눅눅한 피바람
하늘은 파랗고 구름은 하얗다. 파랗고 하얀 색만 하늘을 가득 채웠다. 그 경계가 선명하여 보는 사람의 가슴을 시원하게 적셔준다. 대나무 잎이 서로 비비적거리며 사락사락 듣기 좋은 소리를 냈다.
모든 것이 완벽한 가운데 유일한 흠이라면 바람이다. 맑고 시원한 바람이 아니라 약간 눅눅한 바람이 불어왔다. 용유신은 자꾸 내려가는 눈꺼풀을 억지로 올렸다. 빨리 절세심법을 익혀 고수가 되어야 한다.
고수가 되면 대나무 광주리나 짚신을 만들지 않아도 된다. 아직 여덟 살이지만, 유신의 손은 고사리손이라고 말하기엔 고사리에 정말 미안하다. 손가락 끝과 손날은 광주리나 짚신을 만드느라 굳은살이 박혔다. 손바닥과 손아귀는 검술 수련 때문이고.
그러나 절세심법 죽절공(竹節功)은 절세마공 수면공(睡眠功)을 이기기 힘들다. 아직 어린 유신에게 새벽 일찍 일어나서 외공 수련을 하고 아침을 먹은 후 뒷산 꼭대기까지 올라서 내공 수련을 하는 일정은 버겁다.
억지로 버티던 유신은 포기했다. 더는 내려오는 눈꺼풀을 어떻게 할 수 없다. 갑자기 산꼭대기에 가서 내공 수련을 하라고 한 아비가 미웠다. 어제까지만 해도 편하게 집과 멀지 않은 곳에서 내공 수련을 했었다.
따뜻한 햇볕이 바위 위에 잠든 유신을 보듬어주었다. 유신은 한 번도 느껴보지 못한 어머니의 손길이 아마 이렇지 않을까. 유신이 잠들자 죽절공은 오히려 더 원활하게 운기 되었다. 잡생각이 많은 것보다 오히려 푹 잘 때 수련이 잘 되었다.
### 快劍神龍 龍遊迅 ###
새벽에 아들이 외공 수련을 할 때 용철은 비둘기가 보내온 전갈을 받았다. 천에 적힌 내용을 읽은 후 부엌 아궁이에 집어넣었다. 그리고 평소보다 아침을 더 풍성하게 차렸다. 배부르다고 투정을 부리는 아들에게 밥을 억지로 더 먹였다.
아마 지금쯤 식곤증에 시달려 잠자고 있을 것이 분명하다. 모든 불행은 용철 자신의 탓이다. 항주 최대의 방파, 소속된 사람이 삼천이 넘고 무사라 칭할 수 있는 자가 이백이 넘는 죽련방(竹鍊幇)을 떠난 건 용철 자신의 잘못이다.
죽련방을 만든 사람은 용철의 아비고 용철은 죽련방의 정통 후계자다. 그러나 아내를 잃은 슬픔에 용철은 죽련방을 떠났다. 지금 죽련방은 둘로 갈라섰다.
청죽방(靑竹幇)은 기존 죽련방의 유지를 이었다. 대나무로 광주리를 짜고 죽립을 짜고 우산을 만드는 수공업자, 대나무 장대를 노 삼아 작은 배로 손님을 실어 나르고 짐을 실어나르며 품을 파는 뱃사공들을 비롯해 가난하고 없는 자들의 편을 들었다.
황죽방(黃竹幇)은 반대의 길을 걸었다. 광주리나 죽립 그리고 짚신 등을 수공업자들로부터 싼 가격에 인수했다. 일거리를 소개해주며 얼마 안 되는 품삯에서 수수료의 명목으로 돈을 빼갔다.
용철은 항주 교외의 대나무숲에 집을 짓고 세상과 동떨어져 살았다. 보름에 한 번 정도 물건을 팔고 쌀과 생필품을 사기 위해 시내로 가는 걸 제외하고 사람들과 거리를 두었다. 아내를 잃은 슬픔에 아이가 젖을 떼자 말도 없이 떠나버렸다.
차라리 후계자를 정하고 떠났으면 나았을까. 용철의 나이가 서른이 되지 않아 죽련방은 방주가 없이 호법들이 이끌어갔다. 용철의 나이 서른이 되면 용철이 방주를 맡기로 미리 합의되었다. 그런데 용철이 아무 말 없이 훌쩍 떠나버렸다.
죽련방의 무리가 용철을 찾으려면 못 찾을 것도 없다. 그러나 죽련방은 몇 개의 무리로 나뉘어서 누구도 용철을 찾으려 하지 않았다. 저마다 방주가 되고 싶은 야심에 혈안이 되었다. 그리고 시간이 흐르며 청죽방과 황죽방 둘만 남았다.
돈이 많은 황죽방의 세력이 청죽방을 훨씬 능가했다. 그래서 청죽방 내부에는 용철을 청해서 청죽방의 방주 자리를 맡기자는 논의가 있었다. 그런데 그게 밖으로 새 나가서 황죽방의 귀에까지 들어갔다.
청죽방의 방주이자 용철의 의형제인 전당호가 급히 비둘기를 띄워 용철에게 도망가라고 경고했다. 황죽방의 고수들이 용철의 목숨을 취하려 한다는 정보를 전했다. 용철은 죽련방의 후계자로 키워진 사람이다. 자신이 어떻게 해야 하는지 잘 알고 있다.
### 快劍神龍 龍遊迅 ###
치지직 하는 소리와 함께 약간 구린 냄새가 퍼졌다. 적당한 크기의 돌멩이들로 불이 꺼진 아궁이를 메웠다. 그리고 찰흙을 꼼꼼히 발랐다. 유신은 총명한 아이다. 다만 글공부를 싫어해 아는 글자가 많지 않다. 부엌 아궁이를 막은 걸 보면 떠나라는 뜻임을 바로 알아챌 게 분명하다.
아궁이를 막는 건 이 집에 살지 말라는 뜻이다. 마을이 통째로 옮길 때 우물틀을 들고 떠나는 것과 마찬가지로 오래된 풍습이다. 아궁이를 다 막은 용철은 집 천장을 들췄다. 언뜻 보기에도 비싸 보이는 검 한 자루가 용철의 손에 들렸다. 검을 뽑아보니 검날이 여전히 날카로웠다.
천으로 검날을 깨끗이 닦았다. 그리고 검은색으로 된 무복을 차려입었다. 아비가 죽기 전에 물려준 옷. 방의 행사가 있을 때만 입던 것으로 용철의 어미가 손수 기운 옷이다. 원래는 아들이 장성하면 아들에게 주려고 했다.
'내 선에서 끝내야지.'
이미 십 년 동안 진전이 없다. 죽절공을 익히며 처음에 아주 빠르게 강해졌다. 그러나 열여섯 이후에는 내공이 더는 늘지 않았다. 답답한 마음에 아비의 유품을 들췄다. 그러다 먼 선조가 남긴 열여섯 글자를 발견했다. 무슨 뜻인지 전혀 이해가 가지 않았다.
용철의 무위는 이류 정도다. 열여섯에 이류의 수준이 되면 대단한 기재다. 그래서 용철을 제자로 받으려는 고수가 적지 않았다. 그러나 용철은 고집을 피우고 계속 죽련공을 수련했다. 그 탓에 지금도 그때와 내공 수위가 비슷하다.
"용 소협, 우리를 순순히 따르면 아무 일도 없을 겁니다."
용철은 검집에서 잠들어 있던 검을 깨웠다. 가슴속의 살의가 검까지 전달되었다. 검이 날을 바짝 세우고 피를 달라고 아우성쳤다. 긴장과 흥분이 용철의 가슴을 적셨다. 역시 칼잡이의 피는 못 속인다.
"여기 이 분은 강호에 위명이 자자한 음혈도 강 대협입니다. 전당강의 수적 수괴를 단합에 베어버린 고수죠."
수적 우두머리라 해도 삼류인 경우가 많다. 다만 단합에 베는 게 쉽지 않다. 무공을 모르는 일반인이라 해도 단합에 베어버린다는 게 쉬운 일이 아니다. 음혈도라는 이름은 들어본 적이 없다. 칠 년 이상 사람들과 떨어져 살았기에 강호의 소식에 깜깜하다.
용철은 검을 잡은 손에 힘을 주었다. 깊은숨을 몰아쉰 후 기합 소리와 함께 음혈도라 불리는 자에게 돌진했다. 용철의 기세가 만만치 않아 음혈도는 옆으로 피했다. 미처 칼을 뽑을 시간도 주지 않아 음혈도의 대비가 미흡했다.
용철의 팔이 어깨부터 채찍질하듯 털렸다. 어깨를 터는 힘이 팔꿈치와 손목을 거쳐 손아귀에 꽉 잡힌 검으로 전달되었다. 내공이 없다면 정말 쓸모없는 짓이겠으나, 내공과 결합하여 검 끝이 꽃을 피웠다.
검화의 꽃말은 죽음이다. 화산의 검 끝에서 피어난 매화든, 소림의 달마검이 피운 연꽃이든, 보타암이 피운 목련이든. 세 명의 사내가 목에서 피의꽃을 피우며 쓰러졌다. 아직 남은 수십 년의 생명을 양분으로 삼아 피의꽃은 빠르게 피고 빠르게 사그라졌다.
"용철, 그래도 예전에 한솥밥 먹던 형제인데 감히 살수를 쓰다니."
"칼 들고 찾아온 순간 형제가 아니야. 암, 아니고말고."
용철은 아무 말도 없었지만, 음혈도가 대신 대답했다. 그사이 이미 칼을 뽑아 들었다. 칼의 끝이 살짝 앞으로 휘었다. 기형도, 얼뜨기 아니면 고수다. 돈이 꽤 있는 황죽방이 얼뜨기를 데려왔을 리 없다.
챙 소리와 함께 용철의 검과 음혈도의 도가 부딪혔다. 용철의 검이 부르르 떨리는 게 눈에 보였다. 병장기의 무게에서 이득을 본 음혈도지만 신중하게 대처했다. 용철의 검날에 전혀 이가 나지 않은 것을 확인했다. 웬만한 검은 기형도에 공력을 실으면 깨진다. 보검이 틀림없다.
필부무죄 회벽기죄라는 말이 있다. 필부는 죄가 없지만 보물을 품는 순간 죄가 생긴다. 저런 검을 가지고 지금까지 무사했다는 것은 어느 정도 실력이 있다는 뜻이다.
"저 검은 내가 전리품으로 가져가리다."
황죽방의 무인들은 아무 말도 못 했다. 용철은 비록 열여섯 이후로 내공의 발전은 없지만 무공 수련을 꾸준히 했다. 이류 고수가 된 상태에서 십 년이나 수련했기에 그 무력은 일류 고수에 육박한다.
음혈도 역시 일류 고수로 알려졌지만 사실 내공은 이류 수준이다. 그 내공의 부족함을 기형도로 메워 일류 소리를 들었다. 용철이 괜찮은 검을 들고 있기에 기형도의 우위가 사라지며 둘은 기고상당(旗鼓相當 - 실력이 비슷한 맞수)한 실력을 보였다.
"대협, 안 됩니다."
음혈도의 칼이 용철의 가슴을 향하자 황죽방의 무인이 소리쳤다. 의뢰 측 사람이 아니라면 음혈도는 당장 목을 베어버리고 싶었다. 황죽방 방주가 탐내는 건 용철이 입은 흑색 무복이다. 용철의 아비가 방주일 때 큰 행사에서 항상 입었던 옷.
어차피 청죽방에 비해 황죽방의 세가 더 강하다. 방주의 옷을 가져다 입고 그 옷에 권위를 심으면 청죽방은 천천히 말라 죽는다. 청죽방은 용철에게 유명무실한 방주 자리를 줄 생각이지만, 황죽방은 그저 옷이 필요하다.
용철은 더욱 거세게 날뛰었다. 저들의 목표가 옷임을 바로 알아챘다. 음혈도를 상대하면서도 틈만 나면 황죽방의 사람들을 공격했다. 황죽방의 무인들이 하나둘 쓰러졌다.
기형도와 용철의 검이 부딪혔다. 그러나 아무런 소리도 나지 않았다. 둘 중에 하나는 허초다. 음혈도가 허초면 승기를 잡은 것이고 용철이 허초면 혼자 남은 황죽방의 무인이 목숨을 걱정해야 한다.
허초를 사용한 것은 음혈도였다. 그리고 곧바로 기형도에 의해 커다란 상처가 생기고 피가 콸콸 쏟아졌다. 황죽방 무인은 갑자기 칼을 돌려 자신을 벤 음혈도를 손가락질하며 욕설을 뱉으려 했다.
그러나 커다란 상처로 생기가 빠르게 샜다. 마지막 소원인 음혈도 욕하기를 이루지 못한 황죽방 무인은 두 눈을 부릅뜨고 죽었다. 음혈도의 기행에 용철도 잠깐 검을 멈췄다. 용철의 눈에 희망이 어렸다.
"잘못 생각했네. 자네에겐 최악의 상황이 되었네."
용철은 품에서 천을 꺼내 묵묵히 검을 닦았다. 피 냄새가 나지 않나 코를 검신에 대고 킁킁거리기도 했다. 잘 닦은 검을 다시 검집에 넣었다. 그리고 옷을 벗어서 차곡차곡 개었다.
"부탁이 하나 있습니다."
음혈도는 용철의 목소리가 참 듣기 좋다고 생각했다. 생김새도 서생처럼 부드러운 인상임에 불구하고, 사내다움이 물씬 풍긴다. 의뢰 대상으로 만난 게 아니라 다른 곳에서 만났으면 술잔을 나누며 호형호제했을지도 모른다.
"내 시체를 안 보이는 곳에 버려주십시오."
음혈도가 고개를 끄덕이자 용철은 미소를 지었다. 기형도로 용철의 목을 벤 음혈도는 술 생각이 간절해졌다. 칼밥을 먹은 지 이십 년이 거의 되는데 아직도 살인은 힘들다.
음혈도는 용철이 벗어놓은 옷을 챙긴 후 용철의 시체를 메고 움직였다. 양지바른 곳에 묻어줄 생각이다. 그리고 아직 의뢰가 끝난 건 아니다. 아직 베어야 할 상대가 한 명 남았다. 이번 의뢰를 끝내려면 피를 한 번 더 봐야 한다.
더욱 간절해지는 술 생각을 꾹 누르며 음혈도는 용철의 시체를 묻었다. 땅을 파는 데 사용한 기형도는 용철의 시체와 함께 묻어버렸다. 원래 검을 사용했다. 좋은 검을 마련하지 못해 기형도를 억지로 썼다. 피가 많이 묻은 기형도를 버리고 새 검을 잡았다.
하얗던 구름이 먹구름이 되었다. 참 변덕이 많은 날씨다. 그리고 참으로 변덕스럽고 짖궂은 운명이다. 눅눅한 바람에는 피 냄새가 짙게 배어있다.
- 작가의말
이번 글에는 답 댓글을 자제하겠습니다. 차라리 그 시간에 문장 하나 고민하는 게 나을 것 같습니다. 그리고 매일 연재를 장담하지 못합니다. 두 글을 동시에 진행하며 일주일에 하루 정도는 글을 못 올릴 수도 있음을 미리 말씀드립니다. 글이 막히면 억지로 쓰지 않겠습니다.
Comment ' 3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