낡은 귀신
그때 밖에서 비명이 연신 들려왔다. 노파를 살피는 데 정신을 집중했던 유신은 그제야 밖에 수많은 기척이 늘어난 것을 발견했다. 고수들의 기척에만 신경 쓰다 보니 하수들의 움직임은 무의식적으로 무시해버린 것이다. 서호루는 손님이 서호의 경치를 마음껏 볼 수 있게 창문을 많이 달았는데, 그 창문들로부터 호수의 물비린내보다 훨씬 진한 피비린내가 스며들었다.
"담화일현(曇花一現) 일월실색(日月失色)."
수백의 여인이 낭랑한 목소리로 동시에 외쳤다. 음률도 똑같이 맞춰 남자들의 우렁찬 함성에 비교해도 기세에 손색이 없다. 칠성문의 무인들이 피를 흘리며 쓰러져 있는 모습을 확인하고 호운천이 몸을 부들부들 떨었다.
유신을 비롯한 몇 명을 제외하고 모두 남궁용현의 주변으로 몰려들었다. 문제는 연회에 참석한답시고 병장기를 들고 온 사람이 유신을 포함해 몇 명 되지 않는다. 수련이나 비무를 제외하고 무기 쓸 일이 전혀 없는 생활을 해온 자들이 대부분이어서, 귀찮게 병장기를 직접 들고 다니는 사람이 드물다.
"몽 궁주는 손속에 사정을 두시오."
백발이 성성한 노인 둘이 서호루 안에 홀연히 나타났다. 덩치가 큰 노인은 허리에 검을 찼는데 가죽으로 된 검집이 닳고 해져서 볼품없다. 무릎 아래가 없는 노인은 지팡이 두 개를 짚고 다리 대신 사용했다.
"최명판관은 구면이고, 곁에 노인은 누구시오?"
무릎 아래가 잘린 지팡이 노인은 이십여 년 전까지 강호에 명성이 자자한 최명판관(催命判官)이다. 무공도 뛰어나지만 불의를 보면 참지 못하는 성격으로 더 유명하고, 그 때문에 최명판관이라는 별호가 생겼다. 판관은 당연히 다른 사람의 시비에 끼어들어 옳고 그름을 가려주면서 생긴 것이고, 최명은 다른 사람의 명을 재촉한다는 뜻이 아니라 자기 명을 재촉한다는 뜻이다. 상대의 신분을 가리지 않고 끼어들기에 오래 살지 못할 거라고 모두 입 모아 지어준 별호다.
"노부는 백리철이라고 하오. 소요궁의 몽 궁주의 위명은 귀가 따갑도록 들었소."
"이 아낙이 강호에 첫 출도인데 위명이라니, 검왕은 감언이설은 거두고 원하는 바를 단도직입으로 얘기하시오."
우문현성 이전에 검왕으로 잠깐 불렸던 백리철은 어떤 세력에도 속하지 않은 유협이다. 최명판관 정도는 아니지만 억울한 일을 당한 자를 보면 쉽게 지나치지 못해 강호에 평판이 무척 좋다.
"내가 여기 남궁가의 청년에게 볼일이 있소. 길을 열어주면 몽 궁주의 행사에 방해하지 않겠소."
"그건 안 되오. 여인의 마음을 농락하고 몸을 유린한 후 무정하게 버린 것도 모자라 손수 죽이려고 했소. 저런 인면수심의 위군자는 마땅히 담화궁의 판결을 받아야 하오."
"그건 그쪽 일가지언(一家之言 - 일방적인 주장)이 아니오?"
"여인이 이별을 거부하니 비수로 가슴을 찌르고, 홧김에 목을 조르다가 옷에 피가 튀니까 짜증을 내며 비수를 뽑고 떠나버렸지. 우리 소요궁에서 만든 직언단(直言丹)이 있는데 이걸 먹으면 거짓말을 못 하오. 만약 남궁용현이 직언단을 먹고도 자신의 범행을 부정하면 없던 일로 하고 곱게 물러나겠소."
백리철은 남궁용현과 눈을 마주친 후 탄식했다.
"이 백리철이 평생 누구에게 부탁해본 적이 없소. 열 배로 갚을 테니 오늘 한 번만 퇴로를 내주시오."
물러설 길을 내달라는 말은, 안 내주면 뚫겠다는 뜻이다. 사정하는 듯한 말이지만 은근한 협박을 품고 있다. 그러나 소요궁의 궁주 몽소요 역시 부러질지언정 굽히지 않는 성격이었다.
"오늘 불쌍하게 죽은 아이를 위해 꼭 저놈에게서 자백을 받아내야겠소. 죽은 사람은 살릴 수 없지만, 최소한 구천에서 편히 눈을 감도록 하는 게 도리 아니오. 신이 막으면 신을 죽이고 부처가 막으면 부처를 베겠소."
그때 계속 침묵을 지키던 최명판관이 입을 열었다.
"몽 궁주, 우리 초면도 아닌데 한 번만 사정을 헤아려주시오. 내 막내딸의 아들이오."
몽소요는 최명판관의 말에 이를 악물었다. 불의를 참지 못하는 최명판관이 담화궁을 도와 악한 자들을 벌한 게 한두 번이 아니다. 거기에 최명판관의 막내딸은 담화궁 제자였다.
"죄를 확인한 후 처벌을 줄일 수는 있소. 그러나 죄가 없던 것으로 하는 건 안 되오. 정 걱정되면 판관께서 우리와 동행하고 판결도 직접 지켜보시구려."
"그건 아니 되오. 이 늙은이가 목숨이 얼마 남지 않았소. 죽기 전에 이젠 하나뿐인 혈육과 오붓하게 시간을 보내고 싶소."
"대화가 무의미한 것 같소. 손속에 사정을 두지 않을 테니 알아서 조심하시오."
꼼짝하지 못했던 언무득과는 달리 백리철은 검을 부드럽게 움직여 몽소요의 공격을 전부 막아냈다. 유신의 예상대로 몽소요는 눈에 보이지 않는 무언가로 공격과 수비를 하고 있었다. 유신이 미리 알고 집중하지 않았으면 검과 가늘고 투명한 줄이 부딪치는 걸 알아차리지 못했을 것이다.
대부분 담화궁 여인들은 면사로 얼굴을 가리고 있었다. 얼굴을 가리지 않은 여인들은 최명판관과 남궁용현 그리고 몇몇 젊은 후기지수 중에 고수로 알려진 자를 맡았다. 최명판관은 지팡이 하나로 균형을 잡고 남은 지팡이 하나로 셋의 합공을 막아내는데 여유가 보였다. 만약 다리 두 개가 성했으면 무척 강했을 것 같은 느낌이다.
최소 셋에서 많게는 다섯이 병장기도 없이 맨손인 자들을 몰아세웠다. 실질적으로 고수라 불릴 자는 많지 않고, 고수라 불리는 자들도 실전 경험이 부족하다. 무공도 보잘것없고 병장기도 없는 자들은 속수무책으로 당했다.
'아무리 귀하게 자랐다고 해도 칼 잡은 강호인인데 이렇게 형편없다니.'
당문이나 서문가처럼 혈족으로만 구성된 가문은 많지 않다. 남궁가처럼 남궁의 성을 사용하는 자만 수백 명인 가문도 따로 제자를 받는다. 마교와의 싸움에 대부분 제자들을 보내고 혈족은 얼마 보내지 않았다. 마교와의 전선에 내보내도 일선에 나서는 법이 없고 어쩌다 전투에 참여해도 호위무사가 보호해준다.
오늘 이 자리는 남궁용현을 비롯한 몇 명을 제외하면 전투 경험은커녕 비무 경험도 모자란 자들이 대부분이다. 그저 보여주기로 마련한 자리여서 몇 명으로 구색을 갖췄을 뿐, 대부분 가문에서 대단한 위치에 있는 자들이 아니다. 검이 없는 남궁용현이 믿고 몰려온 자들을 지켜주지 못해 세가 직계들의 비명이 끊이지 않고 울렸다.
찰싹 소리와 함께 유신에게 덤벼들던 여인이 검면에 귀싸대기를 맞고 혼절해 쓰러졌다. 이미 유신의 검 싸대기에 혼절한 담화궁 여인이 스물에 가깝다. 멍청이라도 포기할 법한데 담화궁 여인들은 목숨이 열 개라도 되는 듯 겁이 없고, 질기기가 쇠심줄이 울고 갈 지경이다.
"그만."
몽소요가 뒤로 훌쩍 물러서며 짧게 외치자 담화궁 여자들이 썰물처럼 물러섰다. 한 식경도 안 되는 사이에 술과 음식 향기 그리고 계혈단의 단향이 그윽하던 서호루가 피비린내로 가득 찼다. 육십 명에 가까운 세가 직계들은 열 명만 남고 전부 목숨을 잃었다.
남궁용현과 동방세훈 그리고 언무득이 살아남았고 유신의 곁에 붙은 호운천, 그리고 병장기를 휴대한 다섯 명의 청년이 남았다. 모두 짧은 쇠막대기를 무기로 삼은 걸 보니 같은 가문인듯하다. 거기에 백리철과 최명판관까지 모두 열두 명이 남았고 상대편은 죽은 사람은 하나도 없고 부상이나 혼절로 물러선 자가 오십 명 정도 되어, 여전히 사백 명이 넘는 무리를 이루고 있다.
"몽 궁주, 적당히 화풀이한 것 같으니 오늘은 여기까지 하는 게 좋을 것 같소."
"남궁용현만 넘기면 남은 사람들은 곱게 보내주겠소."
몽소요의 고집에 백리철의 얼굴이 붉어졌다. 우문현성과 행한 몇 번의 비무에서 모두 졌지만, 그래도 잠시나마 검왕이라 불렸던 사람이다. 자신의 체면을 전혀 봐주지 않는 몽소요에게 이가 갈리지 않으면 부처님이다.
"판관, 오늘 네 기일이 될 것 같구나. 길동무를 넉넉하게 보탤 테니 염라대왕 만나는 길에 꽃 같은 처자들과 함께 즐겁게 가거라."
"네 덕분에 이십여 년 목숨을 부지했다. 내 외손은 잘 부탁한다."
백리철의 기도는 시종 부드러웠고 검을 휘두르는 모습은 마치 노를 젓는 늙은 뱃사공처럼 자연스러웠다. 그러나 마음을 달리 먹자 기도가 북풍한설처럼 차갑게 변했고, 서릿발 같은 기세가 적아를 불문하고 날카롭게 후벼팠다. 담화궁의 일반 문도들은 물론 유신 덕분에 살아남은 호운천도 부들부들 떨면서 몸을 가누지 못했다.
"백리철, 친우보다 네 걱정이나 해라."
새로 나타난 건 대머리 노인이었다. 담화궁은 여인만 있는 문파라고 알고 있기에 남자가 분명한 대머리는 따로 내력(來歷)이 있을 것이다.
"너는 백련교의 소법왕?"
"대머리가 되었는데도 용케 알아보는구나."
"담화궁이 백련교의 가지였구나."
"허튼소리. 우리 담화궁은 저들과 아무 연관이 없다."
몽소요가 버럭 소리 지르자 소법왕이 능글거리며 말했다.
"어차피 다 죽이면 되는데 입 아프게 변명해서 뭐하오. 참, 저기 얼굴이 반반한 남궁가의 씨는 살려두라고 했지."
서로 기세를 키우며 기회를 노릴 뿐 누구도 먼저 손을 쓰지 않았다. 최명판관에 대한 걱정을 뿌리친 백리철은 아까와 다른 모습을 보였고, 죽음을 각오한 최명판관의 기세 역시 무시할 바가 되지 못했다.
"거기 덩치 큰 공자, 검을 여기 남궁 공자에게 넘기시오."
동방세훈의 목소리에 유신은 마음의 평정을 유지하기 힘들었다. 백의장에서 유신을 죽음으로 몰아간 자가 바로 동방세훈이다. 유신이 그때보다 덩치도 커지고 얼굴도 더 성숙하게 변했고, 기연을 얻어 체형도 조금 변했기에 저들은 유신을 알아보지 못했다. 어쩌면 크게 변하지 않았어도 저들의 기억에 유신이 남아 있지 않을 수도 있다.
"주둥이 다물어라. 한 번만 더 나불거리면 너부터 벤다."
마음이 흔들리면서 유신의 기도가 살짝 출렁였다. 그 틈을 타서 유신이 애써 누르고 있던 광포한 기세가 서호루를 가득 채웠다. 계성의 과유불급처럼, 유신 역시 경험이나 깨달음보다 훨씬 강한 기세를 담고 있어서 그것을 다스리는 데 애먹고 있다.
"그대는 누구시오?"
소법왕이 아까와는 달리 무척 정중한 목소리로 말했다. 잠깐 새어나간 기도만으로도 유신이 예사 인물이 아님을 알 수 있었다. 몽소요 역시 갑자기 나타난 유신이라는 미지의 존재에 곤혹스러운 표정을 지었다.
"나와 여기 호 공자를 곱게 보내주면 오늘 살계를 열지 않겠소."
유신의 너무 당연한 말투에 소법왕의 눈썹이 꿈틀댔다. 덩치만 컸지 이립도 안 되는 작자가 무공만 믿고 너무 오만방자하다고 느꼈다. 강호에서 생사를 가르는 건 무공이 아니다. 무공이 강하면 살아날 가능성이 커지는 것뿐이고, 실제로 생사를 가르는 건 경험과 순간의 판단 그리고 숨겨둔 필살의 절기 한두 개이다.
"뇌공, 전모, 자네들 손까지 더럽혀야 할 것 같소."
뇌공(雷公)과 전모(電母)는 천둥과 번개를 다스리는 천상의 신으로 뇌공은 우레를, 전모는 번개를 다스린다. 갑자기 나타난 뇌공과 전모의 기척은 유신도 제대로 잡아내지 못했기에 조금 긴장했다.
뇌공은 대머리지만 눈썹이 무척 두꺼웠고 코가 얼굴의 반을 차지할 정도로 컸다. 두 손에 든 무기는 천산에서 봤던 육릉매화추와 비슷했지만, 전혀 모나지 않고 둥글둥글했다. 전모라 불린 여자는 붉은 비단옷에 검은색 면사를 하고 있는데 손에는 신하들이 황제를 뵐 때 손에 드는 홀(笏)을 들고 있었다. 짐승의 뼈나 뿔을 갈아서 만든 것 같은 전모의 무기는 넓적한 홀과는 달리 한쪽 끝이 뾰족했다.
"백련교의 오래된 원귀들이 하나씩 튀어나오는구나. 판관, 네 외손이 문제 아니고 빨리 이 사실을 세상에 알려야 할 것 같다."
"이 검밖에 모르는 멍청이야, 저 원귀들이 원하는 게 내 외손이다."
그제야 유신도 가슴을 간질이던 더러운 기분이 사라졌다. 이해가 가지 않는 일이 발생할 때는 늘 숨겨진 진실이 있기 마련이다. 그 진실을 모르면 머리가 복잡해지고 가슴이 답답해진다. 유신은 억지스럽던 이번 일의 진행이 그제야 이해가 가기 시작했다. 모든 엇물리는 조각들이 남궁용현을 중심으로 하자 그제야 맞물리기 시작했다.
처음 담화궁이 나타났을 때 유신은 저들의 목표가 누군지 확신하지 못했다. 몽소요를 제외하고 최명판관과 소법왕의 기척까지 느꼈기에 자신을 목표로 한 게 아닌가 의심했다. 만약 자신을 목표로 한 것이라면 담화궁 사람을 전부 죽여서라도 후환을 남기지 않으려 했는데 이들의 목표가 남궁용현임을 알게 되자 마음이 홀가분해졌다. 남궁용현도 싫지만, 담화궁이 더 싫기에 저들을 돕기로 했다.
"두 분 노선배께서 남궁 공자를 데리고 길을 내십시오. 저 넷은 내가 처리하겠습니다."
말을 마친 유신이 대청의 중앙으로 성큼 발을 내디뎠다. 넘실거리는 광포한 기세를 억지로 누르지 않아 서호루 안에 있는 자들은 물론 서호루 밖에서 포위망을 구성하고 있던 담화궁의 제자들도 그 압박감을 여실히 느꼈다.
"몽 궁주, 억울하게 죽은 여인의 복수를 한다는 자들이 시체도 수습해주지 않고 있소. 인면수심이라 잘도 욕하더니, 본인이야말로 구시심비(口是心非 - 입만 바르고 마음은 삐뚤어지다) 아니오?"
뇌공이라 불린 자가 유신을 연신 가늠하더니 입을 열었다.
"소법왕. 우리 부부는 좀 더 살고 싶구나. 오늘은 이만하면 안 될까?"
"내가 주는 환약이 없으면 너희 자식은 고통스럽게 죽을 것이다. 오늘 너희가 목숨을 잃는다면 내가 대법왕께 간청하여 네 자식의 병을 완치하게 해주마."
뇌공과 전모가 서로 눈을 잠깐 맞추더니 결정을 내렸는지 기도가 변했다. 둘의 뭉게구름처럼 완만하던 기세가 갑자기 묵직하고 날카롭게 변하자 유신의 광포하던 기세가 민들레 홀씨처럼 변했다. 눈꽃이 흩날리듯, 마른 잎이 떨어지듯, 나비가 꽃밭을 누비듯 표홀하게 변한 기도와 함께 은접미천의 초식이 유신의 손에서 펼쳐졌다.
- 작가의말
글이 늦은 건 늦게 일어났기 때문입니다. 비축분은 어제 4편이나 써서 넉넉합니다.
어제 글에서 유신이 적극적으로 나서지 않은 건 몇몇 고수의 기척을 느꼈기 때문입니다. 뭔가 음모가 있다는 생각에 조심한 거죠. 그러나 뇌공과 전모의 기척은 느끼지 못했습니다. 이번 편에 와서 밝히는 거지만, 깨달음을 수습하지 못해 기세가 광포하게 변해 분노조절장애가 있는 사람처럼 변했습니다. 그걸 누르느라고 감각이 떨어져서 뇌공과 전모의 기척을 느끼지 못한 겁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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