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행
눈꽃이 휘날리지만 바람이 거세지 않아 추위는 몰려오지 않았다. 눈은 추위를 싫어한다. 그래서 항상 따뜻함을 갈구하며 조금의 온기라도 있으면 다가가서 덥석 안아버린다. 온기와 하나 된 눈은 사라지고 눈과 온기가 사라진 빈자리를 추위가 차지한다.
서문초현은 당우형과 즐겁게 대화를 나누면서도 가끔 걱정스러운 눈으로 서문초설을 바라보았다. 그러다 커다란 꽃배가 다가오자 걱정을 덜었다는 듯이 활짝 미소를 지었다. 당우형은 서문초현과 용유신을 번갈아 보면서 속으로 생각했다.
'서문 공자와 동생은 그야말로 불공대천(不共戴天)이군.'
불공대천은 같은 하늘을 이고 살지 못한다는 뜻으로 하나가 꼭 죽어야만 하는 원수 사이를 묘사하는 말이다. 유신이 들었다면 막상막하 혹은 불분백중(不分伯仲 - 우열을 가리기 힘들다)이라고 전음으로 일깨워줬을 것이다.
서문초현 일행은 서호와 가까운 관호각(觀湖閣)이라는 객잔에서 별채를 하나 세냈다. 둘이 늘 함께 붙어 다니고 서문초현이 따로 움직여야 할 때는 서문초설이 남장을 하고 지부대인의 장원에 머무르게 했다.
"형님, 서문세가는 왜 하인도 없이 나다니나요?"
"우리 당문과 비슷해. 외부 사람을 잘 받아들이지 않아. 강호에 은원이 많은 가문이거든."
제자를 받아 무공을 가르치는 다른 세가들과 달리 당문이나 서문세가나 가족에게만 무공을 가르친다. 특히 가문이 방대한 당문은 방계들의 자질을 선별해서 무공을 가르친다. 당문의 방계 중 자질이 부족한 자들은 당문의 절학을 접할 수 없다.
서문초설은 따뜻한 차를 마셔 몸을 덥힌 후 양해를 구하고 방으로 휴식하러 갔다. 서문초현 역시 양해를 구하고 잠시 자리를 비웠다. 유신과 당우형은 차를 마시면서 다음 행적을 상의했다.
"내가 가까운 곳에서 아무런 의문점도 발견하지 못하고 악양까지 다녀왔어. 그런데 표물을 받는 사람이 가명을 사용했는지 하오문에 의뢰해도 물건 받은 사람을 찾을 수 없었다. 그래서 다시 안인표국을 찾아 물건 받은 사람이 누군지 알아보려고 했던 거다."
"다시 악양에 가서 조사하려 해도 마교가 이미 도망가서 얻는 게 없을 겁니다. 차라리 산동으로 가서 모용세가를 조사하는 게 낫습니다."
운하를 타고 가면 산동이 금방이다. 모용세가를 어찌 조사할지 구체적인 생각은 없지만, 우선 그곳에 가서 개방이나 하오문을 통해 은밀히 알아볼 생각이다. 개방은 협의를 따지기에 모용세가의 누군가가 안인표국의 돈을 떼먹었다고 말하면 조사해줄 가능성이 크다.
"만약 그날 의뢰한 사람이 모용세가 사람이 아니라면 어찌합니까. 모용세가의 이름을 도용할 가능성이 크지 않겠습니까."
"아냐, 굳이 살인멸구를 한 걸 보면 모용세가가 틀림없어. 그 의뢰도 죽은 표두가 직접 받은 거라고 했어. 모용세가의 이름을 도용했다면 굳이 죽일 필요가 있을까?"
"형님, 만약 모용세가가 아니면 어떻게 할 겁니까? 단서가 또 끊어지는 건데요. 그리고 모용세가면 또 어떻게 할까요?"
당우형의 눈에 정광이 스쳤다. 어릴 때부터 뺨 한 대 맞으면 상대 이 두 대를 뽑으라고 배우며 자란 불굴의 사나이 당우형은 굳건한 심지가 흔들리지 않았다.
"모용세가에서 단서가 없으면 마교를 족쳐야지. 만약 모용세가라면 그놈들은 내 아비의 목숨을 최소 백 배로 갚아야 할 거야. 가문에서 나올 때 절독 세 개를 가지고 나왔다. 모용세가 방원 십 리에 숨 쉬는 자가 없게 만들 수 있다."
유신은 온몸에 소름이 끼쳤다. 흑룡패, 야명주, 피독주, 심혈을 기울여 만든 게 분명한 암기들, 문외한의 눈에도 엄청 좋아 보이는 침, 거기에 절독 세 개까지 훔쳐서 나온 당우형의 능력에 감탄을 금할 수 없다.
'역시, 형님은 싹수가 남달랐어. 그래서 벌써 절정을 바라보고 있는 거겠지.'
목검 하나 달랑 들고 강호에 발을 내디뎠던 유신과는 준비성 자체가 달랐다. 평소 말실수를 자주 해서 대단해 보이지 않았는데 어디 가나 대협 소리를 듣는 게 절대 우연은 아니다.
그때 서문초현이 방으로 들어왔다. 손에 들린 새장에는 눈을 가린 새 한 마리가 있다. 매처럼 생겼지만 덩치가 작았고 다리가 길다. 특히 머리 위에 닭처럼 붉은 볏이 있어 보는 사람에게 기괴함을 선사했다.
작은 죽통에 천을 둘둘 말아서 넣은 후 덮개를 닫고 기름종이로 한 번 더 감쌌다. 끈으로 기름종이를 단단히 묶은 다음 새의 다리에 죽통을 묶었다. 다리가 꽤 길어서 죽통을 묶기 딱 좋았다.
"용 소협께 부탁하겠습니다. 이곳에서 삼십 장 정도 떨어진 곳까지 가서 새의 눈을 가린 천을 벗긴 후 날려 보내시면 됩니다."
유신은 새를 들고 객잔과 멀찍이 떨어진 곳에 가서 천을 벗기고 새를 날려 보냈다. 허공에서 몇 바퀴 선회한 새는 곧바로 남쪽으로 날았다. 유신이 다시 돌아오자 서문초현은 새장에 대고 있던 손을 뗐다.
그제야 새장에 눈을 준 유신은 새장이 나무로 만든 게 아니라 뼈로 만들어진 것임을 알 수 있었다. 당우형이 새장을 보고 낙타 뼈냐고 물었고 서문초현은 맞다고 답했다.
"천산옹(天山翁)이라는 맹금입니다. 덩치는 작아도 무척 흉악합니다. 어릴 때부터 두 새장에 번갈아 가며 머물게 합니다. 다 자라서도 두 새장을 제외하고 다른 곳에서 잠자려 하지 않습니다."
둘의 눈이 호기심으로 반짝이자 서문초현은 자세하게 설명했다.
"일류의 수준에 이르면 배울 수 있는 수법으로 새장의 존재를 감출 수 있습니다. 그러면 천산옹은 하나의 새장만 감지하게 되죠. 그리고 한 번 목표를 정하면 하늘이 쪼개져도 바꾸지 않는 게 천산옹입니다. 용호산으로 간 숙부들의 새장을 목표로 했으니 더 가까운 곳에 이 새장이 있는 걸 감지해도 고개를 돌리지 않죠."
당우형의 눈은 호기심 대신 소유욕이 넘쳐났다. 서문초현은 미안한 표정으로 당우형에게 말했다.
"천산에서 오월과 유월 사이에 새끼를 포획해야 합니다. 사람 손을 탄 놈들은 번식하려고 하지 않습니다. 지금 저희 가문에 총 세 마리가 있습니다. 수명이 짧아도 삼십 년은 되어서 새로 포획하는 건 몇 년 뒤가 될 겁니다."
당우형은 천산옹이 제대로 욕심났는지 천산옹에 대해 꼬치꼬치 캐물었다.
"이렇게 유용한데 왜 많이 기르지 않는 겁니까?"
"식성이 무척 까다롭습니다. 고기를 그냥 주면 안 먹어요. 자신이 직접 잡아 죽인 것만 먹습니다. 그리고 그냥 먹는 게 아니라 다 헤집어놓고 썩은 후에 먹습니다. 그 냄새가 고약하기 그지없죠. 그리고 열 마리 잡아 오면 한두 마리가 살아남습니다. 성격이 무척 고약합니다."
당우형이 한 마리 달라고 하면 서문가는 줘야 할 판이다. 서문초설의 문제점을 정확히 진단하고 어렵기는 하지만 해결방법도 여러 개 제시했다. 그러나 천산옹은 서문세가에도 매우 중요하고, 어릴 때부터 함께 자라서 가족처럼 느껴진다.
"그리고 가장 큰 문제점은 새장입니다. 낙타 뼈로 만드는 새장인데 그냥 낙타 뼈로는 안 됩니다. 낙타가 죽은 후 수십 년 지나고도 부서지지 않은 뼈로만 새장을 만들 수 있습니다."
서문초현의 노력에 당우형은 포기해야 했다. 새야 다시 잡아서 키우면 되니 달라고 해도 괜찮지만, 어렵게 만든 새장까지 달라고 하는 건 무리다. 귀한 피독주를 유신에게 선물로 줄 만큼 손이 큰 당우형이지만, 다른 사람에게 그 큰손을 마구 내밀 정도로 염치없지 않다.
"이후 시간이 나면 서문 공자께서 새장 만드는 법이랑 천산옹 잡아 길들이는 법을 가르쳐주십시오. 혹시 새장 세 개도 되는가요?"
[형님, 새장 세 개면 하나를 감췄을 때 둘 중에 어디로 갈지 모릅니다. 그럼 의미가 없죠.]
"세 개를 쓰는 걸 본 적이 없습니다. 연유는 저도 잘 모릅니다."
당우형은 새삼스러운 눈으로 유신을 바라보았다. 꾸밈이 없고 대화 속에 늘 진심이 드러난다. 그리고 어린 나이에 부친의 복수를 위해 강호에 나온 것도 마음에 들었다. 본인은 아는 글자가 적다고 자신을 무식하다고 생각하지만, 당우형이 보기에는 유식한 편이다.
그러나 처음 보는 천산옹의 용도에 결합하여 새장을 두 개만 써야 하는 이유를 그 짧은 시간 안에 알아냈다는 것에서 유신의 빠른 판단력과 분석 능력을 알 수 있다. 경지를 떠나 목숨을 걸고 싸울 때 생사의 간극을 가르는 게 바로 정확한 분석과 빠른 판단 그리고 과감한 결단이다.
'든든한 동생을 얻었구나. 동생과 힘을 합치면 내 아비의 복수에 꼭 성공할 수 있다.'
개인의 은원은 개인이 해결해야 한다는 서문세가와는 달리, 당문은 복수 그 자체에 의미를 두고 있다. 복수의 과정이 아닌 결과가 중요하다. 상대가 다시 기어오르지 못할 정도의 보복을 했느냐가 가장 중요하다. 그래서 복수의 과정에 다른 사람의 도움을 받는 것을 당연하게 여기고 있다.
서문초현은 별채에 술상을 크게 벌렸다. 서문초설의 눈치가 보여 기녀는 부르지 않았지만, 사내 셋만으로도 매우 즐겁게 술잔을 기울일 수 있었다.
"여기 지부대인이요? 저희 외가입니다. 배분이 낮아 저희에게 조카 벌이 되지요. 왕래한 적이 없어서 저희도 여기에서 처음 보는 겁니다."
팽가나 언가 그리고 남궁가는 관과 밀접한 관계를 예전부터 유지했다. 서문가는 관과 가까이하지 않는 거로 알았는데 알고 보니 서문초현의 외가였다. 처음 보는 사이라 서문초설이 남장을 했음에도 모르고 있었다.
"제가 당 대협에게 큰 빚을 졌습니다. 이 서문초현을 쓸 데가 있다면 언제든 불러주십시오. 이 서문초현의 힘으로 부족하다면 가문의 힘을 빌려서라도 당 대협의 대은대덕을 꼭 갚겠습니다."
"과분한 찬사에 몸 둘 바를 모르겠습니다. 서문 소저의 호전에 제가 도움을 드릴 수 있다면 미약한 힘이나마 아끼지 않겠습니다."
당우형은 반쯤 진심을 담아 말했다. 서문초현은 강호에 처음 나왔을 때의 당우형과 비슷하다. 그래서 유신과는 다른 의미로 친근감을 느꼈다. 진심이 반만 담겼다는 것은, 이런 상황에서 으레 하는 말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튿날 아침 천산옹이 돌아오면서 당우형이 반쯤 치레로 한 말은 진심이 되었다. 서문초현은 흥분한 마음으로 둘이 일어나기를 기다렸다가 인사도 생략하고 본론에 들어갔다.
"숙부들이 소림으로 가는 걸 허락했습니다. 두 분도 북으로 가신다고 하니 소림까지 동행 부탁드립니다."
술자리에서 다음 행적지를 묻는 말에 북으로 간다고만 대답했다. 개봉으로 가는 것과 산동 교동 반도로 가는 건 완전 다른 길이다. 행적을 자세히 말하지 않은 게 오히려 둘의 발목을 잡았다.
"그러지요. 저도 서문 공자와 이별하기 섭섭했는데 마침 잘 되었습니다. 천하무공의 발원지라는 소림에 들려 안계도 넓혀봐야죠."
당우형은 오래 고민하지 않고 흔쾌히 대답했다. 당문의 사람이라면 귀에 못 박히게 듣는 말이 있다. 복수는 빠르게 하는 게 아니라 확실하게 하는 것이라고. 강호에 나온 지 팔 년 가까이 되는 당우형이 여전히 복수를 포기하지 않을 수 있는 비결이다.
지부대인에게 부탁해 마차를 하나 구했다. 돈은 서문초현도 충분하지만 돈만 있다고 원하는 물건을 바로바로 구할 수 없다. 말 두 필이 끄는 마차는 안락했다. 추위에 대비해 두꺼운 종이와 천으로 마차의 틈을 꼼꼼하게 메웠다.
마차 안에 작은 청동화로 하나까지 넣으니 추위가 전혀 느껴지지 않았다. 서문초설이 마차에 타고 당우형과 서문초현은 말을 탔다. 유신은 신법을 수련한다는 핑계로 말을 거절했다. 말 타는 법은 배운 적이 없기에 망신을 사기 싫었다.
겨울이 본격적으로 다가오며 북으로 갈수록 풍경이 점점 황량해졌다. 앙상한 가지를 애처롭게 뻗은 나무들이 추위를 호소하며 봄을 기다렸다. 따뜻한 봄을 갈망하는 나무들과 마찬가지로, 유신도 봄 내음이 그리웠다.
- 작가의말
소림으로 가즈아. 동인진 깨부수즈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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