넘버즈. 17장(3)
“후우~.”
길리안은 발코니로 나와 한숨을 내쉬며 단추를 풀었다.
꿈같은 하루였지만 힘든 하루이기도 했다.
성인식이야 거의 가만히 있으면 되는 거라서 괜찮았는데, 기사 서임 식은 낮부터 예행연습도 하고 식이 시작되고 나선 실수하지 않기 위해 상당히 긴장한 상태로 임했다.
왕궁에 있을 때만 해도 그런 분위기가 계속 유지돼서 긴장의 끈을 놓지 않았었는데 문제는 자작부인의 저택으로 옮겨서 벌어진 파티.
많은 이들과 인사를 나누고 좋은 이야기를 많이 들었다. 거기까지는 좋았는데 문제는 권하는 술은 주는 대로 마셔야 했고, 레이디들과 춤도 많이 춰서 정신이 하나도 없을 지경.
몇 시간 동안 숨 돌릴 틈도 없었고 계속 버텼지만 한계였다. 조금 전에도 여자들에게 둘러 싸여있었는데 케빈이 틈을 만들어줘서 슬쩍 빠져나와 한숨을 돌리는 중이었다.
안에 있을 때는 죽을 것 같았는데 시원한 밤바람이 스쳐 지나가자 좀 살 것 같았다.
길리안은 밤하늘을 아름답게 수놓고 있는 수많은 별들을 눈에 담으며 미소를 지었다.
어릴 때는 사람이 죽으면 별이 된다는 말을 그대로 믿었었고 저 하늘 어딘가에서 별이 된 어머니가 자신을 지켜보고 계실 거라고 생각했었다. 지금은 그렇지 않다는 걸 알지만 그래도 그렇게 믿고 싶었다.
한동안 멍하니 별을 쳐다봤다.
“어머니한테 감사드리고 있었니?”
언제 나온 건지 옆에서 말하는 이베트를 보고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예. 어머니께도 감사드리고 어머니 같은 분께도 감사드리고 있었습니다.”
이베트가 미소를 지으며 약간 헝클어진 길리안의 머리를 만져줬다.
“길리안. 괜찮은 거니?”
“예. 괜찮습니다.”
술 냄새가 코를 찌르고 평소와는 다르게 눈도 살짝 풀려있는데 괜찮단다.
“오늘 아주 잘해 주었단다. 그런데 술을 그렇게나 마시고 정말 괜찮은 거니?”
“아직은 버틸 만합니다.”
파티는 서임 식과는 다르게 일부러 격식을 좀 빼고 편하게 즐길 수 있도록 준비를 했다. 짓궂은 기사들이 길리안에게 술을 엄청나게 먹였는데도 아직 흐트러진 모습을 보이지 않고 있었다.
대견하기도 한데 조금은 아쉽다고 할까?
“조금 더 편하게 웃고 즐겨도 된단다. 오늘은 너의 날이니까.”
“아주 재미있게 즐기고 있습니다.”
“흐음. 뭐 그렇다면 다행이구나. 마음에 드는 아가씨는 없니?”
“아하하. 아직은 잘···.”
“남자는 사랑을 시작하며 엄마의 품을 떠난다더구나. 등을 떠민다고 억지로 되지는 않겠지만 피하지 말고 많은 여자들을 만나보렴. 그중에 누가 너의 가슴을 뛰게 할지, 언제쯤 네가 사랑에 눈을 뜰지가 궁금하구나. 난 네가 존경받는 기사이자 멋진 남자가 되길 바란단다.”
길리안은 웃으며 그러겠다고 대답했다.
“무리하진 않아도 되니까 앉아서 좀 쉬다가 들어오렴.”
“예.”
머리를 쓰다듬던 이베트가 고개를 끄덕이고 안으로 들어가자 길리안은 의자 하나를 들고 창가를 벗어났다. 좀 어두운 곳에 편하게 앉아 하늘을 올려다보며 한숨을 쉬었다.
‘많이 마시긴 했구나. 그런데 가슴이 뛰면 사랑인 건가?’
솔직히 남녀 사이의 사랑의 감정에 대해선 잘 모르겠다.
마을 처녀들과 노닥거릴 시간에 말을 탔고 검을 잡았다. 의식적으로 수련에 방해된다고 피했던 것은 사실이다. 그건 수도에 와서도 크게 달라지진 않았다.
그런데 그 와중에 제멋대로 가슴을 뛰게 한 여자가 있었다.
바로 미네르바.
그날 산맥에서 있었던 일을 생각하면 아직도 머릿속이 복잡했다.
미네르바는 아름답다. 그런 여인과 키스를 했다면 가슴이 뛰는 것이 당연한 게 아닌가?
물론 자신은 그럴 생각이 없었고 그날의 키스는 당한 것이라고 봐야 했다. 문제는 싫지 않았다는 거다.
아니 솔직히 말하면 좋았다.
미네르바도 싫어하는 사람에게 그럴 리는 없는데 그렇다고 자신을 남자로 보고 그랬다고 보기에도 좀 그렇고, 완전 아니라고 하기엔 마지막에 했던 말이 너무 의미심장했다.
그날 미네르바가.
“빨리 올라와. 내가 있는 곳까지. 나와 마주 설 수 있는 자리까지. 그때까지 기다릴 테니까. 단 너무 늦으면 안 돼.”
이렇게 말했는데 이게 어떻게 보면 빨리 실력을 키워 넘버즈에 올라오라는 말로도 생각할 수 있어 무척이나 머리가 아팠다.
오늘도 서임 식장에서는 만났지만, 파티에는 참석하지 않아서 조용히 물어볼 기회도 없었다.
왕실의 기사도 됐으니 따로 만나볼 기회를 얻는 건 어렵지 않겠지만 이게 또 대놓고 물어보기도 참 그랬다.
‘아 머리 아파.’
술기운이 올라와서 머리가 더 아팠다.
자꾸 그날 했던 키스만 생각나고 심장은 빨리 뛰고 머리는 더 아프고.
눈앞이 빙빙 돌아서 눈을 감았다.
‘아직 파티가 한창인데···.’
자작부인이 자신을 위해 만들어준 자리라서 실수 없이 더 완벽하게 보이고 싶었던 것도 있었다. 그런데 지금 상태론 무리였다.
‘조금만 쉬었다가. 조금만···.’
라데카는 발코니로 나와 두리번거리다 의자에 앉아있는 이를 보고 눈을 흘겼다.
서임 식은 봤고 그 후에 아버지와 함께 보고할 일이 있어 국왕을 뵙고 오느라 좀 늦게 파티 장에 도착했다. 분위기가 한창 달아올라 무척 재미나게 놀고 있었는데 파티의 주인공인 길리안이 보이질 않았다.
자작 부인께 인사를 드리고 어디 있는지 물어 찾아 나온 것.
분명 문 여는 소리가 들렸을 텐데 움직임이 없어서.
“길리안 경.”
하고 불렀는데 아직도 하늘을 올려다보고 있었다.
좀 더 다가가서 보니 눈은 감고 입은 헤 벌리고 있는 길리안의 모습에 어이가 없어 피식 웃었다.
‘아 매력 없어.’
지금 모습을 보며 들은 솔직한 생각이었다.
왕궁에선 기사 서임 식에 임하는 진지한 표정과 절도 있는 모습에 호감이 상승했었는데 지금 이 순간에는 그런 모습을 찾아볼 수가 없었다.
‘아우 술 냄새.’
무슨 술을 얼마나 마신 것인지 숨을 쉴 때마다 퍼지는 술 냄새가 코를 찔러왔다. 날이 날이니만큼 이해 못 하는 것은 아니지만 이런 모습일 줄은 몰랐다.
잠시 어이없다는 표정으로 그를 내려다보다 고개를 저으며 돌아섰다.
고맙다는 말도 하고 함께 춤을 추는 영광을 주려고 했는데 상태가 영 아니었으니까.
들어가 부인에게 알리려던 라데카가 걸음을 멈췄다. 잠시 생각하는 것 같더니 돌아서 다시 길리안에게 다가가 감겨있는 눈 위에 손을 펴고 흔들어 봤다.
반응도 없고 딱 보기에도 술에 곯아떨어진 모습. 평소엔 참 보기 힘든 완전 무방비 상태의 그를 보고 씨익 웃었다.
라데카는 조심스럽게 단추가 풀려있는 셔츠를 조금 젖혔다. 좀 어두웠지만 그래도 보일 건 다 보이는 정도. 목걸이 줄이 보이자 그녀의 웃음이 짙어졌다.
다른 손으로 그걸 조심스럽게 잡아당기자 펜던트처럼 걸려있는 반지가 보였다.
‘정말 목에 걸고 다니네?’
할아버지에게 무척 소중한 반지였고 자신에게도 그랬다.
이 반지는 마법사였던 할머니의 지하 연구실에 들어갈 수 있는 열쇠라고 할 수 있었다. 그렇다고 아티펙트는 아니고 반지에 봉인을 해제할 수 있는 주문이 새겨져 있다는 것이다.
물론 그 주문을 안다고 해서 지금 자신의 능력으로 봉인을 해제하고 들어갈 수 있을지는 의문이었지만 마법사로서 호기심이 일고 욕심이 나는 것은 사실이었다.
또 하나는 할아버지와 할머니의 결혼반지라는 것이다. 하나처럼 보이지만 한 쌍이었다.
할머니에 대한 기억은 별로 없지만, 할아버지에게 많은 이야기를 들었다.
그중에 가장 좋아했던 이야기는 두 분의 로맨틱한 사랑 이야기. 할아버지는 할머니를 정말 사랑하셨고, 오랜 구애 끝에 할머니의 마음을 얻으셨다. 그리고 그만큼 할머니에게 충실했던 분이셨다.
어릴 때부터 반지를 달라고 졸랐고 커서 할아버지랑 결혼할 거라고도 했었다.
그럴 때면.
“허허. 일단 마법사가 되고 아름다운 레이디가 되는 것이 먼저란다. 그러면 내 나중에 세상에서 가장 멋지고 너만 사랑할 남자에게 이 반지를 줘서 보내마.”
라고 하셨다.
할아버지가 보내준 남자랑 꼭 결혼할 거라고 했었는데 그거야 어릴 때 이야기.
이 반지를 받는다고 해서 꼭 결혼할 필요는 없었고 솔직히 받아놓고 마음에 안 든다고 해도 할아버지께서 뭐라 하시진 않았을 것이다.
그럼에도 반지를 받아 챙기지 않은 이유는 그런 식으로 물려받고 싶지는 않았기 때문이다. 솔직히 반지를 훔치네, 마네 했지만 그건 길리안을 가까이에서 관찰하기 위한 일종의 변명 같은 거였다. 어차피 때가 되면 반지는 물려받을 테니까.
할아버지가 반지를 가진 남자를 보낸다고 했을 때 솔직히 얼마나 가슴이 설렜던지.
아버지를 대신해 길드의 수장을 맡은 동안 여러 가지 정보를 접하게 됐고 귀족 가의 비밀들도 많이 알고 있었다. 그뿐만 아니라 괜찮게 생각했던 남자들의 행실도 낱낱이 알게 됐다는 게 문제.
몰랐다면 모르겠지만 알게 된 이상 좋게 보이지 않는 것은 당연한 일.
그때부터 남자들이 다 거기서 거기로 보이기 시작했다.
그나마 다행인 점은 다른 귀족 가의 여식들과 다르게 자신은 결혼에 대해선 거의 압력을 받지 않는다는 것이다. 급할 것도 없고 마음에 드는 남자도 없다 보니 할아버지가 보내준다는 멋진 남자와 로맨틱한 사랑을 꿈꿨었다.
그래서 엄청나게 기대를 했었는데 일단 그에 대한 얘기를 말론에게 듣고 실망하고, 첫 대면에서 받은 인상도 그저 그래서 무척 실망했었다.
역시 남자와 여자는 보는 눈이 다른 것 같았다.
평민 신분에 어린 나이.
처음에는 도대체 어떤 이유로 할아버지가 신분까지 무시하고 자신의 짝으로 생각했는지가 궁금하긴 했다. 물론 자신의 마음에 쏙 든다면야 이미 할아버지의 마음에 들었으니 그런 것들은 크게 신경 쓰이는 문제는 아니었다.
계속 지켜보고 관찰하면서 할아버지의 마음에 든 이유는 어느 정도 알 수 있었고 자신의 마음에 드는 구석도 있었다.
‘쳇 마음에 들기는. 어딜 봐서 세상에서 가장 멋진 남자라는 건지. 하여간 할아버지는. 후우.’
할아버지가 보내준 세상에서 가장 멋있다는 남자가 지금 술에 취해 입을 헤 벌리고 잠들어 있다는 것. 아무리 좋게 봐주려고 해도 자신의 환상을 무참히 깨뜨리는 만행이었다.
더 큰 문제는 자신만 사랑해줄 남자라면 교육을 다 해서 구애를 펼치게 해서 보내주시던가. 아무리 봐도 아무것도 모르는 것 같은 이에게 반지를 덜컥 줘서 보내시면 어쩌자는 것인지.
하긴 이 인간에게 할아버지가 손녀를 만나보라며 반지에 관해 설명했다면 아마 손사래를 치며 거절했을 것이다.
사랑을 시작한다면 자신만 바라봐줄 남자가 맞긴 했다. 문제는 이 인간이 먼저 시작할 기미가 없다는 것.
수많은 남자가 한 번 보고 첫눈에 반했네, 제발 한 번만 만나달라고 하는 건 기본. 혼담을 넣는 이들도 있고 자신 때문에 상사병에 걸렸다는 소리도 여러 번 들었다.
‘그런데 이 인간은!’
라데카는 반지와 길리안을 번갈아 보다 한숨을 쉬었다.
이건 저쪽에서 쫓아다녀도 받아줄까 말까 한데 가만 보면 자기 혼자서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고 끙끙 앓고 있다. 언제부터 자신이 이 인간에게 신경을 쓰게 된 건지.
그 생각을 하자 또 짜증이 확 났다.
‘아 억울해.’
이 인간은 아무것도 모르고 잠만 잘 자는데 자신은 신경 쓰며 관찰하고 계속 그의 주변을 맴도는 꼴. 아무리 생각해도 자신이 꿈꿔온 로맨틱한 사랑과는 거리가 멀었고, 시작부터 잘못됐다는 생각이 들었다.
“라데카 뭐하는 거니?”
“꺄악!”
누군가 귓가에 대고 속삭이는 말에 라데카는 소리를 지르며 물러났다.
“미네르바 언니?”
“뭘 하고 있었기에 그렇게 놀라니? 내가 더 놀랐네.”
“뭐, 뭘 하다니요. 아, 아무것도 안 했어요. 갑자기 그러니까 놀란 거죠.”
“잠든 길리안에게 무슨 짓을 하고 있었기에 말을 다 더듬을까?”
“무슨 짓이라뇨. 놀랐으니까 말을 더듬는 거죠. 그냥 축하의 말을 전하려 왔는데 술에 취해 잠들어 있어서 어떻게 해야 하나 생각하는 중이었단 말예요.”
숨도 안 쉬고 대답하는 라데카를 보며 미네르바가 웃으며 말했다.
“알았어. 놀라게 해서 미안. 그나저나 술을 엄청나게 마시긴 했나 보네.”
길리안을 내려다보던 미네르바가 그의 머리를 쓰다듬었다.
“언니.”
“응?”
“뭐하시는 거예요?”
“보다시피. 왜?”
“아니 그래도 폐하께 경의 칭호를 받은 기사인데 아이 머리를 쓰다듬듯 그러면···.”
“그런가? 잠든 모습이 귀여워서 나도 모르게 그만 실수를 했네.”
라고 말하면서 여전히 머리를 쓰다듬고 있었다. 길리안을 내려다보는 눈빛도 무척이나 부드러웠다.
“언니 설마···.”
“설마 뭐?”
“길리안 경을 좋아해요?”
라데카의 물음에 미네르바가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글쎄. 아직은 나도 잘 모르겠어. 하지만 알면 알수록 끌리는 것은 사실.”
그 말에 라데카가 놀란 듯 눈을 크게 떴다.
“마, 말도 안 돼.”
“흐음. 왜 말이 안 될까?”
“그, 그러니까 언니는 넘버즈에···.”
뭐라 더 말하려던 라데카는 누군가 발코니로 나오는 소리에 입을 다물었다.
“혹시 길리안 경 못 봤어요? 여기 있다던데 오늘의 주인공이 안 보이네.”
엔젤이 밖으로 나오며 한 말이었다.
“여기서 잠들었어.”
미네르바의 대답에 엔젤이 웃는 얼굴로 붉어진 뺨을 두드리며 걸어왔다.
“엔젤. 술 마셨니?”
“네. 너무 기분이 좋아서 아주 조금요.”
“너 와인도 조금밖에 못 마시잖니.”
“괜찮아요. 얼굴이 좀 화끈거려서 그렇지.”
“기분이 좋긴 한가 보네?”
“그럼요. 가르친 것도 없는데 폐하의 마음을 사로잡고 기사가 됐으니까요. 지금처럼 계속 성장해서 스무 살 전에 넘버즈에 합류하면 정말 좋겠는데 말이죠.”
“조금만 실력을 더 키우면 불가능하진 않다고 봐.”
미네르바의 말에 엔젤이 씨익 웃었다.
“그렇죠? 넘버즈인 언니 말이니 정확하겠죠. 많이 신경 쓸 거예요. 기사가 갖춰야 할 능력도 외적인 부분도. 안되면 개인 교습을 해서라도 완벽한 기사로 만들어서 졸업시킬 거예요. 되도록 빨리!”
그렇게 말한 엔젤이 잠든 길리안을 보고 미소를 지었다.
“어쩜 자는 모습도 이리 예쁠까.”
그러면서 허리를 숙여 길리안의 이마에 키스했다.
“엔젤!”
“엔젤언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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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작가의말
늦어서 죄송합니다. 주말에 열심히 썼어야 했는데 제가 뻗어서 ㅠ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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