등가교환
밥상은 푹 끓인 흰 죽과 겨울에 보기 힘든 푸른색으로 가득했다. 그러나 당우형은 뭐가 불만인지 손에 든 젓가락을 잘 움직이지 않았다. 당우형의 모습을 지켜보던 독왕이 버럭 화냈다.
"장가까지 간 놈이 밥투정해?"
"고기가 독에 좋지 않다는 건 압니다만 저까지 육식을 금할 필요는 없잖아요."
독왕은 몸에 수백 가지 독을 품었다. 초현은 중독되었고 유신은 한술 더 떠서 독이 단전까지 침투했다. 그래서 이들은 육식을 최대한 금해야 한다. 그러나 멀쩡한 당우형까지 육식을 금할 필요는 없다.
"젊을 때부터 육식을 자제해야 독공을 제대로 익힐 수 있다. 그리고 흑룡단의 독은 잊은 것이냐?"
내공이 독보다 훨씬 많은 지금은 괜찮다. 그러나 독이 늘어나는 속도가 내공보다 빠르기에 언젠가는 독이 내공을 능가한다. 그러나 당우형은 철이 덜 들었다.
"작은할아버지는 그래도 고기를 계속 드셨잖아요. 왜 나한테는 이러는 거예요."
"고기를 먹어서 내가 독공을 제대로 익히지 못했다. 다 널 위해서 하는 일이다. 그리고 네가 흑룡단의 독을 다 배출해 낸다면 그때는 고기를 마음껏 먹어도 된다."
그때 외총관이 조심스럽게 들어왔다. 방계 출신에 무공도 익히지 못한 외총관은 독왕이나 화수로 내정된 당우형을 무척 어려워했다.
"밖에 청운산장 소장주께서 뵙기를 청합니다. 용 공자와 서문 공자에게 용무가 있다고 합니다."
"식사 중이니까 일다경 뒤에 나갈게요."
일다경은 차 한잔 마시는 시간이다. 단순히 차를 마시는 시간이 아니라 차를 끓이는 것부터 시작해서 끓인 찻물을 두 번 버리고 세 번째 물을 찻잔에 부은 후 맛을 음미하며 마시는 과정을 말하기에 꽤 긴 시간이다.
당우형의 퉁명스러운 대꾸에 외총관이 공손히 머리를 조아리고 나갔다. 죽과 채소밖에 없어서 배가 빨리 꺼지기에 유신과 초현은 배가 부르도록 많이 먹었다. 당우형도 독왕의 감시하에 자기 몫을 다 먹을 수밖에 없었다.
입을 찬물로 헹구고 대청에 나가니 차를 마시던 독만과 독두노가 벌떡 일어나 공손하게 인사를 올렸다.
"우리는 오후에 청운산장으로 돌아갑니다. 그래서 작별 인사를 드리러 왔습니다. 그리고 이건 두 분께 드리는 예물입니다."
유신에게는 작은 함을, 그리고 초현에게는 큰 함을 주었다. 독만의 기대에 찬 눈길을 거부하지 못하고 유신은 함을 열어보았다. 붉은색의 구슬 하나가 안에 있었다.
"오호, 이 귀한 것을."
독왕의 감탄에 독만은 우쭐한 표정으로 입을 열었다.
"저희 청운산장에도 하나밖에 없는 겁니다. 용 선생의 인품과 학식 그리고 무공에 감탄해서 드리는 예물입니다."
모두의 시선이 초현에게로 몰렸다. 훨씬 큰 함이니 뭐가 들어있을지 궁금증이 일었다. 초현도 함을 탁자 위에 놓고 열어보았다.
"제길."
안에는 머리 하나가 놓여있었다. 잔뜩 기대했던 초현은 실망을 표했다.
"서문 공자에게 하독한 독두노입니다. 제 명을 어기고 함부로 서문 공자를 중독시킨 죄를 벌해 머리를 잘랐습니다."
독왕은 독만의 수작을 단번에 알아차렸다. 유신이 쾌검신룡이라는 걸 알고는 전전긍긍했을 것이다. 강호에는 천하에 둘도 없는 절대고수로 소문이 퍼졌으니 말이다. 이제야 온 건 혹시나 유신이 중독으로 죽지 않을까 하는 요행을 바라서였다. 그러다 며칠이 지나서도 유신이 살아있다는 말에 귀한 선물을 들고 찾아온 것이 분명하다.
그때 외총관이 다급히 들어왔다.
"밖에 남무천이라는 사람과 전영득이라는 사람이 뵙기를 청합니다. 독왕 어르신을 찾는다고 합니다."
남무천이라는 말에 독만의 얼굴이 창백하게 질렸다. 구두노 역시 뼈밖에 남지 않은 몸을 부들부들 떨었다.
"두 분을 다른 길로 내보내 주십시오. 제가 예전에 남 대협에게 언뜻 들었는데 청운산장과 사이가 좋지 않다고 하더군요."
유신의 말에 쾌검신룡과 흑면야차가 안면이 있다는 사실을 알아챈 독만은 거의 검은자위까지 하얗게 질릴 뻔했다. 둘은 부들부들 떨면서 외총관을 따라 당문을 벗어났다. 밖으로 나가자마자 마부를 재촉해서 급하게 마차를 달려 당문과 멀어졌다.
둘을 밖으로 내보낸 외총관은 남무천과 전영득을 안으로 안내했다. 독왕에게 인사를 올린 후 남무천과 전영득이 유신에게 반갑게 인사를 건넸다.
"소형제, 서문가에 있다고 들었는데 이렇게 당문에서 예기치 않은 만남을 가질 수 있어 무척 기쁘네."
전영득이 먼저 인사를 건넸고 남무천이 조금 미안한 얼굴로 말을 걸었다.
"소형제 검은 내가 쓰다가 부러뜨렸네. 언젠가 괜찮은 검을 얻으면 내가 꼭 갚아주지."
"괜찮습니다. 덕분에 의형을 만났고 복수도 했고 가문의 검도 찾았습니다. 마음에 두지 마십시오."
은자 열 냥이 넘는 검을 없던 일로 하자는 말에 남무천은 유신에 대한 호감이 더 커졌다. 호법의 자리까지 올라갔지만 재물을 모으지 못했던 남무천이기에 은자 열 냥은 무척 큰돈이다. 일 년 넘게 동행한 백면귀산은 돈이 많지만 엄청 구두쇠라 동전 한 푼도 따지는 자이다.
"독왕 어르신을 번거롭게 해서 죄송합니다. 마침 제가 녹반금피를 얻었습니다. 당문의 적란과 바꾸면 참 좋을 것 같다는 생각에 염치 불고하고 찾아뵙게 되었습니다."
녹반금피(綠斑金皮)는 독사의 한 종류로 황금색 몸통에 약간의 푸른 점이 나 있다. 다른 독들과 다르게 내공 증진에 도움을 주어 여러 단약을 만드는 데 필수로 들어간다. 살린 채 정기적으로 독을 빼낼 수 있어 같은 부피의 금보다 훨씬 귀하게 취급된다.
"참 안타깝군. 우리 당문에는 적란이 없어."
독왕의 말에 백면귀산은 웃는 얼굴로 대답했다.
"우행 진인께서 당문에 적란이 있다고 했습니다. 적란이 귀하다고 하지만 말 그대로 희소한 것이고 쓸모는 녹반금피가 훨씬 많습니다."
확실히 적란은 얻기 힘들지 그 용도가 특출하지 않다. 그에 비교하면 녹반금피는 적란 정도로 희소하지 않지만 구하기가 무척 어렵고 쓸모가 다양하다. 백면귀산은 물론 당문에도 이득이 되는 거래다.
"당문은 적란을 보유한 적이 없네. 우행 진인이 잘못 알았겠지."
"그런데 제 눈에는 이미 적란이 보입니다."
미처 닫지 않은 함 안에서 유신이 구슬로 오해했던 적란이 고운 빛깔을 자랑했다. 백면귀산이 웃는 얼굴과 공손한 말투를 시종일관 유지했지만, 사실상 얼마나 지독한 놈인지 독왕은 잘 알고 있다. 성질도 더러워서 더 골려주다가는 당문에 앙심을 품을지도 모른다.
"저건 오독교가 여기 쾌검신룡에게 뇌물로 바친 적란이야. 그것도 자네들이 오기 불과 일다경 정도 되기 전에 이쪽으로 넘어왔지."
백면귀산은 자리에서 일어나 무당이 있는 방향으로 공손히 인사를 올렸다. 적란은 당문이 아닌 오독교가 가지고 있었다. 만약 적란이 오독교에 있다는 걸 알았으면 녹반금피도 구하지 않고 바로 찾아가서 교주를 협박해 적란을 얻어냈을 것이다.
그런데 우행 진인이 당문에 있다고 말해서 당문의 적란을 얻어낼 수 있는 기물을 찾아다녔고 겨우 녹반금피를 얻어서 이제야 찾아왔다. 그런데 적란의 소유권이 오독교에서 쾌검신룡으로 바뀐 지 일다경 정도밖에 되지 않는다고 한다. 그야말로 살아있는 신선이 아닌가 싶을 정도다.
"소형제, 그날 소형제도 자리에 있었으니 잘 알 것이오. 이 적란은 내 고질병을 치료할 수 있는 물건이오. 나에게는 무척 소중하지. 나는 당문에 적란이 있다는 말을 듣고 녹반금피를 준비해 왔소. 그러나 녹반금피가 소형제에게는 별 가치가 없는 물건이요. 적란이 내게 주는 가치만큼 안 되지. 그러니 등가교환이 성립되지 않는다네."
보따리를 한참 뒤적거리던 백면귀산이 난감한 표정으로 유신에게 질문했다.
"소형제가 서문가의 천금과 혼인했다는 소문을 들었소. 외람하지만 소형제는 부인과 금실이 좋으시오?"
"서로 무척 아끼고 있습니다."
백면귀산은 활짝 웃었다. 꾸며낸 웃음이 아니라 정말 속으로부터 우러러 나온 미소였다.
"내 여기 금잠적주보의가 있소. 잘 늘어나기 때문에 남자가 입어도 되지만 옷 모양새가 여자 옷이라서 주저했소."
금잠적주보의(金蠶赤蛛寶衣)는 금빛 누에고치에서 뽑은 실과 붉은 거미의 거미줄을 엮어서 짠 옷이다. 누에고치에서 실을 뽑아내면 누에는 나비가 되지 못하고 죽는다. 금빛 누에를 계속 얻기 위해서 누에고치가 적으면 실을 뽑지 못한다. 그래서 무척 귀하다.
"우선 암기는 전부 막아낼 수 있소. 강한 내공이 실리지 않은 공격도 옷이 다 막아주오. 그리고 붉은 거미의 거미줄이 있어서 웬만한 독물은 가까이 접근하지도 못하오. 그리고 음약이나 몽한약에도 반응하기에 여인에게 정말 필요한 옷이오."
작은 도자기 병을 꺼내서 독으로 보이는 액체를 옷에 떨구자 옷의 색이 변했다. 음약이나 몽한약에도 반응한다고 하니 어디에 가도 독 걱정은 크게 하지 않아도 된다. 그리고 이러한 효능을 다 빼더라도 금잠적주보의는 무척 아름다운 옷이다.
황금색에 붉은색이 적절하게 섞여서 고귀한 느낌을 물씬 풍긴다. 옷이 잘 늘어나서 웬만한 체형에 다 맞출 수 있다. 거기에 겨울에는 따뜻하고 여름에는 시원하다고 하니 그야말로 돈 주고도 구하기 힘든 옷이 아닐 수 없다.
"이렇게 얇아 보여도 사실 천이 세 겹이나 되어 있소. 비가 와도 물이 밖으로 흘러가오. 그렇다고 땀이 차지도 않소. 체온이 높아지면 천이 늘어지며 땀을 밖으로 내보내오. 체온이 낮다면 천이 빳빳해지며 밖의 냉기가 몸에 침습하지 못하게 막아주오."
백면귀산의 설명이 길어질수록 옷에 욕심이 났다. 심지어 독왕과 남무천의 눈에도 저 옷을 갖고 싶다는 욕망이 서렸다. 유신은 적란의 가치를 제대로 모르기에 당우형의 눈치를 봤다. 유신과 눈을 마주친 당우형은 고개를 격하게 끄덕였다.
"전 대협과 초면도 아니고 이것도 인연이라면 인연이니 교환에 응하겠습니다. 다만 제가 너무 이득을 보는 것 같아 미안할 뿐입니다."
"소형제, 이 옷이 자네 부인의 목숨을 지켜줄 일이 생길지 모르지만, 적란은 확실하게 이 백면귀산의 명줄을 더 길게 만들어주오. 둘 다 이득인 등가교환이지만 나는 확실한 이득을 챙겼으니 오히려 내가 미안해야 하오."
아무리 실리만 따지는 백면귀산이라지만 여자의 것이 분명한 금잠적주보의를 입을 수 없다. 자신에게는 거의 쓸모가 없는 옷을 내주고 목숨을 늘려줄 적란을 얻은 것이니 전혀 손해가 아니다.
초설에게 뭔가 선물해 본 적이 없는 유신은 보기도 좋고 쓸모도 뛰어난 옷이 무척 마음에 들었다. 첫 거래를 성공시킨 백면귀산이 두 번째 거래를 시도했다.
"그럼 녹반금피를 드릴 테니 제 목숨은 독왕 어르신께서 맡아주십시오."
"안돼. 딴 거 내놔. 분명 녹반금피 외에 따로 준비한 게 있을 거야."
백면귀산은 녹반금피로 적란을 얻어낸 후 독왕에게 치료를 부탁하기 위한 무언가를 또 준비했다. 녹반금피로 싸게 때우려고 했는데 그만 독왕에게 들켜버렸다.
"제가 녹반금피는 드린다고 말했잖습니까. 녹반금피는 덤 같은 겁니다. 그냥 드리는 거고 당연히 제 목숨값은 따로 준비했습니다."
백면귀산은 원래부터 그러려고 했다는 듯이 아주 자연스럽게 보따리에서 가죽으로 둘둘 감싼 무언가를 꺼냈다. 가죽을 쭉 펴고 보니 하얀 매화 모양의 암기 일곱 개가 있었다.
"냉골칠정(冷骨七釘)입니다. 호신강기를 뚫는 특성이 있어서 절정고수 잡는 데 정말 필요한 물건이죠."
[밥투정 안 할거지?]
독왕의 전음에 당우형은 격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독왕이 고개를 끄덕이자 당우형은 잽싸게 암기를 잡아챘다. 유백색의 암기는 무척이나 정교했고 아름다웠다. 손에 들고 무게를 가늠하던 당우형은 균형이 정교하게 잡힌 암기에 마음을 푹 빼앗겼다.
"사흘 뒤에 오면 된다."
그날 저녁 당우형은 평소보다 두 배나 되는 죽과 채소를 맛있게 해치웠다.
- 작가의말
백면귀산의 등가교환을 간략히 설명해드리면 두 가지 원칙이 있습니다.
1. 내가 얻은 물건이 내가 내준 물건보다 가치가 커야 한다. 차이가 클수록 좋다.
2. 내가 얻는 가치만큼 상대에게 비슷한 가치를 가진 물건을 내줘야 한다.
내주는 물건의 가치를 느끼는 기준은 1번에서는 백면귀산이고 2번에서는 상대입니다. 나름 공평하면서도 서로가 이득이 되는 거래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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