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귀어진
꽃잎 같은 흰 눈이 펑펑 쏟아지고 서문가의 비무장에는 스러진 담화들이 스물을 채우고 있다. 눈이 벌겋게 달아오른 유신은 검을 왼손으로 바꾸고 손을 엉덩이에 가져다 비볐다. 땀이 조금 난 것뿐인데 손이 피에 전 것 같은 착각이 생겼다.
'살인이 쉬운 일이 아니구나.'
첫 비무도 아니고 첫 살인도 아니지만, 유신에게는 처음처럼 다가왔다. 아비의 복수를 하며 사람을 죽였을 때 당연히 해야 할 일을 한 것처럼 아무렇지 않았다. 오히려 오현사 주지와 중들이 잘못을 뉘우치는 대신 끝까지 자신을 해하려고 했던 것에 느낀 슬픔과 울분만 있었다.
비록 첫 상대는 벼르고 별렀던 복수 상대지만, 그 후에 죽인 스무 명에 가까운 상대는 아무런 원한도 없다. 그러나 남무천에게서 검을 맞대면 최대한 죽이고 그게 아니라면 다시 덤비지 못할 정도로 몰아붙이라고 배웠기에 유신은 독하게 손을 썼다.
"이런 소모전은 끝내고 차라리 최고수들끼리 담판을 지읍시다."
스무 명의 목숨이 사라질 때까지 유신은 스무 번의 찌르기를 펼쳤다. 한 명은 담화궁이 직접 처단했으니 딱 한 명에게만 두 초식을 사용한 셈이다. 그리고 그 한 명이 방금 가슴을 찔려 죽은 상대다.
집요하게 목만 노리는 유신 습관 때문에 다른 곳의 방비를 소홀히 하다가 심장을 찔려 죽었다. 비명과 피와 시체들 때문에 판단력에 문제가 생기고 침착함을 잃은 것이다. 그리고 유신 역시 지금 집중력이 한계에 달한 느낌이 들었다.
"팔 하나 정도 내놓으면 고려해 볼게요."
단약 몇 개를 삼킨 담 부인의 얼굴은 혈색을 되찾았다. 양귀비나 마환초 같은 약재가 들어간 듯 얼굴에 홍조가 오르고 잘린 부위의 통증을 다 잊은 사람처럼 행동했다. 허리가 굵은 여자가 손으로 입을 가리고 귓속말을 했다.
"부궁주, 저들의 의견을 따르는 게 어떻습니까. 부궁주의 안위도 생각하셔야죠."
전음을 사용하면 소리가 집중되어 들으려고 작정한 고수에게는 오히려 더 쉽게 들린다. 이럴 때는 차라리 낮은 소리로 말하는 것이 상대에게 들리지 않는 좋은 방법이다.
"저 어린놈만은 꼭 죽여야겠어요."
부궁주의 뜻을 알아챈 여자는 단약을 먹어 정신이 약간 몽롱한 부궁주를 대신해 나섰다.
"우리 측은 두 명만 남았습니다. 쾌검신룡이 우리 둘까지 상대하고 나면 승패를 불문하고 담화궁이 곱게 떠나겠습니다."
유신이 한 명만 더 이겨서 마지막 사람과 상대한다면 승패를 불문하고 오늘 일은 깨끗이 잊겠다는 뜻이다. 이후 도화궁을 멸문한 게 서문가의 소행이라 밝혀져도 담화궁은 복수할 명분을 잃게 된다.
"덤벼."
하늘에서 눈이 내린다. 유신의 눈에는 오만삼천육백오십삼 개의 눈송이가 보인다. 그 눈송이들은 각자 다른 모습으로 내려오지만 그 난잡함 가운데 흔들리지 않는 법칙이 존재한다.
땅에서 피가 흐른다. 한참을 지켜봐도 얼어붙은 것처럼 전혀 움직이지 않고 있지만, 유신은 눈을 물로 녹이는 피, 바닥에 조금씩 스며드는 피, 밖으로 흐르지 않지만 안에서 느리게 소용돌이치는 피가 보였다.
한 쌍의 소환도를 든 여자가 분기(憤氣 - 분한 기운)를 참지 못하고 뛰쳐나왔다. 유신이 선 곳은 바닥이 깨끗하지만 유신의 맞은편은 피가 흥건히 흘러서 바닥이 조금 미끄럽다. 물론 유신 쪽도 녹은 눈으로 미끄럽지만 피는 물보다 진하다.
여자가 적정 거리에 들어서자 어김없이 유신의 찌르기가 펼쳐졌다. 이젠 누구라도 그 검로와 변화와 빨라지는 시점을 짐작할 수 있다. 물론 방금 목 대신 심장을 노리는 변화도 보여주어서 소환도를 든 여자는 방심하지 못했다.
챙 하는 소리와 함께 심룡척이 두 소환도와 부딪혔다. 바로 유신의 검이 가속하는 시점을 정확히 맞춰서 여자가 두 손의 소환도를 교차하며 가위로 엿 자르듯 유신의 심룡척을 부러뜨리려 했다.
가속하는 원리는 모르지만, 검에 내공을 더하는 순간 타격하면 내상을 입힐 가능성이 크다. 그리고 가속하면서 변화까지 주기 힘들어서 검을 부러뜨리기에 가장 적합한 시기다.
그러나 여자가 간과한 점이 있다면, 동인진의 십팔 동인도 결국 심룡척을 부러뜨리지 못했다. 전설처럼 진짜 용의 뼈와 비늘로 만든 것인지는 몰라도 지금까지 알려진 검 중에서 가장 튼튼한 검은 틀림없다.
그리고 여자가 미처 몰랐던 것이 하나 또 있다. 바로 가속하는 순간 내공을 움직이는 것이 아니라 미리 내공으로 검 속에 진동을 불어넣었고 어느 순간 검이 알아서 가속하는 것이다. 소환도가 검이 가속하려는 순간 심룡척을 가격하자 그 진동이 소환도로 넘어갔다.
진(震)이 진(振)으로 바뀌었다. 내부의 진동이 여자의 소환도에 전달되어 두 소환도를 심하게 흔들었다. 겉은 평온하고 내부에만 진동을 품었던 유신의 검과는 달리 두 소환도는 사시나무 떨듯 부르르 떨면서 여자의 손아귀를 저리게 만들었다.
보통 어설픈 쾌검은 소리가 난다. 유신의 찌르기도 처음 펼칠 때 츳 소리를 냈고 가속할 때 슛 소리를 냈다. 그러나 하늘에서 떨어지는 눈송이를 셀 수 있을 만큼 집중한 유신의 찌르기는 아무 소리도 내지 않고 여자의 목을 뚫었다. 두 소환도가 떨리면서 여자의 두 팔이 살짝 벌어진 틈을 제대로 찔렀다.
유신이 힘을 과하게 써서 검이 여자의 목덜미로 삐져나왔다. 유신은 여자의 목에 박힌 검을 뽑아서 힘껏 털었다. 검을 한 번 털자 검에 묻은 피가 하나도 남지 않고 사라졌다. 만약 소환도를 든 여자가 미리 유신의 검에 피가 잘 묻지 않은 걸 발견했다면 평범한 검이 아닌 걸 알고 다른 대응을 했을 것이다. 그러나 강호 경험의 부족과 무당이 주는 위세 때문에 이런 세세한 것들을 놓치고 말았다.
"너보다 늦게 일류에 든 유신이 절정고수를 한 수에 제압한 것이 무슨 이유라고 생각하느냐?"
"열 초식 수련하는 것보다 필살기 하나 제대로 수련하는 게 낫다는 뜻인가요?"
청산은 초현의 뒤통수를 후려치고 싶은 충동을 참았다. 무당도 있고 담화궁도 있는 자리라 근질거리는 손을 억지로 내렸다.
"절정고수가 자기 무공을 펼쳤으면 유신은 대응하기에 급급했겠지. 그런데 상대는 멍청하게도 유신의 찌르기에 집착하고 그것을 깨려고 했다. 이미 많은 사람이 한 수에 죽은 것을 보고 호승심이 생긴 것이지. 상대를 이기고 죽이려면 상대가 가장 잘하는 걸 펼칠 기회를 주지 말고 몰아쳐야 한다. 한마디로 저 여자가 멍청했다는 거지."
"반대로 잘하는 게 여러 개라면 한두 개는 숨겨놓고 필살기로 쓸 수 있겠네요."
'필살기라는 말이 멋있기는 한데 이놈이 쓰니까 왠지 싫어지네.'
청산은 초현과 유신을 번갈아 보며 이놈도 유신만큼 철들었으면 하는 바람이 생겼다. 여자처럼 곱상한 얼굴과 고상한 말투에 처음 보는 사람은 쉽게 속지만, 가족들은 얼마나 망상이 가득 찬 철부지인지 안다.
'저 눈송이는 아까 내렸던 것 같은데 또 내리네.'
아까 유심히 살폈던 눈송이와 똑같이 떨어지는 눈송이를 보며 유신은 얼굴을 하늘로 향했다. 얼굴 특히 눈 주변이 너무 뜨거워서 눈으로 식히려는 것이다. 그 모습이 담화궁 일행에게는 승리를 자축하는 것으로 비쳤다.
"저와의 대결을 끝으로 담화궁과 서문가는 이후 아무런 은원도 없는 것으로 됩니다."
앞선 여자들은 부채나 검 혹은 도를 들고 나왔다. 철로 된 피리를 들고나온 여자도 한 명 있었다. 그러나 마지막 등장한 여자는 빈손이다. 유신은 조금 더 긴장감을 끌어올렸다.
권장법을 사용하는 고수는 병장기를 사용하는 고수보다 보통 무위가 더 높다. 내공이 더 심후하고 병장기를 든 상대의 가까이에 접근해서 근접전을 펼칠 수 있도록 보법이 무척 능숙하다. 그리고 권장법은 병장기보다 더 많은 변화와 기상천외한 초식이 존재하기에 경험이 부족한 자들은 권장법의 고수를 피해 다녀야 한다.
유신은 여자의 손을 관찰했다. 손가락이나 주먹 혹은 장저, 거기에 수도까지 무기로 쓸 수 있기에 손의 단련 정도로부터 주로 어떤 무공을 사용하는지 유추할 수 있다. 그러나 여자의 손은 무척이나 깨끗했다.
'특별한 수공을 익힌 건가?'
여자가 포권을 올렸지만 유신은 거들떠보지도 않았다. 괜히 포권을 하느라 여자에게 접근할 기회를 주기 싫었다. 여자가 포권을 거둔 순간 유신이 앞으로 크게 한 발자국 내디디며 찌르기를 펼쳤다.
권장법을 익히는 자들은 보법과 신법에 자신이 없으면 먼저 출수하지 않고 상대의 공격을 기다린다. 유신은 머리가 점점 뜨거워져서 오래 버틸 것 같지 못했다. 그래서 선공으로 상대의 반응을 살피려 했다.
목을 찔러오는 검에 여자는 눈 한번 깜빡이지 않고 두 손으로 꽃 모양을 그렸다. 유신의 눈에 여자가 그리는 꽃 모양이 확연하게 들어왔다. 바로 담화궁의 표식인 피다 만 꽃을 열 손가락으로 형상화한 것이다.
푹 소리와 함께 유신의 검이 여자의 목을 뚫었다. 동시에 여자의 옷 소매에서 우모침(牛毛針)이 날아서 유신에게 향했다.
'사천삼백스물둘.'
유신은 눈에 우모침이 적중되는 것을 막으려고 고개를 젖히면서도 우모침의 개수를 한순간에 세어버렸다. 물론 정확하다는 보장은 없다. 잘 만든 우모침인지 여러 겹으로 입은 유신의 옷을 뚫고 대부분 살에 박혔다.
목으로 피를 콸콸 쏟으며 쓰러진 여자는 누가 봐도 가망이 없다. 그리고 우모침에 적중된 유신도 혼절한 채 입으로 조금씩 검은 피를 토해냈다. 중독된 게 틀림없다.
"마지막 비무가 끝났으니 지금부터 과거에 있었던 모든 은원은 사라집니다. 이미 지난 일을 가지고 서로 얼굴 붉히는 일이 없었으면 합니다."
약 기운으로 제정신이 아닌지 담 부인의 면사 밖에 드러난 눈은 웃고 있었다. 두 절정고수와 한 명의 절정에 가까운 일류 고수, 거기에 일류 고수 열아홉에 자신의 왼팔까지 잃고도 실실 웃는 것을 보니 치매가 걱정되었다.
대문 밖에 있던 자들이 들어와 시신을 업어서 마차에 모셨다. 그리고 올 때처럼 요란하게 떠났다. 그러나 서문가의 사람들은 전혀 관심을 두지 않았다.
"진인, 어떻습니까?"
"당문을 불러야겠습니다."
송엽 진인 정도 고수라면 웬만한 독은 내공으로 모아서 배출할 수 있다. 그러나 우모침에 발린 독은 그렇게 간단하지 않았다.
"최소 네 가지 독에 중독되었습니다. 그리고 이 독들이 합쳐져서 단전 속에 숨었습니다."
그때 초현이 문득 입을 열었다.
"유신이 당 대협과 결의형제를 맺으며 당문의 피독주를 선물로 받았다고 했습니다. 아무래도 그 피독주 덕분에 독이 숨은 것 같습니다."
앞섶을 헤쳐보니 메추리 알보다 조금 더 큰 까만 피독주를 목걸이처럼 달고 있었다. 일곱 가지 채색 실로 감싼 건 초설의 솜씨가 분명했다. 피독주 덕분에 극독에도 즉사하지 않고 살아남은 게 분명하다.
"청월은 관에 가서 성도로 전서구 하나 띄워라. 담화궁의 우모침에 맞고 최소 네 가지 극독에 중독되었다고 전해라."
유신을 방으로 옮긴 다음 옷을 다 벗기고 몸에 박힌 우모침을 뽑아내기 시작했다. 혈관에 박힌 우모침은 시간이 오래되면 혈관 속으로 파고 들어간다. 독이 없어도 무척 무서운 암기다.
"이래서 담화궁을 다들 두려워한 것이구나. 절정의 내공을 가진 자가 목숨을 버리면서 동귀어진을 선택할 줄이야."
독심만 따지면 당문보다도 더한 상대다. 그리고 오늘 방문은 의아한 점이 무척이나 많다. 아무래도 알지 못하는 커다란 음모에 연루된 것 같아 서문고택은 깔끔한 결말에도 찝찝함을 잔뜩 느꼈다.
우모침을 다 뽑아낸 후 술을 끓여서 유신을 담갔다. 당문이 올 때까지 약은 함부로 쓰지 못한다. 혼절한 유신은 오랜 기간 쉼 없이 내리는 눈송이를 세었다. 수만 송이의 눈이 제각각 내리다가 어느 순간 똑같은 궤적을 그리며 내렸다. 그러다 결국 똑같은 모양으로 다르게 내리기 시작했다.
- 작가의말
담화궁은 내공이 강하고 독심이 있지만 강호 경험이나 무공은 좀 부족한 세력입니다. 상세한 건 뒤에서 풀 생각입니다.
그리고 담화궁이 대놓고 서문가를 찾아오고 생사투를 제안하는 건 정상적인 일이 아닙니다. 당연히 뭔가 숨겨진 게 있습니다. 다음 편에서 풀 작정입니다. 오래 묵혀두면 더 향기로울 때도 있지만 썩을 때도 있더군요. 이건 술이 아니라서 따끈할 때 개봉하도록 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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