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정인종성권속
하얗게 물든 세상에 마차 두 대와 말 몇 필이 움직이고 있었다. 마차가 멈추더니 사내 몇이 밖으로 나왔다. 말을 타던 사내들은 말에서 훌쩍 뛰어내려 경공을 펼쳐 마차 안으로 빠르게 들어갔다. 경공으로 봐서 고수임이 틀림없지만, 추운 겨울에 말을 타고 움직이는 건 고수에게도 고역이다.
겨울용 편자로 바꾼 후 말은 눈길에 넘어지지 않았다. 그래도 감히 달리지 못하고 조금 빠르게 폴작 거리기만 한다. 추운 날씨에 몸 따뜻하게 뛰고 싶겠지만 며칠 전 넘어져서 다리가 부러져 결국 고기가 된 동료를 기억하고 있다면 발굽이 잘 떨어지지 않을 것이다.
이들이 바로 서문초설의 치료 소식을 듣자마자 형주에서 출발한 서문가의 일행이다. 운 좋게 수로를 따라 항주에 도착한 후 남경까지 운하를 탔고 남경부터 마차 한 대와 말 열 필로 움직였다. 초설의 양친이 말을 탈 수 없기에 마차가 한 대 필요했다.
그런데 갑자기 눈이 오더니 말 한 필이 눈길에 미끄러졌다. 다리가 부러진 말은 결국 푸줏간에 팔려 고기가 되었다. 일행은 어쩔 수 없이 방향을 틀어 가장 가까운 도시에 가서 편자를 겨울용으로 바꾸고 마차 한 대 더 장만했다.
그래서 예정보다 이틀 늦게 등봉현에 도착했다. 다행히 서문청월이 방이 비는 족족 방값을 선지급하며 차지했기에 방이 없어 노숙할 걱정을 덜었다. 건강해진 서문초설의 모습에 다들 무척 기뻐했다.
"용 소협, 용 소협의 은혜는 우리 서문가가 잊지 않고 대를 이어 갚도록 하겠소."
서문가주가 대표로 유신에게 감사를 표했다. 개인이 아닌 가문의 이름으로 은혜를 갚겠다고 말할 권한은 가주밖에 없기에 초설의 부모가 아닌 가주가 대표로 나섰다. 한쪽에서 서문초설의 모친인 소소군이 초설을 부둥켜안고 눈물을 흘렸다.
"가주께 감히 묻습니다. 소환단을 무슨 수로 갚는단 말입니까."
서문청월이 부추기자 초현이 용기 내서 미리 준비한 대로 말했다. 누가 들어도 어색할 정도로 딱딱한 말투였고 얼굴에 풍 맞은 사람이 말하는 것처럼 말에 운율(韻律)이 전무했다.
"가주께서 다 생각이 있으시겠지. 우리 서문가가 어떤 가문인데, 소환단 정도의 빚이야 금세 갚으실 거야."
서문청월은 그나마 자연스러웠다. 초현은 속으로 자신에게 어려운 일을 시킨 숙부가 원망스러웠지만, 친우와 동생을 위한 일이라 생각하며 꾹 참아냈다.
"설마 가문의 무공을 전수한다는 말입니까? 우리 서문가가 무공과 전답 조금 빼면 뭐가 있습니까?"
가주의 감사에 유신이 미처 겸양을 표하기도 전에 둘이 치고 들어왔다. 누가 봐도 뭔가 목적이 있는 수작질이 분명하다. 가주는 대꾸를 안 하고 둘의 만담을 지켜봤다.
"가주께서 대를 이어 갚는다고 말씀하셨잖아. 그게 무슨 말이겠어? 용 소협에게 다 못 갚으면 용 소협의 자손에게 빚을 갚겠다는 뜻이잖아. 용 소협이 자손을 보려면 우선 혼인해야 하니 용 소협에게 참한 처자를 소개해주겠다는 뜻이 아니겠어?"
서문청월이 갑자기 예정에 없던 내용을 말하자 초현은 그 말을 받지 못했다. 소소군은 어느새 눈물을 멈추고 초설을 지긋이 쳐다봤다. 초설은 둘의 말을 처음에 이해하지 못하고 있다고 숙부가 너무 노골적으로 말하자 얼굴이 빨개졌다.
초현이 유신에게 눈짓으로 신호를 주었다. 전음은 엿들을 위험이 있어 감히 사용하지 못했다. 유신은 예상했던 잔잔한 흐름이 아닌 격류가 몰아치는 상황에서 지금이 적절한 시기인지 고민했지만, 그래도 사전에 준비한 대로 품에서 뇌물을 꺼냈다.
"소생이 초현과 친우를 맺고 깊은 우정을 나눴습니다. 초현이 평소 늘 가부의 다친 팔을 염려하며 한숨으로 시간을 보내서 마음이 아팠습니다. 부족한 대로 당문의 호피어담고를 준비했으니 부디 거절치 마시고 받아주시기 바랍니다."
서문청산은 아내의 눈치를 살폈다. 신혼 초기에는 잘 생긴 서문청산이 꽉 잡고 있었지만 시간이 흐르며 아내의 눈물에 정복당했다. 특히 팔 부상으로 서문청산이 의기소침해지자 소소군의 눈물이 부쩍 늘었다.
"청산아, 마음이 담긴 선물은 거절하는 게 아니다. 설마 용 소협이 호피어담고 한 덩이로 네 딸과 바꾸자고 하겠냐."
가주의 말에는 명백한 거절의 뜻이 포함되어 있다. 단박에 말귀을 알아들은 서문초설은 얼굴이 하얗게 질렸다. 가주 할아버지가 얼마나 완고한 사람인지 잘 알고 있기 때문이다. 하늘이 무너져도 먹은 마음은 쉽게 바꾸지 않는다.
"형님, 부담 없이 받으시오. 소림에서 소환단 절반이면 완치 가능하다는데 기를 쓰고 통째로 복용시킨 용 소협이요. 소환단도 거저 주는데 그깟 호피어담고를 마음에 두겠소?"
청월은 감히 가주에게 뭐라 할 수 없어 서문청산에게 돌려서 말했다. 청월이 편들어주자 초설의 얼굴에 살짝 화색이 돌았다. 모친인 소소군이 뚫어지게 보고 있는데도 전혀 모르고 사건의 추이에 모든 신경을 쏟았다.
"소환단의 은혜를 갚을 때 얹어서 갚으면 되니 빨리 받으라니까."
가주 역시 다음 대 가주로 점찍은 청월에게 직접 뭐라고 하지 않았다. 서문청산만 중간에서 진퇴양난이었다. 현 가주와 차기 가주의 사이에서 어찌할 바를 몰랐다.
"소환단과 초설의 목숨에 고작 호피어담고를 얹어봤자 얼마나 되겠소. 형님, 부담을 털고 받으시라니까."
둘 다 받으라고 아우성이지만, 그 안에 내포된 의미는 다르다. 만약 호피어담고를 받으면 이 일의 결정권은 서문청산에게 간다. 유신과 초설의 혼인을 허락할지 말지는 완전히 서문청산의 소관이 되어버리는 것이다.
서문초현을 보면 알 수 있겠지만, 서문청산은 눈치가 무디다. 그리고 연륜이 쌓인 덕분에 자신이 눈치가 무디다는 것을 확실히 알고 있다. 열심히 여럿의 눈치를 봤지만 자신이 어떻게 하는 게 가장 나은 결정인지 전혀 알 수가 없어 망설였다.
그때 소소군이 불쑥 걸어와서 유신이 내민 호피어담고를 받았다. 호피어담고를 서문청산의 손에 올려준 소소군은 서문청월에게 질문했다.
"도련님, 더 해주실 얘기가 없나요?"
초설이나 초현의 의견은 전혀 무게가 없다. 이 혼인의 성패는 서문청월의 입에 달렸다. 미리 준비해둔 말이 있지만, 서문청월은 신중하게 단어를 골랐다. 여기서 실수하면 평생 원망 들으며 살아야 한다.
"일전에 운이 좋게도 무당의 우행 진인을 우연히 뵙게 되었습니다."
전혀 상관없어 보이는 말이지만 모두 서문청월의 다음 말을 간절히 기다렸다. 서문가는 무당파와 사이가 무척 좋아 해마다 무당을 방문해서 친선비무를 한다. 하지만 우행 진인은 한 번도 그 행사에 나타나지 않아 얼굴을 본 사람이 없다.
"용 소협에게 같은 말을 두 번이나 했습니다. 무공에 관한 말인데 아마 본인이 아니면 깨닫지 못할 말인 것 같습니다. 제 생각에는 무척 중요한 말 같더군요."
"서문가의 쾌검은 보여드렸느냐?"
가주가 급한 성격을 이기지 못하고 질문했다. 서문청월이 고개를 젓자 실망한 기색이 얼굴에 확 떠올랐다. 가주를 맡은 사람치고는 너무 표정이 솔직했다.
"그래도 서문가에 관해 말은 한마디 해줬습니다."
서문청월은 잠시 말을 멈추고 시기를 기다렸다. 서문가의 사람은 대체로 성격이 급하기에 오래 기다릴 필요는 없었다.
"보름 뒤가 근래 드문 황도 길일인데, 그날 초설과 용 소협의 혼례를 올리면 큰 화를 피할 수 있다고 했습니다. 이젠 아흐레 뒤가 되겠군요."
가주의 눈이 초현과 초설을 훑었다. 초현과 초설은 고개를 끄덕여 서문청월의 말이 사실이라고 힘을 실었다. 다시 눈길을 유신에게 주니 고개를 살짝 숙여 예의를 표하면서도 꿋꿋이 편 가슴은 전혀 움츠러들지 않았다. 내공은 미약하나 기개는 태산처럼 무겁고 기세는 감히 화산과 겨룰 수 있을 것 같았다.
[용 소협은 혈혈단신이라 데릴사위로 들일 수 있습니다. 그리고 당문의 당우형과 결의형제입니다.]
그때 초설과 대화를 나누던 소소군이 갑자기 눈물을 흘렸다. 품에서 손수건을 꺼내 세필로 글자를 쓱쓱 적더니 가주에게 건넸다. 손수건을 건네면서도 소소군은 눈물을 멈추지 못했다.
손수건에는 쉽게 입 밖으로 낼 수 없는 내용이 적혀 있어 서문 가주는 내공으로 손수건을 불태웠다. 소소군이 건넨 손수건에는 어제 서문초설이 초경을 치렀다는 내용이 담겨 있었다.
어릴 때부터 몸이 허약했지만 병이라고는 생각하지 못했다. 그런데 두관(豆冠)이 지나서도 초경이 오지 않자 심각성을 깨닫고 의원을 찾았다. 그러나 아무 차도도 보지 못했고 용호산 근처에서 당우형을 봤다는 소문을 듣고 출발했다.
당우형도 그렇고 백의신녀도 용한 의원이라 소문났으니 한꺼번에 둘에게 보여서 병을 치료하려고 했다. 여자가 열여섯에도 초경을 하지 못했다는 소문이 퍼진다면 엄청 수치스러운 일이다. 혼인 전에 정조를 잃은 여자와 마찬가지로 사람들이 백안시한다.
소환단은 초설의 목숨뿐 아니라 여자로서의 생명도 구해주었다. 마음을 정한 서문 가주는 다시 용유신을 살폈다. 키도 크고 덩치도 좋고 얼굴도 잘생겼다. 왜 아까는 그렇게 마음에 안 들었는지 의문이 들 정도로 훌륭한 청년이다.
"형주로 가기는 글렀으니까 개봉에서 혼례를 올리도록 하지. 그나저나 소환단을 예물로 받았으니 서문가는 뭘 준비해야 할지 모르겠군."
유신은 넙죽 엎드려 절을 올렸다.
"태산 어르신과 장모님 그리고 처가 어르신들, 제 절을 받으십시오."
예절에 맞는 행동은 아니지만, 유신의 모습에 절실함과 기쁨 그리고 진심이 담겨 있어 모두 나쁘게 보지 않았다. 서문청산은 큰 부담을 덜어 시원했지만 한편으로 용유신이 괘씸하기도 했다. 특히 눈물을 글썽이며 환하게 웃는 딸의 얼굴을 보니 괘씸한 마음이 더 커졌다.
'나보다 약해 보이니 대련을 핑계로 톡톡히 혼내줘야겠다.'
소소군은 줄자로 유신의 몸을 쟀다. 유신의 덩치가 일반 사람보다 훨씬 커서 신랑이 입을 혼례복을 직접 만들어야 한다. 다행히 항주에 들렸을 때 지부대인이 선물로 준 비단이 있어 신랑과 신부의 옷 모두 만들 수 있도록 양이 넉넉하다.
"푸른 비단은 우리 초설 꺼, 붉은 비단은 우리 사위 꺼."
언제 울었냐시피 소소군은 콧노래를 흥얼거리며 분주하게 보냈다. 나무 자와 가위를 빌려다가 옷을 만드는 일에 열중했다.
"저, 혼례에 소림의 나한당주를 청하고 싶은데, 실례는 아니겠죠?"
"나한당주와 친분이 있는가?"
"잠깐 가르침을 받은 적이 있습니다. 의형도 곁에 없고 생각나는 분은 그분밖에 없네요."
개봉부터 소림까지 말을 달려 몇 시진 거리다. 청첩장을 만들어 소림에 보냈고 나한당주가 흔쾌히 승낙했다. 혼례를 올릴 때 삼배가 있는데 우선 하늘땅에 절하고 다음 웃어른에게 절하고 마지막으로 부부가 맞절한다.
나한당주가 유신의 부모를 대신해 고당(高堂) 역할을 맡았다. 급하게 성사된 혼례라 조촐하게 치렀지만 분위기만큼은 수백 명이 모인 혼례식 못지않았다. 그리고 같은 날 당우형이 사천에서 수백 명 가족과 수백 명 신부 측 친척들의 축복을 받으며 성대한 혼례를 올렸다.
개봉에서 가장 큰 객잔의 별채를 빌려 동방을 꾸몄다. 화촉으로 환하게 밝힌 방으로 들어가니 푸른 신부복에 붉은 수건을 쓴 초설이 고운 자태로 침상 끝에 궁둥이를 살짝 붙이고 있었다. 하객이 스물도 안 되지만 하도 술을 권해서 내공이 얼마 없는 유신은 고주망태가 되었다.
"제가 끌게요."
술에 취한 유신은 촛불도 제대로 끄지 못하고 허둥거렸다. 보다 못한 초설이 촛불을 일일이 불어서 껐다. 꿀을 듬뿍 탄 찬물을 마신 유신은 그나마 몸을 가눌 수 있게 되었다.
유신은 초설의 얼굴에 씌운 수건부터 걷어냈다. 연지 곤지 바르고 입술도 빨갛게 물들인 초설의 얼굴은 어둠도 그 아름다움을 가리지 못했다. 허겁지겁 옷을 벗어 던진 유신은 밤새 눈을 붙이지 못했다.
- 작가의말
여러분의 요청에 따라 이번 편은 특별히 3만 자를 채웠습니다. 물론 착한 사람의 눈에만 보이게 은장공(隱藏功)으로 일부 감췄습니다. 이 글을 읽는 분은 다 착한 분이라 믿어 의심치 않습니다.
有情人終成眷屬, 권속은 가족을 말합니다. 요즘 권속이 수하를 뜻하는 말로 자주 사용되던데, 기본 의미가 데리고 사는 식구를 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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