낙양으로 가는 길
짙은 푸른색의 옷은 앞은 주름이 많고 등 부분은 반듯하게 펴졌다. 예살이라는 복식으로 가장 많이 입는 옷이다. 비단은 아니지만 좋은 천으로 만들어서 보기가 무척 좋다. 이마에는 영웅건을 쓰고 발에는 노루 가죽으로 만든 고급 신발을 신었다.
가죽으로 만든 띠로 허리를 살짝 조르니 펄럭이지 않아서 편했다. 유신은 초설이 보내준 비단 수건을 품속에 넣고 천으로 둘둘 감싼 심룡척을 등에 멨다. 보따리에는 은자와 말린 육포에 몇 가지 양념이 넉넉하게 들었고 갈아입을 옷 한 벌을 안에 넣었다.
"혹시라도 이상한 점이 있으면 바로 당문으로 오거라. 평생 독을 다뤘다지만 알면 알수록 모르는 게 독이다."
유신은 독왕에게 허리를 깊숙이 숙여 작별을 고한 후 경공을 펼쳐 떠났다. 마음 같아서는 서문가에 들려서 초설의 얼굴을 보고 낙양으로 가고 싶지만 그러기에는 시간이 부족하다. 무림맹에서 여는 영웅대회에 꼭 참가하라는 당부를 받았기에 낙양 방향으로 움직였다.
관중에서 배를 타고 낙하를 통해 가는 게 가장 빠른 길이다. 낙양이 황하 유역이지만 서안부터 낙양까지 배가 다니기 힘든 구간이 많아서 낙하로 가는 게 훨씬 빠르다. 이미 지도로 숙지했고 방향을 헷갈릴 걱정도 없기에 유신은 경공을 펼쳐 마음껏 달렸다.
딱 하나의 단전에서 독을 전부 몰아냈다. 문제는 아직도 독이 남아있는 단전이 다섯 개나 더 있다. 독왕은 독을 배출하는 데 전념하면 이 년에서 삼 년 걸릴 것으로 추측했다.
'영웅대회에 참가한 후 서문가로 돌아가서 독을 배출한다. 혹시 문제가 생기면 이번에는 초설과 함께 당문에 갈 거야.'
점심을 육포로 때우고 달리다 보니 밤이 어둑어둑 몰려왔다. 야영하려고 자리를 찾다가 문득 부싯돌을 준비하지 않았음을 깨달았다. 당문 사람들은 유신 정도 실력이면 당연히 내공으로 불을 피울 수 있겠거니 짐작했지만, 유신은 내공으로 불 지피는 법을 배운 적이 없다.
사람이 살지 않는 지역이 많은 사천만 벗어나면 웬만해서는 객점을 찾을 수 있다. 이틀 밤 정도만 고생하면 되기에 유신도 크게 개의치 않았다. 마르고 푹신한 잠자리를 찾으려 했으나 봄이 물러가고 여름이 다가오는 계절이라 어디나 눅눅했다.
그러다 불빛을 보고 천천히 다가갔다. 가끔 모닥불 주변에 올가미를 설치하는 사람들도 있어 조심해야 한다고 들었다. 끼지 못하면 불씨라도 빌릴 생각으로 다가갔는데 아는 얼굴을 보게 되었다.
"여기에서 독고 대협을 만나게 될 줄은 생각지도 못했습니다. 혹시 저를 기억하고 계시는지요?"
"용호산의 소형제였군. 여기 와서 앉으시게."
불천검 독고거병을 제외하고 또 한 명의 사내가 있었지만 독고거병은 소개해 줄 생각이 없었다. 어색한 분위기를 감지한 유신은 짐을 풀고 모닥불에서 숯을 분리했다. 땅을 파고 숯을 넣은 후 쇠로 만든 사발에 개울물을 떠다가 위에 놓았다.
물이 끓은 후 설아차 찻잎을 몇 개 넣었다. 정식 다기로 끓인 차보다는 못하지만 야외에서 이 정도만 해도 호사다. 강한 차향이 퍼지면서 분위기가 조금 부드러워졌다.
"저는 항주 태생 용유신이라고 합니다. 감히 존성대명을 여쭙겠습니다."
"나는 은무성이라고 부르네."
"무림맹주!"
유신은 놀란 나머지 참지 못하고 무림맹주 네 글자를 뱉어내고 말았다. 은무성은 화난 기색으로 항변했다.
"난 무림맹주가 아니야. 무림맹 소속은 맞지만 소림이 맹주를 맡기 전까지는 무림맹에 맹주가 공석이었다고. 왜 다들 나를 무림맹주라고 하는 거야?"
"무공이 강해서 그런 게 아닐까요?"
유신의 말에 은무성은 싱글벙글한 얼굴로 바뀌었다.
"그래도 강호의 소문에 과장이 많아. 솔직히 남무천을 이길 자신이 없거든. 정파에서 나를 남무천 위로 자꾸 놓는데 백 번 싸우면 열 번도 이기기 힘들어."
"그러니까 자꾸 귀찮게 하지 마시오. 나는 우문현성을 이기는 게 목표니까 남무천에도 미치지 못하는 실력으로 자꾸 내 사부가 되겠다고 하지 마시오."
그제야 유신은 둘 사이의 어색하고 딱딱한 분위기를 이해할 수 있었다. 보통은 제자로 받아달라고 쫓아다니고 사정하는 게 보통인데 여긴 반대 상황일 뿐이지 강호에서는 드물지 않게 볼 수 있는 광경이다.
"청성에서는 죽어도 널 싫다고 하잖아. 왜 싫다고 하는 청성에는 무릎까지 꿇고 사정하고 제발 내 무공을 배워달라고 사정하는 나한테는 이렇게 매정하게 구는 거야?"
"당신은 권장법을 익혔고 나는 검만 다루오. 가는 길이 다른 데 서른이 넘은 지금 갑자기 권장법을 익히라니. 미친놈이 아니면 누가 좋다고 하겠소."
"너는 팔다리가 길고 몸이 유연해서 권장법을 익히면 검보다 더 강할 거라니까. 한복명 이후 최고의 권사인 내가 보증한다고."
"당신 말을 들었다 낭패를 보면 누구를 찾아 하소연하겠소. 그리고 나는 검을 놓을 생각 없으니 더는 귀찮게 하지 마시오."
차의 향기로 부드럽게 휘저었던 분위기가 다시 딱딱하게 굳었다. 입술을 삐죽거리던 은무성이 유신을 위아래로 훑어보기 시작했다. 그 눈길이 먹이를 노리는 맹수와 같아서 유신은 저도 모르게 몸을 움츠렸다.
"소형제는 이름이 용유신이라고 했는가? 팔다리가 길쭉하니 권장법을 익히면 십 년 안에 십대고수에 이름을 올릴 수 있겠어."
"죄송합니다. 가전 무공을 익히고 있어 함부로 사부로 모실 수 없습니다."
"가전 무공이라. 내가 용씨 가문을 들어본 적이 없는데. 혹시 무공 명칭을 알 수 있을까?"
"강호에 전혀 알려지지 않은 무공입니다. 말씀드려도 알지 못할 겁니다."
"아직 나이가 약관도 된 것 같지 않으니 지금이라도 나를 사부로 모시고 권장법을 배우는 게 어떤가? 서른이 되기 전에 천하를 주름잡는 고수가 될 거라고 내가 보장하지."
저잣거리에서 약을 파는 약장수와 같은 느낌을 주었다. 유신은 독고거병의 눈을 바라보았다. 저 사람이 은무성이 맞는지 확인하려는 것이다. 독고거병이 고개를 살짝 끄덕였다.
"혹시 쾌검신룡이라고 들어보셨는지요?"
"그럼. 소림의 동인진을 파한 신진고수 아닌가."
"그게 바로 접니다."
냉랭한 얼굴로 표정 변화가 거의 없던 독고거병마저 확연히 티 나게 놀랐다. 분명 용호산에서 만났을 때 이류밖에 되지 않은 실력이다. 그리고 지금도 일류로 느껴질 뿐 절정은 절대 아니다.
"소형제가 쾌검신룡이었다니. 정말 반갑군. 동인진을 어찌 파했는지 알려줄 수 있는가?"
더 놀라운 점은 은무성이나 독고거병이나 유신의 말을 전혀 의심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이들이 의심하면 설득하려고 준비했던 말들이 전부 필요 없게 되었다.
"소림에서 말하지 말라고 당부하더군요. 동인진을 제대로 수리해서 다시 내놓을 거라고 합니다. 말씀드릴 수 있는 건 실력이 아닌 운이라는 겁니다."
"그럼 곤륜의 제자라는 것도 거짓인가?"
"곤륜의 제자는 아니지만 무공의 뿌리가 곤륜에 있는 것으로 압니다."
"부럽군. 난 소와 양들이 싸우는 걸 보며 우양장(牛羊掌)을 직접 만들어냈네."
목동 출신인 은무성은 소와 양들이 싸우는 걸 보면서 싸움 기술을 터득했다. 그리고 실수로 귀한 열매를 모르고 먹고 죽음의 위기를 겪은 후 심후한 내공을 얻었다. 먼저 내공을 얻은 후 심법을 익혔고 심법으로 내공을 안정시키자 바로 절정고수가 되었다.
"그 우양장을 봤는데 법도가 전혀 없고 동작이 우스꽝스럽더군. 소형제도 보면 절대 배우고 싶은 생각이 들지 않을 걸세."
"어허, 구양씨의 합마공(蛤蟆功)은 바닥에 엎드려 두꺼비 흉내도 냈다고 하는데. 내 우양장이 어때서 그러나."
"그래서 그 합마공이 지금까지 전해졌소?"
유신은 그제야 은무성의 아픔을 알 수 있었다. 소와 양을 흉내 내는 우양장의 특성상 배우려는 사람이 드물 것이다. 거기에 은무성은 영약을 먹고 심후한 내공을 얻은 덕분에 고수가 되었다. 그래서 제자들에게 심후한 내공을 얻을 수 있는 내공 심법을 가르치지 못한다. 그러니 자연스럽게 은무성의 무공을 배우려는 사람이 없다.
물론 유신의 생각이 모두 정확한 건 아니다. 사실 은무성은 많은 제자가 있다. 그러나 모두 이류에 겨우 미치는 실력이다. 내공이 일류에 이르지 못하면 권각을 사용하는 무인은 무기를 사용하는 무인보다 훨씬 약하다. 그래서 은무성이 괜찮은 자질을 가진 사람만 보면 자기 무공을 배우라고 권하고 있다.
"차라리 우양장 말고 다른 무공을 가르치겠다면 자질이 훌륭한 제자를 받을 수 있을 것이오. 지금처럼 무공 배울 수 있는 문파가 많을 때에 우양장을 배우려는 사람이 어디 있겠소."
"안돼. 내가 직접 창안한 우양장이 경지에 이르러야 다른 무공을 가르칠 수 있어."
은무성은 우양장으로 명성을 얻은 후 사부를 모셨다. 내공 심법도 자세히 배웠고 제대로 된 무공도 배웠다. 그러나 은무성은 자신이 창안한 우양장에 애착을 두고 우양장을 대성한 제자에게만 다른 무공들을 가르친다고 공언했다.
"용 소협, 굳이 사제관계를 맺지 않더라도 내 무공만 배우면 안 될까?"
"죄송합니다. 지금 익히고 있는 무공만으로도 벅찹니다."
역근경과 토납공을 수련해야 하고 거기에 청죽단풍검도 늘 참오해야 한다. 고주일척과 은접미천의 초식도 계속 다듬어야 하고 아직 초식 명을 짓지 못한 표(飇)의 신법 겸 보법도 수습해야 한다.
"하긴, 이 나이에 지금 경지에 이르려면 잠도 줄이면서 수련했겠지."
은무성은 몸을 틀어 독고거병을 향했다. 독고거병은 벌떡 일어나서 소피를 핑계로 자리를 떴다. 확실히 사부를 필요로 하는 독고거병이 가망이 더 크다지만 절정에 이른 검객을 보고 권장법을 배우라고 하는 건 확실히 무리다.
"저, 은 대협. 제가 자질이 괜찮은 아이 하나 알고 있는데요. 아직 열 살이 안 되었습니다."
"용 소협, 그 아이는 어디에 있고 아직 사문이 없는 게 확실한가?"
"항주 청죽방에 가서 동자승을 찾으면 됩니다. 하도 자질이 뛰어난 아이라서 지금까지 사부를 모시지 않았는지는 모르겠습니다. 이 년 전에 작별할 때는 사부가 없었습니다."
"고맙네. 내 만약 좋은 제자를 들이면 용 소협의 도움을 평생 기억하겠네."
자리에서 벌떡 일어선 은무성은 경공을 펼쳐 남으로 달렸다. 장강을 타고 가장 빠른 속도로 항주로 가려는 것이다. 어두운 밤에도 쏜살같이 달리는 경공으로 은무성의 내공이 얼마나 심후한지 알 수 있다. 밤에도 대낮처럼 환히 보는 경지에 이른 것이 분명하다.
"소형제, 저 거머리를 뜯어낸 건 좋지만 조심하게. 만약 그 아이가 성차지 않으면 돌아와서 소형제를 두고두고 귀찮게 할 걸세."
남무천과의 비무에서 격차를 실감한 독고거병은 혼자서 하는 수련으로 사부의 복수가 가망이 없음을 깨달았다. 그래서 다시 청성을 찾아 제자로 받아달라고 애걸했다. 그러나 청성은 독고거병을 오히려 망치는 것이라고 여전히 거절했다.
그러다 재수 없이 은무성에게 걸렸다. 처음에는 조금 마음이 동하기도 했지만 우양장의 우스꽝스러운 모습을 보고 배울 생각이 싹 사라졌다. 청성산 근처에 자리를 잡고 수련하다 우연히 영웅대회 소식을 듣고 낙양으로 가고 있다.
"영웅대회에서 이름을 떨치고 화산으로 찾아갈 생각이네. 화산은 다른 문파들보다 제자를 더 쉽게 받아들인다고 들었네."
확실히 불천검은 실력보다 명성이 극히 부족하다. 항주와 수로로 이어진 곳이고 유신이 오현사에서 많은 강호의 소문을 듣고 자랐기에 알고 있는 것이지 더 먼 지역에서는 없는 사람 취급을 받을 정도로 무명이다.
"저도 영웅대회로 가는 길이니 동행하면 되겠습니다."
영웅대회에서 다양한 고수들과 대결할 것을 상상하니 가슴이 두근거렸다. 모든 실력을 다 발휘해도 독고거병을 이길 자신이 없지만, 다양한 고수들과 검을 섞을 생각만으로도 가슴이 세차게 뛰었다.
- 작가의말
구양씨의 합마공. 영웅문을 본 분들은 아실 겁니다. 이건 오마주입니다.
지금 두 글을 동시 연재 하는데 결국 문제점을 발견했습니다. 두 글을 쓰면 하나가 막힐 때 다른 하나라도 잘 써질 것을 기대했는데 최근 컨디션이 나쁘니 둘 다 잘 써지지 않습니다. 그래서 동시 연재를 최대한 빠르게 끝낼 결심으로 둘 중 하나는 하루 한 편씩, 하나는 최대한 많이 쓰기로 했습니다. 그래서 오늘 한 편 더 올라올 것으로 조심스럽게 예상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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