넘버즈. 7장(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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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와....”
정문으로 들어서자마자 수많은 사람들이 보였다.
아카데미가 종합교육기관으로 거듭난 지금에 이르러서는 기사들뿐 아니라 다른 전공의 지원자들도 많았기 때문에 그들도 시험을 치른다.
그러다보니 수천은 돼 보이는 이들이 입구에서부터 북적이고 있었다.
대부분 입학시험을 치르러 온 이들일 테고 앳된 얼굴을 보니 비슷한 또래들일 것이다. 고향에 친구들도 몇 있었지만 이렇게 많은 또래를 보는 것은 또 처음이었다.
길리안은 사람들이 가장 많이 모여 있는 곳으로 갔다. 기사 지망생들이 모이는 곳이었다.
안내에 따라 지원확인서를 보여주고 간단한 확인을 마친 후에 옷 한 벌을 지급받아 갈아입었다.
그런데...
옷에 별로 신경을 안 쓰는 그가 봐도 이건 좀 아니지 싶은 복장이었다.
봄이라고는 하나 아직 3월이라 날이 차가웠다. 아니 이른 아침이라 두툼한 옷을 입어도 춥게 느껴지는 날이었다.
그런데 지급받은 옷은 낡고 볼품없는 것은 둘째 치고, 얇고 헐렁해서 바람이 숭숭 들어왔다.
거기에 아무리 자신의 몸에 맞춰 만든 옷이 아니라지만, 팔과 다리의 기장이 너무 짧아서 우스꽝스러워 보이기까지 했다.
그런 스스로의 모습에 그저 피식 웃을 수밖에.
뭐 혼자만 그런 것은 아니라 크게 신경 쓰지 않았고, 쌀쌀함에 살이 돋아나는 것만 빼면 별 문제는 없었지만 말이다.
그리고 시험이 시작되면 추위는 가실 것이다.
기사 지망생을 뽑는 시험은 다른 전공에 비해 훨씬 까다로웠고 시험 기간도 길었다.
총 5일에 걸쳐 시험이 진행되는데 첫날은 기초체력 시험이었다. 20여 가지 코스로 진행되는 시험에서 기준에 미달하는 이들은 가차 없이 탈락시켰다.
그렇게 1일차에서 합격한 이들만이 2일차에 시험에 응할 수 있었다.
2일차의 시험은 산행이었다.
수도가 위치한 아라네스 평야를 둘러싸고 있는 타그로스 산맥에서 이뤄지는 시험은 말이 좋아 산행이지 마의 코스라고 불리기도 했다.
2일차까지의 시험은 어찌 보면 과한 지원자들 중 일정수준 이상만 남기고 걸러내는 과정이라 볼 수 있었다.
이유는 3일차부터는 탈락이 없었고, 그때부터는 최종시험까지는 치를 수 있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그렇다고 안심할 수는 없었다.
기준 점수에 미달되면 어차피 합격은 불가능 한 것이고, 정원 이상은 뽑지 않기 때문에 지원자들의 수준이 높으면 기준점수 이상을 받아도 안심할 수 없었으니까.
결국엔 마지막 까지 경쟁인 것이다.
“어이 옷을 갈아입었으면 빨리 빨리 움직여라.”
앞에서 슈발리에 아카데미의 기사생도가 한 말이었다.
생도들이 입는 정복에 옆구리에 의장용 검까지 차고 있었다. 입학하게 되면 길리안도 입을 복장이었다.
지원자가 많고 시험기간이 길다보니 일손이 부족한 것은 당연한 일. 그래서 중급과 고급과정을 밟고 있는 생도들을 동원하는 것이었다.
대하는 태도가 입구에서 안내하던 이들과는 사뭇 달랐다.
어쨌든 그의 말대로 움직여 밖으로 나간 길리안은 앞서 모여 있던 이들을 보고 쓰게 웃었다.
고향에 있을 때 슈발리에 출신 기사들과 형이 했던 말이 떠올랐다.
입학시험을 보러가서 죄수나 노예가 된 기분이 든다면, 그때부터가 진짜 시험이 시작된 거라고 농담 식으로 말했었다.
그때는 무슨 말인가 했는데 이렇게 옷을 갈아입고 나와 보니 알 것 같았다.
모두가 낡고 허름한 옷을 입고 앞뒤에 커다란 번호가 쓰여 있어, 모르는 사람이 보면 정말 죄수나 노예들을 모아놓은 지 알 것 같았다.
“번호순으로 정렬한다. 빨리빨리 움직여.”
교관들과 생도들이 지원자들의 번호대로 줄을 세우고 있었다.
“거기 1116번. 이쪽이다.”
그 말에 길리안은 걸음을 옮겼다.
기왕이면 10번 안쪽의 번호를 받아서 나름 넘버즈같은 기분을 내보고 싶어, 접수 첫날 문이 열리기만 기다렸다가 제일 먼저 접수를 했는데 지급받은 번호는 1116번이었다.
아까 옷을 지급받으며 물어보니 접수한 순서가 아니라 성과 이름의 이니셜 순으로 번호가 매겨진다고 했다. 몰랐던 거지만 알았어도 어쩔 수 없는 것이고, 앞 번호를 배정받아도 넘버즈 같은 기분은 낼 수 없을 것 같았다.
꼭 죄수복을 입은 느낌인데 어떤 번호를 받던 그게 그거니까.
길리안이 자리에 서있는 동안에도 수많은 이들이 같은 복장으로 몰려나왔다.
줄을 세우는 교관과 생도들의 고함소리에, 어색함에 주변을 두리번거리는 이들과 지급받은 옷이 마음에 안 드는 듯 투덜거리는 이들. 뭔가 생각했던 것과는 다른 시험장의 모습이었다.
‘내가 기대를 너무 많이 한 건가?’
하는 생각이 들었다.
주변의 그런 모습보다 실망스러운 것은 시험을 치러오는 이들이었다.
가슴을 설레게 할 정도의 뭔가 느낌을 주는 상대를 찾아볼 수가 없었다. 또래들 중에서 경쟁할 만한 상대가 있기를 기대했는데, 대부분이 고향에서 같이 수련을 하던 친구들보다도 못해보였으니까.
거기에 정식기사인 교관들이나 중급과 상급의 생도들이 주는 느낌도 그저 그랬다.
‘이중에 100명을 추리면 좀 나아지려나?’
과연 이런 동기들과 함께, 또 지금 보이는 교관들에게 6년 동안 뭘 배우고 또 얼마나 성장할 수 있을까하는 의문이 들었다.
비싼 등록금과 6년이라는 시간을 소모해서 배울 수 있는 것이 과연 그만큼의 가치가 있을까? 하는 생각.
잘난 척을 하는 것이 아니라 그만큼 기대했던 것에 못 미쳐 실망스럽고, 처음 받은 인상이 별로라는 말이었다.
솔직히 넘버즈가 목표이고 배움을 위해 수도의 아카데미에 들어가려하는 것이었지 기사가 되고 싶으면 못될 것이 없었다.
이미 영주님에게도 인정을 받았고, 휘하의 기사가 되는 것은 언제든 환영한다고 하셨다. 영지의 기사가 되려면 얼마든 그럴 수가 있었다는 말이다.
매년 가을에 있는 왕실 기사 임관시험도 추천을 받으면 응시할 수 있으니 못할 것도 없었지만, 급하게 마음먹지 말고 많이 배우고 익혀서 스스로를 단련시켜 나가라는 스승 엘런의 말에 따르는 것도 있었다.
배움에는 때가 있다고 했다.
그때가 아니면 배울 수 없고 느낄 수 없고, 또 얻을 수 없는 많은 것들을 놓치지 말라는 조언도 떠올랐다.
높은 꿈을 위해 서두르지 말고 천천히 준비해 나가라는 것이었다.
‘자만하지 말자.’
길리안은 쓸데없는 생각을 털어버리고 마음을 다잡았다.
시작도 해보지 않고 겉모습만 보고 모든 것을 판단하기에는 이르다.
그리고 아직 시험을 치르지도 않았고, 우습게보고 임했다가 시험에 떨어지기라도 하면 고향땅 밟을 생각은 말아야했다.
시험은 매년 있으니 다음을 기약해도 되고 실제로도 그러는 이들도 많다고는 하지만 그럴 마음은 추호도 없었으니까.
“어이 반갑다.”
누군가 옆에서 툭 치면서 하는 말에 생각을 접고 고개를 돌렸다.
170Cm도 안돼 보이는 키에 갈색 곱슬머리, 여드름이 가득한 얼굴에 쭉 찢어진 작은 눈. 아무리 봐도 본적이 없는 얼굴이었다.
“제게 한 말입니까?”
길리안의 물음에 말을 건 이가 고개를 끄덕이면서 손을 내밀었다.
“응. 반갑다. 난 그렉 후네스라고 한다. 나이는 아직 열일곱이지만 곧 열여덟이 된다.”
길리안은 멀뚱거리며 그렉의 얼굴과 손을 번갈아 볼 뿐이었다.
“너 낯가림이 되게 심하구나. 어차피 시험 보러 온 거고 오늘 하루는 붙어 다녀야 될 것 같으니까 잘 지내보자는 뜻이야.”
그러면서 자신의 옷에 쓰여 있는 번호를 가리켰다.
그렉의 번호는 1115번.
입구에서 대충 설명은 들었다.
첫날 시험에는 100명 정도씩 나눠 한조를 이뤄 코스별로 시험을 본다고 했다. 각 번호대마다 시작하는 시험이 다르지만 결국 모든 과정을 거치는 것은 마찬가지.
힘을 합쳐야 하는 코스는 없고, 단지 중복되지 않고 빨리 진행하기 위해 편의상 나눈 조일 뿐이다.
번호를 보니 그의 말대로 오늘 하루는 붙어 다녀야할 것 같았다.
“편하게 대해. 어차피 비슷한 나이에 같은 평민일 테니까.”
“어.. 어 그래. 난 길리안 후버. 나도 아직 열일곱이야.”
“우와 너 정말 열일곱이야?”
그렉이 놀랍다는 듯이 길리안의 위아래를 훑어봤다.
“난 적어도 두세 살은 많을 줄 알았는데. 키가 엄청나게 크구나. 뭘 먹으면 그렇게 크냐?”
“어... 그냥 이것저것...”
“너 억양이 좀 그렇다? 수도 태생은 아니구나?”
“응. 라이라프 영지에서 왔어.”
“오 그건 어디 붙어있는 거냐? 난 수도에서 나고 자랐어. 아버지는 기사신데 지금은 국경에 근무 중이시고, 지금은 어머니랑 여동생이랑 함께 지네고 있어. 아버지께서 곧 올라 오실지도 모른다는데...”
로 시작해서 별로 궁금하지도 않은 스스로에 관한 말을 하는데 이건 끝날 기미가 보이질 않았다.
말을 하면서 가끔 물어보기는 하는데 대답할 타이밍 같은 것은 절대 주지 않고 계속 혼자서 쉬지 않고 말을 해댔다.
거기에 무척 산만해 보였다.
보통 대화를 하면 상대를 쳐다보고 말하는 것이 당연한 건데 녀석은 쉬지 않고 주변을 두리번거리면서 입을 놀렸다.
가만 보면 대화를 하겠다는 게 아니고 그냥 혼잣말을 하고 있는 것 같기도 했다.
그런데 그러다가도 “듣고 있지?” 하고 확인은 한다는 거다.
‘뭐 이런 녀석이 다 있지?’
하는 생각이 들었다.
길리안 말고도 주변에 있던 지원 생들도 그렉을 쳐다보는데 눈빛을 보니 그들도 비슷한 생각을 하는 것 같았다.
2천여 명의 지원자가 다 모이고 정렬하기까지는 꽤 시간이 걸렸다. 그리고 옆에 있는 그렉때문인지 그 시간이 더 길게 느껴졌다.
‘아 빨리 시험이 시작됐으면 좋겠는데.’
그게 지금 길리안이 가장 바라는 것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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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작가의말
시험도 보러가서 합격했다가 아니라 이렇게 과정을 써보려 합니다.
그나저나 제사라며?
내일이더군요. 쿨럭...
친절한? 우리 대표 팀 덕분에 오늘도 연참 없이 넘어가네요. 하아... 4년에 한번 있는 건데 잘 좀 해주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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