만류분해
오가는 눈빛 속에 유신은 자신이 해야 할 일을 알아챘다. 서문청월은 서문가의 대표로 왔기에 말 한마디도 조심해야 한다. 그러니 서문가의 사람이라고 하기에 어렵지만, 서문가와 긴밀한 연관이 있으며 당우형과 결의형제인 유신이 나서야 한다.
"서문초현의 매부인 용유신입니다. 아시다시피 현재 초현이 직접 비무에 나설 형편이 못 되니 완치될 때까지 기다려서 진행했으면 합니다."
유신의 요구가 거절당해도 서문청월이 있기에 최악의 상황은 되지 않는다. 유신이 해야 할 일은 최대한 유리한 쪽으로 협상을 이끌어 가서 서문청월이 최종 협상을 할 수 있도록 하는 것이다.
"나는 여기에 와서 보름 가까이 기다렸습니다. 더는 기다릴 수 없습니다. 늦어도 내일 비무를 진행해야 합니다."
혼서와 폐납을 올릴 때 본인이 직접 여자 집으로 가는 일이 드물다. 그래서 독만도 뒤늦게 소식을 접하고 성도로 왔다. 오독교는 독만 잘 썼지 무공은 평범하기에 대결에서 독을 빼면 서문초현의 압승을 예상할 수 있었다.
서문초현의 무위가 일류에 이르렀다는 사실을 알아낸 오독교는 수작을 부려 미리 오는 길목의 폐가에 주점을 차렸다. 일행이 식사하는 사이 독물을 서문초현의 머리카락 안에 들어가게 했다.
원래 계획은 비무 날짜가 정해진 후 독물을 자극해서 서문초현을 물게 하는 것이다. 그렇게 되면 서문초현은 기권할 수밖에 없다. 오독교의 사람들이 서문초현과 개별적인 접촉을 하지 않으면 누구도 오독교의 짓이라고 생각하지 못한다.
문제가 생긴 건 운남과 성도의 날씨 차이 때문이다. 운남은 겨울에 눈이 드물고 기온이 무척 따뜻하다. 웬만한 곳의 봄 날씨도 운남의 겨울보다 춥다. 갑자기 추운 곳으로 온 독물이 서문초현의 머리카락 속에 숨어든 후 그만 잠들어버렸다.
만약 비무 도중에 서문초현이 중독되면 당연히 오독교의 짓으로 몰린다. 원래는 꽤 치밀한 계획이었는데 추운 날씨 때문에 변덕이 생겼다. 그래서 계획을 임시로 바꿔 엽전에 독을 발라 서문초현을 직접 중독시키기로 했다.
독 때문에 서문초현의 체열이 심했고 유신이 최대한 평온하게 달린다고 했지만 산길이어서 꽤 흔들렸다. 그래서 잠들었던 독물이 갑자기 깨어서 초현을 물어버렸다. 물론 독만은 독물이 서문초현을 문 사실을 모르기에 빨리 대결하자고 우기고 있다.
"청운산장의 소장주는 기어코 타인의 위기를 틈타 이득을 취할 생각입니까?"
"나는 정정당당합니다."
유신은 아까 독만이 당우형의 '유식한' 말에 감탄했던 게 떠올랐다. 유신도 배움이 짧지만 얻어들은 미사여구들을 최대한 동원했다.
"천지가 함께 흰색으로 물들고(천지개백 - 天地皆白) 동장군의 위엄에 대지와 만물이 두려움 속에서 봄 처녀의 미소를 기다리고 있는 지금(동거춘래 - 冬去春來), 인생의 중대사인 혼인을 위해 천부지국(天府之國 - 촉의 땅을 좋게 이르는 말)의 명문대호(名門大戶) 당문을 찾아온 손님으로서 동해와 같은 넓은 흉금과(확여동해 - 擴如東海) 북해와 같은 엄정함을(엄여북해 - 嚴如北海) 보여줄 필요가 있다고 감히 주장합니다. 정인군자라면 타인의 위기를 틈타는(승인지위 - 乘人之危) 일을 불치(不齒 - 입에 담기도 싫다) 해야 하며 강호의 영웅이라면 만전을 기한 상대를 이기는 것을 당연히 여겨야 합니다. 방울방울 물이 바위를 뚫듯이(적수천석 - 滴水穿石) 이런 작은 것들이 쌓여서 청운산장의 주춧돌이 되고 위명이 되는 것입니다. 독만 공자는 외모가 헌앙하고(의표당당 - 衣表堂堂) 거수투족(擧手投足)에 품위가 서려 있으니 절대 소인의 행태는 하지 않으니라(불행소인지도 - 不行小人之道) 굳게 믿습니다."
당우형이 허공을 바라보며 유신이 했던 '유식한' 단어들을 외우고 있었다. 마찬가지로 독만 역시 유신의 말에 흠뻑 빠져서 입속으로 몇몇 문장을 따라 하고 있다.
"배움이 얕은 주제에 너무 반문농부(班門弄斧) 한 게 아닌지 모르겠습니다. 제 부족한 견해에 배움이 깊고 학식이 하늘에 닿은 독만 공자께서는 어찌 생각하는지 고견이 궁금합니다."
"중원인들은 배움이 깊을수록 겸손하다고 들었는데 허명이 아니군요. 용 공자의 고견을 듣고 싶습니다."
허명을 잘못 썼다고 지적해주고 싶은 충동을 꾹 누르고 유신은 서문청월과 눈빛을 스쳤다. 서문청월은 입 모양으로 대(代)자를 말했다. 대리전을 말하는 것이다. 아무래도 유신이 헛소리를 늘어놓는 사이 당문의 사람들과 은밀히 교류하고 결론을 내린 듯하다.
"흔히 이르기를 자식은 부모의 몸에서 떨어져나온 살덩이요 형제는 수족과 같다고 합니다. 인간은 세상에 태어나 절대 혼자가 아닙니다. 피로 이어지고 정으로 연결된 존재들과 서로 돕고 도움받으며 호된 세파를 이겨내죠. 비록 혼인은 초현과 독만 공자의 일이라고 하지만, 이 또한 서로 관련된 모두의 일이 아니라고 할 수 없습니다. 그러니 본인이 직접 출전할 수 없는 지금 상황에서 대리전을 벌이기 원합니다."
독만은 중원을 동경하는 촌놈이지 바보는 아니다. 오독교 소교주로서 안하무인으로 살았기에 유신의 화려한 언변에 긴장이 풀려 실수로 제안할 기회를 주고 말았다. 그러나 유신이 제안한 대로 끌려갈 정도로 멍청하지는 않다.
"이렇게 합시다. 우리 청운산장이 양보하는 거니 세 번 겨루는 것으로 합니다. 무엇을 겨룰지 하나는 서문가에서 정하고 두 개는 우리 청운산장이 정하겠습니다. 당문에는 공정한 판결 부탁드립니다."
유신은 서문청월의 눈치를 보았다. 서문청월은 고심하느라 유신과 눈을 마주치지 않았다. 유신도 짐짓 고민하는 척하며 계속 눈치를 살폈다. 그때 독만이 새로운 제안을 했다.
"만약 용 공자가 출전한다면 더 공정하게 합니다. 청운산장이 하나 당문에게 주어서 당문이 정하게 합니다."
만약 유신이 대표로 출전한다면 겨룸의 방식을 서문가와 당문 그리고 오독교가 하나씩 정하겠다는 뜻이다. 당문도 서문가와 같은 편이니 오독교에게는 무조건 불리한 조건이다. 과연 잠깐 어휘 선택을 고민한 독만은 빠르게 말을 이었다.
"먼저 청운산장 것으로 겨룹니다. 다음 서문가로 하고 마지막 당문 겨룹니다. 대표 한 명 정해서 세 번 다 같은 사람 겨룹니다."
독만의 속셈을 알 수 있다. 분명 첫 대결에서 유신을 무력화시키거나 죽일 생각이다. 그러면 남은 두 대결은 자동으로 오독교가 이긴 것이 된다. 만약 오독교의 대표가 죽거나 무력화되면 서문가가 이기게 되니 첫 대결은 무조건 독에 관한 것이라고 봐야 한다.
"그렇게 정하고 대신 대결은 삼 일 뒤로 하는 게 어떻소?"
당우형이 불쑥 끼어들었다. 그러자 독만이 잠시 고민하더니 마지막 요구를 제출했다.
"출전자와 내기 방식을 지금 정합시다. 그렇다면 사흘 뒤에 겨뤄도 상관없습니다."
서문청월은 당우형과 이미 합의가 되었는지 독만의 요구에 흔쾌히 응했다.
"우리는 출전자를 용 공자로 정했소. 그리고 겨루는 내용은 검술로 하겠소."
"우리는 구두노가 대표로 출전합니다. 그리고 대결은 독주 마시기로 하겠습니다."
독만의 뒤에 시립 해있던 수염 몇 가닥 기른 늙은이가 오른손을 왼쪽 가슴에 댄 후 공손하게 머리를 숙였다. 거의 뼈에 가죽이 붙은 정도로 말랐고 내공도 일류의 초입 정도밖에 되지 않았다.
"세 번째는 그럼 경공을 겨루는 것으로 하겠소."
그때 독만이 문득 한마디 보탰다.
"독주 마시기는 청운산장의 법을 따라야 합니다. 기권이 없습니다. 정해진 양을 마시고 정해진 시간을 버텨야 합니다. 둘 다 실패하면 청운산장 진 것으로 합니다."
### 快劍神龍 龍遊迅 ###
"우형아, 맥을 짚어보니 단전이 다섯이나 되더구나. 확실히 사마외도의 사람이 아니더냐?"
"작은할아버지, 무당의 우행 진인이 곤륜의 무공이라고 말했다니깐요."
"백 세가 넘었으니 노망났을 수도 있잖니."
칠순을 바라보는 독왕은 백 세를 넘긴 우행 진인을 향해 독언을 서슴지 않았다. 무공 고수가 치매에 걸리는 일은 드물지 않다. 육신과 내공의 균형이 무너지면 오히려 일반인보다 더 쉽게 치매 증세를 보인다.
"작은할아버지, 설마 단약이 아까워서 그러는 건가요? 동생의 사지백해를 뚫어주면 이후 가르쳐 주시는 대로 열심히 배울게요."
사지백해를 뚫기 위해서 우선 내공을 전부 없애야 한다. 보통 말하는 산공(散功)인데 독이나 특별한 점혈 수법으로 일시적인 산공을 하는 게 아니라 진짜로 모든 내공을 버려야 한다. 당우형 역시 가문에 도착하자마자 산공을 하고 사지백해를 타통했다.
당우형은 흩어버린 내공을 천천히 회복했다. 그러나 유신은 이틀 뒤에 구두노와 대결해야 하기에 단약으로 내공을 빠르게 회복해야 한다. 단약을 만드는 데 필요한 약초는 수년의 공을 들여야 겨우 모을 수 있다. 독왕이 아까워하는 것도 인지상정이다.
"그래, 이후에는 내게 독과 약을 제대로 배워야 한다. 그래야 내 나이가 되어도 건강하게 살 수 있다. 흑룡단의 위력을 너무 얕보면 안 된다. 침술 따위 잔재주로는 흑룡단의 잔독(殘毒)을 이겨낼 수 없다."
원하는 걸 얻어낸 독왕은 당우형과 함께 연단실로 들어갔다. 독과 단약을 다루는 연단실은 아무나 쉽게 들어올 수 없는 곳이어서 사지백해를 타통하는 만류분해(萬流奔海)의 침술을 펼치기에 좋은 곳이다.
"아이야, 네 내공을 전부 흩어버려라. 단전을 비우는 게 아니라 내공을 완전히 몸 밖으로 흘려서 버려야 해."
내공을 다루는 건 감각의 영역이고 대부분 타고 난다. 노력으로 재능을 극복하기에는 노력하는 방법이 너무 불확실하다. 유신이 순식간에 내공을 남김없이 흩어버리자 독왕은 마음속으로 크게 탄복했다.
'역시 우형이가 사람을 제대로 사귀었구나.'
담화궁의 여자에게 내공을 전부 잃은 적 있고 삼절수로 점혈 되었을 때 혈도를 함부로 건드린 동방가의 애송이 때문에 강제로 산공 된 적이 있다. 그리고 동인진에서 주제에 넘치는 초식을 사용하면서 또 내공을 잃었다. 그래서 유신은 내공이 흩어지는 감각을 꽤 잘 알고 있다.
"내가 대침을 꽂을 테니 너는 소침을 꽂아라. 내가 대침을 꽂으면 주변에 소침을 꽂는 거다. 열두 호흡 사이에 끝내야 하니 절대 실수하지 말아라."
독왕과 당우형은 만류분해의 대법을 펼치기 전에 백화수로 손을 풀었다. 내공이 사라졌지만 눈썰미는 남아 있어 당우형이 피운 꽃이 독왕보다 더 많은 것을 확인했다.
"제길, 재능은 정말 불공평하구나. 내 손이 좀 무뎌졌기로 맨날 이불에 오줌 싸던 네놈에게 질 줄은 몰랐다."
당우형은 무척 긴장했는지 아무 대꾸도 하지 않았다. 독왕이 한 뼘 길이가 되고 굵기도 만만치 않은 대침 서른여섯 개를 나란히 펼쳐놓고 꽂는 시늉을 했다. 시늉하면서 잡기 편하게 대침의 위치를 조절했다.
당우형은 산삼처럼 생겼으나 크기는 무 정도 되는 이상한 뿌리 식물에 소침을 잔뜩 꽂아두었다. 독왕과 달리 당우형은 미리 연습하지 않고 호흡만 가다듬었다.
"시작하자."
말이 끝나기 무섭게 독왕의 손이 허공에 꽃을 수놓았다. 꽃 한 송이가 펼쳐질 때마다 유신의 몸에 대침 하나가 꽂혔다. 그러면 당우형이 바로 소침으로 꽃술과 줄기 그리고 이파리를 채워 넣었다.
어느새 유신의 몸에는 사백 개에 육박하는 침이 꽂혔다. 독왕은 당우형이 실수로 잘못 꽂은 침을 뽑아서 다시 꽂았다. 대침에 손가락을 대고 일일이 확인한 후 독왕이 만족스러운 웃음을 지었다. 나이를 먹으면서 손이 생각대로 움직여지지 않는데 완벽에 가깝게 침을 꽂았다.
독왕은 붓으로 약초를 달여서 얻은 즙을 대침과 소침에 살살 발랐다. 유신은 독왕과 당우형의 두런두런 대화를 자장가 삼아 단잠이 들었다. 일부 대침이 깊숙이 박혀 등 쪽 혈도까지 닿았음에도 작은 통증조차 느끼지 못했다.
- 작가의말
반문농부는 노반의 앞에서 도끼질 자랑한다는 뜻입니다. 반은 노반을 뜻합니다. 나무로 나는 새를 만들었다는 전설적인 건축가이며 목수죠. 화타나 편작처럼 전설적인 유명인이라고 보면 됩니다.
반문은 노반과 노반의 제자를 칭합니다. 즉 전문가 집단을 뜻하죠. 최고의 목수 앞에 가서 도끼를 들고 자기가 목수일 잘한다고 자랑질하는 것을 비웃는 사자성어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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