귀사소년
산과 들이 슬슬 흰옷을 벗고 헐벗은 몸을 드러냈고 알몸이 부끄러웠는지 빠르게 푸른 옷을 찾아 입었다. 그즈음에 사천에서 위세가 제일 강한 당문에서 수십 명의 행렬이 출발했다. 영친하러 온 서문가와 혼례에 참석할 당문의 사람들이다.
만류분해의 시술을 받고 얼굴이 더욱 빛나는 서문초현과 당문의 대표 중 하나로 뽑힌 당우형이 영친 행렬을 따라 서문가로 향했다. 부러운 눈으로 둘을 바라보는 유신의 손에는 손수건 하나 들려있다.
초설이 보낸 비단 손수건에는 소유강호(笑遊江湖) 귀사소년(歸似少年)이라는 여덟 글자가 수 놓여 있다. 강호를 즐겁게 노닐고 돌아올 때는 소년이 되어라. 세파에 찌들지 말라는 초설의 애틋한 마음이 담겨있다.
두 문장의 첫 글자만 따면 소귀, 웃으면서 돌아오라는 뜻이다. 손수건에 초설의 따뜻한 손길이 스며든 것 같아 유신은 손에 꼭 잡고 놓지 않았다. 영친 행렬이 멀어진 후 유신은 쓸쓸한 마음으로 독의당에 돌아갔다.
"그래도 독을 조금씩 빼내고 있지 않으냐. 영웅대회 전까지 단전 하나는 건질 것 같구나."
역근경과 토납공을 결합하니 성취가 부쩍 늘었다. 여덟 살에 내공을 쌓기 시작한 첫 단전으로부터 독을 조금씩 배출하기 시작했다. 매우 소량이지만 조금씩 양이 늘고 있으니 순조롭다면 영웅대회에 참가할 수 있다.
"그래도 아직은 방심할 단계가 아니니 확신이 생길 때까지 이 늙은이 말동무를 조금 더 해줘야겠다."
그간의 관찰을 통해 독이 매우 안정적이어서 웬만한 자극으로 발작하지 않는다는 것을 확인했다. 단전에 웅크린 독을 끄집어내려고 별의별 노력을 다했기에 거의 확신할 수 있다. 그러나 독을 배출하기 시작하며 변화가 생겼을 수도 있어 독왕은 서문가로 돌아가고 싶어 하는 유신을 잡아두었다.
"어차피 독 때문에 합방도 힘들다. 그러니 잡념을 지우고 토납공에 집중해라."
역근경의 동작을 수련하며 의념을 움직이고 동시에 토납공으로 호흡했다. 이젠 제법 익숙해서 처음처럼 버벅거리지 않는다. 독왕 역시 자신이 새롭게 고친 동작을 수련하면서 더 높은 경지에 대한 열망을 불태웠다.
### 快劍神龍 龍遊迅 ###
눈이 녹으면서 대부분 땅은 눅눅하다. 그래서 바람이 세게 불어도 먼지가 잘 일지 않는다. 그러나 서안 근처의 산등성이는 흙먼지가 안개처럼 자욱하게 퍼졌다. 먼지가 가라앉은 후 검과 주판을 든 두 사내가 모습을 드러냈다.
검을 들고 땅에 주저앉은 사내는 남무천이고 주판을 들고 서 있는 사내는 전영득이다. 당문에서 치료받은 후 내공이 급증한 전영득은 빠르게 적응하기 위해 남무천과 비무를 거듭했다. 그리고 끝내 비무에서 남무천을 이겼다.
"가자, 무천아."
"전 형. 치료받고 무공이 강해지니 나를 대하는 태도가 예전 같지 않소."
"예전에는 네가 무공이 훨씬 강하니까 내가 양보할 수밖에 없었지. 지금은 네가 반 초식 정도 앞서지만 내가 나이 더 먹었으니 그냥 맞먹자."
남무천은 일어서서 몸에 묻은 먼지를 툭툭 털었다. 더럽게 싸우는 남무천의 특성상 전영득의 옷이 훨씬 더러웠다. 먼지를 대충 털고 둘은 서안으로 향했다.
"전 형, 왜 내가 비무에서 졌을까?"
"나는 제대로 배웠고 넌 실전을 통해 터득했지. 법도를 따지는 비무에서는 내가 당연히 우위고 실전이라면 아무래도 네가 이기지. 네가 알맞은 검법을 십 년 정도 수련하면 우문현성도 이길 수 있을 거야."
"전 형, 예전에 교주 자리를 놓고 둘이 다퉜다고 하더니 아직도 악감정이 남았나 보오."
"너를 믿을 수 있을 때 진실을 알려주마. 우선 네게 검이나 장만해 줘야겠다. 맨날 검 망가질까 봐 내공 낭비하는 꼴을 봐줄 수가 없어."
"내일 해가 서쪽에서 뜨겠구려. 전 형이 전낭을 열다니."
농담으로 알고 받아쳤던 남무천은 전영득이 진짜로 검을 사주자 깜짝 놀랐다.
"전 형, 혹시 독왕이 실수한 거요? 설마 치료를 잘못해서 목숨이 얼마 안 남은 거요? 아쉽지만 독왕은 나도 두려워서 복수는 해주지 못하겠소."
"원래 치료를 받지 않으면 나는 팔 년 정도 살 수 있었어. 그런데 치료를 받았기에 언제 죽을지 모른다. 조금이라도 더 살기 위해 강력한 우군인 너에게 투자하는 거지. 등가교환이니까 신경 쓰지 마라."
"그래도 검을 너무 많이 사는 건 아니요?"
등에 다섯 자루의 검을 멘 남무천이 싱글벙글 웃으며 말했다. 가장 싼 검이 은자 서른 냥이 넘는다. 잘 만들어진 검만 보이면 본인이 가격을 제시해서 구매했다. 전영득이 제시한 가격이 합리하였는지 검장들은 굳이 전영득과 가격으로 실랑이질하지 않았다.
"영웅대회 방해하려면 어쩔 수 없지. 네가 검을 하도 험하게 다루니 말이다."
"그런데 전 형, 예전부터 궁금했는데 항상 얼굴이 냉랭해 보여서 질문을 못 했소. 어디서 이렇게 많은 돈을 구한 거요?"
"우리 할아버지가 도굴꾼이었어. 도굴로 얻은 보물을 팔아서 우리 아버지를 공부시켰지. 그런데 재수 없게 주원장이 대신들을 숙청할 때 걸려들었어. 나는 할아버지가 안고 도망쳐서 겨우 목숨을 부지했고 그래서 명교에 투신하게 된 거다. 쾌검신룡에게 준 옷은 할아버지 유물이야. 원래 혼인하면 마누라 입히려 했는데 지금까지 장가를 못 갔지."
"전 형이 평소 얼굴 늘어뜨리고 동전 한 푼도 따지니까 여자들이 싫어한 거요."
"그런데 영웅대회 왜 방해하는지는 안 물어?"
"물어봐도 안 알려주겠지. 어차피 방해하기로 마음먹었으니 알든 모르든 중요하지 않소."
남무천의 얼굴에 강한 살기가 나타났다 사라졌다. 무림맹에서 그날 백의장으로 간 게 누군지 알아내지 못했다. 세력이 있다면 은밀히 알아내는 시도를 했겠으나 남무천은 세력이 없다. 그리고 전영득도 가진 세력을 다 잃고 교에서 쫓겨났다.
"하오문도 무림맹 의뢰는 아예 받지를 않으니. 그리고 하오문 일부가 교의 세력이라 함부로 의뢰도 못 하겠고."
전영득의 말에 남무천은 묵직한 미소를 지었다.
"괜찮소. 더는 참을 수 없으면 다 죽여버리겠소."
"그래도 가문은 알고 있으니 찾기 어렵지 않을 것이다. 세 가문을 우리 둘이 상대하는 건 무척 어렵겠지만 말이야."
"전 형은 왜 내 복수를 이렇게 열심히 돕는 거요?"
"그날 백의장에 있었던 세 놈을 찾아내서 자초지종을 알아내면 그때 말해주지."
### 快劍神龍 龍遊迅 ###
머리는 백발이지만 수염은 아직 검은 노인이 낚싯대에 집중하고 있다. 교활한 고기는 미끼를 덥석 물지 않고 톡톡 건드리며 간 본다. 바늘을 입에 제대로 걸어야 하기에 급한 마음을 누르고 인내했다. 미끼가 다 뜯어먹힐 것 같은 불안감이 엄습했지만 억지로 참아냈다.
"그렇지."
크게 소리를 지르며 곁에 죽립을 쓴 낚시꾼을 살폈다. 새벽에 올 때부터 미동도 없이 앉아있는 낚시꾼은 대나무로 짠 통발에 커다란 잉어 한 마리를 담아놓고 있었다. 붉은색 비늘에 테두리가 황금색을 띤 보기 드문 물건이다.
다가가서 얼마에 팔겠냐고 흥정했지만 팔지 않는다는 소리만 들었다. 그래서 오기로 곁에 앉아 낚시를 시작했다. 세 번 던지면 한 마리 잡는 아주 어복 터지는 날이지만 적린금변(赤鱗金邊)만 보면 배가 아파서 점심도 거르고 낚시에 열중하고 있다.
낚싯대를 당기는 힘이 장난 아니다. 앙탈을 제법 부리는 걸 보니 월척이 분명하다. 바늘을 털려고 힘차게 펄떡이는 고기를 노련한 기술로 제압했다. 추운 날씨에도 이마에 땀이 살짝 날 정도로 힘을 빼니 고기도 힘이 다했는지 반항을 멈추고 얌전히 끌려 나왔다.
크기는 적린금변과 비슷하지만 비늘 색이 너무 차이가 났다. 평소라면 월척을 낚았다고 기뻐했겠지만 오늘은 오히려 화만 더 커졌다. 작은 것들은 전부 강에 풀어주고 가장 큰 고기만 챙긴 노인은 자리를 떴다.
노인이 멀리 떠나자 미동도 하지 않던 사내가 낚싯대를 당겼다. 낚싯줄에 칭칭 감긴 커다란 잉어 한 마리가 끌려 나왔다. 머리부터 꼬리까지 새까맣고 비늘이 연한 노란색을 띤 검은 잉어였다. 보통 흑원수(黑元帥)라고 부르는 잉어로 적린금변보다 더 귀한 고기다.
손에 내공을 집중해 두 잉어의 배를 가르고 내장을 털어낸 다음 곧 한음장을 펼쳐서 물고기를 꽁꽁 얼렸다. 아주 꽁꽁 얼린 잉어를 솜이불에 싼 후 뒤로 던졌다. 어느새 나타난 사내가 잉어를 받아든 후 경공을 펼쳐 달렸다.
"부인의 몸은 아직도 차도가 보이지 않았느냐?"
"많이 나아지고 있습니다. 존주께서 보낸 잉어로 보신하면 더 빨리 나아질 것입니다."
"생각지도 못한 방해를 받아 반나절을 허비했구나."
"더는 방해하지 못하게 할까요?"
"아니다. 꼭 죽여야 할 사람만 죽인다. 무의미한 살생을 해서 내 자식이 그 벌을 받은 것이다. 이제부터라도 악업을 적게 쌓아야겠다."
주인의 아픈 곳을 건드린 수하는 입을 다물었다. 눈을 감고 한참 침묵을 지키던 사내가 다시 입을 열었다.
"이곳에는 이젠 대물이 없구나. 낚시터를 옮겨야겠다. 그리고 백면귀산이 적란을 얻어 치료를 받았다는 건 무슨 소리냐?"
"새로 들어온 정보로 확인해 보니 오독교의 독만이 적란을 당문에 선물로 준 것 같습니다. 당문에 혼약을 청하러 가서 넘긴 것 같습니다."
"우행 이 늙은이는 뒈지지도 않고 살아서 나를 방해하는구나. 어떻게 수련하면 앞날을 볼 수 있는 것일까?"
"홍면주귀한테 주의를 시킬까요? 홍면주귀가 오독교에 지시를 하지 않았어도 이런 일이 없었을 겁니다."
"아니야. 하늘의 뜻을 인간이 어찌 감히 헤아리느냐. 천하를 위한 내 마음을 하늘이 몰라준다면 어쩔 수 없지. 다만 내 진실한 마음이 변하지 않으면 하늘이 언젠가는 굽어살피리라 믿을 뿐이다."
"남무천이야 생각 없는 놈이니 상관없지만 백면귀산은 꽤 많은 걸 알고 있습니다. 놈이 입을 함부로 놀리면 큰일 아닙니까?"
"그놈이 입을 놀리면 오히려 나를 돕는 것이지. 누가 마교 호법의 말을 곧이곧대로 듣겠느냐. 그걸 적당히 각색하면 오히려 내게 유리해진다. 백면귀산은 영리한 놈이니 이미 계산을 마쳤을 것이다."
"존주께 도움이 못 되어 송구합니다."
유일하게 주인을 대신할 수 있는 일이 머리 굴리는 일인데 그것마저 존주보다 못하다. 수하는 쓸모없는 자신이 너무 가증스러웠다. 둘 다 침묵으로 하염없이 시간을 흘려보냈다.
그때 낚시를 마치고 돌아갔던 노인이 젊은 장정 몇을 데리고 왔다.
"이놈, 내 강에서 잡은 잉어를 내놓지 못할까."
"하늘의 뜻은 참으로 헤아릴 수 없구나. 낚시하다가 물에 빠져 죽은 것으로 하자."
사내의 몸이 허공에 떠오르더니 그대로 날아갔다. 중간중간 몸이 가라앉으려 할 때 낚싯대에 맨 은사로 바닥을 한 번씩 찍었다. 눈썰미가 무척이나 좋은 사람이 아니라면 그저 허공으로 날아가는 것으로 보인다.
"헉, 용왕님이셨구나. 제발 이 어리석은 중생을 용서하시오."
몽둥이를 팽개친 장정들이 노인과 함께 황급히 무릎을 꿇고 머리를 조아렸다. 주인이 떠나자 수하는 허리춤의 채찍을 풀었다. 길이가 삼 장이 조금 넘는 채찍이 수하의 손에서 하늘거렸다.
"물에 빠져 죽은 것이니 일단 산채로 바닥에 가라앉혀야겠구나."
뱀처럼 뻗어 간 채찍이 노인과 장정들을 옭아맨 다음 강바닥으로 끌고 들어갔다. 채찍으로 전해지는 몸부림을 음미하던 수하는 만족한 웃음을 지었다.
"이 맛에 존주께서 낚시를 하시는구나."
손목을 한 번 가볍게 털자 채찍이 살아있는 뱀처럼 강에서 기어 나왔다. 허공에 채찍질 몇 번 하니 물기가 깨끗하게 사라졌다. 채찍을 허리에 감은 후 수하는 주인이 앉았던 자리의 흔적을 모두 지웠다.
누군가 낚시를 했던 흔적을 다 없앤 후 몇 번이나 더 꼼꼼히 살피고 나서야 만족하고 자리를 떴다. 작은 탐욕으로 큰 대가를 바친 시체들만 강물에 둥둥 떠다녔다.
- 작가의말
노인의 방해를 받아 반나절 낭비했다는 말, 진심이 아닙니다. 노인이 떠날 때까지 낚싯줄로 잡아놓은 잉어를 미동도 못 하게 살린 채 잡고 있었죠. 그 자체만으로 무척 대단한 수련입니다. 옆 사람이 낚싯줄에 고기가 있다는 걸 눈치 못 채게 반나절 묶어둔 겁니다.
제 글은 일부 소설처럼 일반인이 있는 곳에서는 무공도 경공도 못 펼치고 그렇지 않습니다. 그런 설정의 소설 볼 때마다 이해가 안 되더군요. 경공 펼치면 사회적 위화감을 조성해서 경찰이 잡아가나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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