 맞은편에 얼굴에 흉한 검상이 있는 두 사내가 앉았고 중년의 뒤에는 젊고 건장한 사내가 시립했다.
청년이 들어오면서 잠시 중단되었던 대화가 다시 이어졌다.
"상인도 그렇지만 계약을 통해 일하는 모두에게 신용이 생명이오. 미리 협의가 끝난 일에 지금 와서 말을 바꾸면 어쩌자는 거요?"
칼자국이 입꼬리와 귀를 이어준 독한 인상의 사내가 단호한 말투로 대답했다.
"정 그렇다면 우리는 상행에서 빠지고 계약금도 일부 돌려드리겠소. 마교와 무림맹이 갑자기 전쟁을 벌일 줄은 누구도 예상하지 못했소."
"조용. 여기 청해 지역에서 감히 마교라고 칭하다니. 출발 전부터 신신당부하지 않았소?"
청해나 감숙 지역은 회족과 강족을 비롯한 많은 부족이 살고 있다. 어려운 환경에서 생존하는 이들은 신앙이 필요했고 백련교와 그 명맥을 이은 일월교는 이들의 신앙이 되었다. 일월교가 마적들을 소탕하여 삶도 더 편하게 만들어 주었고 어려운 일이 생기면 무인을 보내 해결해 주었다.
그래서 마교라는 말을 함부로 입에 담으면 일월교의 귀에 들어간다. 정기적으로 이곳을 통해 상행해야 하는 상인은 두 사내를 잡고 싶은 마음이 싹 사라졌다.
"계약금의 절반은 돌려주시오. 사실 더 돌려받아야 하지만, 돌아가는 길에도 노자가 있어야 하니 내 절반만 받겠소."
상인의 말에 사내는 품속에서 은자 주머니 하나 꺼내 돌려주었다. 둘에게 하나씩 주었으니 절반이 맞다. 중년 상인은 굳이 주머니를 열어 확인하지 않고 뒤의 청년에게 건넸다.
"이번 일은 참으로 미안하게 생각하오. 하지만 이 상판을 보면 무림맹이 잡아갈 게 뻔하니 이만 작별하겠소."
자주 이 길로 상행하러 다니기에 일월교와 안면이 있다. 물론 교역 세를 따로 내야 하지만, 일월교의 누구도 이들 상단을 건드리지 않는다. 그래서 현재 걱정하는 건 오히려 마교와 싸우려고 이곳을 찾은 무림맹이다. 말이 정의무림맹이지 보는 눈이 없으면 강도로 돌변하는 건 다반사다.
그때 주인장을 똑 닮은 젊은 청년이 향기가 풀풀 나는 차를 내다 중년 상인의 앞에 놓았다. 진한 차향에 손님들이 코를 벌름거렸다.
"소이, 나도 차 한잔 다오."
"객관, 찻잎은 저 손님 것이고 저희는 그저 끓였을 뿐입니다. 본점에는 차가 없고 맛있는 술밖에 없습니다."
잘생긴 청년은 점소이의 말에 입맛을 다셨다. 텁텁한 모래바람이 기승을 부리는 황토고원에 오면 누구라도 차를 마시고 싶은 생각이 간절하다.
"하하, 협사께서 차를 좋아하시나 봅니다. 와서 함께 나누시죠."
상인은 차를 흘릴세라 아주 조심스럽게 대접에 따랐다. 청년은 포권으로 고마움을 표현한 후 차를 입안에 머금었다. 차의 향이 입안에 가득 찬 후 단번에 삼켜버렸다. 차가 넘어간 목구멍에서 조금 다른 차향이 올라와서 입안에 머물렀던 차향과 섞였다.
"과연 다도를 아는 분이셨군요. 외람되지만 혹시 형주에서 오셨는지요?"
"어찌 아셨습니까. 무창이나 한구 말투와 잘 구분하지 못하는데 말입니다."
"그쪽 말투에 이렇게 잘생긴 분이라면 형주 천검산장의 옥면검룡밖에 생각나지 않습니다. 더구나 옷에 먼지가 전혀 묻지 않은 걸 보면 고수가 틀림없으니 아둔한 머리를 굴려 억지로 맞춰냈습니다."
"옥면검룡이라니 부끄럽습니다. 천하를 돌며 잘생기고 무공이 강한 사람을 수없이 만났습니다. 몹시 부끄러우니 제발 다른 별호가 생겼으면 하는 바람뿐입니다."
상대가 시인하자 상인의 눈이 반짝였다. 서문세가는 무림맹에 가입하지 않았다. 옥면검룡과 함께 움직인다면 일월교도 무림맹도 상인을 곤란하게 하지 않을 것이다. 서문가와 당문이 사돈을 맺으면서 긴밀한 관계를 유지하고 있기에 누구도 서문가를 건드리려 하지 않는다.
"혹시 어디로 향하는지 여쭤봐도 되겠습니까? 만약 우연히 길이 겹친다면 동행을 부탁드리려 합니다. 사례는 물론 가는 길 내내 편하게 모시겠습니다."
옥면검룡과 안면을 튼다면 이번 상행에서 이득을 얻지 못한다 해도 남는 장사다. 어차피 장사 한두 해만 할 것이 아니기에 훌륭한 투자라고 봐야 한다. 옥면검룡은 난처한 기색을 얼굴에 띄었다.
"저는 사람을 찾고 있습니다. 그래서 딱히 정한 목적지는 없습니다."
"제가 이쪽에서는 귀가 밝은 편입니다. 저랑 함께 가시다가 찾는 분의 소식을 접하면 바로 알려드리죠."
옥면검룡이 쾌검신룡을 찾아다니는 건 강호에 유명한 일이다. 이미 쾌검신룡을 자처하던 작자 세 명이 옥면검룡의 손에 목숨을 잃었다. 최근 쾌검신룡이 이곳 청해에 나타났다는 소문이 무성하지만, 소문이 너무 많아 오히려 진위의 구별이 어려웠다.
"자네가 진짜 옥면검룡인가?"
도사 차림의 사내 옆에서 식사하던 어린 소년을 데리고 있는 중년 사내가 입을 열었다. 옥면검룡은 자리에서 일어나 포권을 올렸다.
"강호의 선배 같으신데 제가 눈이 어두워서 몰라뵙습니다."
"내가 누군지는 중요하지 않고, 자네가 옥면검룡이라면 내 제자랑 비무를 해줄 수 있겠소?"
사내의 맞은편에서 전병(煎餠 - 몽골족을 비롯해 북방에서 많이 먹는 음식)을 꾸역꾸역 입에 밀어 넣던 소년이 급하게 물을 찾았다. 소년조차 상상하지 못했던 말이라 당황해서 딸꾹질이 나기 시작했다. 옥면검룡은 삼 년 전 영웅대회의 우승자이고 절정에 이르지 못했지만 검법의 위력이 절정고수 못지않다고 소문났다.
"제가 검을 제외한 무공은 별 볼 일이 없습니다. 그리고 아직 화후가 부족해 검을 들고 상대를 배려하는 법을 익히지 못했습니다. 죄송합니다."
그때 가장 밝고 좋은 자리에 앉아있던 도사가 입을 열었다.
"죽어도 괜찮으니 나는 어떻소? 옥면검룡의 검이 천하에서 두 번째로 빠르다고 들었는데 한번 견식해 보고 싶군. 아 참, 나는 공동파의 오영진이라고 하오."
쾌검신룡의 검이 가장 빠르고 그다음이 옥면검룡이라고 전해진다. 강호에서 옥면검룡의 검을 본 자들이 하나같이 천하에서 가장 빠른 검이라고 칭찬했고 그때마다 옥면검룡은 쾌검신룡보다 느리다고 겸손을 표했다.
"공동의 검술은 곤륜과 일맥상통하고 원형에 가장 가깝다고 들었습니다. 빠르기만 한 제 검으로는 공동의 박대정심한 검법을 어찌할 수 없으니 비기나 마나 아니겠습니까."
오영진은 상대의 겸손한 태도에 속으로 감복했다. 약관이 갓 지나서 피가 끓는 나이고 후기지수 중에서 모두가 인정하는 최고를 차지했음에도 저리 겸손하기는 힘들다.
"옥면검룡, 내 제자는 이미 열세 살이니 자기 앞가림은 할 나이오. 그리고 자네가 목검을 사용하면 되는 일, 자네 정도의 고수라면 부지깽이를 들어도 상관없지 않소?"
"사부님, 제자 사부님을 모신 이래 새벽에 하나같이 일어나 물을 길어다 사부님의 세숫물을 끓였고 음식을 손수 장만했습니다. 장작도 제가 다 해왔고 사부님의 옷도 제가 다 기웠습니다. 그런데 왜 사부님은 이 제자를 죽음의 구렁텅이에 밀어 넣지 못해 안달입니까."
변성기인지 앳된 목소리에 가끔 탁한 소리가 섞이면서 오히려 더 애절하게 들렸다.
"어릴 적에 많이 싸워야 커서 고수가 될 수 있다. 비록 당장은 쓸모가 없지만, 기억에 깊이 새겨져서 언젠가 네가 경지를 높이는 데 반드시 도움이 된다. 애들은 싸우면서 큰다는 말도 있지 않으냐."
- 작가의말
객잔에 있는 사람 중에 신분이 밝혀지지 않은 사람들, 이미 등장했던 인물들입니다.
이번에 무대는 이쪽으로 옮겼습니다. 두명이 머리 잘라서 요강으로 만들어야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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