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주일척
당우형은 자신의 경공에 지금까지 불만을 가져본 적이 없다. 눈썰미와 몸놀림은 타고나서 암기술과 침술 그리고 경공은 또래들을 상항 앞서갔다. 그러나 소림을 향해 달리면서 등에 날개가 자라지 않은 것이 원망스러웠다.
나한당에 도착했을 때 유신은 이미 동인진에 도전하고 있었다. 삭이 유신의 옆구리를 스치자 당우형은 멈추라고 소리쳤다. 그러나 동인진은 실패가 확실하거나 도전자 본인이 요청하기 전에는 멈추지 않는 것이 원칙이다.
당우형이 직접 동인진을 멈추려 했지만 나한당주의 제지를 받았다. 순서가 잘못되면 오히려 도전자가 더 위험해진다는 말에 당우형은 무릎을 꿇었다. 나한당주가 앉은 자리에서 손을 위로 휘젓자 부드러운 힘에 밀려 일어섰다.
유신은 비틀거리면서도 용케 동인진의 공격을 아슬아슬하게 피해냈다. 그러다 사 단계에 이르자 유신이 갑자기 드러누웠다. 당우형은 급기야 눈물을 흘리며 동인진을 멈춰달라고 애원했다. 탈진해서 쓰러진 것으로 오해한 것이다.
### 快劍神龍 龍遊迅 ###
빠른 속도로 초현을 객잔까지 업어다 준 유신은 점심을 매우 빠르게 해치웠다. 그리고 자신의 방에 들어가 검을 챙겼다. 악진의 찌르기가 아직도 눈앞에 아른거리는 지금 바로 도전해야 한다는 생각만 머리에 가득했다.
"항주 태생 용유신이 동인진에 도전합니다."
검은 검집에 넣은 채로 뽑지도 않았다. 삼 단계까지는 피해야 한다. 유신의 내공과 무공으로 동인의 공격을 받아내다가는 어떤 파탄이 생길지 모른다. 악진의 찌르기를 머리 한편에서 계속 되새기며 다른 한편으로 남무천과 불천검의 대결을 떠올렸다.
남무천의 팔자(八字) 보형은 비교적 자유로운 편이다. 두 발의 발끝 혹은 발꿈치를 모아 역팔자나 팔자를 이루면 된다. 두 발이 이루는 각도는 본인이 상황에 따라 마음 가는 대로 정한다. 유신은 남무천이 그 보형을 동인진에서 얻은 게 아닐까 짐작했다.
문제는 용유신의 경험이나 깨달음이 팔자 보형을 자유자재로 쓸 수준이 되지 못한다. 그래서 유신은 불천검의 정자(丁字) 보형도 가져왔다. 정자 보형은 두 발이 직각을 이루어야 하는 매우 엄격한 보형이다.
유신은 정자 보형을 근간으로 하고 팔자 보형을 섞었다. 밖에서 보기에는 엄청 비틀거리는 것 같지만 사실 엄정한 법도에 따라 움직이고 있다. 다만 아직 명확한 형태를 이루지 못했고 유신도 몸에 익힌 게 아니라서 주정뱅이가 비틀거리는 것처럼 보였다.
몸의 움직임은 추구질행을 바탕으로 했다. 추구질행은 기본적인 신법이다. 당문의 신법이나 서문가의 신법처럼 고절한 신법은 아니다. 곤륜의 운룡구현이나 토룡팔섬과는 비교조차 힘들다. 그러나 기본적인 공격만 하는 동인들을 상대로 추구질행은 크게 부족함이 없다. 유신은 삼 단계까지만 버티자는 생각으로 정신을 하나로 모았다.
이 단계에 삭이 허리를 스쳤지만, 유신은 전혀 통증을 느끼지 못했다. 너무 집중해서 통증을 무시해버린 것이다. 동인진 밖이 잠깐 소란스러웠지만 유신은 모든 소리를 귓등으로 흘렸다.
두 발이 직각을 세우며 정자를 이루었다. 공격이 들어오면 팔자 보형으로 이동했다. 공격이 끝난 순간 다시 정자 보형을 이루었다. 정적인 상태에서는 정자, 움직일 때는 팔자로 움직이며 상체는 추구질행의 가르침에 따랐다. 처음 하는 시도지만 높은 집중력과 빠른 순간 반응으로 삼 단계까지 어렵게 버텨냈다.
사 단계로 바뀔 때 잠깐의 휴식 시간이 있다. 유신은 악진과 똑같은 자세로 누웠다. 키가 훨씬 커서 조금 걱정이 되었지만 잡생각을 이내 지워버렸다. 검을 뽑아 오른손에 든 다음 검집을 가슴 위에 놓았다. 만약 공격을 당하면 검집이 한 번 버텨주기를 바랐다.
삼 단계까지 세 번 공격을 허용했다. 삭이 허리를 스친 건 피륙상이라 괜찮은데 남은 두 번은 둔기인 파와 추에 맞았다. 밀리면 더 큰 위기에 놓일 수 있기에 억지로 버텼더니 작은 내상을 입었다.
'이 찌르기의 이름은 고주일척이라 짓자.'
이 생각을 마지막으로 유신은 머리를 깨끗이 비웠다. 계속 머릿속에서 반복하여 떠올리던 악진의 찌르기마저 사라졌다. 동인들이 우스꽝스럽게 허공에 대고 병장기를 휘두르는 데도 전혀 웃기지 않았다. 그러다 어느 순간 뇌리에 번개가 쳤다.
용이 되기 위해 폭포를 거슬러 뛰는 잉어의 몸놀림이 이러할까, 천 겁을 이겨내고 여의주를 얻어 하늘로 승천하는 용의 자태가 이러할까. 당우형마저 걱정과 근심을 잊고 경악에 빠진 찌르기가 유신의 손에서 펼쳐졌다.
빠르냐고 물으면 누구도 빠르다고 하지 않을 것이다. 왜냐면 너무 빨라서 그 과정이 잘 보이지 않는 다른 쾌검들과 달리 이 찌르기는 처음부터 마지막까지 모든 과정이 눈에 보였다. 검의 궤적이 모두의 눈에 똑똑히 새겨졌다.
느리냐고 물으면 누구나 고개를 저을 것이다. 눈에 보인다고 느린 게 아니다. 눈에 보인 건 검의 궤적이 모두가 무의식적으로 내린 판단과 일치하기 때문이다. 이 검의 궤적은 이러할 것 같은 데라고 생각했는데 그 궤적이 생각과 일치할 때, 사람들은 눈이 아닌 마음으로 검을 볼 수 있다.
사람이 보는 길이 아닌 검이 가려는 길을 따랐기에 무척이나 빨랐음에도 모두가 그 궤적을 똑똑히 보았다. 나한당주는 동인진을 멈추고 싶은 충동을 억지로 눌렀다. 자신 때문에 원칙이 무너져서는 안 된다.
약관에 미치지 못한 소년이 평생 검술을 수련한 노련한 노검객도 어려워하는 일검을 펼쳤다. 동인진에서 목숨을 잃기에는 너무 아깝지만, 소림의 이름으로 한 맹세는 태산보다 무겁다.
나한당에 자리한 모든 사람 중에서 유일하게 이 일검을 음미하지 못하는 사람이 있었다. 바로 일검을 펼친 후 크게 내상을 입고 기절한 유신이다. 온몸의 기력을 짜내 경천동지의 일검을 펼친 유신의 의식은 급속히 가라앉았다.
유신의 검은 이름이 심룡척(尋龍尺)이다. 용을 찾는 자라는 뜻이다. 자는 길이를 재는 도구로 반듯하게 생겼다. 유신의 검은 자루에 가까울수록 조금씩 넓어지는 전형적인 쾌검에 적합한 검이다. 왜 검이 아니라 굳이 척이라고 했는지 유신은 늘 궁금했다.
심룡척은 열여덟 병장기와 한데 엉켰다. 병장기들이 가고자 하는 길을 전부 심룡척이 막고 있다. 악진의 불진은 나무로 만든 것으로 열여덟 병장기의 힘을 이겨내지 못했다. 그러나 심룡척은 아직 든든하게 버텨냈다.
피를 토하고 쓰러진 유신을 중심으로 열여덟 동인이 모여있다. 지금은 흡사 심룡척이 기둥이 되고 열여덟 동인이 벽이 된 상황이다. 열여덟 병장기가 지붕이 되어 숨을 가쁘게 쉬며 기절해있는 유신에게 집을 만들어준 모습이 되었다.
끼기긱 소리가 나며 오 단계로 진입하자 나한당주는 침음성을 흘렸다. 동인진을 만든 자는 수많은 상황을 생각하며 동인진을 설계했을 것이다. 그러나 천년도 더 후에 이런 상황이 생기리라고는 설계자도 상상하기 힘들다.
모두가 침묵한 상황에 유신의 숨소리만 크게 들렸다. 가쁘기는 하지만 고른 숨소리에서 유신이 기절했음을 누구나 알 수 있었다. 모든 사람은 나한당주의 입이 떨어지기만 기다렸다. 그러나 나한당주의 입은 고집스럽게 다물려 있었다.
동인진이 육 단계에 진입하고 얼마 지나지 않아 서문초설 일행이 도착했다. 유신이 움직이지 않고 심룡척이 미동도 하지 않고 열여덟 동인도 제자리에 못 박힌 듯 서 있었다. 팔십 년 이래 가장 조용한 도전이 계속되었다.
동인진이 칠 단계로 진입하자 나한당주가 벌떡 일어섰다. 얼굴이 벌겋게 달아오르더니 입을 벌렸다. 그러나 나한당주의 입에서는 아무 소리도 나오지 않았다. 대신 만칠천 평이 넘는 소림사에 있는 모든 사람이 똑같은 말을 들었다.
"나한칠현(羅漢七現)."
나한당에 동인진 칠 단계가 나타났다는 말이다. 엉덩이가 무겁기로 강호에 유명한 소림의 방장이 깃털처럼 가볍게 날아 나한당으로 향했다. 십여 장에 한 번씩 발끝으로 땅을 찍으며 말 그대로 날았다.
달마원에서 나한당주보다 배분이 최소 하나는 높은 체격이 왜소한 늙은 중들이 배꼽까지 내려오는 흰 수염을 자랑하며 걸어 나왔다. 동네 마실 나간 노인네처럼 어슬렁거리는 듯 보였지만 한 발짝 내디디면 몸이 최소 삼 장은 움직였다. 꽁지에 불붙은 것처럼 허겁지겁 달리는 방장을 보며 젊은 놈이 체통을 안 지킨다고 핀잔했다.
삼백 나한승이 하던 일을 전부 멈추고 나한당으로 향했다. 오천 무승은 나한당에 들어가지 못하고 나한당 외곽을 물샐틈없이 감쌌다. 이만에 육박하는 학승들이 모두 탑림으로 몰려가 함께 보현보살십대원을 읊었다. 내공을 익히지 않았지만 이만 명이 낭랑한 목소리로 함께 불경을 읊으니 소리가 십 리 밖으로 퍼졌다. 불경 소리를 들은 사람들은 소림사 방향으로 무릎을 꿇고 부처님에게 소원을 빌었다.
달마원의 원로들과 방장 및 당주·원주들만 나한당 안에 들어가고 남은 사람들은 전부 밖에서 기다렸다. 한 시진의 시간이 흐르고 나한당주의 불소갈(佛笑喝)이 다시 들려왔다.
"나한팔현."
탑림에서 무릎을 꿇고 불경을 읊던 늙은 중이 갑자기 몸을 일으켰다. 불경 읊는 소리가 천천히 사그라들었다. 늙은 중은 인자한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마음을 다잡아라. 평소와 똑같이 읊어라. 급한 마음도 삿된 것이니, 평상심을 유지해라. 수양이 부족하면 나보다 나은 자를 따라라."
늙은 중은 바로 곁에 있는 사람에게 속삭이듯 말했지만 모두의 귀에 똑똑히 들렸다. 늙은 중을 시작으로 학승들은 불설아미타경을 읊기 시작했다. 중의 꾸짖음 덕분에 불경을 읽는 속도는 빨라지지 않았다.
날이 어둑해졌지만 나한당을 제외하고 일절 불을 밝히지 않았다. 소림사 밖에는 소문을 듣고 찾아온 사람들이 가득했다. 소림사에서 낭랑하게 퍼져 나오는 불경 읊는 소리를 들으며 각자 마음의 평화를 찾았다. 백팔 배를 하며 부처님에게 소원을 비는 자도 있고 머리를 바닥에 찧으며 자신의 죄를 뉘우치는 자도 있었다.
"나한구현."
불소갈은 마음으로 소리를 내는 심공(心功)이다. 내공이 없어도 마음이 바르면 사용할 수 있다. 늙은 학승의 작은 소리가 모든 학승의 귀에 들린 것도 불소갈을 사용했기 때문이다.
나한당주는 아직 수양이 조금 부족하지만 내공의 도움을 받아 불소갈을 사용했다. 그러나 마음이 조금 흔들렸는지 나한구현이라는 네 글자에 떨림이 실렸다. 가까운 곳에서 나한당주의 마음을 접한 나한승 중 수양이 부족한 일부는 눈물을 흘리기 시작했다.
심룡척이 비명을 질렀다. 구 단계에 이르자 동인들의 힘은 절정고수가 자신의 모든 힘을 쏟아부은 일격과 맞먹었다. 물론 열여덟 힘이 균형을 이루어서 심룡척은 힘에 대항할 필요가 없고 버티기만 하면 된다.
밤이 깊어지며 유신은 끝내 기절에서 깼다. 시끄럽게 들리는 불경 소리는 마치 귀 안에서 읊는 것 같았다. 밤이 되었는지 나한당 안은 초롱불로 환하게 밝혀졌다. 고개만 돌려서 살펴보니 당우형과 서문초설이 보였고 수염을 길게 기른 늙은 중들도 보였다.
눈을 감고 내공을 움직이려 했지만 아무 반응도 없다. 단전이 아예 느껴지지 않았다. 오른팔에 감각이 없고 왼쪽 옆구리에 불로 지지는 듯한 통증이 느껴졌다. 다시 눈을 뜨고 소리를 내보려 했지만, 가슴에 먹먹한 통증이 느껴지며 소리를 낼 수 없었다.
"용 소협, 포기하고 싶으면 눈을 세 번 깜빡이시오."
유신이 깨어난 것을 확인한 나한당주가 말했다. 유신은 많은 피를 토했고 숨이 무척 가쁘다. 구 단계가 얼마나 오래갈지 모르니 도전자의 의사를 확인해야 한다.
유신은 눈을 감아버렸다. 그때 심룡척이 살짝 비틀리며 작은 조각이 유신의 얼굴에 떨어졌다. 그 뒤로도 연이어 몇 개의 조각이 얼굴에 떨어졌지만, 유신은 고집스럽게 눈을 뜨지 않았다.
- 작가의말
孤注一擲. 고주일척은 단 하나에 모든 걸 거는 멋진 행동, 유식한 말로 올인이라고 합니다.
다음 편에서 이런 진행이 가능한 이유를 풀겠습니다. 죽은 자식 파이어애그 만져봤자 소용없다고요? 우리 연성이는 살릴 수 있습니다. 개 씨 가문의 종갓집 장손 연성이를 꼭 다시 살리겠습니다. 더는 연성이 쌍둥이 동생 막장이 설치는 꼴을 볼 수 없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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