옛날 옛적에
우문현성은 고아다. 그리고 어린 시절의 기억이 전혀 없다. 당시 백련교는 고아가 무척 많았다. 주원장의 군대와 중원 무림의 무인들에게 쫓기며, 죽거나 실종된 어른이 많았던 탓이다.
그런 고아들은 교에서 한곳에 모아놓고 키웠다. 글을 빨리 익히거나 무공을 잘 배우면 밥을 넉넉하게 준다. 우문현성은 하루 세끼 꼬박꼬박 챙겨 먹었다.
"내게 검을 배워볼 생각 없느냐?"
"얼마나 강하십니까?"
웬만한 무인들은 다 우문현성에게 거절당했다. 최강의 무공이 아니면 배우지도 않는다는 신념을 가진 꼬마는, 지금까지 마음에 드는 무인을 만나지 못했다.
사내는 어른 머리만큼 큰 돌멩이를 공깃돌처럼 들어 올렸다. 외공 고수들은 대부분 가볍게 해내는 일이라 우문현성은 여상스럽게 흘렸다.
"받아 봐."
사내는 커다란 돌멩이를 우문현성에게 훌쩍 던졌다. 깜짝 놀란 우문현성은 보법을 펼쳐 옆으로 피했다. 뒤로 피하면 상대의 후속 공격에 대처할 때 선택이 적어진다. 반격을 염두에 두고 옆으로 피하는 우문현성을 보며, 사내는 고개를 젖히고 큰소리로 웃었다.
바닥에 떨어진 돌멩이는 풀썩 부서졌다. 돌 대신 곱게 갈린 돌가루가 소복이 쌓였다. 우문현성은 슬며시 다가가 발끝으로 돌가루를 헤집었다. 작은 알맹이 하나 없이 곱게 가루 난 것을 확인하고, 바로 무릎을 꿇었다.
"사부님, 제자의 절을 받으십시오."
사내는 우문현성을 데리고 근처 산으로 갔다. 여인들이나 쓸법한 길이가 일 척이 조금 넘는 철검을 던져준 사내는, 다짜고짜 시범을 보였다.
"낙월검은 초식이 천 개가 넘는다. 방금 가르쳐 준 초식부터 익히도록."
사내가 가르쳐 준 칠십 개에 달하는 초식을 사흘 만에 능숙하게 펼쳐내자, 사내는 길이가 조금 더 길고 무게는 훨씬 무거운 검 하나를 우문현성에게 주었다.
"내일부터 전장에 나가라. 살아서 돌아올 때마다 초식을 더 가르쳐 줄 것이다."
그렇게 아홉 살 우문현성은 검을 들고 전장에 나가게 되었다. 전장에서 목숨을 걸고 싸워야 할 상대는 명나라 군대였다. 다행히 정예군들은 만리장성에서 변방을 지키고 있어, 우문현성의 목숨은 별 위협을 받지 않았다.
"무공도 익히지 않은 자들을 상대로 상처를 입었느냐?"
사내의 비웃는듯한 말에, 우문현성은 침착하게 대답했다.
"외공을 익힌 자 셋이서 저를 협공했습니다. 아무래도 제 검이 탐났나 봅니다. 일부러 좋은 검을 들려주신 겁니까?"
"미안하구나. 그 점은 나도 생각지 못했다. 싸구려 검 아무거나 준 건데, 전장에서는 귀한 물건이었구나."
사내는 정말 미안했던지 약속했던 것보다 더 많은 초식을 가르쳤다. 이튿날 또 전장에 나가야 함에도 우문현성은 새로 배운 초식을 밤늦게까지 수련했다.
그렇게 세월이 흘러 우문현성이 열세 살이 되었을 때, 사내는 낙월검의 초식을 전부 전수했다. 천 개가 넘는 초식을 우문현성은 순서대로 펼칠 수 있었고, 사내가 몇 번째 초식을 지정하면 바로 펼칠 수 있을 정도로 능숙하게 다뤘다.
"이제부터는 무인을 상대해야겠구나. 화산과 종남의 속가 제자들이 공동파와 함께 지키는 곳이 있다. 교의 무인들과 함께 그곳을 공격하거라. 하나라도 더 죽이는 것보다 살아서 돌아오는 데 집중 해라."
"돌아오면 뭘 가르쳐 주시겠습니까?"
"낙월검의 비밀을 알려주마."
왼쪽 어깨에 깊이가 손가락 한 마디 정도 되는 상처를 입었지만, 우문현성은 무사히 생환했다. 그뿐만 아니라 화산인지 종남인지 모를 곳의 속가 제자 세 명을 상대하여 셋 다 상처 입혔다.
"사실 낙월검은 단 하나의 초식이다. 그 초식이 너무 난해하고 펼치기 힘들어서 천여 개의 초식으로 흩어놓은 것이다. 너는 이제부터 낙월검의 초식들을 모두 합쳐 진정한 낙월검을 얻어야 한다. 기억해야 할 점은, 가르쳐 준 초식 중 하나라도 빠지면, 진정한 낙월검이 아니다."
"실마리라도 주십시오."
"단술에 배를 불리려 하지 말아라."
사내의 조언을 받아들여, 우문현성은 비슷한 느낌의 초식들부터 합치기 시작했다. 초식을 줄이는 과정에, 새로운 초식이 무수히 튀어나왔다. 수련과 실전을 통해 우문현성은 취할 건 취하고 버릴 건 버렸다. 낙월검의 초식이 줄어들수록 우문현성의 명성은 높아졌고, 외당의 부당주 직을 맡게 되었다. 그때 우문현성은 열일곱 살이었다.
사내의 주선으로 우문현성은 혼인도 하였고, 이쁜 딸도 얻었다. 우문현성에게 호법 자리를 내주라는 호성이 점점 높아졌고, 피만 나누지 않았을 뿐인 친형제 같은 친우들이 생겼다.
그러나 어느 날, 전장에서 돌아온 우문현성은 아내와 딸이 사라진 것을 발견했다. 거미줄같이 희미한 실마리를 따라 찾아간 곳에는, 우문현성에게 낙월검을 가르친 사내가 있었다. 그러나 우문현성이 익히 알던 사내가 아닌, 얼굴만 같은 낯선 사내였다. 사내와 몇 수 겨룬 우문현성은, 그대로 혼절했다.
다시 정신 차렸을 때, 우문현성은 무서운 경험을 했다. 자신의 몸이 제멋대로 움직이고 있고, 감각은 매우 흐릿했다. 가장 가벼운 눈꺼풀마저 자기 힘으로 움직일 수 없었고, 그나마 시야만 남아있었다. 냄새도 감각도 제대로 느껴지지 않았고, 눈으로 보이는 상대는 입술만 움직일 뿐, 말소리는 전혀 들리지 않았다.
시야도 아주 또렷한 게 아니고, 새벽녘 물안개에 싸인 것처럼 흐릿했다. 입술 움직이는 것으로 상대가 무슨 말을 하는지 판단하려고 해도, 입 모양이 제대로 보이지 않았다. 상대가 눈을 감으면 시야마저 캄캄해져 미치지 않고 견딜 수 없었다.
그러던 어느 날, 우문현성은 마주 하고 싶지 않은 진실의 민낯을 확인했다. 우문현성이 몸을 움직이려고 노력하는 게 들켜버린 것이다. 상대는 바닥에 글씨를 적어 우문현성을 조롱했다.
- 네 몸은 내가 잘 사용하마. 그간 무공을 가르쳐준 대가라고 생각하거라.
화가 치민 우문현성은 자신의 몸을 되찾으려고 용썼다. 그러나 빼앗긴 몸을 찾는 방법은 배워본 적이 아니라 들어본 적도 없다. 그래서 아무리 애써도 화만 점점 커질 뿐이었다.
시야를 통해 자신의 아내와 딸을 단 한 번도 본적 없어, 우문현성은 십중팔구 사내가 제거했다고 생각했다. 복수심을 불태우며 몸을 되찾으려는 시도를 한시도 멈추지 않았고, 그 정성이 드디어 하늘에 닿았다.
몸을 되찾은 우문현성은, 자신이 일월교의 교주가 되었음을 발견했다. 우문현성의 방에는 무척 많은 종이가 있었고, 우문현성은 그 종이에 적힌 기록들을 읽으며 상황을 파악했다. 그러나 많은 정보를 얻고 아내와 딸을 찾아 움직이기도 전에, 우문현성은 다시 몸을 빼앗겼다.
두 번째로 몸을 되찾았을 때, 우문현성은 경공을 펼쳐 담화궁으로 향했다. 자신의 아내와 딸이 담화궁에 있다는 사실을 알아냈고, 담화궁의 위치도 알아냈다. 그러나 담화궁에 이르기도 전에 다시 몸을 빼앗겼고, 그대로 일월교로 돌아가게 되었다.
세 번째로 몸을 되찾았을 때, 우문현성은 아내와 딸의 생사를 확인하려고 경공을 최대로 펼쳤다. 그러나 여전히 담화궁에 이르기 전에 몸을 빼앗길 위기에 놓였고, 화를 이기지 못한 우문현성은 비수로 자기 심장을 찔렀다. 제대로 찌르지 못해 즉사하지 않았지만, 우문현성은 치료할 생각도 버리고 죽음을 기다렸다.
그런데 약초를 찾아 돌아다니던 약왕이 우문현성을 발견했고, 신선이 와도 살릴 수 있을까 싶은 우문현성의 목숨을 구해냈다. 그리고 기구한 우문현성의 운명을 불쌍히 여겼는지, 우행 진인과도 만나게 되었다.
"내 도움을 받을 텐가?"
우행 진인은 우문현성에게 짧은 구결을 가르쳐주며, 늘 외우고 있으라고 했다. 그 구결을 외우기 시작한 후, 몸을 되찾는 주기가 짧아졌다. 그리고 아주 조금씩 몸을 차지하고 있는 기간도 늘어났다.
몸을 되찾을 때마다, 우문현성은 사내가 하려는 일에 방해했다. 남무천에게 조언해 고수로 만들어주고, 전영득에게 일부 비밀을 누설해서 사내의 일을 방해하게끔 했다. 아내는 예전에 죽었고, 담화궁에 소궁주로 있는 딸은 우연히 한 번 만났다.
### 快劍神龍 龍遊迅 ###
정적이 흘렀다. 우문현성과 같은 고수가 눈물 흘리는 모습을 보는 건 쉬운 일이 아니다. 눈물이 샘 솟듯 하며, 우문현성은 이야기를 이어가지 못했다.
"내 아비를 죽인 건 누구요? 내 아비는 당문의 전대 화수였소."
당우형은 격동으로 말을 유려하게 잇지 못하고, 한 글자씩 힘겹게 뱉었다. 우문현성은 눈동자를 위로 올리고, 회상에 잠겼다. 눈물은 여전히 멈추지 않았다.
"미안하오. 사내가 자신이 하려는 일을 일일이 기록한 것으로 알 수 있겠지만, 기억력에 좀 문제가 생겼다네. 잘 잊기도 하고, 쉽게 기억해내지 못하기도 하고, 가끔 기억이 헷갈리기도 한다네. 잘못 기억하는 건 아니고, 기억의 순서가 뒤죽박죽이라네."
우문현성은 의자에 앉아있고, 넷은 우두커니 서 있었다. 유신의 등에 업힌 용박은 몸을 가늘게 떨었다.
"한복명이네. 물론 내 몸을 썼지. 정 복수하고 싶다면 팔 하나 정도는 내줄 생각이 있다네."
"내 아비가 어떻게 죽었는지 자세히 알고 싶소."
### 快劍神龍 龍遊迅 ###
우문현성의 몸을 빼앗은 한복명은, 자신의 몸을 모용 가에 보존했다. 다름이 아니고, 모용 가의 지하 깊은 곳에 시체가 부패하지 않게 하는 특이한 장소가 있다. 그곳에 시체를 일정 기간 보존했다가 다시 땅에 묻으면, 수십 년은 썩지 않는다.
몸의 주인이 빈번히 바뀌자, 한복명이 먼저 화해를 제안했다. 다툼이 없고 많은 사람이 행복하게 사는 세상을 만들고 싶다는 말을 장황하게 글로 적었고, 우문현성에게 몸을 돌려줄 테니 자신이 원래 몸으로 돌아가는 걸 도와달라고 했다.
한복명은 우선 자신의 몸으로 돌아간 후, 다시 모용부영의 몸으로 들어갈 생각이다. 우문현성이 일월교를 키워 황실과 무림맹을 긴장시키고, 모용부영이 된 한복명이 일월교와의 다툼에서 두각을 드러내고 무림맹에서 출세한다. 그러다 황실을 전복시키고 백련교의 세상을 만들 계획을 꾸몄다.
명나라 조정에 백련교 교도가 무척 많다. 고향을 버리고 교를 따라 관서까지 이만 리가 넘는 길을 따라온 신실한 자들과 비교하긴 그렇지만, 충분한 이득을 안겨준다면 기꺼이 백련교와 손잡을 자들이 많다. 백련교와 싸우면서 원한을 쌓은 무림인들이나 선동에 넘어간 일반 백성들만 마교에 대한 거부감이 강하지, 권족들은 오히려 백련교에 호감을 느끼고 있다.
그런데 어디서 문제가 생겼는지, 동시에 도착해야 할 시체와 모용부영 중 시체만 도착했다. 그 시체도 표국을 통해 보내온 것이어서, 표행을 이끈 표두를 은밀하게 암살했다. 그리고 당우형의 아비가 나타나서 한복명의 시체에 독을 뿌렸다.
화가 난 한복명이 고산종으로 상처를 입혔고, 도망가는 당우형의 아비를 홍두명이 쫓아가 목숨을 취했다. 홍두명 역시 우문현성과 마찬가지로 껍데기로 선택된 아이였는데, 머리가 둔하여 선택받지 못했다. 한복명의 고산종을 펼치기에는 홍두명이 더 적합했지만, 한복명이 하려는 일은 무척 대단한 일이어서, 홍두명의 머리로는 실패할 가능성이 더 컸다.
### 快劍神龍 龍遊迅 ###
"한복명은 지금 그 몸 안에 있는 것이오?"
"내가 이겼네. 우행 진인의 도움으로 한복명을 제압하고 몸을 완전히 되찾았다네."
당우형과 우문현성의 대화가 끝난 듯하여지자, 전영득이 질문했다.
"상처를 입으면 안 되는 대공은 무엇이오?"
"양의심공이네. 시간이 흐를수록 우리의 기억이 서로 섞이면서 헷갈리기 시작했네. 서로 섞이기 싫어서, 양의심공을 익혀 확실히 분리하려 했네. 만약 상처를 입었다면 정말 끔찍한 일이라네. 자네가 다른 사람이랑 섞여서 하나가 된다고 생각해보게."
"왜 나한테 확실하게 알려주지 않은 것이오? 그랬다면 훨씬 효과적으로 대처했을 수도 있소."
"자네 성격에 자세히 알려주면 오히려 의심하겠지. 그리고, 지금도 부족하지만 그때는 엄청 부족했네. 사실 한복명은 자네 둘을 죽이려 하지 않았네. 자네들에게 위기감을 심어주기 위해 내가 수작을 부렸네. 물론, 저기 남 호법은 눈치를 채지 못하더군."
전영득이 부족했다는 뜻이기도 하지만, 우문현성 자신도 부족했다는 뜻이기도 하다.
"반박귀진의 경지에 이른 겁니까?"
유신의 듣기 좋은 목소리에 우문현성은 바로 대답했다.
"내 경지에 굳이 이름을 달고 싶지 않다네. 구음진경에서 얻어낸 낙월검과, 우행 진인이 가르쳐준 풍류경의 일부 구결 덕분에 경지는 무척 높아졌지."
"영웅대회 때 모용부영의 몸을 빼앗으려 한 겁니까?"
"한복명은 내가 우행 진인과 다시 만나는 게 싫었는지, 어딘지 알기 힘든 곳들에 은신처를 만들어놓고 자신을 가뒀네. 물론 나는 부단한 노력으로 은신처를 나가려 했지. 그런데 안타깝게도 나는 진법에 자질이 평범해서 은신처를 쉽게 나오지 못했네."
"그래서 어쩔 수 없이 타협했다네. 한복명도 나 때문에 계획이 늘 실패하니 몸을 바꾸고 싶어 했고, 나도 한복명을 떠나보내고 내 삶을 살고 싶은 마음이 간절했지."
- 작가의말
옛날 옛적이라고 제목을 지은 건, 진짜 옛이야기에나 나올법한 얘기이기 때문입니다.
개연성 집착증 말기 환자인 글쇠는, 여기에서도 개연성을 살리려고 노력하고 있습니다. 이 말도 안 되는 상황에서 어떻게 개연성을 살리는지 꼭 끝까지 지켜봐 주십시오.
그리고 내일은 연참합니다. 초반 구상과 달리 마음이 살짝 변했고, 그래서 내일 같은 시각에 두 편이 동시에 올라갑니다.
Comment ' 8