설투
허름한 객잔이 도산검림으로 변했다. 향긋한 술 냄새와 식욕을 돋우는 기름 냄새가 피비린내로 바뀌었다. 뼈를 얼리는 서릿바람이 사방으로 몰아쳤다. 백면귀산만은 뭔 일이 있었냐는 듯 태연스럽게 차를 홀짝였다.
초설이 많은 사람 앞에서 유신을 낭군이라 거짓말을 하자 잠깐 사고가 멈춰졌던 서문가의 두 남자도 정신을 찾았지만, 강호에 흉명이 자자한 마교의 호법 때문에 초설을 다그치고 꾸중할 겨를이 나지 않았다.
태연스럽지는 않지만, 지금 상황을 별로 개의치 않는 사람은 또 있었다. 숙부와 오라비 그리고 유신을 돕는다고 나름 용기를 내서 나섰다가 본심을 말해버린 초설과, 초설이 낭군이라 부르자 반쯤 정신이 나가버린 유신이다.
남무천과의 만남 덕분에 마교에 대한 공포나 거의 없는 유신이어서 백면귀산의 출현에 큰 충격을 받지 않았다. 오현사를 떠난 날 낭아봉을 사용하는 마교 고수와 남궁가의 싸움에 휘말리지 않으려고 도망에 급급했던 때와 간의 크기가 달라졌다.
강한 지린내가 객잔 안에 퍼졌다. 도화궁 일행 중 가장 어려 보이는 둘은 옷차림으로 봐서 시녀로 보였다. 그중 한 명이 그만 오줌을 지려버렸다. 남은 한 명은 얼굴이 파랗게 질려 소리도 내지 못하고 있었다.
그때 다 해진 도포를 입은 늙은 도사가 객잔에 들어섰다. 신발도 구멍 여러 개 뚫렸고 머리에 꽂은 나무 비녀도 무척이나 낡았다. 그러나 손에 든 불진만은 아주 대단해 보였다. 나무는 붉은색으로 너무 고급스러워 보였고 수실은 은으로 뽑은 실처럼 반짝반짝 빛났다.
객잔에 발을 들인 노도인은 불진을 한 번 휘저었다. 훈풍이 사방으로 몰아치며 싸늘한 기운을 쫓아냈다. 백면귀산의 내공이 섞인 살기에 목숨이 경각에 달했던 두 시녀가 숨통이 트여 컥컥거렸다.
"도화궁, 내가 꼭 기억해두고 돌아가서 '마교'의 나쁜 놈들에게 강호에 나가면 도화궁을 피해 다니라고 일러주겠소. '마교 척결'의 기치를 높이 든 문파니 마주치지 않게 조심하라고. 동해 무릉도에 본궁이 있다고 들었으니 꼭 그곳을 피하라고 당부하겠소."
노도인이 등장하고 백면귀산의 살기가 사라지자 도화궁 일행은 눈치를 살피며 슬금슬금 객잔 입구로 움직였다. 그러다 백면귀산의 말에 서문청월에게 은자를 던졌던 여자가 다리가 풀려 풀썩 쓰러졌다.
"오늘 일 잊지 않겠소."
마교와 얽히기 싫었지만 서문청월은 참지 못하고 한마디 했다. 서문가는 무림맹에 가입하지 않았기에 무림맹 창설 이후로 그 위명이 계속 하락했다. 무림맹이 여론을 만들고 소속 문파와 세가 그리고 거기에 소속된 자들만 띄워 주다보니 무림맹 소속이 아닌 자들은 강호에서 명성을 떨치기 힘들다.
그래서 무림맹 소속인 도화궁이 서문가와 감히 대들 수 있었다. 당문에 비교해 부족해서 그렇지 서문가의 악명도 만만치 않다. 쾌검을 사용하는 서문가는 자기보다 더 경지가 높은 고수도 찰나의 방심을 하는 순간 해치울 능력이 있기에 무공 고하를 떠나 서문가와 척을 지려는 사람은 많지 않다.
"아까 그 맹세 검으로 거두겠다."
유신이 태연한 기색으로 한마디 보탰다. 도화궁을 없애겠다는 맹세를 검으로 거두겠다는 건 그 맹세를 꼭 이루겠다는 뜻이다. 생사를 몇 번 넘나들고 남무천과 비무하고 동인진을 파하면서 유신은 무공 실력보다 심력이 무척 굳건해졌다. 그래서 내공이 전혀 없고 오른팔을 겨우 움직이는 상황에서도 기세를 잃지 않았다.
"네가 용유신이냐?"
노도인이 불쑥 유신을 향해 질문했다. 유신은 허리를 살짝 숙이며 옳다고 대답했다. 노도인은 아래위로 몇 번 훑어보더니 껄껄 웃었다.
"과연 대단한 기재구나. 서문가가 보물을 얻었어. 단전에 품은 청죽을 잘 키워서 꼭 단풍을 피우거라."
도화궁 일행은 쓰러진 여자를 부축해서 객잔을 급하게 떠났다. 노도인은 허겁지겁 도망가는 도화궁 일행의 모습을 보며 고개를 설레설레 저었다.
"얼굴은 고운 처자들이 예의가 없군. 고맙다는 말은 기대하지 않았다만."
말은 그렇게 했지만 감사 인사를 듣지 못해 기분이 상한 게 표정으로 드러났다. 자리에 일어서서 말할 기회를 엿보던 백면귀산이 공손하게 포권을 올렸다.
"소문만 무성하게 들었지 처음 뵙습니다. 일월교 호법을 맡은 전영득이라 합니다. 우행 진인을 만나 뵙게 되어 정말 삼생의 영광입니다."
우행(愚行)은 어리석은 행동 혹은 어리석은 걸음으로 이해할 수 있다. 장삼풍의 도손으로 현재 강호에서 배분이 가장 높은 고수다. 소림 달마원의 원로들도 최소 우행보다 배분이 하나 낮다. 강호에서 가장 웃어른이다.
"서문가의 청월이 인사 올립니다. 어린 것이 눈이 어두워 미처 진인을 알아보지 못했습니다. 부디 용서해 주십시오."
일각 전까지 혼자서 도화궁을 상대하겠다고 광오한 소리를 내뱉던 서문청월이 새색시보다 더 얌전하게 변했다. 초현과 초설 그리고 유신까지 덩달아 함께 공손히 인사 올렸다.
"차 한잔 얻어먹어도 되겠나?"
우행 도인은 어느새 백면귀산의 앞에 앉아서 차를 잔에 부었다. 강호에 널리 알려지지 않았지만, 우행 도인이 칭찬을 좋아하고 공짜를 좋아하는 건 알만한 사람은 다 아는 이야기다. 백면귀산은 공손한 어투로 마음껏 드시라고 말했다.
장삼풍은 평생 수많은 제자를 받았다. 그 제자들이 만든 문파만 열일곱 개나 된다. 그리고 아주 특별한 제자들이 있었는데 바로 강호의 악인들이다. 장삼풍은 젊은 시절 악인이 나타났다는 소문을 들으면 직접 가서 굴복시키고 감화했다.
그렇게 받은 제자들은 장삼풍이 중년이 될 때까지 따라다니며 수발을 들었다. 그러다 장삼풍이 무당에 뿌리를 내리자 자기들끼리 모여서 무공을 연마하며 살았다. 그리고 공동으로 제자 한 명 키웠는데 바로 우행이다.
장삼풍이 우화한 후 무당이 온갖 정성을 들여 우행을 무당에 모셨다. 장삼풍의 무공을 가장 많이 알고 있는 사람은 현재 우행이다. 다만 인연이 아니면 가르치지 않아 무당에서도 골머리를 앓고 있다.
"인사도 받고 차도 얻어먹었으니 본론에 들어가지. 혹시 자네 쾌검신룡 때문에 이곳을 찾아온 건가?"
"진인의 혜안은 피할 수 없군요. 맞습니다. 그자의 성향을 알아보고 본교에 적대적일지 판단하기 위해 소림을 찾았습니다."
"쾌검신룡은 그 뿌리가 곤륜에 있어. 이 정도 말하면 알아듣겠지?"
곤륜은 강호에 전혀 관심이 없다. 간혹 강호에 곤륜의 제자가 등장하기는 하지만, 곤륜이라는 문파가 강호의 일에 나선 적은 없다. 강호에서 소림보다 역사가 유구한 문파가 아미와 곤륜인데 모두 강호에 관심을 두지 않았다.
"진인의 가르침에 감사드립니다. 보잘것없지만 서역에서 들여온 상아입니다. 귀한 건 아니니 어린 후배의 성의를 생각해서 꼭 받아두시기 바랍니다."
백면귀산은 등에 멘 봇짐 중 하나를 끌러서 길이가 일 척이 넘는 커다란 상아를 꺼냈다. 저 정도 크기면 수저를 몇 쌍 만들고도 남는다. 솜씨가 좋은 장인을 만나 아예 통째로 조각을 하면 그 가치는 어마어마하게 변한다.
"자네 가슴의 울혈을 풀려면 당문의 적란(赤卵)이 필요해."
적란은 뱀의 알인데 껍질이 붉은색이다. 독 주제에 화기를 품은 적란은 무척 강한 독이지만, 절정고수쯤 되면 독도 약으로 만들 수 있다. 인체가 버텨낼 수 있는 독은 약이라 부르고 인체가 버텨낼 수 없는 약은 독이라 부른다. 절정고수는 절독이라는 평가가 붙지 않은 독 대부분을 약으로 만들 수 있다.
상아 하나로 귀중한 정보를 얻어낸 백면귀산은 얼굴에 화색이 돌았다. 물론 창백한 얼굴 때문에 화색이 돌아봤자 티가 나지 않았지만 말이다. 우행이 다시 몸을 일으키자 백면귀산은 자리에서 일어나 공손히 인사 올렸다.
"보름 뒤가 황도 길일이야. 두 사람 그날 혼례를 올리면 큰 화를 피할 수 있을 거야."
초설이 유신을 자기 부군이라고 말할 때 우행은 분명히 이 자리에 없었다. 설마 우행과 같은 고수가 밖에서 몰래 엿듣지는 않았겠으니 신통이 광대하다고 생각해야 한다. 일행의 인사를 받으며 느릿느릿 걸어가던 우행이 불진으로 유신의 오른팔 부목을 툭 쳤다.
"어린 핏덩이가 이런 걸 하고 있으니 내 마음이 아프구나. 아까 내 말 꼭 명심해라. 청죽을 키워서 단풍을 피워야 하느니라."
불진에 맞은 부목이 부서졌다. 유신은 오른팔이 마음대로 움직여지자 퍼뜩 놀랐다. 인대와 뼈 그리고 근육까지 복합적으로 다쳐서 최소 석 달은 필요할 거라 들었는데 순식간에 씻은 듯이 나아버렸다.
유신이 황급히 감사 인사를 드리려 했는데 우행의 신영(身影)이 어느새 사라졌다. 유신의 상처가 얼마나 중한지 제일 잘 알고 있던 초현이 가장 심하게 놀랐다. 유신은 허공을 향해 포권을 하며 우행에게 감사를 전했다.
"정말 부럽군. 진인께 인정을 받다니."
귀한 상아를 주고 정보를 얻어낸 백면귀산은 공짜로 치료받은 유신을 무척 부러워했다.
"언젠가 무천이와 함께 찾을 테니 그때까지 무공을 열심히 익히고 있으세나."
말을 마친 백면귀산은 서문청월에게도 포권을 하고 훌쩍 떠나버렸다. 백면귀산이 떠나자 초현이 유신에게 다그쳐 물었다.
"너 정말 마교랑 연관이 있어?"
"아니, 난 항주에서 쭉 살다가 항주를 떠난 게 몇 달 전이야. 마교 사람은 몇 본적이 있지만 마교랑 아무 상관도 없어."
"다행이다. 내 매부가 마교 사람이 아니어서."
초현이 무심코 한 말에 유신과 초설의 얼굴이 빨갛게 달아올랐다. 그때 푸드덕 거리며 천산옹이 날아왔다. 아침에 떠나보낸 천산옹이 곧바로 돌아오자 서문청월은 긴장을 감추지 못하고 발목의 죽통을 풀었다.
"지금 가주 포함해서 십여 명이 이곳으로 오고 있다고 한다. 그래서 우리 보고 여기서 기다리라는데. 눈 때문에 조금 느려질 수도 있지만 글피면 도착할 수 있다고 한다."
어차피 초현의 상처 때문에 며칠 더 있다가 움직여야 한다. 아무리 쌍둥이라지만 초현과 초설 둘만 마차에 타는 것도 구설에 오를 수 있는 일이다. 천산옹의 출현 덕분에 분위기가 조금 풀렸지만, 유신과 초설은 여전히 서로 쳐다보지 못하고 있었다.
하루도 되지 않아 등봉현에는 도화궁이 서문가와 시비 붙고 마교에 꼬리를 말고 도망쳤으며 강호의 최고 어르신이자 무당의 태상장로인 우행 진인을 무시했다는 소문이 퍼졌다. 그리고 소문은 날개를 달고 강호에 빠르게 퍼졌다.
그리고 쾌검신룡이 곤륜의 제자이고 이름이 악진이라는 소문도 날개를 달았다. 소문의 출처 중 하나가 당문이고 다른 하나는 바로 우행 진인이었다. 당문은 이름까지 언급했고 우행 진인은 곤륜만 언급했다. 강호에서는 거의 쾌검신룡이 악진이라고 결론을 내렸다.
눈이 더욱 크게 내려 나흘이 지났는데도 서문가의 사람들은 도착하지 않았다. 유신은 팔이 회복되자 다시 쌓이기 시작하는 내공을 가늠하며 우행 진인의 말을 곱씹었다.
"청죽을 키워 단풍을 피워라. 도대체 무슨 뜻일까?"
잠을 자면서도 운기가 되고 내공이 쌓이며, 일전에 당우형이 단전이 세 개라고 말했다. 내심 마공이 아닐까 걱정했는데 쾌검신룡이 자신을 말하는 것임을 알게 된 지금 마음이 푹 놓였다. 우행 진인이 쾌검신룡의 뿌리가 곤륜에 있다고 분명히 말했다.
나한당주가 가르쳐 준 수련법은 동작이 크지 않고 움직임이 느려서 방에서도 충분히 수련할 수 있다. 유신은 몸에 땀이 살짝 날 정도로 수련한 후 창을 열어 방안의 땀 냄새를 쫓았다.
뽀각 소리가 들려서 밖을 내다보니 서문초설이 불당으로 향하고 있었다. 청음술을 펼칠까 하다 그만두었다. 오가는 눈빛에서 서로의 마음은 이미 확인이 끝났다. 굳이 입으로 뱉고 귀로 담을 필요가 없다.
분홍색 복사꽃이 하얀 눈을 쓰고 사뿐사뿐 걸었다. 바라만 봐도 가슴이 울렁이는 저 하얀 얼굴에 하루빨리 붉은 수건을 씌우고 싶다.
- 작가의말
설투는 舌鬪, 즉 혀로 하는 말싸움을 말합니다. 강호라고 늘 검과 칼을 서로에게 겨누는 싸움만 하는 게 아니죠. 명분, 기세, 세력, 배분으로 겨루는 경우도 많습니다. 물론 이번에 도화궁은 완패했습니다. 좀 더 좋은 방에서 자겠다고 갑질 하다가 X 됐습니다. 자기 회사 비행기에서도 갑질하면 안 되는 세상인데, 도화궁 사람들 참 딱합니다.
중국 전통혼례는 신부의 얼굴에 붉은 천을 씌우는 겁니다. 혼례가 끝날 때까지 붉은 천을 벗지 않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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