야명주
밤이 깊었다. 야경꾼이 대나무를 두드리는 소리가 가끔 정적을 깨뜨렸다. 유신은 미리 당우형과 약속한 곳으로 조심스럽게 움직였다. 둥글던 달이 다시 일그러지며 반달에 못 미치는 모양새가 되었다.
보름 사이에 참으로 많은 일이 있었다. 항주를 떠나며 영문도 모르고 죽을 뻔했다. 그러다 거지를 만나 헤매지 않고 용호산까지 오게 되었다. 식사하러 갔다가 금강추를 얻어 대장간에서 검과 바꾸었다.
거기에서 흑면야차와 불천검을 만나 둘의 대결을 구경하게 되었다. 그리고 남무천을 업고 백의장에 가서 남비연을 만났다. 병이 골수에 미치면 편작도 치료하지 못한다고 들었는데 골수에 들어간 독을 치료하는 걸 구경했다.
삼절수를 동방가의 애송이가 잘못 건드려서 주화입마에 생명까지 위태로웠다. 사람을 그 지경으로 만들어놓고 그대로 떠나버리는 소위 명문정파의 작태를 확인하기도 했다. 당우형을 만나 구함을 받고 원수도 찾아내고 의형도 얻었다.
그리고 깊은 밤 담을 넘어 도둑질은 아니지만 도둑질과 비슷한 일을 하려고 한다. 강호에 발을 들인 지 두 달도 안 되는 사이에 평생 겪을까 싶은 일들을 체험했다. 용유신은 강호가 원래 이런 건지 자신이 특별하게 운이 없는 건지 헷갈렸다.
뻐꾹새 소리가 울리자 유신은 그 방향으로 움직였다. 당우형과 만난 유신은 잔소리부터 늘어놓았다.
"형님, 밤에는 올빼미 소리가 자연스럽죠. 두견새는 밤에 울지 않습니다."
"동생 덕분에 내가 괄목상대하네. 이후에도 학수고대하겠네."
유신은 한숨을 나직히 쉬고 길 안내를 위해 앞장섰다. 표국은 원래 사람이 살던 장원을 표국으로 삼은 것이다. 시내 중심에 가까운 곳이라 담을 높이 쌓지 않았다. 덕분에 무공을 익힌 둘은 손쉽게 담을 넘었다.
"장부랑 의뢰 내용을 적은 책자가 저곳에 보관되어 있습니다."
손바닥 크기의 자물쇠가 있었지만 당우형은 손쉽게 땄다. 강호에 널리 알려지지 않았지만 당문의 기관진식도 수준이 높다. 기관진식을 만드는 데 너무 많은 재물이 필요하고 널리 쓰이지도 않는다. 그 때문에 암기술과 결합해 연구만 할 뿐 실질적으로 사용하지 않는다.
다시 문을 닫은 당우형은 품에서 함 하나를 꺼냈다. 함을 여니 안에 흐릿한 빛을 내는 구슬 하나가 나왔다. 잔소리를 좋아하는 장방은 세심한 성격인지 서랍마다 글자를 적어 놓았다.
"형님, 경인년 의뢰는 여기에 있습니다."
당우형은 서랍을 열었다. 안에 책자를 꺼내 탁자 위에 놓은 후 구슬을 대고 내용을 확인했다. 주로 의뢰 시간을 확인하다 경진월을 찾고 자세히 읽어보았다.
"동생, 이달에 세 개의 의뢰가 있구나. 어느 의뢰가 가장 의심스러우냐?"
하나는 다른 곳으로 시집가는 새색시를 호위하는 의뢰다. 사람뿐 아니라 혼수도 함께 움직이기에 표국의 호송이 당연히 필요하다. 또 하나는 붓과 벼루를 친구에게 보내는 의뢰다. 무게가 만만치 않고 벼루는 쉽게 부서지기 때문에 표국에 맡기는 게 맞다.
세 번째 의뢰는 아주 이상했다. 의뢰인은 산동의 모용세가이다. 그리고 물건의 도착지는 호남의 악주다. 산동에서 강서까지 거리가 무척 멀다. 그리고 강서에서 호남까지도 가까운 거리가 아니다.
안인표국이 유명한 표국도 아닌데 무림에서도 세가 강한 모용세가가 굳이 이천 리나 떨어진 안인표국에 의뢰한 것, 소소한 의뢰 위주로 맡고 가을에 식량 옮기는 게 가장 큰 의뢰인 안인표국이 천 리나 떨어진 악양까지의 의뢰를 받은 것, 둘 다 의심스럽다.
"형님, 의뢰 내용을 보십시오. 모용세가의 무사 시체를 고향인 악양에 보낸다고 되었습니다. 보통 무사는 함부로 받지 않는 게 아닙니까?"
"맞다. 우리 당문은 하인도 함부로 받지 않는다. 역시 내 판단대로 이 의뢰가 가장 의심스럽구나."
당우형은 품에서 누런색의 두꺼운 종이와 검은 나뭇가지를 꺼냈다. 나뭇가지로 필요한 정보를 옮겨 적은 당우형은 종이를 조심스럽게 접어서 품에 간직했다. 책자를 서랍에 다시 넣고 구슬을 함에 넣은 후 밖으로 나가 자물쇠를 도로 잠갔다.
"형님, 그 빛을 내는 구슬은 야광주입니까?"
밖에 나오자 긴장이 풀린 유신은 궁금한 것부터 질문했다. 당우형은 고개를 저었다.
"이건 야광주가 아니고 야명주다. 야광주와 야명주의 차이를 아느냐?"
"야광주나 야명주나 같은 거 아닙니까?"
"야광주는 빛을 모으는 구슬이다. 빛을 모아 품어서 주변을 밝히지. 아예 빛이 없는 곳에서는 아무 쓸모도 없다. 빛이 강한 곳에서도 소용없지. 약한 빛이 있는 곳에서만 쓰이는 게 야광주다."
유신은 몰랐던 사실이다. 야광주나 야명주는 같은 말이고 구슬이 빛을 내는 것으로 알았다.
"야명주는 스스로 빛을 내는 구슬이다. 그러나 이 구슬은 매우 귀하다. 이 구슬은 어느 순간부터 빛을 내기 시작하고 점점 밝아진다. 그러다 가장 밝은 빛을 낸 후 다시는 빛을 내지 않는다. 일찍 발견해서 채취해야 하고 수명이 있어서 무척 귀하지. 가문에서 나올 때 여비로 삼으려고 가지고 나온 건데 쉽게 팔 수 있는 물건이 아니더구나."
유신은 슬픈 느낌이 들었다. 가장 밝은 빛을 낸 후 다시는 빛을 내지 못하는 운명이 가혹했다. 차라리 야광주처럼 남의 빛을 빌려 주변을 밝히는 게 나은 것 같다.
"형님, 이제 어떻게 움직일 생각입니까?"
"우선 가까운 곳으로 향한 두 의뢰를 조사해 볼 생각이야. 실제로 혼사가 이루어졌는지와 벼루가 제대로 전달되었는지, 그리고 의뢰한 사람이 강호와 연관이 있는지. 그리고 돌아와서 동생의 복수를 돕겠다. 네 원수면 내 원수이니 사양하지 말아라. 대신 네 복수가 끝나면 나를 도와 같이 내 원수를 찾아달라."
당우형은 유신과 작별했다. 유신은 다시 숙소로 돌아가 잠을 잤다. 원수도 찾고 했으니 일꾼으로 일하지 않아도 되지만, 먹여주고 재워주는 곳을 떠나기가 쉽지 않았다. 많은 사람이 표행을 떠난 후 유신이 하는 일은 오히려 줄었다. 물도 많이 쓰지 않고 장작도 덜 쓰니 쉬는 시간이 많아졌다.
### 快劍神龍 龍遊迅 ###
검을 든 손에 힘이 들어가지 않았다. 상대에게 몇 번이나 찔렸지만 피가 흐르지 않았다. 피륙만 다친 모양이다. 가슴을 짓누르는 답답함을 없애기 위해 고함을 질렀다. 그런데 소리가 들리지 않는다.
'천하무공 유쾌불파.'
아비는 쾌검이 가장 강하다고 알려줬다. 그런데 아비를 죽인 원수를 상대로 유신은 느리고 힘없는 검밖에 내지르지 못했다. 분하고 원통해서 젖먹던 힘까지 다해서 검을 내질렀다.
눈을 뜨고 보니 온몸이 땀투성이다. 오시에 자면서 꿈을 꾼 적이 드문데 이상하다.
소매로 땀을 닦았지만 찝찝함이 사라지지 않았다. 당우형의 경공이라면 이미 열 번도 돌아왔을 것 같은데 아직 감감무소식이다. 다른 일꾼들은 장원에서 일하고 있다. 유신은 점심 먹으러 장원으로 가려고 자리를 털고 일어났다.
그때 누군가 달려가며 표행을 나간 사람들이 돌아왔다고 소리 질렀다. 웅성웅성하며 사람들이 표국으로 몰려갔다. 이곳 안인현에서는 매년 가장 큰 행사인 셈이다. 장작을 넉넉하게 패놓은 유신도 무리에 섞여 움직였다.
표국으로 가는 내내 뜨겁던 분위기가 차갑게 식었다. 사람들이 소곤거려서 술렁이는 분위기는 있지만 기존 떠들썩하던 분위기는 사라졌다. 갑자기 통곡이 터졌다. 표행에 나간 사람 중에서 시체가 되어 수레에 실려 온 사람이 셋 있었다.
강 표두도 왼쪽 어깨에 천을 감고 있었다. 꽤 크게 다쳤는지 말라붙은 핏자국이 작지 않았다. 다친 사람은 많지 않았다. 대부분 사람은 멀쩡했다. 규모가 작은 산적을 만났을 가능성이 크다.
다른 때와는 달리 표행을 떠난 사람들은 빠르게 표국 안으로 들어간 후 문을 닫았다. 잠시 후 세 대의 수레가 시체들을 옮겼다. 얼굴이 천으로 가려졌지만 사람들은 옷차림과 체형으로 누군지 단번에 알아봤다.
구경하는 무리가 빠르게 흩어지고 유신도 장원으로 가서 점심을 먹었다. 식사하며 귀를 세우니 별의별 얘기가 다 있었다. 표국과 싸운 산적 무리가 곧 보복하러 이곳에 들이닥칠 거라는 말도 있었다. 북방의 마적은 가끔 자신들에 대항하는 자들을 응징하는 때도 있다. 이곳은 어떤지 유신도 잘 모른다.
점심을 먹은 후 임시 일꾼들은 한자리에 모였다. 일부는 정식 일꾼이 될 꿈에 부풀어 있었다. 표국주는 표국뿐 아니라 주루도 하고 양조장도 한다. 죽고 다친 사람의 자리를 대신해 임시 일꾼들이 정식으로 채용될 수도 있다.
그때 누군가 와서 유신을 불렀다. 표국으로 오라는 말에 다른 일꾼들은 전부 탄식했다. 아무래도 나이가 어리고 힘도 센 유신이 선택받은 거라며 배 아파했다. 유신은 자신을 부른 자를 따라 표국으로 향했다.
표국은 분위기가 살벌했다. 죽은 자도 죽은 자지만 불구가 될 정도로 다친 사람도 있었다. 유신을 부른 자가 자리에 가서 착석했다. 표국주와 꽤 가까운 위치에 착석하는 걸 보니 유신을 데리러 심부름을 갈 정도의 신분은 아닌 것 같았다.
"이놈, 무릎을 꿇지 못할까?"
표국주는 무공을 익혔지만 이류에도 못 미친다고 들었다. 그러나 호통 소리는 중기가 충만한 게 몸은 건강함이 틀림없다. 고용주에게 허리를 숙여 인사하는 법은 있어도 무릎을 꿇어야 한다는 법은 없다. 유신은 뭔가 잘못되었음을 알아챘다.
"나는 임시 일꾼일 뿐입니다. 내일 품삯을 받으면 당신과는 아무 상관도 없는 사람인데 왜 무릎을 꿇어야 합니까."
몇몇이 분기탱천하여 자리를 박차고 일어났다. 칼자루에 손을 가져다 대는 자도 있다. 표국주는 이들을 제지했다. 힘으로 제압하면 뒷말이 나온다.
"해마다 표행은 아무 일도 없었다. 올해에만 충돌이 발생했고 예년과 다른 점은 무공을 익힌 네놈이 일꾼으로 들어온 것뿐이다."
"표국주께서도 억지라는 건 아실 텐데요. 제가 일꾼이 된 것과 충돌이 발생한 게 무슨 상관입니까?"
"무공을 익힌 놈이 왜 하찮은 일을 하느냐?"
표국주는 잠깐 득의의 표정이 지었다. 유신은 표국주가 세상 물정을 잘 모르는 사람임을 확신했다. 운 좋게 가업을 이어받아 호의호식하며 편하게 세상을 살아온 자가 분명하다.
"무공을 익히고 거지로 동냥질하는 자들도 있습니다."
표국주가 당황하자 옆에 있던 자가 바로 귓속말을 했다. 귓속말을 들은 표국주는 다시 호통을 쳤다.
"개방은 의협지사들 아니냐. 감히 너 따위가 그분들에게 비교하느냐."
"무공을 익힌 자는 그럼 무슨 일을 해야 합니까? 제가 무지해서 국법을 잘 모릅니다."
그때 강 표두가 일어서서 표국주에게 말했다.
"국주께서 화를 푸십시오. 이는 강호의 일이라 제가 나서는 게 맞는 것 같습니다."
표국주의 준엄하던 얼굴이 빠르게 풀렸다. 강 표두 덕분에 사업이 번창하고 있다. 강호의 유명한 일류고수가 투신했다는 소문이 퍼지자 일 처리가 아주 쉬워졌다. 표국의 수익은 그대로지만 다른 사업들은 수익이 엄청 늘었다.
"네놈은 왜 나한테 거짓말을 했느냐. 일꾼으로 뽑을 때 열여덟이라 하고 나한테는 왜 스물이라고 한 것이냐?"
그날 검을 확인하고 마음이 격동하여 실수한 모양이다. 유신은 주위를 둘러보고 빠르게 계산을 마쳤다. 한쪽 어깨를 다친 자라면 승산이 있다. 다만 확고한 명분으로 누구도 끼어들지 못하게 해야 한다.
"거짓을 말한 건 인정한다. 사실 나는 올해 열여섯이다."
강 표두가 흠칫하는 게 보였다. 유신은 손바닥으로 자신의 얼굴을 쓸었다. 올라오던 열기가 조금 가라앉았다.
"내 이름은 유신이 아니라 용유신, 내 아비 이름은 용철이다."
예상외의 전개에 강 표두를 제외한 모두가 어안이 벙벙해졌다.
"음혈도, 팔 년 전 내 아비의 목숨을 앗아간 원수를 갚으러 왔다. 강호의 법도에 따라 내 목숨을 걸고 너와 생사투를 하겠다."
- 작가의말
야광주와 야명주는 제 설정입니다. 실제 빛을 내는 야명주는 없는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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