화령초
화령초는 분명 영초다. 하지만 체질이 맞지 않는 사람에게는 독이나 다름없다. 내공이 전혀 없고 무공에 입문하지도 못한 은무성이 화령초 열매를 먹고 절정고수가 된 것은 백 년에 한 번 있기 힘든 일이다. 천우신조(天佑神助 - 하늘과 신의 도움)가 아니면 벌어질 수 없는 우연이다.
거기에 화령초 열매는 채취하여 보관할 수 없다. 채취하여 얼마 지나지 않으면 기운이 다 사라진다. 그래서 영약을 만드는 재료로도 사용하지 못한다. 극히 일부에게는 보물이지만, 대부분 사람에게는 계륵과 같은 존재다. 분명 귀한 물건이지만, 돈도 안 되고 찾기도 힘들다.
그러나 백면귀산으로 불리는 전영득이 가장 이해하기 힘든 사람에 속하는 천산괴노는 화령초의 위치를 일일이 기록하고 다닌다. 실제로 가치를 가지는지보다 귀한 물건인지에 집중하기 때문에 쉽게 발견하기 어려운 화령초의 위치를 기억해두고 자기 소유라고 여기며 거기에서 즐거움을 얻는다.
"확실히 약속을 지킬 것이오? 목숨도 해치지 않고 무공도 그대로 둔다는 말 말이오."
전영득이 고개를 끄덕이자 천산노괴는 기쁜 얼굴로 대답했다.
"바로 근처에 있으니 혈도를 풀어주시오."
"방향만 가리키거라. 용 소협, 이자를 부탁하네."
유신이 다가가서 천산괴노의 허리띠를 잡고 번쩍 들어 올렸다. 유신에게 들린 천산괴노는 입으로 방향을 설명했다. 은무성이 계성을 업고 전영득이 당우형의 허리춤을 잡고 달리는 것을 도왔다. 다들 마음이 급하여 전력에 가깝게 경공을 펼쳤다.
'내가 말벌 둥지를 쑤셨구나.'
묘운부설의 신법을 펼친 유신은 매우 빠르게 움직였다. 천산괴노는 그제야 아까 유신이 손속에 사정을 두었음을 알아챘다. 아까 검격에 이 신법만 섞었어도 자신은 도망쳤을 것이다. 물론 유신은 천산괴노가 숨겨둔 한 수가 있지 않을까 하는 걱정과 당우형을 기습할까 봐 전력을 다하지 않은 것뿐이다.
'아니지. 이 개자식이 실력을 숨기는 바람에 잡혔다. 고마워할 일은 아니구나.'
상대의 실력을 만만하게 보고 도망치지 않은 탓에 전영득에게 사로잡혔다는 생각에 천산괴노는 엉뚱하게 유신에게 복수심을 불태웠다. 그러다 유신의 손이 뒤통수를 때리자 속마음이 들킨 줄 알고 깜짝 놀랐다.
"저기 검은 바위가 보이는 산봉우리로 향하면 되오."
잡생각을 하느라 길을 제때 말하지 않아서 유신이 뒤통수를 때린 것이다. 유신의 손에 들려 바람을 탄 꽃잎처럼 날아가던 천산괴노는 문득 뒤에서 파공성이 거의 들리지 않는다는 사실을 깨닫고 머리가 쭈뼛 섰다.
'대호법의 무위도 소문보다 훨씬 강하고 남은 자도 만만치 않구나. 내가 나이를 먹어 총기가 흐려지더니 용담호혈에 겁 없이 뛰어들었구나.'
전영득이 부축한 자가 대수인 전수자로 내정된 두전의 팔을 부순 당우형임을 알았으면 그 놀라움이 배가 되었을 것이다. 뇌음사가 이 지역에서 갖는 위상이 중원에서 소림의 위상과 비슷했었음을 상기하면, 당우형의 악명이 이곳에서 얼마나 대단할지 상상할 수 있다. 차기 소림사 방장으로 내정된 자를 불구로 만든 거나 다름없다. 물론 지금은 일월교 때문에 뇌음사의 성세가 예전 같지 않다.
골짜기라고 하기는 좀 그렇지만, 산봉우리 둘 사이에 아주 깊지는 않은 골이 하나 있다. 그 골에 들어가니 작은 못이 하나 있었고 그 못에 반사되는 햇빛이 향하는 곳에 계성이 발견한 것보다 훨씬 크고 거기에 열매까지 달린 화령초가 고운 자태를 뽐냈다. 눈이 쌓이고 햇빛이 잘 드는 곳을 우선으로 수색했기에 천산괴노가 아니라면 찾아내는 데 꽤 시간이 걸렸을 법한 위치다.
"이보다 더 붉은 것은 있을 수 없겠구나."
형언하기 어렵지만 보는 순간 붉음이 뭔지 알게 해주는 열매가 주렁주렁 매달려 있었다.
"내가 그때 정확히 기억나진 않지만 세 개를 먹고 죽을 뻔했소. 혹시 전 대협은 몇 개 먹어야 하는지 알고 계시오?"
"동권철장(銅拳鐵掌)?"
동권철장은 은무성의 별호다. 화령초를 먹고 고수가 된 은무성의 소문 때문에 목숨을 잃은 자가 한둘이 아니다. 대부분은 화령초를 찾다가 죽었고 운 좋게 화령초를 찾아낸 자들도 화기를 이기지 못해 목숨을 잃었다. 그래서 천산 일대에서 은무성은 무공보다 천운을 타고난 것으로 더 유명하다.
'멍청한 작자로군. 멸구를 두려워하지 않고 함부로 입을 놀리다니.'
당우형의 생각대로 천산괴노는 약삭빠른 척하지만 사실 꽤 아둔한 자이다. 심후한 내공과 괜찮은 무공에 귀한 물건을 잘 찾아내는 재주가 아니었으면 벌써 해골이 되어 어느 야산에 굴러다녔을 수 있다.
"제자분은 한 알만 먹고 당 대협은 세 알 복용하시오. 그리고 용 소협은 일곱 알이 적당하겠소."
말을 마친 전영득은 유신이 바닥에 내려놓은 천산괴노를 집어 들었다.
"나는 이자를 먼 곳에 가져다 두고 돌아오겠소. 보름 정도 걸릴 예정이니 여기서 기다려 주시오."
전영득은 말을 마친 후 경공을 펼쳐 빠르게 동쪽으로 달렸다. 남은 넷은 열매를 먹는 순서를 상의했다.
"내가 가장 먼저 먹고 다음 은 대협의 제자를 돕겠습니다. 동생은 가장 마지막에 먹도록 해라."
당우형이 먼저 복용한 후 계성을 도우면서 경험을 쌓고 마지막에 유신이 안전하게 열매를 먹게 하려는 목적이다. 유신은 섭취해야 할 양이 많고 계성은 경험이 부족하니 꽤 합리적인 순서이기는 하다.
"은 대협은 화령초를 더 취할 생각이 없으십니까?"
"나는 화령초를 먹고 이미 체질이 변했네. 지금 화령초의 열매는 내게 독이지. 전 대협 역시 화기가 강한 체질이어서 화령초를 거들떠보지도 않았다네."
더욱 안전하게 한 알씩 먹는 건 턱도 없다는 소리다. 유신과 당우형은 한참 옥신각신하다가 결국 당우형이 먼저 먹기로 했다. 유신이 열매를 먹고 문제가 생기면 은무성만 도움을 줄 수 있지만, 당우형이 문제가 생기면 은무성과 유신이 도울 수 있다. 거기에 당우형은 양도 유신보다 적다. 둘이 꽤 오래 다퉈서 그사이 은무성과 계성이 분지에 있던 짐들을 옮겨왔다.
당우형은 열매 세 개를 따서 입에 넣고 씹지도 않고 삼켰다. 씹으면 기운이 입안에 남을 것 같아서 통째로 삼키는 걸 택했다. 당우형이 열매를 삼키자 은무성이 입을 열었다.
"나는 일각 정도 시간이 흐르고 복통이 왔지. 차분하게 앉아서 기다리는 게 좋을 것 같네."
유신은 넓적한 바위 하나를 뽑아서 가져왔다. 땅이 눅눅해서 오래 앉아있기가 불편하다. 제대로 수습하지 못한 은무성이 내공만큼은 누구도 부럽지 않을 정도로 강한 기운을 품은 열매다. 수습하는 데 며칠이 걸릴 수도 있는 노릇이니 편하게 앉을 수 있도록 바위를 가져왔다.
그러나 유신은 곧 자신이 헛짓거리했음을 알았다. 만류분해와 토납공 덕분에 당우형은 몸 안의 열기를 몸 밖으로 뿜어냈다. 당우형이 내뿜는 열기에 주변의 땅이 순식간에 말라버렸다.
밖으로 뿜어진 열기는 다시 피부의 혈도들을 통해 몸 안으로 들어갔다. 강한 화기를 담은 당우형은 얼굴과 목이 시뻘겋게 달아올랐다. 화기를 다스리려 애쓰던 당우형은 버티기 힘들어지자 곧 화기를 밖으로 뿜어냈다.
몸 안의 기운을 고르고 당우형은 다시 화기를 불러들였다. 운기를 통해 몸이 화기에 적응하게 하고 화기도 몸에 적응하게 했다. 너무 강한 화기에 몸이 알아서 천산의 청량한 기운을 빨아들였다.
은무성과는 다르게 당우형은 화령초의 열매로 인해 화기가 강한 체질로 변하지 않았다. 온몸으로 기운을 뱉고 들이켜서 화기가 몸에 오래 머무르며 체질을 억지로 바꿀 기회를 주지 않았고, 화기를 빨아들일 때 음기도 적잖이 섞여 들어와서 천천히 균형 있는 내공으로 변해갔다.
점점 많은 음기를 빨아들여 화기와 균형이 맞춰진 후에도 당우형은 기운을 밖으로 뿜었다가 다시 수납하는 것을 멈추지 않았다. 당우형의 기운은 내부에서 혈도를 따라 순환하면서도 수시로 몸 밖으로 나왔다 다시 들어갔다. 순환이 체내에 국한되지 않고 체외까지 이어지자 당우형의 기운은 더욱 정순하게 변했다.
"이 은무성이 다섯 손가락 밖으로 밀려날 것 같네. 용 소협과 계성이에 우문현성만 해도 벌써 넷이군."
말은 아쉽다는 듯이 했지만 은무성의 입가에는 흐뭇한 미소가 어렸다. 천운으로 강력한 내공을 얻었지만 차근차근 과정을 밟지 않아서 본인의 무위는 매우 아쉬운 수준이다. 비록 열심히 공부하고 연구하여 많은 무공 이론을 섭렵했지만, 정작 본인에게 적용할 수 있는 건 얼마 되지 않는다.
그리고 솔직히 무공에 대한 자질도 평범보다 조금 나은 수준이다. 강력한 내공과 정교한 무극권 그리고 일격필살을 자랑하는 우양장 덕분에 누구에게도 쉽게 지지 않지만, 비슷한 수준이거나 상대가 많으면 쉽게 이기지도 못한다.
그래서 무공에 자질이 보이는 사람만 보이면 제자로 들이려고 애썼다. 제자로 맞아들이고 은계성이라고 이름을 지어준 아이는 내공에 대한 자질은 조금 부족하지만, 무공에 대한 열정과 자질 그리고 끈기는 은무성보다 훨씬 나았다. 비록 한 알만 복용한다지만 당우형의 도움이 있으면 은무성과 비슷한 내공을 얻을 수 있다.
거기에 아직 열셋의 어린 나이라 이후 내공이 계속 늘어날 것이다. 스물이 넘으면 성장이 멈추는 육체와 달리 단전은 늙어서 죽을 때까지 발전할 수 있다. 은무성은 기초도 없는 상황에서 열매를 복용했고 내공을 얻은 후 제대로 된 심법으로 다스리지 못해 오랜 시간이 흐른 지금에도 그때보다 내공이 많이 늘지 않았다.
'백화수를 대성한 형님이 독왕 할아버지의 독공까지 익히면 천하에 적수가 없겠구나.'
유신은 타인의 내공 수준을 잘 가늠하지 못한다. 그러나 지금의 당우형이 얼마나 거대하고 정순한 힘을 몸에 품고 있는지는 온몸으로 느껴졌다. 그리고 자신 역시 화령초의 열매를 먹으면 얼마나 강한 내공을 얻게 될지 기대되었다.
달이 휘영청 뜬 밤이 되어서야 당우형은 운기를 멈췄다. 비록 운기를 멈추고 몸을 일으켜 움직이고 있지만, 몸 안의 기운이 여전히 밖으로 들락날락했다. 당우형의 단전과 혈도에 다 담을 수 없는 엄청난 양이어서 토납공이 수시로 남아도는 기운을 밖으로 내보냈다가 다시 안으로 들이며 달아나지 못하게 잡아두고 있다.
전영득의 계산이 틀린 건 아니지만, 토납공으로 화령초 열매의 삼 할에 달하는 음기를 더 얻는 바람에 기운이 넘쳐나게 되었다. 당우형이 눈을 떴을 때 유신과 은무성은 조용히 정좌하고 있고 계성은 꾸벅꾸벅 졸고 있었다.
"동생, 네가 먼저 복용해라. 아무 위험도 없을 것이다."
당우형의 말에 유신은 옷을 벗었다. 영문을 모르고 있던 당우형은 자신이 알몸으로 변한 걸 발견하고 울상을 지었다. 몸에 맞는 옷이 하나밖에 없는데 홀라당 태워버린 것이다. 유신은 당우형보다 덩치가 더 커서 억지로 입을 옷도 없기에 미리 알몸이 되었다.
소매가 딱 손목까지 오는 상의와 발목이 보이는 바지를 억지로 입은 당우형은 몸의 움직임이 불편하여 보이자 비수로 바지 몇 곳을 쨌다. 움직임이 훨씬 편해지자 당우형은 만족스러운 웃음을 지었다. 어차피 내공이 돌아와서 추위를 전혀 타지 않기에 바지에 구멍이 몇 개 나도 전혀 상관없다.
유신은 화령초의 열매 일곱 알을 입에 넣고 당우형처럼 씹지 않고 삼켰다. 한참 시간이 걸린 당우형과는 달리 유신은 열매를 먹자마자 느낌이 왔다. 가장 발달한 혈도가 단전이고 그 단전이 하나가 아니라서 서로 기운을 달라고 아우성을 쳐댔다.
"아, 저놈 특이 체질이지. 위험할 수도 있겠는데."
같은 영약을 먹어도 남들보다 몇 배의 내공을 얻는 유신이기에 일곱 알이 위험할 수도 있다는 생각에 당우형은 느긋하던 태도를 버리고 두 손을 꼭 맞잡고 유신에게서 눈을 떼지 않았다. 조금이라도 이상이 보이면 바로 도움을 줄 생각으로 눈 한번 깜빡이지 않았다.
당우형의 생각과는 달리 전영득은 유신의 능력을 적절하게 평가해서 일곱 알이라고 말했다. 사실 일곱 알도 유신에게는 적은 양이나, 당우형과 마찬가지로 음기가 몰려오면서 적당한 양의 기운이 되었다.
"허허, 역시 오래 살고 봐야 하는군."
당우형 때도 기운이 밖으로 나가고 다시 들어가는 모습이 꽤 장관이었다. 그러나 일곱 알에다 특이 체질인 유신에게 비빌 정도는 아니다. 유신은 온몸으로 시뻘건 불을 밖으로 내뿜고 뻘겋고 퍼런 불을 몸 안으로 빨아들였다. 마치 사막에 사흘 동안 버려진 사람이 시원한 물을 들이켜는 것처럼 탐욕스럽게 기운을 빨아들였다.
투둑 소리와 함께 그간 빠름만 고집하면서 살짝 뒤틀린 유신의 근골들이 바르게 자리를 잡았다. 비록 많은 가르침을 받고 깊은 고민을 통해 쾌검이 그저 빠르기만 한 검이 아님을 알고 제대로 된 길에 들어서고 있지만, 그 전에 쌓였던 잘못된 습관들이 하루 이틀에 고쳐지는 게 아니다. 그리고 본인도 의식하지 못하는 나쁜 습관들이 배여 있었는데 이 기회에 새로 시작할 수 있게 되었다.
펑 소리와 함께 유신은 뱃속에 단전이 하나 더 늘었음을 알아차렸다. 예전에는 내공을 빼앗기거나 내상을 입거나 산공이 되면서 단전이 늘었는데 처음으로 긍정적인 영향으로 단전이 늘게 되었다.
'단전이 여덟 개. 그러나 한꺼번에 쓸 수 있는 단전은 하나. 혹시 이 문제를 해결하는 게 단풍을 피우는 일인가?'
- 작가의말
비축분 만드는 데 푹 빠져서 miraekimh 님이 추천해 주신 것도 몰랐습니다. 쓸 때는 몰랐는데 이젠 조금 부끄러운 글 천마입니다. 지금도 어설픈 초보지만 저 때는 글과 캐릭터에 휘둘리는 생초보였습니다. 글과 캐릭터에 휘둘리며 무리한 전개는 덜하지만 설정을 위해 비틀어서 부자연스러운 부분이 적지 않았고 장르 소설의 핵심인 재미를 제대로 살리지 못했습니다. 좋게 봐주시고 추천해 주셔서 감사드립니다.
지금 이 글부터 조금씩 나아지고 있다고 생각합니다. 천마까지는 기틀을 마련한 것이고 지금부터는 인터리어를 연습하는 과정입니다. 언젠가는 무협의 세계에 멋진 건물 하나 남길 수 있도록 노력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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