화향만루 청풍영수
고운 눈가루가 세상을 보슬보슬 물들였다. 세상이 고요해지고 만물이 단잠에 들었다. 그러나 설경에 취하지 않고 자기 갈 길만 재촉하는 한 무리의 무인이 있었다.
"우형아, 너 혹시 쾌검신룡이라는 작자를 보았느냐?"
앞장선 당무헌의 말에 당우형이 잠깐 생각하다 대답했다.
"강호초출입니까? 들어본 적이 없습니다."
"무슨 꼼수를 썻는지 동인진을 파했다고 하더라."
뒤에서 따르는 독룡대 대원들의 눈에 감탄의 기색이 떠올랐다. 경공을 펼쳐 달리는 것만으로도 힘든데 당우형은 입을 열어 당무헌과 대화까지 하고 있다. 웬만큼 잘났으면 몰라도 저 정도로 잘나니 질투조차 나지 않는다.
"곤륜의 승룡 말하는 겁니까? 뭔 이상한 수를 써서 동인진을 멈췄다고 들었습니다. 이름이 아마 악진이었을 겁니다."
당우형은 꼼수라는 말에 당무헌이 말하는 쾌검신룡이 유신이라는 생각을 전혀 하지 못했다. 당우형은 유신이 정당하게 동인진을 파했다고 생각한다. 유신이 펼친 쾌검에서 가장 많은 심득을 얻은 건 그 자리에서 가장 경지가 높은 나한당주와 당우형이다.
"역시, 뿌리 없는 거목이 있을 수 없지. 곤륜은 강호에 관심이 없으니 무시해도 되겠구나."
비록 오해가 생겼지만 쾌검신룡을 무시하기로 한 것은 정확했다. 세력도 배경도 없고 무공도 보잘것없는 유신이 당장 강호에 어떤 영향력을 끼치기 힘들다. 그리고 당우형은 쾌검신룡이 곤륜의 악진이라는 헛소문의 출처가 되었다.
### 快劍神龍 龍遊迅 ###
서문청월은 술이 간절해서 발길을 재촉했지만 소원을 이루지 못했다. 객잔에 돌아가자마자 시비가 붙었다.
소림의 동인진이 쾌검신룡에게 깨졌다는 소문이 보름여 전부터 퍼지기 시작했다. 소림을 찾는 강호인이 많아지며 등봉현의 객잔들이 난데없는 호황을 맞이했다.
동인진을 도전하는 자는 바로바로 받아주지만, 소림의 방장이나 당주 혹은 원주를 만나려면 줄 서서 순서를 기다려야 한다. 동인진의 도전을 핑계로 삼을 수 없는 지금, 소림에 방문첩을 올린 자들이 객잔에서 소림의 부름을 기다리고 있다. 객잔뿐 아니라 마당 좀 넓고 방 좀 있다 싶은 장원도 강호인으로 북적거렸다.
갑작스러운 행운이 꼭 좋은 것만은 아니다. 준비한 술과 식량이 부족했고 아예 숙수가 고향으로 돌아간 객잔도 있다. 동서남북에서 온 손님들의 입맛을 맞추려면 노련한 숙수도 힘들 텐데 숙수까지 없으니 객점 주인과 점소이들이 숨소리도 조심했다.
소림의 발밑이라 억울함을 당할 가능성은 작지만, 무인에게 제대로 한 대 얻어맞기라도 하면 최소 보름은 누워있어야 한다. 소림이 나서서 사과와 보상을 얻어낸다고 해도 한 번 크게 다치면 평생 고생해야 하기에 무척 조심했다.
"먼저 그 방을 우리에게 내주고, 그 방의 손님이 오면 우리가 설득한다니까. 왜 이렇게 말귀를 못 알아들어?"
좋은 기분으로 객잔에 들어선 일행은 점소이에게 트집 거는 앙칼진 소리에 기분이 잡쳤다. 그때 점소이의 얼굴에 화색이 돌며 유신 일행을 가리켰다.
"손님들이 오셨어요. 제가 거짓말하는 게 아니라고 했잖아요."
근래 일행 중 서문청월만 객잔에 묵었고 남은 사람들은 소림에 기거했다. 서문초설은 달마원에서 치료가 끝날 때까지 나오지 않았고 유신 등은 객방에 머물렀다. 서문청월도 마지막 며칠은 조바심을 이기지 못하고 소림에서 내려오지 않았다.
그래서 일행의 방은 며칠 동안 사람이 묵지 않았다. 어떻게 알았는지 다른 객잔에 묵고 있던 여자들이 찾아와서 방을 내놓으라고 억지를 부렸고 점소이는 손님들이 아직 떠나지 않았다고 거절했다. 미리 선지급을 받았기에 방을 마음대로 다른 사람에게 내줄 수 없었다.
"은자 한 냥 줄 테니 방을 빼고 다른 데 알아보세요."
유신은 옷에 피가 배어 소림의 무복을 빌려 입었고 서문청월도 강호에 나오면서 특징 없는 무복을 입었다. 서문초설도 치료를 위해 수수한 옷을 입었고 그나마 차려입은 서문초현도 보름 동안 빨래를 하지 않아 무척 꾀죄죄했다. 거기에 옷에 닿은 눈이 녹으며 더욱 후줄근해져서 일행은 외형상 볼품없었다.
"이거 가지고 당장 내 눈앞에서 사라져라."
서문청월이 품에서 열 냥짜리 은자를 꺼내 여자에게 던져줬다. 엉겁결에 은자를 받아 든 여자는 얼굴이 시뻘겋게 달아올랐다. 바늘로 살짝 찔르면 피가 콸콸 쏟아질 것 같았다.
"귀하는 어디에서 온 뉘신데 감히 이렇게 무례한 언행을 일삼는 것이오?"
"너는 어데서 온 누군데 감히 나를 거지 취급하느냐?"
평소에는 자상하고 잔소리 많은 모습을 주로 보여주었는데 지금의 서문청월은 다른 사람이 되었다. 아픈 초설과 함께 있으며 성질을 숨겼던 서문청월이 이제는 본색을 드러냈다. 초현의 동인진 도전을 말리며 내심 초설에게 미안해 성깔을 죽이고 지냈었다.
"동해 도화궁(桃花宮)에서 왔소."
화를 주체하지 못하는 여자를 대신해 다른 여자가 서문청월의 말을 받았다. 그때 엉겁결에 은자를 받아 든 여자가 아기 주먹만 한 은자를 서문청월을 향해 던졌다. 내공이 충분히 실린 은자는 거리가 열 발자국도 되지 않는 서문청월의 가슴을 향해 날아갔다.
너무 가까운 거리여서 예상했다고 해도 유신은 피하거나 막을 자신이 없었다.
서문청월은 왼손을 슬쩍 들어 올려 은자를 가볍게 받아냈다. 손을 올리는 데는 풍권잔운(風卷殘雲)의 쾌검 초식을 변형했고 은자를 잡는 데는 아호탐식(餓虎貪食)의 조법을 응용했으며 은자에 실린 힘을 해소하는 데는 낭화추전(浪花推前)의 수법을 사용했다.
"감히 도화궁 따위가. 나는 서문청월이다."
가문의 이름을 대지 않은 건 이 모든 은원을 홀로 감당하겠다는 선언이다. 서문청월이 이름을 밝히자 도화궁의 여자들은 낯빛이 변했다.
"검질 서문청월."
검질(劍蛭)은 검 거머리라는 뜻으로 듣기 좋은 말은 아니다. 그러나 서문청월은 그다지 우아하지 않은 자신의 별호가 무척 자랑스러웠다.
"청월 숙부가 예전에 친우의 복수를 한다고 마적 떼를 삼 년 쫓아다닌 적이 있어요. 마지막에 마적 떼가 우두머리의 수급을 베어 올리며 제발 괴롭히지 말아 달라고 애원했죠. 그래서 검질이라는 별호가 생겼어요."
서문가에서 무공이 가장 강한 사람은 아니지만 강호에 명성이 가장 드높다. 술자리를 몇 번 같이한 친우를 위해 삼 년이나 사막과 초원을 떠돌며 마적 떼를 쫓아다녔다. 그 끈질김에 진절머리를 느끼면서도 그 높은 의기는 모두 입을 모아 칭송했다.
유신은 가까이 다가와서 귓속말하는 초설 때문에 얼굴이 달아올랐다. 예전에도 가까이 있었던 적은 있는데 지금처럼 기분 좋은 향이 나지는 않았다. 거기에 남들이 듣지 못하게 하려고 손으로 입을 가리고 말해서 귀에 닿는 입김이 무척 거세게 느껴졌다.
그때 희미하게 낯익은 여자가 입술을 달싹거렸다. 내공을 다루는 게 능숙하지 못하면 전음할 때 입술을 움직인다. 유신은 곧바로 청음술을 펼쳤다. 백의장과 마교 라는 두 단어만 귀에 들어왔다.
"네 분은 일행인가요?"
"인질 잡으려고? 그런다고 이 서문청월이 눈썹 하나 까딱할 것 같으냐?"
키는 작지만 어깨가 꽤 넓은 여자는 득의의 미소를 띄웠다.
"일행 중 한 분이 마교의 사람이어서 그래요. 소문이 강호에 퍼지면 서문가도 감당하기 힘들 텐데요?"
서문청월은 유신을 쳐다보았다. 그때 유신이 뭔가 생각났다는 듯한 표정을 짓다가 갑자기 얼굴이 흉신악살처럼 구겨졌다. 가까이 있던 서문초설이 깜짝 놀라 몸을 움츠렸다.
"누군가 했더니 네년 들이었구나. 삼절수로 점혈 당한 사람의 혈도를 마음대로 건드려놓고 그대로 떠나버려? 내 의형을 만나지 못했으면 지금쯤 살이 다 썩고 뼈다귀만 남았겠지."
백의장에서 동방가의 애송이가 유신의 혈도를 섣불리 건드렸을 때 있었던 두 여자였다. 사실 유신은 복수에 대한 생각을 굳히지 못하고 있었다. 아비의 복수는 어릴 때부터 다짐했던 것으로 흔들림 없었지만, 무림맹 소속이고 세가의 직계가 분명한 상대들에게 꼭 복수해야 하는지 망설였다.
그러나 정작 두 여자가 눈앞에 나타나자 화가 무척 치밀었다. 저들에게 장난감처럼 농락당했던 수치심에 화가 정수리 끝까지 치밀었다.
"저 흉악한 얼굴을 보세요. 마교의 종자가 틀림없습니다."
"용 소협, 그대가 마교인지 여부는 상관하지 않겠소. 이 청월은 용 소협과 같은 편이오."
"이 변변찮은 서문초현도 한 팔 보태지."
서문초현이라는 이름이 나오자 도화궁의 일행은 흠칫 놀랐다. 열여섯에 일류의 경지에 든 서문가의 기린아다. 옥면검룡(玉面劍龍)이라는 별호는 강호에 널리 퍼지지 않았지만, 많은 세력이 주시하는 후기지수다.
당우형보다 일찍 일류의 경지에 접어들었다. 이 년 전에 일류의 끝자락에 이른 당우형이 지금은 명성이 훨씬 크지만, 만약 당우형보다 어린 나이에 절정의 경지를 밟으면 한동안 서문세가와 어깨를 견줄 단일 세력은 없을 것이다.
서문청월과 시비 붙으면 그건 도화궁과 서문청월의 문제다. 도화궁이 비열한 방법만 사용하지 않는다면 서문가가 개입할 여지가 없다. 그러나 서문초현을 건드리면 서문가의 고수들이 개인의 이름으로 동시에 도화궁에 시비를 걸 것이다.
말로는 가문이 개인에게 간섭하지 않는다고 하지만, 누군가 억울함을 당하면 불같이 화내며 나서는 게 서문가 식솔들이다. 다만 서문가의 이름을 내세우지 않고 개개인의 이름으로 함께 나설 뿐이다.
"도화궁은 마교 척결의 기치를 높이 들고 있습니다. 지금 이 자리에서 마교와 연관된 자를 발견하고 신문하려고 하는데, 혹시 서문가에서 방해할 생각인가요?"
이제는 방 다툼이 아니라 순수한 자존심 싸움이 되었다. 어떤 억지를 써서라도 오늘 기세를 잡아야 다음에 만났을 때 고개를 빳빳이 들 수 있다. 유치한 듯하지만, 강호에서 머리 한 번 잘못 숙이면 무공 실력과 상관없이 조롱받고 배척받는다.
명분, 세력, 무공, 기세 등 강호의 싸움은 다채롭기 그지없다. 처음에 세력과 무공 싸움으로 시작해서 서문청월이 우위를 점했다. 그러자 도화궁이 명분으로 싸움을 걸어왔고 서문가의 두 사내는 기세로 받아쳤다.
"항주 태생 용유신, 이 자리에서 맹세컨대 반드시 이 강호에서 도화궁 세 글자를 지워버리겠다. 이 맹세를 지키지 못하면 벼락 맞고 뒈져서 영세토록 환생하지 못하리라."
용납하기 힘든 악인은 하늘이 벼락을 내린다고 한다. 그 벼락에 죽은 악인은 환생하지 못하고 영원히 잡귀로 떠돌며 고통받는다. 맹세 중에서 가장 독한 맹세를 유신이 입으로 내뱉자 도화궁 일행은 낯이 하얗게 질렸다.
"서문세가는 정녕 도화궁과 마교의 싸움에 발을 들이겠습니까?"
유신의 말을 받으면 전면전을 하자는 말이나 다름없어 서문청월에게 화살을 돌렸다. 도화궁은 자꾸 마교와 서문가를 거론하며 명분을 키우려 했다. 이대로 진흙탕 싸움을 지속하면 얻는 게 없다는 생각에 서문청월은 무의미한 다툼을 멈출 궁리를 했다.
"유신 랑(郞 - 낭군)은 제 부군입니다. 지금 도화궁은 우리 서문세가가 마교와 사돈을 맺었다고 모함하는 겁니까."
기둥 칠이 일부 벗겨진 허름한 객잔이 천상누각으로 변했다. 싸구려 화주 냄새와 역한 기름 냄새가 꽃향기로 화했다. 매서운 눈바람이 부드럽고 따뜻한 봄바람이 되어 유신의 마음을 사르르 녹였다.
"거참, 마교마교, 듣는 마교 마졸이 기분 나쁘구려."
등에 봇짐을 세 개나 멘 얼굴이 하얗고 긴 사내가 참견했다. 도화궁의 일행은 사내에게 시선을 돌렸지만 서문청월은 도화궁의 사람들만 바라보았다. 누군가 암기를 날리려고 시도하는 즉시 검으로 머리를 벨 생각이다.
"나는 전영득이라 하오. 강호에서는 백면귀산(白面鬼算)이라 불리며 욕먹지. 마교 척결 기치를 높이 든 도화궁의 도전을 받아주겠소."
마교 호법 백면귀산, 진짜가 나타났다.
- 작가의말
花香滿樓 淸風盈袖
꽃향기가 누각에 가득 차고 시원한 바람이 소매를 부풀게 하다. 아주 기분 좋은 상황을 묘사하는 말입니다.
맞춤법 검사기가 접속이 안 되더군요. 네임 서버 오류로 보입니다. 그래서 글 올리는 게 늦었습니다. 사실 오전에 글은 이미 완성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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