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모와 연민 사이
유신은 자기 숨소리가 무척 거슬렸다. 지금 이 자리에서 유일하게 경지가 일류에 이르지 못한 유신의 숨소리가 가장 불규칙적이고 거셌다. 평소에는 주의하지 못했으나 극도로 조용해진 지금 숨소리로 자신과 다른 사람들의 차이를 절실하게 느꼈다.
"동인진을 파하면 진의 북쪽에서 소림의 달마경과 역근경 원본이 나오게 되어있소. 동인진이 멈췄지만 경전들이 나오지 않았으니 실패한 셈이오."
곤륜의 고수 악진은 잠깐 고민하더니 내일 다시 도전해도 되냐고 질문했다.
"도전했던 사람이 다시 도전하지 못한다는 규칙은 없으니 언제든 재도전해도 되오."
한편으로 안도가 느껴지고 다른 한편으로는 막막함이 엄습했다. 동인진을 멈춘 곤륜의 고수가 실패했다는 것에 안도했고 초현이 생각했던 꼼수가 막히며 도전에 대한 막막함이 또 한 번 몰려왔다.
저녁이 되자 유신은 다시 초현을 업고 객잔으로 향했다. 초현은 현재 거동이 가능하지만, 상처의 통증으로 빠르게 움직이지 못한다. 소림에서 객잔까지 이십 리가 넘는 거리여서 유신이 업고 가는 게 훨씬 빨랐다.
객잔에 도착한 후 저녁을 먹고 초현은 바로 잠들었다. 추운 날 왕복 사십여 리를 업혀 다니는 것도 쉬운 일이 아니다. 유신이 아무리 조심스럽게 움직여도 상처의 통증은 어찌할 수 없다. 꾹 감내했지만 결국 객잔에 돌아오면 바로 잠이 들었다.
"용 소협, 가형을 잘 설득하셨나요?"
성격이 참 급한 분이라는 생각을 하며 유신은 긍정적인 대답을 했다.
"초현이 나름대로 생각해둔 방법이 있었는데 그 방법이 안 통한다는 걸 오늘 알게 되었습니다. 아마 방법이 궁하면 도전할 생각을 하지 못할 겁니다."
곤륜의 절정고수로 보이는 자가 실패했다고 알리려다, 안심시키는 게 아니라 오히려 서문초설을 절망하게 할까 봐 말을 아꼈다. 서문초설이 두 손을 가슴에 모으고 눈물을 글썽였다.
"가형이 저 때문에 다치면 저도 이 하찮은 목숨 부여잡고 싶지 않아요. 우리 남매의 목숨을 살린다 치고 제발 용 소협께서 가형을 제대로 설득해주세요."
유신은 고개를 무겁게 끄덕였다. 사람을 업고 이십 리를 걷는다는 건 쉬운 일이 아니다. 그것도 업은 자를 배려해 최대한 흔들리지 않게 걸으려면 심력의 소모가 무척 크다. 그래서 열흘 정도 되는 시간 매일 일찍 잠들었던 유신이지만 오늘은 가슴에 묵직한 게 걸려서 잠이 쉽게 오지 않았다.
'내가 서문 소저를 연모(戀慕)하고 있는 것인가 아니면 연민(憐憫)하고 있는 것인가?'
뒤척거리던 유신은 객잔 뒤에 있는 공터에 가서 외공이나 수련하기로 했다. 열흘 동안 서문초현을 업고 소림으로 오가며 수련을 등한시했다. 내공이야 잠을 자면 알아서 수련되니 외공만 쉰 셈이다.
그러나 공터는 땅이 고르지 않았고 바닥이 물러서 수련할 수 없었다. 마보만 이 각 정도 하고 유신은 객잔으로 돌아갔다. 땀을 씻을 생각으로 우물을 찾았는데 익숙한 신형을 목격했다.
서문초설이 객점에 있는 작은 불당으로 들어가자 유신은 청음술을 사용했다. 당우형에게서 방법은 배웠지만 한 번도 성공한 적이 없었다. 최근 내공의 질이 높아져서인지 아니면 집중력이 남달랐는지 유신은 청음술에 성공했다.
- 제발 가형의 상처가 낫게 해주세요. 다친 곳이 제대로 아물어서 무공에 영향을 주지 않게 해주세요.
서문초설이 부처님께 소원을 빌고 있었다. 서문초현은 늑골 사이의 근육이 크게 다쳤다. 팔의 움직임에 영향을 주는 부위라서 무공에 지장이 갈 수 있다. 자신의 앞을 가로막으며 생긴 상처라 서문초설이 자책감을 느끼는 듯하다.
- 부친이 하루빨리 마음의 병에서 벗어나게 해주세요. 무공을 포기하고 만년을 편하게 보냈으면 좋겠어요.
서문초현의 부친도 동인진에 도전했다가 오른팔의 뼈가 부서졌다. 경맥까지 다쳐 내공수련도 지지부진하다고 한다.
- 모친이 몰래 울지 않고 얼굴에 웃음꽃이 활짝 피게 해주세요. 철없는 부친 때문에 더는 속상하지 않게 해주세요.
무공에 대한 미련을 놓지 못하는 부군(夫君 - 남편) 때문에 모친이 속을 크게 썩이는 모양이다. 유신은 다른 사람의 내밀한 가정사를 엿듣는 느낌에 청음술을 거두려 했다.
- 제가 용 소협처럼 훌륭한 낭군을 만나게 해주세요.
청음술이 멈췄다. 마음이 격동하여 내기가 진탕했다. 다행히 청음술은 내공의 흐름이 복잡하지만 사용하는 양이 많지 않다. 피를 토하는 내상을 입거나 주화입마에 이르지는 않았다.
'연모일까 연민일까.'
자정까지 잠이 들지 못한 유신은 이튿날 늦잠을 자고 말았다. 서문초현이 아픔을 참고 다시 올라와서 객방의 문을 두드려서야 잠에서 깼다.
아침을 거른 유신은 서문초현을 업고 빠르게 달렸다. 초현도 통증으로 얼굴을 일그러뜨렸지만, 오히려 유신을 재촉했다. 곤륜의 고수가 어떤 기상천외한 방법을 생각해냈을지 궁금하기도 하고, 정말 동인진을 깨는 게 아닐까 걱정되어 직접 확인하고 싶기도 했다.
조금 늦었지만 아예 늦지는 않았다. 둘이 도착했을 때 곤륜의 고수는 삼 단계에 진입했다. 어제와 달리 병장기를 막는 것보다 피하는 게 더 많았다. 아무래도 어제 삼 단계에서 내공을 많이 소모해서 사 단계에 꼼수를 쓴 것 같다.
'절정고수도 내공이 부족할 정도라면 도대체 누가 이걸 깰 수 있을까. 총 아홉 단계가 있다고 들었는데.'
동인진이 사 단계로 진입하자 유신과 초현은 더욱 집중했다. 두 번째 도전에서 어떤 기발한 대응을 할지 무척 기대되었다. 사 단계가 시작되자 악진은 바닥에 드러누웠다.
바닥을 통해 사람의 위치를 알아낸다는 가설이 맞았는지 동인들은 다소 우스꽝스러운 대응을 보였다. 허공에 대고 찌르고 베고 휘둘렀다. 그때 흰 수염의 스님이 모두에게 들리게 경고했다.
"일정 시간 병장기의 부딪힘이 없으면 열여덟 동인이 동시에 공격하오."
악진은 스님의 충고를 들었는지 말았는지 계속 누워있었다. 가끔 낮게 다가오는 공격을 피하며 내공의 소모를 최대한 줄이는 모습이었다. 그러다 결국 스님의 말대로 열여덟 동인이 동시에 공격했다.
물샐틈없다는 말이 전혀 손색이 없다. 더는 피할 데가 없어 보이는 공격에 악진은 오른손의 불진을 위로 찔렀다. 그 빠르기는 섬광이라는 말과 무척 어울렸다.
초현과 유신은 유려하고 부드러우면서도 흔들림 없이 곧은 찌르기에 취했다. 검이 아닌 나무로 된 불진으로 저런 수준의 찌르기를 했다는 것으로 악진이 얼마나 대단한지 절실(切實)하게 느낄 수 있었다.
파삭 하는 소리와 함께 불진이 부서졌다. 바닥에 누워있던 악진의 몸이 뱀처럼 꿈틀거렸다. 유신과 초현은 단 한 번의 꿈틀거림을 보았는데 악진은 어느새 동인진 밖으로 나왔다.
"훌륭한 토룡팔섬(土龍八閃)이오. 어제에 이어 노납이 개안하는구려."
열여덟 병기가 한데 엉켰다. 빠져나갈 틈이 전혀 없어 보이는데 악진은 어떻게 틈을 발견하고 동인진 밖으로 탈출했다. 유신과 초현은 방금 무슨 일이 일어났는지 세세히 되새기고 싶었지만 스님은 둘의 편의를 봐주지 않았다.
"내일 또 도전할 생각이오?"
악진은 포권 비슷하게 주먹의 형태를 취했다. 그러나 포권과 달리 두 엄지를 겹친 주먹 안으로 넣었다. 흡사 태극 문양과 비슷하게 말이다.
"사부께서 물려준 불진을 잃었지만 얻어가는 것도 많습니다. 제 능력으로는 사 단계가 한계인 것 같습니다."
악진은 작별 인사도 없이 나한당을 훌쩍 떠났다. 풀이 죽은 초현은 유신에게 객잔으로 돌아가자고 말했다. 유신은 조금 기다리라 말하고 인상이 만만해 보이는 스님에게 다가가 질문했다.
"남무천은 몇 단계까지 갔습니까?"
"남 시주는 첫 단계에서 동인 두 개를 부쉈습니다. 그래서 동인진이 바로 육 단계로 진입했습니다. 사 단계 전에 동인을 부수면 최소 오 단계로 바로 뜁니다."
### 快劍神龍 龍遊迅 ###
당우형은 천랑을 품에 안고 기쁜 마음으로 등봉현에 도착했다. 항주를 떠나기 전 천랑이 갑자기 앓기 시작했다. 어린 나이에 환경이 급격히 바뀌면서 몸에 탈이 났다. 그래서 청죽방에 잘 돌보라고 맡겼다가 서문초현이 다치면서 발이 묶이자 항주로 돌아갔다.
천랑이 보고 싶어 항주로 향했는데 일행을 떠나자 유신과 초현이 무척 그리웠다. 그래서 경공을 최대로 펼쳐 빠르게 다녀왔다.
"만질 때 조심해. 아직 유치를 갈지 않아서 독이 있을 수 있어. 호부무견자(虎父無犬子 - 호랑이 아비에게서 개 자식이 태어나지 않음)라는 말도 있잖아."
천랑은 초현과 초설의 이쁨을 듬뿍 받았다. 흑자(黑紫 - 검보라)색의 털은 잘 먹여서인지 윤기가 자르르하다. 똘똘한 눈과 삼각형에 가까운 귀는 무척 귀여웠다.
"그런데 유신이는 어디 갔지? 의형이 왔는데 코빼기도 보이지 않네?"
당우형은 호부무견자를 잘못 말한 것 같은데 지적해주는 전음이 없자 유신이 생각났다.
"오전에 저랑 함께 소림사에 가서 곤륜의 고수가 동인진에 도전하는 걸 보고 돌아와서 점심을 먹었습니다. 그 뒤로 보지 못했습니다."
서문초현의 대답에 이어 서문초설이 말했다.
"아까 검을 들고 밖으로 나갔어요. 어디 가는지 궁금해서 불렀는데 못 들었는지 그냥 가더라고요."
강호 초출인 서문초현에 서문초설이라는 짐까지 있어 세 숙부가 자원해서 동행했다. 이미 당우형을 찾았고 진단도 받았으니 두 명은 가문으로 돌아가고 셋째 숙부인 서문청월만 남았다.
서문청월은 강호 경험도 풍부하고 사람도 영리하다. 이런 경우 무턱대고 추측하는 건 아무 도움이 안 된다. 최악의 상황을 가정하고 그걸 막으면 최소 본전은 한다.
"설마 소형제가 동인진에 도전하는 건 아니겠지?"
당우형이 벌떡 일어나서 소림으로 달렸다. 서문초현은 점소이를 불러다 동전 몇 푼 쥐여주고 유신의 행방을 물었다. 짧은 시간이 지나고 점소이가 정보를 가져왔다. 검을 든 용유신이 소림 방향으로 가는 걸 목격한 사람이 있었다.
급히 말들에게 굴레를 씌우고 마차를 몰아 소림으로 향했다. 십여 리를 간 다음 길이 가파르게 변하자 마차를 버리고 걸음을 재촉했다. 초현은 상처의 아픔을 참으며 빠르게 걸었고 초설도 평소보다 보폭을 반 배 정도 크게 했다.
"욕속즉불달(欲速卽不達 - 급하면 오히려 닿지 못한다)이라고, 급할수록 돌아가자. 호흡을 고르게 쉬면서 규칙적으로 움직여라. 그러면 더 빨리 소림에 도착할 수 있다."
서문초현은 통증으로 눈에 눈물이 고였고 서문초설은 용유신이 동인진에 도전한 것을 확인도 못 했는데 벌써 눈물이 글썽했다. 서문청월은 마음을 쉽게 주는 둘이 걱정되었다. 강호에서 사귄 친우 중 황야의 고혼이 된 자가 열이 넘는다. 그때마다 찢어지는 가슴을 달래느라 적지 않은 술과 눈물과 세월이 필요했다.
소림이 가까워져 오자 서문초설은 그제야 면사를 쓰지 않은 게 생각났다. 급히 품에서 손수건을 꺼내 얼굴을 가렸다. 불편하긴 했지만 한시라도 빨리 용유신의 안위를 확인하고 싶었다.
나한당으로 향하는 길에 탑림을 지날 때 서문초설은 걸음을 멈추고 가장 낡아 보이는 탑에 절을 올렸다. 소원을 빈 후 서문초설은 입술을 앙다물고 나한당으로 발걸음을 재촉했다.
서문초현은 추운 날씨에도 땀에 폭 절었다. 서문청월은 수시로 서문초현의 등에 장심을 대고 내력을 불어넣었다. 같은 피를 타고 같은 심법을 익혔기에 가능한 일이다. 둘 다 일류의 경지라 함부로 남한테 내력을 불어줄 깜냥은 되지 않는다.
나한당에 도착하니 당우형이 두 주먹을 꽉 주고 부들부들 떨고 있었다. 당우형의 볼에는 눈물 자국인지 땀이 흐른 자국인지 여러 갈래의 마른 자국이 보였다. 당우형의 모습에서 위안을 얻지 못한 셋은 그제야 동인진으로 눈길을 돌렸다.
용유신이 동인진의 바닥에 쓰러져 있었다. 열여덟 동인과 병장기가 유신을 물샐틈없이 감싸고 있다.
- 작가의말
동인진은 총 9단계입니다. 곤륜의 절정 고수가 4단계에서 멈췄습니다. 그리고 짧게 언급했는데, 3단계까지 동인을 부수면 하나당 한 단계씩 뜁니다. 남무천은 1단계에서 2개 부숴서 바로 6단계가 되었습니다. 하나도 안 부수면 4단계, 하나 부수면 바로 5단계, 둘 부숴서 6단계가 되었죠. 여기에서 알 수 있는 건 남무천이 단번에 두 동인을 부쉈다는 것입니다.
개연성이란 무엇인가? 바로 글쇠가 개떡같이 써도 독자들이 찰떡같이 이해하고 받아들이는 것을 개연성이라고 합니다. 다음 화 개연성 기대해 주세요.
Comment ' 19