넘버즈. 8장(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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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렇게 기다리는 건 내취향이 아니야. 정말 나타나긴 하는 건가?”
파란 투구 속에서 흘러나온 물음에 금발의 미남자가 희미하게 웃었다.
“글쎄.”
“아무리 시종장의 요청이라지만 이건 너무 과하다고 생각되지 않나?”
푸른 갑주 푸른색의 투구. 환영의 기사 로렌스 폰 지그먼트의 말이었다.
“꼭 그 때문만은 아닌 것 같았다.”
그런 로렌스의 말에 답하는 금발의 미남자는 금발의 사자, 루퍼드 폰 히스클리프였다.
“무슨 말이지?”
“확실하진 않지만 왕의 명을 받는 정보조직이 있는 것 같더군.”
“음? 왕께서 따로 보고를 받았다는 건가?”
“아마도. 내 생각일 뿐이지만 어쨌든 시종장의 요청이 아니었다고 해도 아마 이렇게 했을 거란 거다.”
“우리에게도 비밀로 해야 하는 정보조직이라. 그는 알고 있을까?”
“아마도.”
“결국엔 No.1이 되어야 한다는 건가?”
로렌스의 말에 루퍼드가 눈을 빛냈다.
“왕가의 비밀에 관심이 많은가 보군.”
로렌스가 고개를 저었다.
“왕가의 비밀 따위엔 관심 없다. 단지 약간의 호기심이라고 해두지. 그러는 넌 어떤가? 한 계단만 올라서면 최고의 자리다. 모든 걸 알 수 있고, 모든 걸 손에 넣을 수 있다. 욕심이 나지 않나?”
“별로. 지금으로도 충분하다. 그의 자리에 오른다는 건 왕의 그림자가 된다는 말. 난 충성을 맹세한 기사지만 누군가의 그림자로 살고 싶은 마음은 없어.”
“그보단 그에게 이길 자신이 없는 것이 아닐까?”
로렌스의 말에 루퍼드가 쓰게 웃었다.
“지금당장은 네 말대로 일지도 모르겠군.”
그들이 말하는 그는 현재의 No.1 드겔 폰 에머슨을 말함이었다.
30년 동안 넘버즈의 1번을 달고 있는 왕국 최고의 기사.
“10년만 기다려봐라. 혹시 아나? 늙은 괴물이 스스로 물러날지. 그럼 어차피 그 자리는 너의 것이 될 거다. 10년이라고 해봐야 너의 나이는 서른 셋. 그 정도면 기다릴 만 하지 않나?”
로렌스의 말에 루퍼드가 살짝 인상을 찌푸렸다.
“그런 식으로 물려받는 건 마음에 들지 않는군.”
“뭐 네가 알아서 해라. 난 어차피 올라갈 마음도 없고, 너나 그 괴물 늙은이와 싸울 마음은 더더욱 없으니까.”
그렇게 말하는 로렌스를 루퍼드는 빤히 쳐다볼 뿐이었다.
솔직히 말하면 넘버즈 안에서도 실력의 격차는 존재한다. 그리고 상위 3명과 나머지의 격차는 생각보다 크다.
특히 No.1의 실력은 No.2인 그로서도 아직 부담스럽다.
그런데 지금 옆에 있는 로렌스는 No.5이지만 충분히 세손가락 안에 들 수 있는 실력이 있었다.
1번은 아니더라도 지금 자신의 자리나 그 밑에는 충분히 노리고 남을 실력이 있으면서도, 저 번호에 머무르고 있는 것이 이상하게 느껴질 정도였다.
거기에 로렌스는 특별한 능력도 가지고 있었다. 아는 사람이 몇 되지 않는 그의 능력은 상대하기 무척 까다로웠다.
로렌스는 엄살처럼 너에겐 통하지 않는다고 말하지만 그건 모르는 것.
그리고 늘 붙어 다니는 것 같지만 그리 친근한 사이는 아니었다. 단지 그가 가는 곳에 로렌스가 따라다니는 것이고, 그것에 별 신경을 쓰지 않는 것 뿐.
넘버즈들은 각자의 개성이 강하다.
왕국에서 손가락에 꼽히는 이들이고 그만한 실력과 배경을 가지고 있기에, 모두 한자리에 모아 놓아도 섞이기가 힘들다.
아카데미 출신이나 가문의 관계에 따라 조금 가까운 사이가 있기는 하지만, 어차피 그 안에서도 서로의 경쟁이 계속 되는 것이 넘버즈이니까.
그래서인지 서로에 대해 드러내놓은 것 보다는 감추는 것이 더 많았다.
지금 붙어있는 그 둘도 다르지 않았다.
“투구가 뚫어지겠군.”
로렌스이 말에 루퍼드가 쓰게 웃으며 시선을 돌렸다.
“그보다 루퍼드. 넌 녀석들을 상대하는 것은 처음이지?”
로렌스의 물음에 고개를 끄덕였다.
그가 넘버즈에 합류한 것은 3년 전.
귀족기사단이라는 것들이 흔적을 지우고 잠적했을 때였다.
“넌 마지막 추적 때 합류했던 걸로 아는데?”
루퍼드의 물음에 로렌스가 대답대신 짜증난다는 듯 발밑에 있던 돌멩이를 걷어찼다. 멀리 날아가는 돌멩이를 보며 휘파람을 불던 그가 말했다.
“그러긴 했는데... 별로 재미있는 일은 아니었다. 사건이 터지면 항상 뒤꽁무니만 쫓아다니는 식이었으니까. 생각보다 대단한 녀석들이란 생각이 들더군. 그 정보가 얼마나 정확한 건지는 몰라도 아마 이런 식으로는 잡기 힘들걸?”
“그렇겠지.”
라고 대답하는 루퍼드를 보며 로렌스가 말했다.
“남의 이야기처럼 말할 때가 아니다. 이번일의 책임자는 바로 너. 무슨 일이 생긴다면 모든 비난은 네게로 향할 거다. 호시탐탐 너를 끌어내리고 싶어 하는 자들에겐 아주 좋은 기회지.”
그 말에 바람이 흐트러진 머리칼을 쓸어 넘기던 루퍼드가 피식 웃었다.
“능력도 없는 자들의 시기와 질투는 신경 쓰지 않는다.”
“조금은 신경 쓰는 게 좋을걸. 넌 너무 어린나이에 높은 곳에 올라섰다. 올라서는 것은 힘들지만, 내려가는 것을 아주 잠깐이지.”
“걱정해주는 것은 고맙지만, 그런 자들에게 빌미를 줄 생각도 없다.”
“오 자신 있다는 뜻인가?”
“내가 할 수 있는 최선을 다할 뿐.”
“최선이라... 내가 보기에는 너무 여유를 부리는 것 같다만...”
“따로 빼놓은 병력 때문에 하는 말인가?”
루퍼드의 물음에 로렌스가 말했다.
“왕께서는 녀석들을 잡아들이기보단 뭔가 벌어질 수 있는 일을 막고자 하는 의지가 더 강해 보였다. 어쨌든 슈발리에의 설립자는 왕가. 도적들의 도발조차 막을 수 없다면 슈발리에의 명성은 저 밑바닥으로 떨어지겠지. 그건 타노스 3세의 명예에도 누가 되는 것이라 생각하는 것 같더군. 이번일이 잘못되면 왕께서도 네게 무척 실망하실 거다.”
그 말에 루퍼드도 수긍한다는 듯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
“물론 그런 일 생기지 않게 막을 거다. 그리고 이정도면 충분하다고 생각하기 때문이지.”
“그런가? 하지만 내 눈에는 충분해 보이지 않는군.”
많은 이들이 동원됐다.
넘버즈를 비롯해 그들이 이끄는 왕실 기사단과 수도를 방위하는 상비군, 각 귀족가의 기사들과 사병들까지.
그런데 루퍼드는 이일을 맡으면서 넘버즈 2명과 중앙기사단의 절반, 그리고 상비군들의 상당수를 이곳이 아닌 수도 근방에 잠복시켰다.
포위라도 해서 잡을 생각인 것도 같았지만, 그렇게 보기에는 배치가 이상했다. 이곳에만 집중해도 구멍이 많은데 병력을 분산한 이유를 모르겠다는 것이다.
“아무 일도 없을 거라 판단한 건가?”
로렌스의 물음에 루퍼드가 천천히 고개를 저었다.
“아니. 뭔가 벌어지긴 할 것 같아.”
“그런데?”
“일이 벌어지는 곳이 이곳일지. 아니면 저곳일지가 문제지.”
그러면서 루퍼드가 시선을 돌렸다.
로렌스의 시선도 그를 따라갔다. 그의 눈에 들어온 것은 멀리보이는 수도의 모습.
“설마 성에서 일을 벌일 거라 생각하는 건가?”
“충분히 가능성이 있는 얘기이지 않나?”
“흐음... 글쎄. 대범한 녀석들이긴 하지만 성안에서 일을 벌일 거라고는 생각해보지 않았다.”
“그걸 노린 것일 수도 있지. 상대가 누구인지도 모르는데 확실해 보이는 정보가 들어왔다. 거기에 대비하기 위해 많은 병력이 동원됐지. 지금 수도에 남아있는 병력이라곤 근위대와 소수의 성문 경비대, 최소한의 치안 대 뿐이지.”
“흐음...”
로렌스는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 생각해보니 일리가 있는 말이었다.
산맥과 성까지의 거리는 꽤 돼는 편이다.
말을 타고 달려도 30분은 가야하고, 그것도 산 밑에 있을 때의 얘기. 산맥에 흩어져있는 병력을 추슬러 달려가려면 몇 시간은 족히 소요된다.
“참 좋은 기회이지 않나? 텅 빈 수도에서 일을 벌이기엔 말이지.”
“듣고 보니 그렇군. 그렇다면 함정을 파놓은 거였나? 기왕이면 나도 저쪽으로 보내줬으면 좋았잖아. 심심한건 별로라서 말이지.”
로렌스의 말에 루퍼드가 피식 웃었다.
“확실한건 아무것도 없다. 그리고 양쪽에서 일을 벌일 가능성도 배제할 수는 없지.”
“오호 여기서도 뭔가 벌어질 거라 생각하는 거군.”
“만약에 일을 벌인다면 충분히. 이쪽에 있는 병력의 발을 묶어놓을 뭔가는 필요할 테니까. 단지 그 뭔가가 궁금할 뿐이다. 제일 좋은 것은 역시 아무 일도 벌어지지 않는 거겠지만.”
“나는 뭔가 벌어졌으면 좋겠다. 너무 지루하거든.”
“넌...”
“아아 누군가가 다치길 바라는 건 아니야. 그냥 너무 심심해서 한 말이니 신경 쓰지 말라고. 그나저나 슈발리에 애들은 참 힘든 시험을 치르는군.”
말을 돌리는 로렌스를 보면서 루퍼드도 시선을 돌렸다.
멀리 절벽을 오르는 지원 생들의 모습이 보였다.
“저 절벽 위로 통하는 길이 있던가?”
루퍼드의 물음에 로렌스가 어깨를 으쓱 해보였다.
“글쎄. 나도 이곳은 처음이라 말이지. 지도에는 없는 것 같았지만... 다른 쪽에서 올라간 병력이 있을 거다.”
“아무래도 확인해 봐야겠군.”
말을 마치고 걸음을 옮기는 루퍼드를 따라 로렌스도 걸음을 옮겼다.
목에서 느껴지는 서늘함에 길리안은 하던 행동을 멈췄다. 슬쩍 내려다보니 눈이 시리도록 날이 서있는 검이 목에 닿아있었다.
“뭘 하고 있었지?”
뒤에서 들리는 목소리는 여자의 것이었다.
“약초를 캐고 있었습니다.”
“후 약초라. 복장은 시험을 보는 예비생도와 같군.”
“맞습니다.”
“시험 중에 약초를 캔다? 꽤나 여유 있는 모양이구나.”
“조원들이 휴식을 취하는 동안 주변을 둘러보다 눈에 보여 캐는 것입니다. 상처에 좋은 것인데 있으면 여러모로 쓸모가 있으니까요.”
“재밌는 녀석이군.”
말과 동시에 목에 닿아있던 검이 치워졌다.
“일어서서 뒤로 돌아라.”
그 말에 길리안은 천천히 일어서 뒤로 돌았다.
그러자 눈앞에 보이는 여자.
윤기 나는 은발의 생머리에 까무잡잡한 피부. 커다란 눈과 전체적인 이미지가 미인이란 생각이 들게 했다. 갑옷보다는 오히려 드레스가 어울릴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보다 눈에 들어오는 것은 흉갑의 오른쪽에 새겨진 넘버 10.
“미네르바 폰 발렌스타인 경이십니까?”
그 물음에 여자가 살짝 고개를 끄덕였다.
길리안은 잠시 멍하니 그녀를 쳐다봤다.
먼발치에서 넘버즈를 본적은 있지만 이렇게 가까이에서 본 것은 이번이 처음이었다.
게다가 상대가 넘버즈 중 유일한 여기사인 미네르바. 아름답다는 말은 들었지만 실제로 보니 소문이 과장된 것은 아니었다.
그보다 왜 넘버즈인 그녀가 이곳에 있는지가 궁금했다. 이런 곳에서 마주친 넘버즈는 기쁘기 보다는 당황스러울 정도였으니까.
그래서 물었더니 돌아오는 대답은 의외로 싸늘했다.
“내가 네 물음에 답할 이유가 있을까? 난 아직 널 의심하고 있다.”
무엇에 대한 의심인지 잠시 생각해봤지만 잘 모르겠어서 입을 열었다.
“무엇이 의심스러우십니까?”
“그럼 네 행동이 정상이라 생각하는 것이냐? 어쨌든 네 신원에 대한 조사는 조금 해봐야 하니 앞장서도록.”
미네르바의 말에 뭐라 말을 하려던 길리안은 낮은 한숨을 내쉬며 뒤로 돌아 걸음을 옮겼다.
뭘 의심하는 건지는 몰라도 분명 무슨 일이 있는 것 같기는 했다.
이 시험과 전혀 상관없는 카스트로 경이 나타나 해준 당부도 그렇고, 지금 눈앞에 나타난 넘버즈 미네르바까지.
‘도대체 뭐가 어떻게 돌아가고 있는 거지?’
추천과 댓글은 글쟁이에게 큰 힘이 됩니다.^^
- 작가의말
등장인물들이 좀 많군요.
사건은 언제 터지는 거냐?
아마도 곧...
여차저차 연재를 시작한지 한 달이 되어가는군요.
항상 제 글을 읽어주시고 응원해주시는 독자 분들께 감사드립니다.
그러고 보니... 하루도 빼먹지 않았군요.
우하하하하. 하하;;;
앞으로도 성실연재를 계속 됩니다. 쭈욱~
정말?
글쎄요. 당근을 주신다면 또 모르죠. 쿨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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