천산괴노
유신은 모용부영의 사탄공에 대항하다가 정말 우연히 나한당주가 가르쳐준 역근경의 서른여섯 동작을 하나로 합쳤다. 그리고 사탄공의 움직임에서 깨달음을 얻어 독을 밖으로 배출하는 방법을 알아냈다.
커다란 깨달음을 두 개나 동시에 얻고 흥분한 유신은 내력을 회복하고 당우형의 독을 제거했다. 당우형 본인도 동의한 일이지만, 독이 사라진 후 산공이 되면서 당우형은 내공이 없는 몸이 되었다. 만류분해의 시술을 받기 위해 이미 한 번 산공을 한 당우형이다. 흑룡단 덕분에 막대한 내공을 얻었는데 흑룡단의 독을 몰아내니 내공까지 사라졌고 심법을 수련하는 것으로는 내공이 모이지 않았다. 늘 가슴 한구석에 미안함을 품었던 유신은 당우형이 백화수를 대성하자 작게나마 마음의 위안을 얻었다.
만약 화령초를 찾아 당우형이 내공을 회복한다면 그야말로 전화위복이 되는 셈이고 유신은 마음의 빚을 깨끗이 덜어낼 수 있다. 당우형 역시 육신의 피로를 다 잊은 듯 활기차게 움직였다.
"형님, 누가 옵니다."
먼 곳에서 작은 점으로 보이는 무언가가 이쪽으로 달려오고 있다. 천산에는 북산양이나 붉은 사슴 등 큰 짐승이 살고 있으니 꼭 사람이라고 할 수는 없다. 그러나 둘이 있는 곳을 향해 달려오는 걸 보면 동물은 아닐 것이다. 맹수라도 사람을 향해 이렇게 곧장 달려오지는 않는다.
"우엉."
전영득에게 배운 방법으로 부엉이 소리를 냈다. 판단이 어려운 상황에 부닥치면 내기로 한 소리다. 당우형은 주머니에서 조약돌을 꺼내 손에 잡았다. 예전에는 세 개씩 잡았지만 백화수를 대성한 기념으로 한 손에 조약돌 다섯 개씩 쥐었다.
"지호가 쫓기고 있어요."
좀 더 가까워지니 상황이 파악되었다. 지호가 무척이나 빠르고 민첩하게 당우형이 있는 곳으로 도망치고 있고, 그 뒤에는 처음 보는 복식을 차려입은 은발의 노인이 경공으로 쫓고 있었다. 노인의 몸놀림은 무척 자연스럽지만, 나이 때문인지 늘 간발의 차이로 지호를 잡아내지 못했다.
유신과 당우형은 빠른 걸음으로 지호를 마중 나갔다. 지호를 쫓는 노인은 둘을 보았음에도 불구하고 전혀 속도를 줄이지 않았다. 그러다 지호가 당우형의 뒤에 숨자 그제야 눈치채고 신형을 멈췄다.
"이 여우가 자네 거였는가? 내가 사고 싶은데 얼마에 팔 수 있지?"
말투가 조금 딱딱하기는 하지만 이쪽 사람이 아니다. 하북이나 산동쪽 말투와 비슷했고 생김새도 관외의 사람 같지가 않았다.
"이리 만난 것도 인연이니 웬만하면 들어드리고 싶지만, 이 여우는 팔지 않습니다."
비록 나이가 들어 근육이 쇠퇴하고 반응이 느려져서 지호를 잡지는 못했지만, 경공의 경지가 낮지 않았다. 그리고 꽤 먼 거리를 단숨에 달려오고도 전혀 지친 기색이 없다. 노쇠한 육체의 부족함을 메울 정도로 내공이 심후하고 그 운용이 능숙하다는 뜻이다.
"웃는 얼굴로 권하는 술은 마시지 않고 꼭 벌주를 마시겠는가? 내가 화를 내기 전에 빨리 가격을 말하게."
당우형의 내공이 사라지지만 않았어도 당우형은 물론 유신도 검을 들고 뛰쳐나갔을 것이다. 은무성은 몰라도 전영득은 경공으로 곧 도착할 것이니 그때까지만 참기로 했다.
"설사 황제가 왔다고 하더라도 내가 팔기 싫으면 안 파는 겁니다."
노인은 얼굴이 벌겋게 달아올라 노발대발했다. 사정을 모르는 사람은 당우형이 노인의 물건을 훔치고 돌려주지 않고 발뺌하는 것으로 오해할 정도로 화를 냈다. 다소가 아니라 엄청이나 어처구니없는 상황이다.
"성질을 죽이고 말로 하려고 했는데, 내 손속이 과하다고 원망치 말아라."
노인은 등에서 이 척 길이의 봉 두 개를 뽑아 들었다. 숙동(熟銅)으로 만든 것으로 보이는 봉은 노인의 손에서 생명을 얻은 듯 꿈틀거렸다. 유신은 심룡척을 뽑고 노인의 공격에 대비했다.
"지금까지 내 비연봉(飛鳶棒) 밑에서 살아난 작자가 셋밖에 되지 않는다."
봉의 이름인지 무공의 이름인지 구분할 수 없지만, 유신은 무공의 이름일 가능성이 크다고 여겼다. 솔개가 유유히 떠다니다가 전조도 없이 병아리를 채듯 느닷없는 공격을 일삼았다. 다행히 유신도 빠름을 좇는 자라 쉽게 당하지 않았다.
"실력은 평범한데 무척 좋은 검을 가지고 있구나. 내 말에 고분고분 따랐으면 그 검도 값을 넉넉히 쳐주었겠지만, 내 비위를 거슬렀으니 너희 목숨을 취하겠다."
"이 발바닥에 욕창 나고 밑구멍에 말뚝 박을 늙은이가 하늘 높은 줄 바다 깊은 줄 모르네. 곧 관짝을 덮어야 할 불쌍한 늙다리라고 오냐오냐해줬더니 천지 분간 못하고 날뛰는구나. 오늘 하늘을 대신해서 꼭 너를 지부(地府 - 염라대왕 사는 곳)로 보내주마."
당우형이 욕설을 시작하자 유신은 전영득이 가까이 왔음을 알아챘다. 노인의 공격은 빠르지는 않지만 공격하는 시점이 항상 유신의 예측을 벗어났고, 숙동으로 만든 게 분명한 봉은 마치 살아있는 생물처럼 괴이한 경로로 움직여서 방비가 어려웠다. 그래서 모든 정신을 대결에 집중하느라 주변 상황에 주의를 기울이지 못했다. 그리고 상대하는 노인 역시 전영득이 온 사실을 까맣게 모르고 있었다.
무공의 위력은 다소 부족하지만 경공의 경지나 초식의 숙련도를 보면 꽤 행세했을 노인이다. 그런데 수양이 무척 부족한지 당우형의 말에 숨소리가 거칠어졌다. 덕분에 유신은 점점 여유가 생겼다.
'실전이 부족해 보인다.'
왼손의 봉이 머리를 공격하고 오른손의 봉이 가슴을 찔러왔다. 머리를 공격하는 봉이 먼저이고 가슴을 찌르는 봉은 상황에 따라 변화할 여지를 품고 있다. 유신은 오른쪽으로 한발 움직인 후 노인의 목을 향해 평범한 찌르기를 펼쳤다.
남무천의 보법으로 회피한 후 독고거병의 보법으로 빠른 찌르기를 펼쳤다. 노인이 머리를 내려치는 봉은 그대로라면 유신의 왼쪽 어깨를 가격할 수 있다. 그리고 가슴을 찌르던 봉은 유신의 왼쪽 팔을 찌르게 된다.
유신의 찌르기 자체는 빠르지만, 출수가 늦어서 노인보다 느리다. 노인의 공격이 먼저 적중한 후 유신의 찌르기가 도착한다. 자신이 있다면 두 공격이 적중한 후에 회피를 선택해도 되는데 노인은 동귀어진처럼 보이는 유신의 선택에 성급히 물러섰다.
"미친놈, 너는 목숨이 아깝지도 않으냐?"
유신은 노인의 삿대질에 피식 웃기만 했다. 만약 노인이 피하지 않았다면 유신은 고주일척을 펼쳐 찌르기를 갑자기 빠르게 만들었을 것이다. 그렇다면 유신의 검이 먼저 노인의 목을 찌르게 된다. 그리고 찌르기를 빠르게 하며 몸을 비틀어서 내려치는 봉과 찔러오는 봉을 동시에 피해낼 수 있다. 동귀어진처럼 보이지만 묘설부운의 신법과 고주일척의 찌르기가 있기에 노인이 숨긴 재주가 없다면 유신은 털끝 하나 다치지 않고 노인의 목숨을 취할 수 있다.
'전 대협은 왜 가만히 있는 거지?'
노인은 유신의 기세에 주춤해서 공격이 뜸해지고 방어에 더 집중했다. 유신은 초식을 숨기고 정직한 찌르기로만 공격했다. 빠르기만 하고 검에 실린 힘이 약하며 예측 가능한 찌르기에 노인이 익숙해질 때 은접미천으로 속이고 고주일척으로 끝장을 볼 생각이다. 비록 큰 원한은 없지만, 이런 자는 살려두면 후환이 될 게 뻔하니 삭초제근해야 한다.
일관되게 목을 찔러오는 유신의 검을 두 봉으로 엇갈아 후려쳤지만 흠집도 내지 못했다. 숙동은 정련을 거친 동으로 무거운 무기를 제작할 때 많이 사용된다. 철처럼 성질이 단단하지는 않지만 탄성이 있어서 무기끼리 부딪치면 늘 이득을 본다.
"요사한 놈. 실력을 숨기고 약한 척 하다니."
제멋대로 지껄이는 노인의 행태에 살짝 화가 치민 유신은 찌르기에 힘을 더 실었다. 찌르는 속도는 그대로지만 검에 실린 힘이 훨씬 강해졌다. 그 전의 찌르기와 똑같은 줄 알고 봉으로 검을 후려친 노인은 어깨를 향해 찔러오는 검을 피하느라 상체를 급하게 젖혔다.
[생포해야 하오.]
적절하게 전해온 전음에 유신은 고주일척 대신 은접미천을 택했다. 유신의 검 끝에서 은색 나비들이 쏟아져 나왔다. 하늘에서 내려오는 눈꽃처럼 하늘거리는 나비가 아니라 눈사태처럼 쏟아져나오는 이빨 달린 나비들이다. 다양한 변화로 눈을 속이는 환검이 아닌 요란한 변화로 정신을 못 차리게 하는 새로운 개념의 환검이 펼쳐졌다.
노인은 체면을 지킬 생각도 못 하고 뒤로 누운 후 급히 뒹굴었다. 바늘을 터는 물고기처럼 격정적으로 움직인 노인이 유신의 공격 권역을 벗어나고 숨을 고르려는 순간 은무성의 웅혼한 내력을 품은 무극권이 지척에 다가왔다.
"비겁한."
유신이라면 말하는 호흡과 힘도 아껴서 회피하는 데 사용했을 것이다. 그러나 노인은 안하무인이 뼈에까지 박혀있는지 목숨이 위태로운 상황에도 입을 놀리는 것을 멈추지 않았다.
황토고원에서 뱀이 빠르게 기어가는 모습을 본 적이 있다. 노인은 땅에 누운 채 뱀처럼 몸을 꿈틀거리며 은무성의 권격을 아슬아슬하게 피해냈다. 그러나 연속된 무리한 회피에 심후한 내공으로 이어가던 호흡이 끝내 끊어졌다.
"잡았다."
전영득의 두 손이 물속의 고기를 찍는 두루미의 부리처럼 잽싸게 움직였다. 순식간에 스무 개가 넘는 혈도를 점한 전영득은 그러고도 마음이 놓이지 않는지 노인의 두 다리를 허리띠로 칭칭 묶어버렸다.
"천산괴노, 내가 누군지 알겠느냐?"
"대호법, 나한테 왜 이러시오? 대호법 손님이라는 걸 말했으면 내가 무례를 범하지 않았을 거요."
유신과 당우형은 경멸하는 표정을 숨기지 못했다. 전영득은 아직 사십 대이고 노인은 누가 봐도 환갑은 넘은 모습이다. 유신과 당우형에게 으름장을 놓던 기세가 사라지고 비굴한 웃음을 짓는 모습이 참으로 하찮아 보였다.
"내가 말이야. 홍두명의 함정에 걸려서 죽을 뻔했다는 말이지. 오늘내일하는 너보다 먼저 제삿밥을 먹을 뻔했다는 말이다. 그런데 홍두명이 어떻게 그곳에 진을 치고 나를 기다렸는지 너랑 깊이 있는 대화를 나누고 싶구나."
"나는 모르는 일이오."
전영득은 주판의 알을 몇 번 튕겼다. 알 하나만 튕겨도 주판의 모든 알이 움직이는 모습은 여전히 신기했다.
"너는 살길이 하나뿐이다. 그 일을 반드시 알아야 하고 내가 시키는 일을 해내야 한다. 그게 아니라면 너는 아주 몹시 매우 비참하게 죽을 것이다. 내가 정확히 계산해서 네가 서른 시진 동안 고통을 받은 후 죽도록 하고 시체는 갈기갈기 찢어서 짐승 먹이로 던져주마."
천산괴노라고 불린 자는 눈알이 뱅글뱅글 돌아가며 머리를 굴렸다. 귀한 것을 좋아하는 성격이지만, 제일 귀한 건 자기 목숨이라는 신조를 지니고 있다. 유신의 내공이 평범하고 당우형이 내공이 없는 몸이 아니었다면 무기를 들고 싸우지도 않았을 것이다. 작은 욕심으로 큰 화를 불러온 천산괴노는 자신이 살 구멍을 찾느라 머리가 터질 지경이 되었다.
"빨리 털어놓지 않으면 너에게 교주의 비밀을 하나 알려주마."
천산괴노는 몸을 부들부들 떨며 바로 입을 열었다.
"내가 맞소. 그 비동의 위치를 알려준 건 나요. 하지만 나는 그들이 그저 재물을 가져가려는 줄로만 알았소. 만약 대호법에게 불리한 일을 한다는 걸 알았으면 심장에 칼이 들어와도 말하지 않았을 거요."
"그 비동의 위치를 알아낸 방법을 말해."
천산괴노는 주저주저하다가 전영득이 입가를 실룩이자 황급히 입을 열었다.
"홍두명이 지도를 발견하고 나더러 찾으라고 했소. 그래서 찾아낸 거요."
전영득은 천산괴노의 품에 손을 넣고 얇은 양가죽을 몇 장 끄집어냈다. 비동의 위치를 아는 전영득은 곧바로 그중에 석 장이 조부가 재물을 숨긴 곳임을 알아차렸다. 재물을 숨길 곳을 찾고 기관을 만들고 물건을 옮기는 일을 조부 혼자서 하지는 않았을 것이니 이런 지도가 있다고 해도 이상하지는 않다.
서로 다른 석 장의 지도는 모두 비동의 위치를 가리켰다. 세 가지 다른 길로 접근하는 지도인데 당우형과 계성이 우연히 발견한 그 길은 지도에 없었다. 고대 왕의 무덤을 개조한 것이라고 하니 모르는 길이 더 있어도 딱히 이상하지는 않다.
전영득은 석 장의 지도를 손으로 비볐다. 황토고원의 모래보다 더 고운 가루가 사방으로 날렸다. 천산괴노는 전영득이 보여준 무시무시한 한 수에 겁을 집어먹었다. 홧김에 약속을 어기고 자신을 죽일까 봐 사지가 부들부들 떨렸다.
"남은 지도는 뭐야?"
"누란(樓蘭) 왕조의 왕궁 위치요. 강줄기가 자주 바뀌어 지도만으로 찾을 수 없어 홍두명이 내게 의뢰했소. 내가 머리로 기억하고 손수 그린 것이오."
누란이라면 한때 서역의 패주였다. 수많은 나라를 부속 국으로 거느린 강대국인데 수백 년 전에 멸망해서 흔적도 없이 사라졌다. 전설에 누란 왕국의 궁전 기둥이 순금으로 만들어졌다는 이야기도 있어 일확천금을 노리는 자들이 사막을 헤매곤 했다.
서로 다른 지도로 보였던 몇 개의 지도는 사실 하나였다. 강줄기가 변할 때마다 새로 그린 것으로 모두 왕궁 위치를 나타내는 지도다. 지도를 품에 넣은 전영득이 천산괴노에게 말했다.
"화령초 열매가 있는 곳으로 우리를 안내해라. 화령초 열매를 취하게 되면 너를 죽이지 않고 무공도 그대로 둘 것이다."
- 작가의말
자랑 하나 하자면, 어제 7시간 조금 넘는 시간 안에 비축분 4편을 썼습니다. 글자 수로 따지면 대충 2만5천 자 정도 썼습니다. 물론 오타가 꽤 있고 문장과 흐름도 다듬어야 하지만, 글 쓰는 속도에 자부심을 느낍니다.
3부를 어떻게 끝맺을지는 이미 정해져 있고 변하지 않았습니다. 하지만 그 끝으로 향하는 방향을 조금 비트니 글이 훨씬 잘 써집니다. 결말 역시 정해져 있고 4부 구상 역시 끝났습니다. 다만 그 과정에 다양한 강호의 모습을 최대한 많이 표현하려고 합니다.
Comment ' 19