금의위
"서문가의 사람 계시오? 금의위에서 나왔소."
금의위라면 나는 새도 떨어뜨린다는 최고의 특무기관이다. 만약 길목에 백 구가 넘는 시체가 널려있지 않았다면, 아마 훨씬 건방진 태도를 보였을 것이다.
상처 입은 사람이 나서면 괜히 얕보일 수 있다. 그래서 서문초현과 유신이 대문 밖으로 나갔다. 금의위(錦衣衛)라고 진짜 비단옷을 입는 건 아니었으나, 옷의 색이 무척 선연(鮮然)하여 평범한 옷감은 아닌 것 같았다.
"서문가의 대리 가주 초현이라 합니다. 무슨 일로 오셨는지요?"
"이번에 항주에서 많은 가문이 회합을 뒀다 들었소. 서문가의 대표로 갔던 사람 중에서 용 씨 성을 가진 자가 마교의 마수를 벗어났다고 들었는데, 그 종적을 찾을 수 없어 서문가로 방문했소."
"나다. 무슨 일로 나를 찾는 것이냐?"
유신의 건방진 말투에 금의위의 눈썹이 잠깐 흔들렸다. 그때 유신이 잠깐 기세를 풀었다. 산을 허물어뜨리고 강을 메꿀 것 같은 기세가 휩쓸고 지나가자 금의위의 자세가 좀 더 공손하게 변했다.
"칠성장에서 화합을 열던 사람들이 전부 실종되었소. 우리와 함께 항주로 가서 사건의 해결에 도움을 주기 바라오."
"언제까지 가면 되는 것이냐?"
"당장 우리와 함께 출발하면 되오."
유신은 초현에게 전음을 날렸다. 초현은 곧바로 몸을 돌려 재로 덮인 장원 안으로 들어갔다. 유신이 가타부타 대답이 없자 금의위 인솔자는 난감하기 그지없었다. 방금 보여준 기세라면, 자신들을 전부 죽인 후 밖에 있는 마교의 소행으로 몰아버리면 끝이다. 사정하자니 체면이 걸리고, 강하게 나오자니 목숨이 걸렸다.
"작은 선물이다. 볼일이 끝나면 알아서 항주에 가서 찾을 테니, 먼저 돌아가도록 해라."
초현이 건넨 선물을 본 금의위 인솔자는 다리에 힘이 풀려 후들거렸다. 곧바로 금루의를 초현에게 돌려준 금의위 인솔자는 허리를 숙여 인사를 올리고 바로 떠났다.
금루의는 돈만 있다고 얻을 수 있는 게 아니다. 그리고 최소 성 한 채와 맞먹는 물건을 뇌물로 내미는 배포가 있는 자라면, 금의위의 총기(總旗)로 정칠품밖에 안 되는 인솔자가 감히 건드릴 수 있는 상대가 아니다.
오는 길에는 그저 끔찍해서 지나쳤던 시체들을 자세히 살피니, 상처가 두 개인 시체가 드물었다. 금의위 총기는 평소처럼 위압적으로 나서지 않았던 것이 다행이라고 생각하며, 돌아가는 대로 조상들의 위패에 향을 올릴 궁리를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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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문가를 공격하러 온 무리를 다 죽인 것인지, 길목에 시체를 늘어놓아 시위한 게 효과가 있었는지, 더는 귀찮게 구는 자가 없다. 금의위가 떠나고 사흘 되는 날 오전, 당우령의 산통이 시작됐다.
"초현, 마음을 가라앉혀라."
안절부절못하는 초현을 다독이는 유신의 마음도 편치 않았다. 아이를 출산하는 고통이 이렇게 컸나 생각이 들어서, 곁을 지켜주지 못한 미안함에 초현만큼 괴로웠다. 자신이 없는 상황에서 홀로 아이를 낳은 초설이 얼마나 힘들었을지 생각하니, 가슴이 갈기갈기 찢어지는 것 같았다.
"그래도 네 덕분에 걱정을 많이 덜었다."
유신이 가주전 주변의 재를 전부 쓸어버렸다. 물을 뿌리고 빗자루로 쓰는 것처럼, 전혀 재가 날리지 않고 얌전하게 쓸려갔다. 그래서 초현도 마음 놓고 이리저리 걸어 다녔다. 아니었으면 재가 날릴까 봐 미동도 못 했을 것이다.
"초현아, 아이 이름은 생각해 두었느냐?"
부친의 질문에 서문초현은 어물거렸다. 생각해 놓은 이름이 여러 개 있었는데, 긴장한 나머지 생각나지 않았다.
"돌림 따지 말고, 이름을 재기(再起)라고 짓는 건 어떠냐?"
청(靑) 자 돌림에 이어 초(初) 자 돌림이고, 이번에는 자(慈) 자 돌림이다. 백 년이 넘는 천검산장이 불타고 서문가는 피신해야 할 신세가 되었다. 그래서 서문청산은 친손주에게 재기라는 이름을 지어주고 싶었다. 외손자의 이름도 초설이 바락바락 우겨서 귀소라고 지었기에, 아들만큼은 자기 뜻에 따르기를 바랐다.
"무척 마음에 듭니다."
딸이라고 해도 재기라는 이름이 딱히 나쁘지는 않다. 그러나 배가 옆보다는 앞으로 볼록 나왔기에 서문청산이나 서문초현은 아들이라고 확신하고 있다. 오전부터 산통이 왔으니 늦어도 오후면 출산이 끝날 거라는 생각에, 서문초현을 남겨두고 모두 출발 준비를 했다. 마차 두 대에 널판을 대서 암기에 대비하고, 유신은 길목의 시체를 치우러 나갔다.
유신이 빠르게 돌아오자 다들 얼굴이 어두워졌다. 시체를 치운 것이 담화궁과 마교라면, 당문까지 향하는 피난의 길이 결코 순탄하지 않을 것을 의미한다. 마차의 보강을 돕던 유신은 연무장에 가서 바닥에 깐 청석 중에서 가장 큰 조각을 파냈다.
심룡척으로 천검재기(千劍再起) 네 글자를 적었다. 검으로 돌에 흔적을 내는 건 많은 사람이 가능하지만, 글을 쓰는 건 아무나 할 수 있는 게 아니다. 더구나 유신처럼 붓으로 글 쓰듯이 가볍게 쓰는 건 더욱 힘들다.
그러나 일동이 가장 놀란 건, 글씨를 적고 난 후 돌가루가 거의 날리지 않았다는 것이다. 돌을 파내서 글을 만든 게 아니라, 돌을 흙처럼 눌러서 글을 새겨넣었다. 유신이 의도한 바는 아니지만, 막막하고 갑갑하던 서문가 남자들의 마음이 조금은 시원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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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덕분에 편한 길이 되었소."
형주에서 출발해 당문까지 향하는 길에 시종 금의위가 주변을 어슬렁거렸다. 어차피 마교와 담화궁은 우문현성 수준의 고수가 직접 오지 않으면 유신에게 위협이 전혀 되지 않는다.
대신 푼돈을 노리고 귀찮게 하는 관의 사람들을 금의위가 깔끔하게 정리했다. 붉은 수실을 단 명패를 꺼내기만 하면 하나같이 다리가 풀려 쓰러졌고, 덕분에 마차 수리에 도움을 여러 차례 받았다.
"아닙니다. 용 대협의 무용을 전해 듣고 칠 왕야(王爺)께서 한 번 만나고 싶어 합니다."
칠 왕야는 항주부와 가까운 소흥부(紹興府)에 있는 황척으로, 주체의 조카다. 정강지난 때 주체를 도운 공으로 소흥부에서 왕부를 하사받았는데, 아직 부친이 건재하여 왕으로 봉해지지 않았다. 칠성문을 비롯한 절강의 여러 가문과 친분이 깊고, 강호의 기인이사들과 교분을 쌓는 걸 좋아하는 호걸이다.
"칠 왕야의 위명은 쟁쟁하게 들었소. 만나 뵙고 싶던 차에 잘 되었소."
이틀 후 성도에서 만나기로 약조하고 금의위의 총기와 헤어졌다. 유신은 당우형과 만나 그간 있었던 일들을 간단히 말해주고 도움을 청했다. 당문만큼 안전한 곳도 없으니, 이 기회에 담화궁을 뿌리 뽑고 싶었다.
아이들을 데리고 독왕을 찾아가니, 초현과 당우령이 아들을 데리고 먼저 와있었다. 늘 안색이 파리하던 서문재기는 독왕의 치료를 받고 곧바로 얼굴에 혈색이 돌았다. 치료를 끝낸 독왕은 유신의 부탁으로 귀소와 호가박의 체질을 확인했다.
"너보다 못하지만, 귀소는 가전 심법을 익혀도 되겠다. 그리고 이 아이는 권각술을 익히는 게 좋을 것 같다."
귀소는 죽절공을 익혀도 되지만, 유신만큼의 효과를 기대하기 힘들다. 그래도 귀소는 부친의 무공을 익힐 수 있다는 말에 무척 기뻤다. 호가박은 유신의 무공을 배울 수 없다는 말에 시무룩했지만, 양자로 받아들이고 은무성을 사부로 소개해준다는 말에 함박웃음을 지었다.
두 아이를 먼저 밖으로 내보낸 후, 독왕이 우려를 표했다.
"귀소는 너를 닮아 곧고 바르고 묵직한데, 호가박이라는 아이는 가볍고 기복이 심해 보인다. 서문가와 같은 작은 가문에는 자칫 화가 될 수 있는 성격이다."
유신의 눈에는 어른스럽고 철들어 보였는데, 독왕의 눈에는 다르게 보인 모양이다. 유신은 호가박과 얽힌 이야기를 독왕에게 들려준 뒤, 하늘이 맺어준 인연 같아서 쉽게 끊을 수 없다고 말했다.
"네가 행실을 늘 바르게 하면, 화도 복으로 바뀌겠지. 하나 명심해야 할 것은, 귀소와 똑같이 키우지 말고 성격에 따라 다른 가르침을 내려야 한다."
독왕에게 작별 인사를 하고 당우형의 집으로 향하니, 천랑과 지호가 유신의 몸에 매달렸다. 털이 하얀 여우는 무척 이뻤지만, 피둥피둥 살찐 천랑이 두려워 아이들은 감히 다가가지 못했다.
"천산을 다시 다녀오셨습니까?"
"아니야. 전 대협과 남 대협이 가져다주셨어. 검을 맡겨놓고 훌쩍 떠났는데 언제 올지 모르겠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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금루의를 처분한 돈을 나눈 후, 은무성은 계성을 데리고 진양 상단을 찾아갔다. 갑자기 큰돈이 생겼는데 쓸 방법을 모른다. 그렇다면 돈을 다루는 전문가를 찾으면 된다는 생각에 진양 상단을 찾았다.
진양 상단의 도움으로 적당한 크기의 장원을 얻어 계성의 내공 수련에 몰두했다. 은무성 본인도 얻은 깨달음이 조금 있어 그걸 수습할 시간이 필요하다. 그렇게 세상과 단절하여 살던 은무성에게 갑자기 전영득과 남무천이 찾아왔다.
"우리가 이렇게 만나는 게 소문이라도 나면 발칵 뒤집히겠소."
말은 그렇게 했지만, 은무성은 삶은 고기와 잘 익은 술로 둘을 환대했다. 남무천은 모르고 보면 무척 평범한 사람이고, 전영득은 주판이 부서져서 철로 된 방패를 무기로 사용하여 누구도 백면귀산이라고 생각하지 못할 것이다. 더구나 하얗던 얼굴이 독왕의 치료를 받으며 혈색이 돌아 들킬 염려가 전혀 없다.
"은 대협, 사실 우리가 한복명이 살아있다는 단서를 발견했소. 혹시 무림맹에서 예전에 한복명의 시체를 발견한 후 어떻게 처리했는지 아시오?"
"불태웠소. 태울 때 나도 있었소."
"은 대협, 이 술만 나누고 우리는 바로 떠나야겠소. 혹 도움이 필요하면 이곳으로 서신을 보내리다. 강호의 명운이 걸린 중대한 일이니, 장소만 적힌 편지를 받으면 꼭 와주시기 바라오."
"급한 일인 모양이군. 그럼 술이 식기 전에 빨리 마십시다."
안주는 거의 건드리지 않고 술만 마신 둘은 은무성에게 빠른 작별을 했다. 둘이 떠난 후 은무성은 술기운을 배출하고 곧바로 수련에 몰두했다. 권왕으로 불렸던 한복명이 살아있다는 소식에 두려움보다는 반가운 기분이 먼저 들었다.
한편, 태원을 떠난 전영득과 남무천은 경공을 펼쳐 쉬지 않고 달렸다.
"전 형, 어디로 가는 거요?"
"바로 안양부로 간다."
"남궁용현이라는 자를 죽일 생각이오?"
"상황을 봐서. 생포할 수 있으면 생포하고, 그게 힘들면 죽여버리자."
남무천은 전영득의 속도에 맞춰 달렸다. 예전에는 경공이 전영득에 미치지 못했지만, 지금은 전영득을 꽤 많이 능가했다.
"생포하면 어찌할 생각이오?"
"생포하면 함정을 파서 한복명의 덜미를 잡는 것이고, 죽이면 또 시간을 버는 거지. 너도 그렇고 소형제도 그렇고, 언젠가는 저들을 이기지 않겠느냐?"
"그 청석으로 된 집이 한복명 솜씨라면 자신이 없는데."
달리던 전영득이 우뚝 멈췄다. 남무천 역시 전영득이 멈추자 속도를 줄였다.
"집이 만들어졌을 때 우문현성은 애송이었고, 한복명은 권법을 익힌 자이다."
"뭐야. 한 놈 더 있다는 소리요?"
"우문현성의 무공을 생각해보면, 사부가 없다는 게 말이 안 되지."
"나나 소형제를 생각해보면 말이 안 되는 것도 아니오."
제대로 된 사부가 없는 건 남무천이나 유신도 마찬가지다. 우문현성이 남무천보다 훨씬 더 어린 나이부터 전장을 돌아다녔던 것을 생각하면, 독학으로 고수가 되고 검법을 만들어 냈다고 해도 못 믿을 일은 아니다.
"아냐. 너는 딱히 검법이라고 할만한 걸 익히지 못해 그저 싸움을 잘할 뿐이고, 소형제는 아는 초식이 몇 안 돼. 그런데 우문현성의 낙월검을 생각해 봐. 그게 어디 혼자서 만들어낼 수준의 검법이야?"
남무천은 영사검법을 비롯해 몇 가지 무공을 익혔지만, 많은 사람이 아는 평범한 무공일 뿐이다. 남무천은 무공을 잘 익혔다기보다는 싸움을 잘한다는 말이 더 적합하다. 그리고 유신의 초식들 역시 하나하나 따로 만든 게 티가 난다. 전혀 체계적이지 않고, 초식 사이의 연계 따위도 없다. 유신도 초식들을 억지로 연계시키기보다는, 초식 하나를 하나의 검법처럼 완전하게 만드는 데 주력하고 있다.
"그럼 어쩌자는 말이오?"
"우선 안양부로 가자. 상황을 봐가며 어떻게 할지 정하자."
그러나 안양부로 도착한 둘은 허탕을 쳤고, 곧바로 항주로 향했다. 항주에서 남궁용현과 백리철이 함께 사라졌다는 소식을 듣고 은밀하게 칠성문에 잠입했다.
"용 소협이 먼저 떠나고, 그다음 백리철과 남궁용현이 떠났다는 말이냐?"
"기리스니다."
"다음은?"
"체며팡과 주기고 동바세수 자바가고. 어무그느 자겨해스미다."
최명판관은 죽이고 동방세훈은 생포하고, 언무극은 자결했다.
"너는 어찌 살았느냐?"
"저시화며다."
"글로 써 봐."
- 정심활명단(定心活命丹).
심장이 멈추고 기운도 흐르지 않지만, 살아있게 하는 단약이다. 혈액 독에 중독된 자를 구할 때, 정심활명단으로 심장과 피를 멈추고 약을 쓰면 살릴 가능성이 커진다.
"듣는 건 문제 없느냐?"
- 귀가 점점 어두워집니다.
"말하는 것도?"
- 처음엔 잘 말할 수 있었는데, 점점 힘듭니다.
"백리철과 남궁용현이 어디에 간다고 했느냐?"
- 약왕을 찾아간다고만 했습니다.
약왕이 운남에 있는 건 알만한 사람들만 아는 사실이다. 왜냐면 약왕이라는 명성이 중원이 아닌 관외 위주로 퍼졌기 때문이다. 눈이 총기를 잃은 호운천은 둘을 금의위로 알고 고분고분 질문에 답했다.
"가자."
"뭔가 짚이는 게 있소?"
"혹시 백리철이 우문현성의 사부가 아닐까?"
"어찌할 생각이오?"
"백리철은 무조건 죽이고, 남궁용현은 상황을 봐가며 결정하자."
- 작가의말
글이 너무 널뛰는 게 아닌지 걱정입니다. 그래도 너무 뻔한 이야기들로 채우는 것보다는, 휙휙 지나가는 게 낫다는 생각입니다.
유신이 금의위에 강하게 나온 건, 사정해서 말 들을 놈들이 아니라는 걸 알기 때문입니다. 오히려 강하게 나가면 원하는 바를 이루기 더 쉽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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