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가 연합
야무진 기합 소리와 함께 내지른 주먹은, 기합에 어울리지 않게 가볍고 느렸다. 거기에 주먹을 내지르는 힘을 이기지 못하고 몸을 휘청이기까지 했다. 그냥 거스르지 않고 앞으로 한 발 내디디면 되는데 하체에 힘을 주어 버티려고 하다가 앞으로 몸이 기울어졌다.
아이의 머리만큼 큰 손이 옷 덜미를 잡고 쑥 끌어 올렸다. 키의 몇 배나 되는 높이로 들어 올려진 귀소는 해맑은 웃음을 지었다. 떠지지 않는 눈을 억지로 잡아 뜯으며 부친과 함께 무공 수련을 시작한 지 어언 한 달이 다 되어간다. 가르치는 사람도 없고 배우는 사람도 없이 아비는 아비대로 자식은 자식대로 수련하지만, 귀소는 가끔 늦잠을 자서 수련 시간을 놓치면 몰래 숨어서 울기도 했다.
"귀소는 무공이 좋아?"
"소자는 무공 수련이 글공부보다 좋습니다."
"그럼 내가 글공부시키지 말고 무공 수련만 시키자고 말해볼까?"
귀소의 얼굴에는 난처한 기색이 떠올랐다. 가끔 외조부나 외조모 그리고 다른 식구들 앞에서 멋진 시구를 읊으면 다들 크게 기뻐하고 칭찬해준다. 그 기분도 나쁘지 않아 글공부도 포기하고 싶지 않다.
"소자 불민하지만, 부친의 무공과 모친의 학식을 두루 갖춘 문무겸전의 사내가 되고 싶습니다."
키가 무릎에도 미치지 않는 아이가 어른 말투를 흉내 내니 귀엽기만 했다. 유신은 장난기가 발동해 일부러 진지한 표정으로 말했다.
"내 무공을 익히려면 하루에 여덟 시진씩 수련해야 한다. 남은 시간이 네 시진밖에 안 되는데 어찌 글공부한다는 말이냐?"
"사람의 체력으로 여덟 시진 내내 수련할 수는 없을 터이니, 중간에 쉬는 짬짬이 글공부에 열중하도록 하겠습니다. 방울방울 물방울이 바위를 뚫고 인간의 의지는 산도 옮긴다고 했습니다. 소자 비록 그 정도 도량을 지녔는지 모르지만, 부친과 모친의 기대에 어긋나지 않게 열심히 노력하겠습니다."
유신은 자신의 손에 들려 또박또박 대답하는 아들이 너무 사랑스러웠다. 볼을 아이에게 갖다 대고 비비적거린 후 목말을 태우고 집으로 향했다. 유신의 행동에 귀소가 놀라서 다급히 말했다.
"자식 된 몸으로 어찌 부친의 어깨에 올라탄다는 말입니까. 소자 걸을 수 있으니 어서 내려주십시오."
"힘센 아비가 자식을 어깨에 태우고, 장성한 자식이 연로한 아비를 업어주는 건 인지상정이다. 너무나 당연한 것이라서 성현들도 굳이 글로 남기지 않았을 뿐이다."
유신의 말에 반박할 말을 찾지 못한 귀소는 조마조마한 심정으로 목말을 타고 집으로 향했다. 유신이 무릎을 굽히고 집 안에 들어서자 초설이 둘의 모습을 보고 깔깔 웃어댔다. 유신의 큼직한 머리 위에 작고 귀여운 유신과 똑같이 생긴 머리 하나가 얹어져 있었다.
자신을 꾸짖을 것이라 여겨 조마조마했던 귀소는 초설이 즐겁게 웃자 그제야 시름을 놓고 해맑은 웃음을 지었다. 부자가 똑같은 미소를 짓자 초설은 다시 한번 배를 부여잡았다.
그간 아비 없이 자라서 버릇없다는 소리를 들을까 봐 자식에게 엄하게 대했던 초설이었고, 유신이 돌아왔지만 그간의 버릇이 남아 있어서 자식에게 엄한 편이었다. 그러나 매일 아침 일어나도 늘 곁에 있는 유신 덕분에 초설도 점점 너그럽게 변해갔다.
"물을 받아놨으니 시원하게 씻으세요."
귀소가 가장 좋아하는 시간이 왔다. 옷을 홀라당 벗은 귀소는 부친의 품에 안겨 물이 가득 담긴 욕조로 향했다. 유신은 귀소를 품에 안은 채 한 손만 물에 넣고 내공을 운용했다. 얼마 지나지 않아 차갑던 물이 부글부글 끓기 시작했다.
유신은 귀소를 안고 펄펄 끓는 물에 들어갔다. 아이에게는 무척 뜨거운 물이어서 귀소는 물에 닿지 않도록 조심스레 안아 들었고 적당히 식은 후에야 내려놓았다. 잠깐 물장구를 치던 귀소가 유신의 뒤로 가서 거친 천으로 등을 밀었다.
너무 거대한 등이라서 절반도 밀지 못했는데 숨이 가빠왔다. 귀소는 자신이 힘들어서 숨이 차는 게 아니라 끓는 물에서 나오는 열기 때문이라고 생각했다. 매일 아침 부친과 함께 절세신공을 수련하면서 힘도 체력도 무척 강해졌기에 체력 문제로 숨이 차는 건 절대 아니라고 여겼다.
커다란 등을 다 밀자 역할이 바뀌어 유신의 큼직한 두 손이 귀소의 몸을 깨끗하게 씻겨주었다. 특별히 내공을 머금은 손으로 근골을 섬세하게 만져줘서 모자람이나 치우침 없이 성장하도록 몸의 균형을 잡아주었다. 두 번이나 몸의 비틀림을 바로잡는 경험을 했기에 가능한 것으로, 내공이 더 많거나 유신보다 경지가 높다고 부릴 수 있는 재주가 아니다.
초설이 정갈하게 차린 아침을 맛있게 먹은 후 차를 마셨다. 유신과 초설은 잘 끓인 용아차를 마셨고 귀소는 달곰한 팔보차를 마셨다. 꽃잎과 대추와 생강을 비롯한 햇볕에 말려 화기에 전혀 닿지 않은 여덟 가지 건물(乾物)로 끓인 팔보차는 아이나 노인들이 마시기 좋다.
"아이에게 글공부를 좀 쉬게 하고 셋이서 가까운 곳에 여행을 다녀왔으면 하오. 책에는 오래된 죽은 것들만 있는데 거기에 숨을 불어넣으려면 눈으로 보고 귀로 듣고 온몸으로 느껴야 하오. 혹 가고 싶은 데가 있으면 말해보시오."
초설이 기쁜 얼굴로 고개를 끄덕이고 깊은 생각에 잠겼다. 가까운 곳은 언제든 갈 수 있으니 조금 먼 곳으로 가고 싶은 생각이 들어 조심스럽게 입을 열었다.
"동정호는 어떻습니까?"
사백 리 정도 떨어졌지만 나쁘지 않다. 마차를 타고 열흘 가야 하는 거리지만, 금루의를 메고 온 유신이 돈 따위가 아쉬울 리 없다. 아직 금루의를 처분하지 못하고 창고에 잘 보관해두고 있지만, 유신이 입만 열면 은자 백 냥 쯤은 당연하게 얻어낼 수 있다.
"내 가주께 허락을 받아오겠소."
그러나 유신의 동정호 유람 계획은 가주와 대면한 순간 파멸되었다. 항주에서 세가 연합을 위한 회의를 열기로 했고, 당우령의 출산일이 가까워져서 유신이 가기로 정했다. 이미 가주의 직무를 대부분 인계받은 서문청월이 무리를 인솔하고 젊은 층을 대표하는 고수로 유신이 초현을 대신하기로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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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저 가까운 데를 여행하려 했는데 어쩌다 보니 내 고향으로 가게 되었구나. 서호는 내가 네 모친과 처음 정식으로 만난 곳이니 어쩌면 더 잘된 것 같다."
다른 곳이라면 유신 혼자 출발해야 했으나 항주의 지부대인이 아직도 관직을 옮기지 않아 초설과 귀소도 함께 데리고 떠났다. 항주에 도착하면 유신까지 셋이서 세가의 사람들과 달리 지부대인의 저택에 머물기로 했다.
"부친께서 처음 본 모친의 모습은 어떠했습니까? 지금처럼 현숙하고 단정한 모습이었습니까 아니면 나이에 어울리게 발랄하고 귀여운 모습이었습니까?"
"귀소야, 이런 말은 누구한테 배운 거니?"
유신이 궁금해서 질문하자 귀소가 바로 대답했다.
"외숙부와 외숙모의 대화를 듣고 많이 배웠습니다."
초설이 몰래 주먹을 쥐고 이를 갈았다. 아무래도 눈치도 없지만 아예 볼 생각도 없는 서문초현과, 그런 서문초현에게 물든 당우령이 아이가 보는 앞에서 말을 가리지 않고 막 한 것 같다는 생각이 강하게 들었다.
"그때 네 모친은 이슬을 머금은 한 떨기 배꽃 같았지. 나는 그저 이뻐서 그런가 보다 했는데 알고 보니 몸이 아팠던 거였다. 지금은 건강을 되찾아 복사꽃 같은 화사함을 자랑하지만, 그때는 가냘프고 청초한 느낌이 훨씬 강했지."
유신의 말에 초설은 얼굴이 발갛게 달아올랐다. 담담한 말투로 낯부끄러운 말을 뱉는 유신으로 인해 부끄럽기도 하고, 거기에 담긴 진심이 느껴져서 기쁘기도 하여 심장이 노루가 뛰어다니듯이 마구 요동쳤다.
"소자 두 분의 해후가 무척 궁금해 자세히 듣고 싶습니다."
유신은 적당히 각색해서 들려주었다. 지부대인의 담을 넘은 일은 얘기하지 않고, 당우형을 찾아 병을 치료하려던 초설과 우연히 만났다는 식으로 이야기를 꾸몄다. 소림사의 동인진을 멈추고 소환단으로 초설을 구한 후 혼인한 이야기까지 다 들은 귀소가 눈물을 글썽였다.
"양산백과 축영대의 이야기처럼 아름답습니다."
양산백과 축영대는 옛날에 순찰을 나온 왕의 눈에 든 축영대가 남편을 위해 절개를 지키려고 투신한 이야기다. 아내가 죽자 곧 따라 죽은 남편을 나란히 묻어주었는데 거기에 나무 한 그루가 자랐고, 원앙새 한 쌍이 나무에서 구슬피 울다가 나비로 화해서 짝을 지어 날아갔다는 이야기로 천 년 가까이 전해진 슬픈 사랑 이야기다.
"귀소야, 양산백과 축영대의 이야기는 슬픈 이야기다. 아름다워지려면 양산백이 왕을 물리치고 아내를 지켰어야지. 책은 이상이고 강호는 현실이다. 너도 강호에 몸담은 셈이니 성현의 말씀은 그 속뜻을 헤아릴 뿐 맹목적으로 따라서는 안 된다. 성현의 말씀이라고 언제 어디서나 옳은 건 아니다."
"부친의 금과옥조 소자 꼭 명심하겠습니다."
"그리고 이후 기회가 되면 당 백부를 만나게 될 텐데, 당 백부의 말을 따라 해서는 안 된다. 꼭 명심하거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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늦가을의 서호에는 누렇게 뜬 낙엽들이 잔뜩 떠 있어서 살짝 경치가 죽어버린 느낌이 들었다. 그러나 배를 타고 중심으로 향하니 여전히 아름다웠다. 초설은 금잠적주보의 덕분에 옷을 얇게 입을 수 있었고 유신 역시 가벼운 차림을 했다. 유독 귀소만이 싸늘한 날씨에 옷을 여러 겹으로 입어 무척 통통하고 귀여운 모습이다.
유신의 어깨에 올라탄 귀소는 서호의 풍경에 연신 감탄했다. 처음 보는 세상에 뭐가 놀랍고 신기하지 않겠냐만, 서호의 풍경은 아무리 세상을 다 돌아본 사람이라도 처음 보게 되면 감탄하기 마련이다.
서호를 구경하고 유명한 주루에 가서 항주 음식뿐 아니라 중원 각지의 음식을 배불리 먹었다. 지부대인의 저택에 돌아가는 길에 지쳐서인지 아니면 배가 불러 곤해서인지 귀소가 잠이 들었다.
"내가 귀소 나이 때는 말도 제대로 하지 못한 것 같은데, 내 자식이지만 참 잘난 것 같소."
"형주에서도 소문이 자자합니다. 장차 장원급제할 기재가 나타났다고 난리이었습니다."
"이제 시간이 날 때 당문에 가서 독왕 어르신의 진찰을 받아야겠소. 내 가전 심법은 특별한 체질만 익힐 수 있으니 어르신께 확인받고 가전 심법을 익힐지 서문가의 심법을 익힐지 정해야겠소."
초설이 당황한 얼굴로 말했다.
"만약 가전 심법을 못 익히면 무공이 전해 내려가지 못하는 게 아닙니까?"
"별걱정을. 귀소가 안 되면 귀소 동생들에게 익히게 하면 되오."
유신의 말에 고개를 끄덕이던 초설이 얼굴이 빨개지더니 고개를 돌려버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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붉은 아지랑이가 정수리에서 아물아물하더니 코로 쑥 빨려 들어갔다. 하얗던 얼굴이 붉은 아지랑이를 흡입한 후 거멓게 변했다. 독에 중독되었을 때 볼 수 있는 자색에 가까운 검은색이 아니라 살짝 회색에 가까운 검은색이다.
조금 버티다가 넘쳐나는 기운을 다시 밖으로 내뱉은 남무천은 붉은 아지랑이를 정수리에 이고 가쁜 숨을 몰아쉬었다. 절정에 이른 고수에게서 쉽게 볼 수 없는 검은 기미가 눈 밑에 드리워 있었다.
"소형제랑 당 씨 청년은 하루도 걸리지 않았다면서? 나는 왜 한 달이나 잠도 못 자고 이 고생을 해야 하는 거요?"
전영득이 미안한 표정을 지으며 말했다.
"아마 둘이 특별한 무공을 익힌 것 같구나. 그리고 은 대협의 제자는 둘의 도움으로 빠르게 수습한 것이고. 정 힘들면 남는 기운은 그냥 날려버리거라."
"젠장, 지금 수습하지 못한 기운도 예전 내 내공보다 더 많은데 어떻게 버린단 말이오. 이 남무천의 눈에 모래가 들어가지 않는 한 어림도 없소."
전영득이 두리번거리며 모래를 찾았지만, 눈과 진흙밖에 보이지 않았다.
"과유불급, 소탐대실. 이미 얻은 내공도 무척 많은데 집착하다가 어렵게 모은 것까지 다 날리면 어떡하냐?"
말은 이렇게 하지만 전영득 역시 남무천이 모든 기운을 다 수습하기를 바랐다. 단순히 내공이 많아지는 게 문제가 아니라, 남무천이 내공을 다루는 솜씨가 하루가 다르게 능숙해지고 있다.
예전에는 흑혈기공의 특성상 그저 내공이 부족할 때는 억지로 더 짜내고 내공이 넘쳐날 때는 거기에 휘말리지 않도록 잘 버티는 게 다였다. 물론 흑혈기공이 심술을 부리지 않을 때는 무척 괜찮은 다스림을 보였지만, 싸우는 기술이나 힘 조절에 비하면 그저 평범한 수준이었다.
그러나 화령초의 기운과 한 달 남짓이 싸우면서 내공을 다루는 천재성마저 자신을 가리고 있던 흑혈기공을 갈기갈기 찢어버리고 머리를 불쑥 내밀었다. 아직은 솜털이 보송보송하지만, 남무천의 천재성이라면 몇 달 지나지 않아 내공을 움직이는 게 숨 쉬듯 자연스러워질 것이다.
"소탐대실이라니? 나는 지금 대탐대득이오."
"독한 놈, 한 달째 먹지도 마시지도, 거기에 싸지도 않다니."
기운을 머리 위에 띄우고 휴식을 취하던 남무천은 다시 기운을 삼켰다 뱉었다 하면서 씨름하기 시작했다. 그러다 심력이 부족하거나 집중력이 떨어지면 다시 휴식을 취했다.
"그 여우는 먹으려고 잡아 온 거요?"
"이건 지호라는 이름으로 불리는 여우인데 당 대협이 키우던 거였다. 네가 기운을 다 수습하면 당문에 가서 네 검을 완성해야지. 그때 등가교환의 대가로 줄 귀한 몸이다."
지호는 눈을 살포시 감고 턱을 간질이는 전영득의 손길을 즐겼다.
- 작가의말
사실 지난 편이 3부 끝이었습니다. 1부보다 2부가 10편 정도 짧고, 3부는 또 더 짧아졌습니다. 이유는 원래 3부에서 우문현성의 정체를 조금 밝히려다가, 그렇게 되면 글이 짧아져야 한다는 사실을 발견했습니다. 우문현성의 비밀을 밝혀버리면 다른 일들이 시시해져서 몰입이 안 될 것이고, 그렇게 되면 지루해지지 않기 위해 글을 빨리 마무리해야 할 것 같았습니다. 그러면 3부가 길어지는 대신 글이 전체적으로 짧아집니다. 3부의 분량을 조금 희생한 대신 4부가 좀 더 길어지고 원래 기획한 것보다 더 흥미로워질 것 같습니다.
그리고 이번 편은 1부에서 2부로, 2부에서 3부로 바뀔 때 쉬어가는 편이 있었던 것처럼 그런 편입니다. 일상물을 추구하는 글이기에 이번 편만 글의 주제를 벗어나는 움직임을 보이고, 다음 편부터는 강호의 일상인 살인, 방화, 배신, 음모 등을 다시 서술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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