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쾌불파
하늘이 내려준 분가루를 받은 땅은 눈물을 흘렸다. 단단한 청석을 깐 연무장은 내리는 눈을 바로바로 녹여버렸다. 대리에서 나는 귀한 청석으로 황제가 사는 자금성 안팎 모두 이 돌을 바닥에 깔았다. 돌 자체가 온기를 품고 있어 눈이 잘 쌓이지 않는다.
"이렇게 하죠. 대결은 생사투로 하고 출전 상대는 상대편에서 지목합시다."
담화궁이 특이한 제안을 했다. 서문가에서 출전할 사람을 담화궁에서 뽑고 담화궁에서 출전할 사람을 서문가에서 선택한다. 이는 무공 이외에 안목도 겨루자는 뜻이다. 서문고택은 담화궁이 강호에 정식으로 출도하려는 게 아닌지 의심했다.
정체를 숨기고 있는 담화궁은 명성을 쌓아봤자 아무 이득이 없다. 이득이 없는 일에 헛심을 빼는 건 누구든 싫어한다. 다만 담화궁이 진정 원하는 게 뭔지는 본인들만 알 것이다. 워낙 비밀이 많은 문파라서 쉽게 짐작할 방법이 없다.
"좋소. 멀리서 온 손님이니 담화궁이 먼저 선택하시오."
사실 선후 순서는 중요하지 않다. 어차피 서문가는 쾌검밖에 없고 담화궁의 무공은 강호에 알려진 바가 없다. 서로 상생상극을 따지기엔 서문가의 무공은 다양성이 전혀 없다. 그저 더 빠른 검과 덜 빠른 검이 있을 뿐이다.
"강호에 위명이 자자한 쾌검신룡의 무공을 견식 하고 싶습니다."
"내 사위는 서문가의 사람이 아니오. 외인을 서문가의 비무에 끌어들이고 싶지 않소."
무당과의 비무에 용유신을 내보내지 않은 건 오늘을 위한 포석이다. 아는 초식도 몇 없고 그마저도 본인이 직접 만들어낸 초식이다. 기초 수련을 제대로 하지 않고 초식을 수련하면 잘못 익혔을 때 동작을 고치는 데 무척 애를 먹는다. 그래서 유신은 아직도 기초 수련만 하고 검술 초식을 하나도 배우지 못했다.
그래서 외인이라는 핑계로 비무에서 배제하려 했다. 그러나 담화궁은 녹녹히 물러서지 않았다.
"담화궁이 정성스럽게 준비한 선물을 외인이 망쳤다는 이야긴가요?"
여기에서 더 변명을 보태면 구차해진다. 유신은 심룡척을 뽑아 들고 검집은 바닥에 버린 채 비무장에 나섰다. 검집을 두고 나가는 건 이 비무가 생사투이기 때문이다.
"상대는 제 왼손 편으로부터 세 번째 분으로 하겠습니다."
"쾌검신룡의 기개가 하늘을 찌르는군요. 이미 절정을 바라보고 있는 본궁의 기재와 겨루기를 원하시다니 배포와 안목이 놀랍습니다."
유신이 고른 상대는 놀랍게도 절정을 바라보는 고수였다. 면사로 얼굴을 가려 나이를 정확히 짐작하기 어렵지만 드러난 체형만 보면 스무 살이 안 되었을 것 같다.
"남의 걸 열 개 빼앗아서 자기 것처럼 모아두는 것보다 자기 걸 하나 제대로 키우는 게 훨씬 낫습니다. 담화궁의 안목은 참 볼품없군요."
면사로 눈 아래를 다 가렸지만 담화궁의 부궁주인 담 부인과 대결에 나선 여자 모두 놀라는 것이 느껴졌다. 다들 영문을 몰라 어리둥절해 있는 와중에 무당의 송엽 진인만은 고개를 끄덕이며 흐뭇한 미소를 지었다.
"제가 강호초출이라 알려진 게 많지 않을 겁니다. 비무에 앞서 간략하게 소개하죠. 집안 가훈이 천하무공 유쾌불파입니다. 제 처가인 서문가와 마찬가지로 빠름을 추구하고 후발선지를 무의로 삼고 있습니다. 그러니 선공은 소영 소저에게 양보하겠습니다."
"넌 도대체 누구냐!"
담 부인이 격동을 이기지 못하고 날카롭게 외쳤다. 유신은 능글맞은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쾌검신룡 용유신이라 합니다. 저는 담화궁처럼 숨긴 게 없어서 뭐라 더 소개할 수가 없네요."
유신이 선택한 여자가 바로 유신을 '겁탈'하고 내공을 '강탈'한 담화궁의 여자다. 더 정확히 말하면 담화궁의 한 갈래인 소운궁의 향주이며 유신을 시작으로 무수히 많은 남자의 내공을 흡수해 절정에 가까울 정도로 내공을 모은 소영이다.
모든 무공은 적합한 체질이 있고 소영은 채양보음에 적합한 체질이다. 그래서 어린 나이에 이미 향주 직을 맡고 이번에는 그저 강호 경험을 쌓는 셈 치고 데려온 것이다. 담 부인이 임시로 변덕을 부리지 않았으면 소영이 대결에 나서는 일도 없었을 것이다.
소영과 마주 선 유신은 정중히 포권을 올렸다. 엉겁결에 따라서 포권을 하며 소영의 머리는 두 가지 생각으로 어지러웠다. 하나는 자신의 정체를 쾌검신룡이 어떻게 알아냈는지고 다른 하나는 첫 초식으로 무엇을 사용해야 할지 고민했다.
소영이 포권을 마치자 유신이 빛살처럼 움직였다. 서문가의 검과 흡사하게 곧게 목울대를 향해 날아갔다. 남무천을 상대로 우직하게 고집하던 검과는 달리 동인진에서 얻은 고주일척 초식의 깨달음과 청죽단풍검에서 얻은 진(震)이 깃들었다.
외견상 평범하지만 내부에 엄청난 진동을 품은 검은 어느 순간 갑자기 더 빨라졌다. 예전에 출검 후 힘을 가해 검을 더욱 빠르게 하려는 시도는 실패했지만, 진동을 품은 검은 출수 도중 자연스럽게 더 빠르게 변했다.
정체가 탄로 난 데 대한 의심, 무슨 초식을 사용해야 할지에 대한 고민, 선수를 양보한다는 말에 무의식적으로 한 방심, 세 가지가 겹쳐서 소영은 비명 한 번 지르지 못하고 목이 뚫렸다. 작은 울림이 있는 유신의 목소리는 진심이 깃든 듯 들려 상대가 쉽게 방심하게 했다.
"이런 비겁한, 분명 선수를 양보한다고 하지 않았소?"
"생사투는 목숨을 건 대결이다. 목숨까지 걸었는데 무슨 지킬 게 더 남아있냐? 담화궁은 소문대로 꽃이나 키우는 아낙네들 모임이었느냐? 꼬리 말고 숨어서 사니 강호가 그리 우습더냐?"
남무천의 가르침 덕분이다. 천하에서 두 번째로 강하다는 고수도 음낭을 걷어차고 침을 뱉고 모래를 뿌린다. 실력으로 제압할 수 있음에도 일부러 상대를 무른 땅으로 유도해 실수하게 한 후 그 허점을 파고들어 더욱 쉽고 확실하게 처리한다.
그리고 자기 경험담을 무수히 들려주며 기세를 타는 법, 상대의 기세를 죽이는 법, 상대의 마음을 흔드는 법 등 무공 초식이나 내공 심법보다도 더 귀중한 것을 많이 가르쳤다.
다른 세가라면 유신의 행동에 눈살을 찌푸렸을지 모르지만, 서문가는 유신이 생사투에 임하는 자세에 모두 고개를 끄덕였다. 쾌검만 고집하는 서문가는 팔 하나 묶어놓고 대결하는 거나 마찬가지다. 그래서 살아남으려고 웬만큼 비겁한 짓은 강호에서 다 해봤다.
"제가 강호에서 딱 두 번 목숨이 위태로웠던 적이 있는데 한 번은 담화궁이고 한 번은 도화궁입니다. 도화궁도 담화궁 소속인 것 같으니 담화궁과 저는 정말 악연이라고 할 수 있군요. 오늘 피로 그 연을 씻어 없애고 싶습니다. 가주께서 대신 상대를 지목해 주시기를 청합니다."
유신은 상대의 실력을 가늠하는 안목이 전혀 없다. 타고나지 않았고 내공 경지가 일류에서 중간 정도이며 경험도 부족하다. 그리고 당우형이나 심유처럼 '방법'을 알지 못한다. 그래서 최대한 많이 죽이고 싶음을 피력하며 서문고택에게 상대를 지목해달라고 청했다.
"우선 시체부터 치우시오. 아무리 죽었다지만 여인의 시체를 우리 서문가가 건드리는 건 실례인 것 같으니 직접 치우기 바라오."
담화궁은 강호 경험이 부족한 게 눈에 보였다. 시체를 직접 수습하고 거기에 시체를 계속 쌓다 보면 마음이 흔들려서 제 실력을 발휘하지 못한다. 담 부인의 지시에 두 여자가 나서서 소영의 시체를 질질 끌었다. 무공을 익힌 여인이라 들어서 나갈 수도 있는데 시체가 무서운지 피가 튈까 걱정인지 바닥에 끌고 나갔다.
"오른손 편 세 번째 여협을 지목하오."
방금 시체를 끌고 가던 둘 중의 하나다. 서문고택은 예리한 눈썰미로 손끝을 바들바들 떠는 걸 놓치지 않았다. 지목당한 여자의 절망스러운 느낌은 면사로도 가려지지 않았다.
소영은 방심해서 유신의 뻔한 찌르기를 조금도 피해내지 못했다면, 두 번째 출전한 여자는 겁에 질려 미리 피하는 바람에 유신에게 틈을 주었다. 유신도 쾌검을 추구하지만 서문가처럼 곧지 않다. 출수 도중 허리를 비틀고 어깨와 팔꿈치 그리고 손목을 조금씩 움직이는 것으로 방향을 틀어 여자의 목울대를 정확히 찔렀다.
허리가 절구통처럼 굵은 여자가 나와서 시체를 어깨에 메고 나갔다. 목에서 흐른 피가 담비 가죽으로 만든 귀한 옷을 적셨지만 전혀 개의치 않았다.
"왼손 편에서 다섯 번째 여협을 지목하오."
지목당한 여자는 풀썩 주저앉았다. 소영은 물론 방금 찌르기 한 번에 목이 구멍 뚫린 여자보다도 무공이 부족하다. 전부 일류 이상의 고수이긴 하지만 상황에 몰려 수준에 알맞은 무위를 보이지 못하고 한 수에 죽었다.
물론 유신의 찌르기는 무척 수준이 높다. 동인진을 멈출 때 펼쳤던 고주일척에 비교하면 손색이 많으나 강호의 풍랑을 견뎌보지 못하고 곱게 수련해서 일류의 경지에 오른 여인들이 쉽게 막아낼 수 있는 찌르기가 아니다.
시체를 메고 나갔던 허리가 굵은 여자가 소환도(小環刀)를 뽑았다. 길이가 일 척이 조금 넘는 소환도는 여자들이 사용하기에 적합한 칼이다. 길이도 짧고 무게도 가볍다. 여자는 바닥에 주저앉은 어린 제자의 목을 단칼에 베였다.
"이 대결은 우리가 진 것으로 하겠소. 다음 상대를 지목하시오."
목소리가 남자처럼 우렁찼다. 완전히 죽어버렸던 담화궁의 기세가 서서히 살아났다.
"그럼 네 번째 상대는 담 부인을 지목하겠소."
비무장이 고요해졌다. 담화궁의 부궁주를 지목한 서문고택은 태연한 기색이고 비무 당사자인 유신도 낯빛 하나 변하지 않았다. 그러나 대부분 사람은 당황을 금치 못했다.
'확신합니까?'
'내공은 절정이지만 무공은 전혀 익히지 않았습니다. 틀림없습니다.'
사실 송엽 진인도 담화궁의 부궁주가 내공은 높은데 행동거지에 고수의 품격이 보이지 않아 의아해하던 참이었다. 심지어 내공이 절정에 이르렀건만 숨소리마저 균일하지 않았다. 뭔가 마공이나 사공을 익힌 게 아닌가 생각했는데 서문고택이 담화궁의 기세가 살아나자 다시 한번 요해를 제대로 찔렀다.
"본 궁은 우연히 내공을 얻었지만 무공을 익힌 적이 없습니다."
"지금까지 서문가와 대화를 한 자가 담화궁과 상관이 없는 외인이라는 말이오?"
아까 유신을 묶어두던 명분이 이번에는 담 부인의 목에 올가미를 걸었다. 서로 눈치를 주고받던 담 부인이 몸을 일으킨 후 왼팔을 옆으로 들었다. 소환도가 또 한 번 번뜩이더니 담 부인의 왼팔이 어깨 밑으로 바닥에 떨어져서 잠깐 파닥거렸다.
황급히 점혈로 피를 멈추고 금창약을 두껍게 발랐다. 순식간에 얼굴이 창백해진 담 부인은 억지로 이를 악물고 신음을 토해내려 하지 않았다. 차라리 입을 벌리고 숨을 크게 쉬면 통증이 더 빨리 가라앉는데 체면과 사기를 위해 억지로 참아냈다.
"본 궁의 팔 하나로 끝내죠. 굳이 내 목숨이 필요하다면 담화궁과의 전면전을 각오하세요."
아직도 통증이 가라앉지 않았는지 담 부인은 마디가 아닌 한 글자씩 내뱉었다. 서문가주는 상대의 기세를 죽이고 규칙을 변경해서 유신을 내리려 했었는데 상대가 팔 하나를 던지자 퇴로가 사라졌다.
"그럼 오른손 편 일곱 번째 여협을 지목하오."
담화궁의 고수들은 유신의 목울대를 향한 찌르기를 피하지 못하고 하나씩 쓰러졌다. 궤적이 눈에 뻔히 보이고 변화하는 과정도 뻔히 보인다. 이 지점에서 검이 빨라질 것 같다고 생각하면 정말 빨라지고 저 지점에서 검 끝이 움직일 것 같다고 생각하면 정말 그곳에서 검 끝이 움직인다.
예상할 수 있지만 피할 수 없는 검, 눈에 보이지만 그 변화를 따라갈 수 없는 검이 유신의 손에서 펼쳐졌다. 서문가의 식솔들은 유신의 검에 취했다. 그저 빠르기만 한 게 아니라 상대보다 조금 더 빠른 검, 검의 속도만 빠른 게 아니라 변화까지 빠른 검을 유신이 펼쳤다.
핏자국이 선명해질수록 하늘은 더 많은 눈을 내렸지만, 눈보다 피가 훨씬 빠르게 흘렀다.
- 작가의말
동심세계 님 추천 감사드립니다. 뻔한 얘기지만 끝까지 열심히 쓰겠습니다.
이번 글의 목표는 강호의 세계와 세력을 그리는 것입니다. 예전에 김용 소설을 읽고 그 안에 새로운 인물이 되어 들어가서 어떤 무공을 배우고 누구랑 친분을 맺고 누구를 처리할지 고민하며 즐거워하던 때가 있었죠. 저도 읽는 분들에게 균형이 있는 무협이라는 세계를 펼치고 그 안에서 각자의 상상이 살아있기를 바라는 마음으로 글을 쓰고 있습니다.
물론 다른 형태의 글도 생각하고 있습니다. 고룡처럼 세계관이나 밸런스보다는 캐릭터의 특이함과 자극성에 중점을 둔 무협도 무척 재밌죠. 한국 무협의 대부분이 고룡의 영향을 김용보다 더 많이 받은 것으로 보입니다. 그런 글도 생각하고 있지만, 제 성향과 잘 맞지 않아 아직 손을 못 대고 있습니다.
눈이 녹는 돌은 실화입니다. 다른 곳엔 눈이 쌓여도 저런 돌에 눈이 내리면 바로 녹습니다. 아예 안 쌓이는 건 아닙니다만, 쉽게 쌓이지 않습니다. 물론 청석이라는 이름은 제가 멋대로 지은 겁니다. 실제 이름을 모르거든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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