형제의 우애
동굴 벽은 반질반질했다. 물살이 센 구역이어서 그런지 이끼조차 끼지 않았다. 그러나 급한 물살에도 유신은 다행이라 생각했다. 좁은 동굴로 갔으면 물살이 데 드셀 것이라고 여전히 오해했다.
배가 벽에 충돌하려고 할 때마다 검으로 신중하게 동굴 벽을 찍었다. 반질반질한 벽은 의외로 잘 부서져서 이미 배가 벽에 한 번 충돌했다. 유신이 정신을 하나로 모아 벽을 찍는 순간 거대한 힘을 품은 지팡이가 유신의 등을 공격해왔다.
'개자식.'
마음을 독하게 먹은 유신은 회피 대신 등에 내공을 집중하고 벽을 찍은 다음 검을 빠르게 회수하여 뒤로 찔렀다. 싸움에 임할 때 주저함이 없어야 한다고 남무천에게 귀에 딱지가 앉을 정도로 들었기에 무모한 선택이지만 추호의 머뭇거림도 없었다. 긴박한 상황이라서 확신은 어렵지만 은접미천에 고주일척이 조금 섞였다.
홍두명도 독한 놈이라는 소리를 가끔 듣지만 유신의 생사를 초월한 찌르기에 마지막 순간 철괴가 흔들렸다. 남무천이나 백면귀산이라면 상대방의 몸에 병장기가 적중한 후에 회피했을 것이다. 그러나 무공이나 판단력이 조금 부족한 홍두명은 철괴가 유신의 등에 닿기 전에 피하는 동작을 하며 공격이 흐트러졌다.
배가 동굴 벽에 쿵 하고 충돌하는 소리와 유신의 검에 눈을 찔린 홍두명의 비명이 동시에 귀로 들어왔다. 그리고 유신의 안에서 북이 울리는 소리가 퍼졌다.
왼쪽 어깨에 감각이 사라졌다. 그리고 눈앞이 노래지면서 시야가 좁아졌다. 풍부한 경험으로 유신은 자신이 곧 혼절할 것임을 알았다. 당우형의 몸 위에 엎드린 유신은 심룡척으로 자신과 당우형의 옷을 한데 꿰어 배에 박았다. 그리고 허리띠로 당우형과 자신의 손목을 한데 꽁꽁 묶었다. 마지막으로 억지로 몸을 움직여서 당우형의 머리를 오른팔로 품에 꼭 안았다. 아득하면서도 아늑한 느낌이 들고나서 세상이 멈췄다.
### 快劍神龍 龍遊迅 ###
'살았구나. 형님은?'
통증을 느낀 유신은 살아있음에 우선 감사했고 곧바로 당우형을 떠올렸다. 당우형의 손목과 묶었던 왼손은 감각이 없어서 당우형이 있는지 느껴지지 않는다. 그리고 다른 곳의 감각도 몹시 무뎌져 있다.
'조급하지 말자.'
유신은 마음을 차분히 가라앉히고 내공을 돌리기 시작했다. 아주 미약한 내공만 유신의 의지에 호응했다. 양이 너무 적어 주천이 이루어지지 않았다. 그러나 유신은 실망하지 않고 끊임없이 시도했다. 다치고 회복할 때마다 느리게 모이는 내공으로 고생했기에 이게 당연한 흐름임을 잘 알고 있다.
내공을 계속 돌리려는 시도는 별 성과가 없었지만 집중하다 보니 몸의 감각이 차츰 돌아왔다. 감각이 돌아오자 유신은 뭔가 이상함을 느꼈다.
'감각이 돌아왔는데 왜 움직일 수 없지?'
눈은 여전히 떠지지 않는다. 눈을 뜰 힘이 없는 게 아니라 눈 주변이 너무 부어서 작은 틈도 만들어낼 여지가 없다. 이것도 당문에서 중독되었을 때 한번 경험해본 적이 있다.
'홍면주귀의 독에 내가 중독되었나?'
마지막에 홍면주귀가 주독을 사용했을지도 모른다. 만약 자신이 중독되었다면 무방비의 당우형은 훨씬 위험하다는 생각에 몸에 힘을 주어 꿈틀거렸다. 점점 감각이 또렷하게 돌아오며 유신은 새로운 것을 발견했다.
'수초 같은 것에 엉킨 모양이군.'
뭔가 팔다리가 움직이는 걸 방해하는 느낌이 들었다. 수초라면 힘을 조금 더 쓰면 끊어질 수도 있다는 생각에 유신은 팔다리에 힘을 주려고 노력했다. 그때 유신의 귀에 청천벽력이 떨어졌다.
"깨어났군. 곧 고자로 만들어 줄 테니 기대해."
모용부영의 목소리다. 당황하면서도 유신은 모용부영의 목소리에서 숨길 수 없는 무력감을 잡아냈다. 목과 혀도 심하게 부어서 입을 열 수 없는 유신은 몸부림을 더 심하게 쳤다.
"허리띠랑 옷으로 꽉 묶었으니 무의미한 저항은 그만해라."
모용부영의 말에 유신은 오히려 더 힘냈다. 자신이라면 묶을 필요도 없이 바로 죽였을 것이다. 그리고 굳이 말로 협박하는 걸 보면 모용부영도 현재 움직이기 힘든 상황에 부닥친 게 분명하다.
퍽 소리와 함께 머리를 걷어차인 유신은 다시 혼절했다. 정신을 완전히 잃기 전에 쿵 하고 넘어지는 소리가 귓속에 파고들었다. 그래서 기절하는 순간에도 웃으려고 입꼬리를 살짝 움직였다.
### 快劍神龍 龍遊迅 ###
"동생, 어떻게 된 일인지 설명 좀 해줘."
유신이 당우형의 머리를 꼭 안고 보호한 덕분에 당우형은 많이 다치지 않았다. 지금 당우형과 유신은 일 장 정도 떨어진 두 나무에 각각 묶여있다.
"홍면주귀에게 잡힌 건 기억납니까?"
유신의 발음이 조금 흐릿했지만 당우형은 알아들었다.
"중독된 지도 몰랐는데 갑자기 취기가 올라오는 것처럼 독이 발작하더라. 그리고 아무것도 기억나지 않아."
유신은 간단히 남무천 등과 함께 당우형을 구하려고 이곳까지 따라왔고 강물에 휩쓸렸음을 말했다. 그리고 모용부영은 고자이고 우문현성의 애첩이라고 말했다. 앞에서 운기행공을 하던 모용부영이 몸을 부르르 떨었다.
"죽여버리고 말 거야."
눈이 빨갛게 충혈된 모용부영이 이를 갈았다. 모용부영 역시 이곳저곳 다치지 않은 곳이 없다. 모용부영이 둘보다 나은 건 먼저 깨어났다는 것이다.
"고자 새끼가 주둥이만 살아서는."
유신은 모용부영이 다른 사람의 내공을 갈취할 수 있다는 걸 알고 있다. 바로 행동하지 않은 건 내상 때문이라는 생각에 마음을 흔들어 회복을 늦추려고 도발을 멈추지 않았다.
"이해가 안 되는군. 너는 당우형을 구하는 게 목적이니 나한테는 원한이 없을 텐데 왜 자꾸 나를 매도하는 거지?"
내공을 주고받는 무공은 강호에 드물지 않다. 화산의 조석성옥과 같은 내공을 주는 심법도 있고 명문 대파들도 다른 사람의 내공을 뽑아내는 무공이 있다. 주화입마에 걸린 사람을 구하려면 우선 내공부터 없애야 한다.
대부분 흡기공은 상대의 내공을 뽑아서 버린다. 모용부영처럼 자신의 것으로 하는 무공은 매우 적다. 갈취한 내공을 자신이 가져가는지 그냥 버리는지 알 수 없으니 내공을 뽑는다고 해서 무조건 마공이라고 몰아갈 수는 없다.
그래서 모용부영은 순찰조의 무인들을 살려줬다. 어차피 명문정파마다 흡기공 한두 개씩은 보유하고 있고 전문적으로 익히는 사람도 있다. 그래서 알려져도 상관없다는 생각에 입막음하지 않았다.
아는 것만큼 보인다는 말이 있다. 유신은 강호에 출도하자마자 채양보음하는 도화궁 여자에게 내공을 갈취당했다. 그래서 유신은 모용부영이 자신들의 내공을 빼앗으려 한다고 확신했다.
아는 게 적은 덕분에 정확한 판단을 내린 유신은 계속 모용부영을 도발했고 모용부영은 화를 참아가며 운기에 집중했다. 일단 주천을 이루기만 하면 그 뒤로는 내공이 회복하는 속도가 빨라진다.
지금 셋은 하늘이 손바닥만큼 작게 보이는 분지에 있다. 사방이 벼랑으로 막혀 있고 그 높이가 얼마인지 짐작조차 가지 않는다. 커다란 연못 하나가 있는데 물이 흘러들어오는 구멍이 높은 절벽에 있다. 아마 저 구멍에서 떨어졌는데 연못 덕분에 목숨을 부지한 것으로 추측한다. 출구가 있는 감옥이지만, 지금 형편으로는 누구도 탈출 가망이 묘연하다.
"모용 공자, 살려면 우리끼리 힘을 합쳐야 하지 않겠소?"
"형님, 어차피 내공을 회복하면 우리를 죽일 계획입니다. 지금 우리를 살려둔 건 식량이 필요해서 그럴 겁니다."
연못에 물고기도 많고 여기저기 빨갛고 노란 열매도 많다. 그러나 물고기는 지금 형편에서 잡기 힘들고 열매들은 독이 있을까 봐 걱정된다. 실제로 모용부영이 빨간 열매를 유신에게 먹였고 유신은 중독으로 쓴 물까지 다 토해냈다. 강한 독이 아니지만 먹어도 되는 건 아니다. 내공이 온전하다고 해도 독이 든 열매를 먹으면 어떻게든 탈이 생긴다.
"내 제안에 응한다면 한 명은 살려주지."
"제안을 말해보시오."
당우형이 침착한 어투로 말했다.
"현재 우리 모두 목숨이 위험한 상황이오. 이대로는 다 죽을 게 분명하니 둘이라도 삽시다. 누군가 나에게 자발적으로 내공을 건네준다면 남은 사람은 내 명예를 걸고 살려주겠소. 물론 이곳을 떠나는 것까지는 돕지 않을 것이오."
몸이 정상이 아니라서 내공을 갈취할 때 상대가 반항하면 내상을 입을 수 있다. 그러나 상대가 반항하지 않는다면 탈이 생길 가능성이 작다. 내공이 좀처럼 주천을 이루지 못하자 다급해진 모용부영은 협상을 시도했다.
"우리 둘이 반씩 빌려줄 테니 셋이 함께 삽시다."
당우형이 넉살 좋게 너스레를 떨었다. 모용부영은 자부심이 강한 자라 거짓말을 하려고 하지 않았다.
"내가 익힌 흡기공은 일단 시작하면 멈출 수 없소. 그리고 상대는 무조건 죽음이오."
모용부영이 익힌 흡기공은 내공을 다 뽑아낸 후 상대의 원정까지 탐한다. 인간의 모든 기운을 조화(調和)하는 원정(元精)을 뽑아내면 반드시 죽는다. 그래서 무림맹 순찰대를 상대로 맥문을 통해 흡기공을 사용했다. 맥문은 상대적으로 약한 맥이기에 원정이 빨려 나오기 전에 끊어진다. 그러면 목숨만은 보전해줄 수 있다.
'주둥이 더러운 네놈은 명문혈로 해서 반드시 죽여버린다.'
계속 도발했던 유신은 원정까지 흡수해서 죽여버릴 생각이다. 원정을 흡수하면 내공과 달리 부작용이 많기에 웬만해서는 지양해야 하지만, 유신을 최대한 고통스럽게 죽이려는 생각에 부작용을 감수할 작정이다. 위험을 무릅쓰고 당우형을 구하던 유신의 모습으로 미루어 보아 자원해서 희생할 가능성이 크다고 느꼈다.
"내가 형이니 당연히 내가 먼저 죽어야지 않겠소. 내 내공을 가져가시오."
당우형이 호쾌하게 대답했다. 일단 근접만 하면 백화수로 어떻게든 해볼 생각이다. 비록 내공은 없지만 순수한 백화수만으로도 치명적인 일격을 날릴 수 있다. 당우형은 손가락 사이에 끼운 작은 돌멩이의 감촉을 느끼며 표정을 관리했다.
"역시 명문 출신이라 그런지 의기가 하늘을 찌르는군."
모용부영이 유신의 심룡척을 지팡이 삼아 몸을 일으켰다. 당우형의 죽음을 원하지 않는 유신은 황급히 입을 열었다.
"모용 공자는 흑룡단을 아시오?"
모용부영은 걸음을 멈췄다. 흑룡단이 뭔지 모르지만 왠지 독단과 같은 느낌이 들었다. 혹시 당우형이 흑룡단이라는 독단을 가지고 있다는 뜻일까?
"의형은 흑룡단을 복용해서 절정고수가 되었소. 그리고 흑룡단의 독을 몸에 품고 있소. 만약 내공을 뽑아내면 독이 기승을 부려 두 분의 목숨을 위험하게 할 거요. 그러면 나 역시 굶어 죽을 것이니 차라리 내가 죽는 게 나은 것 같소."
당문에 절대고수를 만드는 영약이 있다는 말은 들었다. 그러나 당문은 오래도록 강호를 호령하는 고수를 배출하지 않았다. 유신의 말을 듣고 모용부영은 그 연유를 알 수 있었다. 무척 위험한 영약이어서 아무나 고수로 만들어주는 게 아니었다.
"두 분의 우애와 의기가 참으로 부럽소. 이 모용부영이 여유가 있었다면 두 분 다 살려드렸을 텐데 참으로 안타깝기 그지없소."
유신의 뒤로 간 모용부영은 나무에 묶은 줄을 풀었다. 흡기공을 사용할 때 일 장 거리에 있는 당우형이 방해할까 봐 걱정되어 유신을 질질 끌고 조금 먼 곳으로 움직였다.
"나는 약속을 지키는 사람이다. 네가 반항하면 너는 반드시 죽고 나도 내상을 입겠지. 그러면 나는 우선 네 의형을 죽일 것이다. 너희 둘은 반드시 죽게 되고 나는 죽을지 살지 모른다. 그러나 네가 순순히 내공을 내놓는다면 네 의형은 내가 떠나기 전까지 책임지고 살려둔다."
그러고도 마음이 놓이지 않는지 유신의 두 팔을 나뭇가지에 묶어서 함부로 움직이지 못하게 했다. 이미 탈의한 유신의 등 뒤에 가서 손을 명문혈에 올려놓고 흡기공을 펼치기 시작했다. 그래서 유신이 입가에 떠올린 찬란한 미소를 미처 확인하지 못했다.
- 작가의말
여기까지 읽으신 분들은 아마 다음 편 내용을 다 예상하고 계실 겁니다. 뻔하고 진부한 스토리에도 계속 읽어주시는 분들을 보며 반성하게 되었습니다.
저는 제가 참신한 스토리로 승부하는 글쟁이라고 지금까지 오해했습니다. 지금 생각해보니 제 스토리는 뻔하고 진부합니다. 그러니 꾸준히 읽어주시는 분들은 제 스토리가 재밌어서가 아니라 제 출중한 필력 때문에 계속 읽어주시는 거였습니다. 지금까지 자기 장점을 오해하고 필력을 늘리려고 노력했는데, 이제부터는 정신 차리고 참신한 스토리에 집중하겠습니다. 필력만 출중한 점 거듭 사과드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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