철골한 매화향
산길에는 낙엽이 수북이 깔렸다. 알록달록한 단풍들이 산을 어지럽게 수놓았다. 곧 겨울이 오면 나무들은 앙상한 가지를 움츠리고 봄이 오기만을 기다릴 것이다. 물론 추운 겨울에 당당히 꽃을 피우는 나무도 있다.
개방에는 까막눈이 많다. 먹고살 만한 자 중에도 글공부를 하는 자는 소수다. 거지가 될 정도면 공부할 기회가 아예 없다고 봐야 한다. 예외는 존재하지만, 예외는 예외일 뿐이다. 그래서 추구질행의 구결은 아주 쉬운 말로 되어있다.
"왼쪽 무릎을 굽힐 때 오른쪽 엉덩이에 힘을 줘야 하네. 그러면 균형이 덜 흔들릴 걸세."
시키는 대로 했더니 과연 훨씬 안정적이었다. 몸이 안정적이니 착지할 때마다 균형을 잡기 위해 체력을 허비할 필요가 없다. 다만, 습관이 되기까지 많은 수련이 필요하다.
"두 어깨와 고환이 안정적인 삼각을 이뤄야 하네. 팔다리와 머리까지 움직여도 괜찮지만 몸통은 고정되는 게 최고야."
오시가 되자 유신과 거지는 낮잠을 잤다. 거지들이 가장 좋아하는 잠시간이 오시라고 한다. 서서히 더워지면서 추위를 느끼지 않고, 또 점심 끼니를 건너뛰기 위해 오시에 자는 게 가장 좋다고 한다.
유신은 굳이 궁금하지 않은데 거지는 해석까지 했다. 거지 주제에 점심까지 챙겨 먹는 게 들키면 구걸하기 힘들다. 가난한 자들은 대부분 점심을 건너뛰는 세상이다. 거지가 점심까지 챙겨 먹으면 아니꼽게 생각할 사람이 한둘이 아니다.
"그래서 말인데, 자네는 딱 거지 체질이야. 우리 개방에 투신할 생각은 없는가?"
유신은 굳이 거절을 표하지 않았다. 거지도 진심으로 말한 게 아니다. 유신은 추구질풍의 신법을 빠르게 배워나갔다. 유신으로서는 심법 수련을 제외하고 처음 받는 가르침이다. 당연히 집중할 수밖에 없다.
유신은 내공이 모이는 속도가 훨씬 빨라진 것을 느꼈다. 그저 잠만 잤는데 내공이 모인다. 말 그대로 절세심법이 아닐 수 없다. 유신은 문득 엉뚱한 생각이 들었다. 오시에는 잠을 자고, 다른 시간에는 직접 수련하면 내공이 더 빨리 모이지 않을까 생각했다.
보통 내공의 수련을 제한하는 이유는 주화입마 때문이다. 내공의 수련은 높은 집중력이 필요하다. 오래 수련하다 집중력이 풀리면 주화입마에 들 가능성이 크다. 그래서 내공 수련은 가장 효과가 좋은 시간에만 한다.
죽절공은 앉아서도 누워서도, 심지어 걸으면서도 수련할 수 있다. 딱히 자세에 대한 요구가 없고 운기 되는 혈도가 전부 몸통에 있기 때문이다. 유신은 자기 전에 수련을 해서 효과가 있는지 확인해보기로 했다.
내공을 전부 잃은 유신은 지금 처음부터 다시 수련하는 셈이다. 내공을 그저 소모한 것이라면 몇 번의 운기로 전부 회복했을 것이다. 그러나 이번에는 내공을 잃은 상황이라 다시 쌓아야 한다. 다행히 내공이 쌓이는 속도가 무척 빨라 보름도 안 걸려 예전 수준으로 돌아갈 것 같다.
"세 소협은 어디로 가시는 길인가?"
비슷한 복식을 한 세 남자가 길을 재촉하고 있었다. 천으로 둘둘 감았지만 유신도 이들이 등에 멘 것이 칼임을 알아보았다. 거지는 넉살 좋게 다가가서 말을 걸었다.
"개방의 협객이시군요. 저희는 전당삼걸로 용호산에 가는 길입니다."
무명 소졸이다. 전당삼걸이라는 별호도 아마 본인들이 직접 지었을 것이다. 거지는 동행하지 않겠냐고 말했고 세 남자는 흔쾌히 수락했다. 나이가 스물은 넘은 것 같다. 가정을 이룬 몸들일 텐데 검보를 노리고 용호산에 가는 것이라면 정말 철부지다.
저녁이 되자 거지가 또 솜씨를 부렸다. 아침에 먹었던 뱀고기도 별미였지만, 유신은 규화계(叫花鷄)가 하루 내내 잊히지 않았다. 세 남자도 침을 꼴깍꼴깍 삼키며 닭이 익기를 기다렸다.
유신은 거지에게서 야생닭을 잡는 방법을 배웠다. 당연하게 새는 머리가 향하는 방향으로 난다. 그 순간을 포착해 날아오르는 닭을 낚아채야 한다. 말로는 간단하지만 날랜 몸을 타고나거나 신법을 능숙하게 사용해야 한다.
"자네들은 용호산에 무슨 용무가 있는가?"
거지는 일부러 유식한 말을 썼다. 세 남자는 체면을 차리기 좋아했다. 왜 용호산에 가느냐고 간단히 묻기보다 용무와 같은 단어를 쓰는 게 저들의 입을 더 쉽게 연다.
"개방의 협객께서도 들으셨는지 모르겠습니다만, 흑면야차가 용호산에 있다고 합니다."
"설마 자네들도 검보 얘기를 들은 건가?"
세 남자의 어리둥절한 표정에 거지는 셋의 평가를 한 단계 더 내렸다. 유신 같은 경우는 흑면야차의 존재도 모르고 용호산으로 향했다. 이 셋은 흑면야차의 이야기까지 들었는데 검보 얘기를 모른다. 차라리 유신보다 더 못하다.
"저희는 강호의 정의를 신장(伸張)하기 위해서 용호산으로 향합니다. 마교의 악적을 무찌르고 중원 무림의 정기를 세울 것입니다."
유신은 감탄했다. 저런 입에 발린 소리를 하려면 얼마나 깊은 심력이 필요할까. 유신은 저런 말을 하려면 혀가 굳고 입안이 마른다. 천성적으로 체질상 맞지 않는 것이다.
"이런, 내가 고수들을 못 알아봤군. 많이 실례했네."
거지가 비꼬는 것도 모르게 세 사내는 우쭐한 표정이었다. 거지는 셋이 대답할 기회를 주지 않고 말을 이었다.
"자네들은 셋이 연수할 생각인가?"
"아닙니다. 비록 상대가 마교의 악인이라 하지만, 무인 된 도리로 어찌 셋이서 하나를 핍박하겠습니까. 당연히 대형인 제가 나서야지요."
배에 힘을 주었다. 조금만 방심하면 웃음소리가 새나갈 것이다. 유신은 웃음을 꾹 참았다. 오현사에서 얻어들은 게 없고, 죽림에서의 일과 강에서의 일을 겪지 않았다면 자신도 저들과 마찬가지였을까?
"이거 참, 이 거지가 눈이 있어도 망울이 없어 고인을 알아보지 못했구려. 절강에서 최고수로 불리는 칠성검을 능가하는 고수들을 알아보지 못했네."
거지는 짐짓 송구하다는 말투로 말했다. 칠성검은 무당의 속가제자로 절강 제일의 고수로 불린다. 물론 칠성문의 세가 가장 크기 때문이지 실제로 칠성검보다 무력이 강한 자가 없지는 않다.
"협객께서 큰일 날 소리를 하십니다. 저희가 어찌 칠성검 대협에게 견줄 수 있겠습니까."
"과겸은 비례라는 말이 있소. 너무 겸손하면 오히려 예가 아니라는 말이지. 흑면야차를 단독으로 상대하려는 고수가 칠성검 따위를 안중에 두면 안 되지."
칠성검은 단순히 칠성문의 문주가 아니다. 무당파 속가 강남연합의 장로이며 정의무림맹에서도 당주직을 맡고 있다. 무공 실력도 만만치 않지만, 머리에 쓴 감투의 무게가 장난 아니다.
칠성검을 따위라고 하자 전당삼걸의 세 남자는 딸꾹질을 하며 대꾸도 못 했다. 거지는 한심한 얼굴로 셋을 바라보며 혀를 쯧쯧 찼다.
"흑면야차와 칠성검이 검을 맞댄 적이 있지. 삼 초식 만에 칠성검의 검이 부러졌어. 칠성검이 흑면야차에게 체면을 살려줘서 고맙다고 인사까지 했지. 세 초식이나 끌어줘서 고맙다고 말이야."
실제로 강호에 널리 알려진 일화다. 그리고 칠성검 본인도 이 일을 굳이 수치스럽게 여기지 않는다. 전당삼걸 세 사내는 아마 작은 고을의 무관 출신일 가능성이 크다. 외공 정도나 익히고 강호의 사정에는 어두운 자들이 분명하다.
"사, 사실입니까?"
"강호에 발을 담근 사람이라면 다 아는 이야기지. 안 그런가, 소형제."
"맞습니다. 제가 아홉 살 때 들은 얘기군요."
덩치는 크지만 병장기도 휴대하지 않은 유신을 내심 깔보던 셋이다. 거지에게서 아주 기초적인 신법을 배우는 듯했다. 그래서 새로 개방에 입문한 어린 거지 정도로 생각했는데, 알고 보니 노강호였다.
"그럼 흑면야차의 무위가 어느 정도인지는 들었는가?"
"마교 교주 우문현성을 제외하면, 마교에서 적수가 없다고 하더군요. 아마 무림맹주와 비슷한 무위가 아닐까 생각합니다."
세 남자는 서로 쳐다보다가 거지에게 넙죽 절을 올렸다.
"미욱한 자들을 깨우쳐주시고 목숨을 구해주셔서 감사합니다."
거지는 모닥불을 치우고 흙을 팠다. 마침 닭이 익은 것이다. 유신은 넓적한 돌을 가져왔다. 미리 물로 씻어서 먼지조차 없다. 거지와 유신은 능숙하게 진흙을 털어내고 닭고기를 찢었다. 세 남자는 둘이 하는 걸 그대로 따랐다.
과일을 먹고 나니 일단 배가 고프지 않았다. 거지는 포만감을 느끼면 닭고기를 더 천천히 먹을 수 있고, 천천히 음미하면 더 맛있을 거라고 말했다. 찢어놓은 닭고기에서 향긋한 냄새가 퍼졌다. 식으면 더 맛있다는 말에 세 남자는 침을 삼키며 둘의 눈치만 봤다.
"내일 아침 일찍 집으로 돌아가게. 용호산은 용담호혈이야. 나도 용호산 근처까지만 갈 생각이네."
세 남자는 고개를 주억거렸다. 평소 들은 얘기로는 무림맹의 일반 무사들도 마교의 악인들의 목을 싹둑싹둑 자른다고 들었다. 그래서 쉽게 생각했는데 평소 존경해 마지않던 칠성검이 세 초식 만에 패했다고 하니 정신이 번쩍 들었다.
"어머, 이거 설마 개방의 규화계 냄새인가요?"
"그래, 향이 이렇게 진한 걸 보니 심 거지의 솜씨가 분명하구나."
하얀 옷을 입은 남녀가 불쑥 나타났다. 남자는 서른 정도의 나이로 보였다. 이마가 번듯하고 눈썹이 진했다. 코는 현담처럼 곧고 높았으며 입술은 두툼했다. 넓적한 얼굴이 사내다움을 한층 더 강조했다.
여자는 얇은 면사를 몇 겹으로 해서 얼굴을 가렸다. 버들 닢처럼 곱게 휜 눈썹과 갓 떠오른 샛별이 내려앉은 것 같은 두 눈만 보였다. 그러나 은연중에 드러나는 몸매가 남자들의 심장을 요동치게 했다.
"어허, 누군가 했더니 매화궁에서 꽃이나 심는 매무환이구나."
놀랍게도 거지와 남자는 동년배였다. 사십은 되어 보이는 거지가 사실 삼십 대 초반이었다. 거지는 외모도 외모지만 말투 때문에 훨씬 나이 들어 보였다.
"매화궁의 매무연이 심 협객에게 처음 인사 올립니다."
모습을 드러내기 전에도 무척 듣기 좋은 목소리였다. 거지는 급히 일어나 환례(還禮)했다.
"무환에게서 얘기 많이 들었소. 개방의 거지 심유라고 하오."
매무환은 심유와 무척 친한 듯했다. 여자 앞에서 멋있는 척을 한다고 구시렁대더니 다짜고짜로 손을 내밀었다.
"지난번 내기에서 나한테 규화계 다섯 마리 졌잖아. 빨리 내놔."
거지는 난처한 얼굴이 되었다. 하필 지금 규화계 다섯 마리가 있다. 그러나 이미 임자가 있는 상황이다. 매무환의 성격이 얼마나 막무가내인지 거지는 잘 알고 있다. 매화궁의 위세를 등에 업고 대부분 사람을 아래로 깔고 본다.
"내가 심 거지가 가까이 있다는 소문에 매화주도 몇 병 준비했는데 말이야."
매화주라는 말에 심유가 흔들렸다. 유신의 귓가에 대고 속삭였다.
"우리 둘의 닭을 일단 양보함세. 내 몇 년 전 매화주를 처음 먹고 다른 술을 마시지 못했네. 술이 물 같아서 목에 넘어가야 말이지."
유신은 고개를 끄덕였다. 닭을 잡은 것도 거지요, 요리한 것도 거지다. 심지어 유신에게 신법을 가르쳐주고 있다. 유신으로서는 거절할 명분이 전혀 없다.
"매화궁의 매화주라면 내 규화계가 전혀 안 아깝지. 여기 두 마리를 너희에게 넘기마."
매무환은 매화주 한 병을 심유에게 건넸다. 심유는 병째로 입에 대고 크게 한 모금 입에 물었다. 그리고 천천히 삼켰다. 캬 소리와 함께 시 한 구절이 튀어나왔다.
不經一番徹骨寒 怎得梅花撲鼻香
불경일번철골한 즘득매화박비향
글공부를 등한시한 유신은 무슨 뜻인지 모른다. 매무연은 심유의 시를 듣더니 감탄했다.
"뼈까지 시린 차가움을 겪지 않으면 어찌 코를 덮치는 매화향이 나왔을까. 참으로 좋은 시구네요. 심 대협이 지은 시인가요?"
"저 거지가 무슨 시를 지어. 당나라 황얼선사의 시다."
유신은 거지가 건네주는 술병을 받은 후 한 모금 작게 마셨다. 매화향이 입안을 가득 채웠다. 뼈까지 시린 차가움을 겪은 매화의 강한 향이다.
- 작가의말
실제 매화주는 대단한 술이 아닙니다. 독한 술도 아니고요. 무협에서의 각색이라고 봐주시기 바랍니다.
코는 현담처럼 곧고 높다. 현담은 담낭을 드리운다는 뜻입니다. 담낭을 드리운 것처럼 단정하게 생긴 코를 현담같다고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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