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신작칙
늦은 가을, 들국화도 이미 시들었고 매화는 아직 꽃 피울 계절이 아니다. 초설을 목표로 덤비던 사내들은 피로 꽃을 피우며 이 심심한 계절을 달랬다. 보통 검객들은 싸움이 끝나면 검에 묻은 피를 멋있게 털어버리는데, 심룡척을 사용하는 유신은 그런 버릇이 들지 않았다.
"성현은 나쁜 자가 있으면 인의예지신으로 감화시키라고 했다. 그러나 내 일생은 짧고 세상에는 나쁜 자가 너무 많다. 그러니 어느 정도 선만 넘으면 가차 없이 죽이는 게 세상에 이롭다."
호가박도 그렇고, 귀소도 눈 하나 깜짝하지 않고 유신이 음담패설을 뱉으며 무기를 휘두르던 작자들을 도륙하는 과정을 지켜보았다. 미리 유신이 전음으로 아이들의 눈과 귀를 가리지 말라고 초설에게 말했다.
아이에게 아무리 이건 나쁜 일이고 저건 좋은 일이라고 말해봤자 소용없다. 아이는 부모가 하는 말과 행동을 똑같이 따라 하면서 자란다. 그래서 이신작칙(以身作則 - 몸소 본보기가 되다)이 필요하다. 대부분 아이는 부모와 똑같은 말과 행동을 하는 어른으로 자라고, 일부 아이는 부모의 말이나 행동에 크게 반발하며 반대되게 자란다. 어느 쪽이 옳다 그르다 가늠하기 힘들지만, 부모가 바른말과 바른 행동을 일삼는다면 자식이 훌륭한 어른으로 자랄 가능성이 크다.
"노자께서 말씀하셨다. 도가도 비상도라고. 세상에는 무조건 옳은 일도 무조건 틀린 일도 없다. 살인은 대체로 나쁜 일이지만, 만약 내가 힘없는 사람이었다면 저들은 죄를 감추기 위해 우리를 전부 죽였을 것이다. 이 세상을 살아가는 중심은 바로 나 자신이다. 성현들의 말씀을 나에게 알맞게 해석하여 세상을 어떻게 살아가야 할지 정해야 한다."
"부친의 실력이면 저들을 죽이지 않아도 되는 것 아닙니까?"
"내가 검으로 한 명을 제압했을 때 저들은 주저 없이 덤볐다. 이게 첫 범행이라면 당황하거나 주춤해야 하는데, 나는 저들의 행동에서 '익숙함'을 발견했다. 내가 살려준다고 해서 회개할 자들이 아닌 것 같으니 그저 죽여버린 것이다."
그때 호가박이 질문했다.
"만약 제가 저런 놈들을 죽이지 않고 살려줬는데 저자들이 다시 죄를 범해서 사람을 해쳤다면, 그건 제가 잘못한 것입니까?"
"네가 거기까지 책임질 필요는 없다. 네 삶에서 네가 중심이지만, 세상의 흐름에서 너는 남들과 똑같은 하나일 뿐이다. 네가 원해서 짐을 짊어진다면 몰라도, 누구도 너에게 과한 책임을 묻지 못한다."
늦가을이라 물이 줄어서 장강으로 역행해서 올라가는 게 힘들다. 그래서 강을 따라 용호산을 빠르게 벗어난 뒤, 유신은 초설과 두 아이를 데리고 육로로 움직이고 있다. 황 파파의 처소에서 나올 때 은자를 조금 들고 나왔지만, 마차를 구할 정도는 아니어서 튼튼한 수레와 부지런한 노새 한 마리를 사서 초설과 아이들을 태웠다.
"그런데 저자들은 어찌 우리가 올 것을 알고 미리 기다렸습니까?"
"아까 우리가 들렀던 주점에 이 자들에게 정보를 주는 자가 있겠지."
식사할 때 면사를 벗은 초설의 용모가 저 산적들에게 전해졌을 가능성이 크다. 그게 아니라면 산적들이 저렇게 확신을 하고 덤벼들지는 않았을 것이다.
"그럼 돌아가서 그자도 벌해야 하는 게 아닙니까?"
"누군지도 모르고, 알아내서 죽인다고 해도 그런 자가 또 나타날 것이다. 세상을 바꾸려는 생각은 오만한 생각이다. 네 주변에 작고 든든한 세상을 만들어 가까운 사람들만 지켜도 훌륭한 사람이다."
"그 작고 든든한 세상을 크게 키워 많은 사람을 지켜주면 안 됩니까?"
호가박의 당돌한 질문에 유신이 피식 웃었다.
"많은 사람이 들어오는 순간, 그 세상은 네 세상이 아니다. 모두의 세상인 것이고, 네 생각과는 다른 일들이 벌어질 것이다."
"대협은 아직 이립도 되지 않았는데 어찌 이런 이치를 깨달으셨습니까?"
"너는 이제 네 살인데 뭔 궁금한 게 그리 많으냐."
유신이 엄지로 호가박의 머리를 꾹 누르자 호가박이 헤헤 웃었다. 초설의 곁에 찰싹 붙어있던 귀소가 슬그머니 다가와서 자기 머리를 내밀었다. 유신은 귀소의 머리도 꾹 눌러준 다음 산적이 주업인지 겸업인지 모를 자들의 시체를 길 한쪽에 버렸다.
"시간이 넉넉하면 시체를 묻어주는 게 도의다. 그러나 우리 형편이 여의치 않으니 길이나 재촉하자꾸나. 그리고 오늘 한 말은 너희가 이해하기 힘든 말이다. 그저 기억하고 있다가, 풀리지 않는 의문이 있을 때 한 번씩 끄집어내 보아라. 내 말도 다 맞는 건 아니니까, 많이 고민해야 할 거다."
유신이 노새를 끌고 걷고 초설과 두 아이는 수레에 앉았다. 수레에 고운 모래를 뿌린 귀소가 호가박에게 글자를 하나씩 가르쳤다. 영리한 아이지만 글을 배우는 건 조금 느려서 하루에 몇 글자만 배워내고 있다.
### 快劍神龍 龍遊迅 ###
천검산장. 일반인에게는 잘 알려지지 않았지만, 강호에서는 꽤 유명하다. 쾌검을 사용하는 서문가는 절세의 고수는 잘 배출하지 못하지만, 일정 수준의 고수가 꾸준히 나왔고 강호 활동도 활발히 했다.
가끔 천검산장에 비무를 목적으로 방문한 자들은 장원의 위치와 경치에 무척 놀란다. 산 중턱에 자리 잡은 천검산장은 주변의 봉우리들이 추위와 바람을 교묘하게 막아주어 정말 거주하기 편하다. 형주 시내가 훤히 내려다보이는 높은 지형에도 불구하고 우물이 세 개나 있다.
백여 년 전에 심은 귀한 나무들이 아름드리로 자랐고, 서문가의 식솔들이 강호를 돌아다니다 얻어온 귀한 차 나무도 곳곳에 심겨 있다. 기후나 토양이 맞지 않아 죽은 것들이 대부분이지만, 백 년이 넘는 시간의 퇴적이 천검산장을 별천지로 만들었다.
그러나 지금 일행의 앞에 펼쳐진 천검산장은 편액이 박살 나고 일부 건물이 불타 사라졌으며, 그 귀한 나무들도 대부분 화마에 삼켜졌다. 그러나 유신과 초설은 물론, 호가박과 귀소도 크게 당황하지 않았다. 늦가을의 쌀쌀함과 겨울의 무정함을 오는 내내 뼛속 깊이 느꼈고, 그런데도 든든하게 지켜준 유신에 대한 믿음이 깊어서 침착을 유지했다.
"걱정 말아라. 가주전은 아직 멀쩡하지 않으냐."
유신은 수레를 몰아 반쯤 허물어진 천검산장 장원의 문을 넘어섰다. 재가 사방으로 날려 있는데, 바람이 잘 불지 않는 곳이라 꽤 두껍게 쌓였다.
"유신이 맞느냐?"
"나다."
초설이 얼굴에 쓴 면사를 벗고 나서야 서문초현이 몸을 드러냈다. 물론 유신은 서문초현이 어디에 숨어 있었는지 미리 알고 있었다.
"다들 무사해?"
"다친 사람은 있어도 죽은 사람은 없다."
서문가는 식솔이 서른이 조금 넘는다. 항주로 떠난 사람들을 제외하면 스물이 남았는데 다행히도 전부 무사했다.
"불은 우리가 직접 지른 거다. 바람이 잘 불지 않는 곳이라서 적당히 조절해 불을 질러 적들을 막아냈지."
"누가 공격했지?"
"담화궁인데, 이상하게 남자가 많이 섞였어."
"마교일 거야. 항주의 소식은 아직 못 들었어?"
"소문은 들었어. 마교의 고수들이 몰려와서 크게 싸웠다는 말은 들었는데, 아직 청월 숙부는 아무 연통도 없어."
"마교의 저력이 참 대단하구나."
백만이 넘는 백련교가 일월교가 되면서 세가 죽었고, 거기에서 우문현성이 해체를 선포하고 사라지며 세가 또 한 번 죽었다. 그래서 다들 방심하고 있었는데, 어딘가에 숨어있던 마교의 고수들이 갑자기 사건을 일으켰다.
가주전에 들어가니 식솔들이 전부 모여있었다. 가주와 서문청산은 둘 다 옷에 핏자국이 역력하고 팔과 다리에 천을 감고 있었다. 무공을 익힌 남자 중에 유일하게 초현만 멀쩡했다.
"사위 잘 왔네. 며느리가 곧 출산할 테니, 그때까지만 버텨주면 되네."
당우령이 아기만 출산하면 천검산장을 버릴 생각이다. 갓난아기를 데리고 먼 길을 떠나는 것도 위험하지만, 임부를 데리고 피난 가는 건 훨씬 위험한 일이다. 태어난 아이는 고수들이 어떻게든 돌볼 수 있지만, 배 안에 있는 태아는 누구도 손을 쓰지 못한다.
"적들이 어디 있는지 아십니까?"
유신과 초설의 집도 불태워졌다. 청죽단풍검의 비급은 초설이 보관하고 있어 무사하지만, 그 외의 모든 추억이 사라졌다. 불은 서문가가 직접 지른 것이라지만, 유신은 당장 놈들을 찾아 죄를 묻고 싶었다.
"어디에 있는지는 우리도 모르지. 지금 밖과 완전히 단절되어 있단 말이네."
호가박을 가문 어른들에게 인사시킨 후, 휴식을 취했다. 서문가로 돌아오면 따뜻한 음식을 먹으며 편하게 쉴 수 있다고 생각했는데, 식은 만두를 씹으며 적이 언제 쳐들어올지 걱정해야 했다.
"유신, 푹 쉬어. 저녁이 되면 아마 놈들이 찾아올 거야."
초현이 보기 드물게 사나운 표정으로 웃었다.
"초현, 아기가 곧 태어날 테니 넌 뒤로 빠져."
기쁜 일을 맞이해야 하는 데 살생은 좋지 않다. 그러나 초현은 대수롭지 않게 말했다.
"이미 여럿 죽였어. 그리고 강호의 가문에서 태어날 거라면, 이 정도 시련은 이겨내야지."
"아기는 핑계고, 네가 방해되어서 그래."
초현과 유신은 서로 바라보며 껄껄 웃었다. 초현은 유신이 와줘서 마음이 든든하고, 유신 역시 초현이 가족들을 지켜준다면 마음 놓고 날뛸 수 있다.
### 快劍神龍 龍遊迅 ###
서걱 소리는 한 번만 울렸지만, 바닥에 쓰러진 사람은 셋이다. 마교 무인은 다리를 부들부들 떨었다. 죽는 게 두려운 건 아니다. 죽어서 명화신의 품으로 가는 데 뭐가 두렵겠는가. 죽음을 떠올리고 느끼는 공포가 아닌, 맹수를 보았을 때 느끼는 인간 본연의 공포다.
차가운 물건이 심장에 닿는 느낌을 끝으로 마교 무인은 공포에 떨지 않아도 되었다. 한 걸음도 물러서지 않았으니 성화신의 곁으로 갈 수 있다는 위안을 품고 무인은 눈을 감았다.
전화표허로 여섯 명을 제거한 유신은 바로 몸을 날렸다. 아무리 작은 화살도 시위를 떠나면 파공성이 있기 마련인데, 유신은 아무 소리도 없이 유령처럼 움직였다. 빠른 속도로 지나감에도 두껍게 쌓인 재들이 먼지를 피우지 않았다.
혈야차는 백련교 고수다. 머리가 붉은색이어서 혈야차라는 이름을 얻었지, 피를 보는 걸 좋아하는 성격은 아니다. 물론 본인 피와 상대 피 중에서 어느 피가 더 보고 싶냐고 물으면, 늘 상대의 피를 보는 걸 선택했다.
지금까지는 혈야차가 원하는 대로 이루어졌다. 그러나 유령처럼 앞에 나타난 사내는 혈야차의 선택을 마음에 들어 하지 않았다.
혈야차는 상상해본 적도 없는 쾌검이 목으로 향했다. 이때 뒤로 물러서는 건 하수다. 상대의 초식에 큰 힘이 실렸을 때 변화의 폭이 작다. 그러니 이럴 때는 오히려 피하면서 전진해 상대의 틈을 찔러야 한다.
세상에서 가장 빠른 검으로 보이던 쾌검이 갑자기 사라졌다. 그리고 훨씬 빠른 검이 다시 혈야차의 목으로 향했다. 아까보다 더 빠른 건 아니고, 혈야차가 옆으로 피하며 앞으로 다가가서 거리를 좁혔기 때문이다.
그래도 목이 찔리자마자 절명했기에 자기 피를 보지는 않았다. 뇌공과 전모도 연수하지 않고 단독으로는 혈야차를 어쩌지 못하는데, 연속 사용하는 똑같은 초식에 목숨을 잃을 줄은 상상도 못 했다.
'무공은 그대로여도 경지가 높으면 이런 좋은 점이 있구나.'
사람들의 기척이 무척 잘 느껴졌다. 담화궁을 떠나서 서문가로 오는 데 한 달이 넘게 걸렸다. 밤이면 노새까지 수레에 태우고 유신이 직접 끌면서 시간을 단축한 덕분이다. 비록 무공 수련은 하지 못하고 잠도 제대로 자지 못했지만, 시간이 흐르면서 경지가 보다 안정되어 경지가 낮은 자들의 기척을 더욱 수월하게 느꼈다.
"초현, 나다."
서문초현이 휘두르는 검을 피한 유신이 전화표허로 담화궁의 제자 다섯을 한꺼번에 쓰러뜨렸다. 다섯의 협공에 반격 기회를 잡지 못했는데 유신이 나타나 떨어진 이삭 줍듯 손쉽게 처리하자 초현은 허무감이 들었다.
'나도 삼 년쯤 가출할까?'
서문초현은 엉뚱한 생각을 하며 가주전 주위를 돌았다. 유신이 크게 움직이며 적극적으로 처리하고 초현은 작게 움직이며 수비적인 태세를 취했다.
그렇게 유신과 초현이 밖에서 활약하니, 가주전 안에 있는 서문가의 식솔들은 검을 휘두를 기회조차 없었다. 불안에 떨며 잠들지 못하는 다른 이들과 달리 푹 잠이 든 귀소와 호가박을 보며 서문청산이 한탄했다.
"나도 저 철부지들처럼 푹 잤으면 좋겠다."
"용랑(龍郞 - 남편을 지칭할 때 성에 랑을 붙임)이 지켜줄 거라는 믿음이 있어서 그래요. 고달픈 여행이었지만, 아이들에게는 좋은 추억이 된 것 같습니다."
"강호를 일찍 접하면 더욱 곧게 자라거나 완전히 삐뚤어지게 자란다. 사위가 저 아이들에게 좋은 바람벽이 되었던 모양이구나."
부친의 말에 초월은 입술을 살짝 깨물었다.
"아이들이 강호를 멀리하게 하고 싶습니다. 방법이 없을까요?"
"평생 장원 안에 가두고 살면 되지. 가족의 울타리에서 벗어나는 순간 강호다. 무공을 익힌 자들이 모인 곳이 강호가 아니다. 세상이 강호이고, 무공을 익힌 자들이 더욱 날뛸 뿐이다."
차가운 새벽이 지나가고 미지근한 해가 뜰 때, 천검산장으로 향하는 길목에 백 명에 가까운 남녀의 시신이 놓였다. 흉수는 자신의 실력을 과시하려는 듯, 시체를 높이 쌓지 않고 전부 바닥에 뉘었다. 몇몇 시체를 제외하면 모두 일 검에 목이나 심장을 찔린 흔적밖에 없었다.
- 작가의말
이미 다 쓴 글에 아쉬움이 드는 건, 내가 더 나아졌다는 긍정적인 신호라고 생각합니다. 지금 쓰는 글에 미숙함이 보이는 건, 더 잘 쓰고 싶은 열정이 살아있는 것이겠죠. 작은 생각의 전환으로 위로받았습니다. 그러나 이것도 너무 과하면 자기기만이 되더군요.
아이들이 만으로 네 살이 갓 지난 정도입니다. 아이들이 그럴듯한 말은 했지만, 사실 꽤 일차원적인 사고에 가까운 말을 했습니다. 하나를 던져주면 그 하나에 대한 의문을 표했죠. 물론 저 나이에 저 정도 사고만으로도 너무 어른스럽다는 느낌이 들겠지만, 고민 끝에 이대로 밀고 나가기로 했습니다. 실제로 저 정도 나이에 조숙한 아이가 없는 것도 아닙니다. 자주 볼 수 없을 뿐이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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