넘버즈. 7장(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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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지만 그 바람은 쉽게 이루어지지 않았다.
왕실 중앙기사단장의 격려사에 이어 부학장의 격려사도 모자라, 이제는 시험을 총괄하는 총교관의 주의사항이 이어지고 있었다.
“나는 마르스 폰 하버트다. 이번 시험의 총괄을 맡고 있다. 시험을 치르기 전 너희가 알아야 할 몇 가지에 대한 당부를 하겠다. 첫째 시험에 임하는 동안 너희의 신분은 잊어라. 귀족이건 평민이건 지금 이 순간 너희는 슈발리에 아카데미 기사교육과정에 지원한 예비생도일 뿐이다. 교관 및 선배생도들의 말에 절대 복종해라. 특히 귀족이랍시고 반항하는 것들은 내 이름을 걸고 절대 용서치 않을 것이다. 불만이 있는 자는 지금이라도 이곳을 떠나라. 두 번째로 부정한 행위를 하다 적발되면 바로 자격박탈이다. 그러니...”
그의 말은 계속 이어졌다.
“하암... 아 더럽게 기네. 시험을 보겠다는 거야 말겠다는 거야? 으으 추워. 시험도 치기 전에 얼어 죽겠네. 안 그러냐?”
옆에서 그렉이 말했지만 길리안은 대꾸도하지 않고 고개를 돌리지도 않았다.
입을 꾹 다물고 주먹을 꽉 쥔 채로 앞만 보고 있었다.
저 녀석은 얼어 죽을지 몰라도 자신은 짜증나서 죽기 일보직전이었다.
지금도 그렇지만 격려사가 계속되는 동안에도 그렉의 입은 쉬지 않았다. 큰 소리로 말하는 것은 아니었지만 마치 무슨 주문이라도 외우듯 말이 끊이질 않았다.
그동안 많은 수련을 했고 집중력을 높이는 훈련도 했었다.
때문에 검을 수련할 때는 물론 여러 가지 소리 중 한 가지 소리에만 집중하거나 사물을 관찰할 때도, 마음먹으면 주변의 상황과 동떨어진 상태가 된 것처럼 다른 것에 영향을 받지 않고 집중할 수 있는 정도는 됐다.
그렇게 일단 집중하면 옆에서 무슨 말을 해도 귀에 들리지 않을 정도였으니까. 칭찬에 인색한 스승에게서도 좋은 집중력이라고 칭찬을 들었었다.
그래서 녀석의 말이 듣기 싫어 다른 것에 집중하기 시작했다. 그럼 무시할 수 있을 줄 알았다.
그런데 이상하게도 그게 잘 되질 않는다는 거다.
의식을 모아 집중을 해도 별것 아닌 녀석의 말 한마디 한마디가 집중력을 흐트러트렸다.
이정도면 능력이라고 봐도 좋을 정도였다.
“....셋째로 예비생도간의 다툼은 어떠한 경우도 용인하지 않는다. 아무데서나 주먹을 날리고 검을 뽑는 못난 것들은 기사의 자격이 없다. 그러니....”
총교관의 말에 주먹에서 힘을 뺐다.
마음 같아서는 녀석의 입을 틀어막거나 어딘가로 날려버리고 싶었지만, 그랬다가는 시험을 치르기도 전에 집으로 돌아가야 할 판이었으니까.
“야 길리안. 너 어디 아프냐? 표정이 안 좋다. 아하! 너도 춥구나? 그치? 그럴 줄 알았지. 아 이게 무슨 고생인가 몰라. 아주 짜증난다. 짜증나.”
정말 짜증이 났다.
기사는 어떠한 상황에서도 평정심을 잃어서는 안 된다고 배웠다.
분노가 때로는 괴력을 발휘하는 요소가 될 때도 있지만, 보통 화가 나면 판단력이 흐려지기 때문에 좋은 대처를 할 수 없다는 것을 잘 안다.
마음의 평정을 유지하는 훈련도 항상 해왔다. 그래서 어지간한 일에는 화를 내지 않는 편이고, 항상 웃을 수 있는 것도 그 때문이다.
그런데 이 녀석 사람을 정말 화나고 짜증나게 한다. 그동안 해온 훈련을 무색하게 만들 정도였다. 그리고 누군가가 이렇게 마음에 안 들어보긴 또 처음이었다.
길리안은 멀지않은 곳에 있는 선배생도를 보고 손을 들었다.
“무슨 일이냐. 1116번.”
“이 번호 바꿀 수 없는 겁니까?”
“바꿀 수 없다. 그게 시험이 끝날 때까지 네 이름이나 마찬가지다. 그러니 마음에 안 들어도 참도록.”
선배생도의 말에 길리안은 인상을 찌푸렸다.
번호를 바꾸면 자리도 바꿀 수 있을 텐데 그게 안 된단다. 녀석이 바로 앞 번호이다 보니 시험을 치르는 내내 붙어있을 확률이 무척이나 높았다.
중간에 떨어져주면 고맙지만 그렇지 않을 경우 입학시험을 치르는 5일이 왠지 힘들 것 같은 생각이 들었다.
“너 그 번호가 맘에 안 들어? 혹시 미신 같은 거 믿는 거냐? 내가 그런 거 무지 믿어봤는데 다 소용없더라. 기사는 실력이지. 암 그렇고말고. 그러니까 번호 같은 건 잊어버리고 노력을 해라. 노력. 우리 아버지가 그러시는 노력을 해야.....”
이어지는 그렉의 말에 길리안은 머릿속에서 뭔가가 툭 끊어지는 것을 느꼈다.
“.....자 이상이다. 각 교관들과 생도들은 예비생도들을 인솔에 시험장으로 갈수 있도록 한다.”
총교관의 주의사항 전달이 끝나자 이동이 시작됐다.
“야 길리안 뭐하냐? 정신 차려. 춥다고 정신을 잃으면 안 되지. 애가 눈이 맛이 갔네, 갔어. 쯧쯧. 어쨌든 가자 드디어 시작이다.”
그렇게 말하고 돌아서 걷는 그렉을 멍하니 보던 길리안이 뒷목을 잡았다.
“아... 피곤하다.”
목이 뻣뻣하게 굳어오는 게 무척이나 피곤했다.
“결국엔 주의사항을 다 못 들었네. 하아...”
한숨을 내쉰 길리안이 쓰게 웃으며 걸음을 옮겼다.
왠지 이번시험이 쉽지 않을 것 같은 예감이 들었다.
“보는 바와 같이 벤치에 누워 바벨을 들어 올리는 거다. 가슴에 닿을 정도로 내렸다가 밀어 올렸을 때는 팔을 쭉 펴야한다.”
생도하나가 벤치에 누워 바벨을 들어 올리는 시범을 보이고 교관이 그에 따른 설명을 해주었다.
“이게 하나다. 다들 해보긴 했겠지만 제대로 하지 않으면 수를 세지 않을 것이다. 교관과 생도들이 매의 눈으로 지켜볼 테니 요령 따위는 부릴 생각도하지마라.”
보통 이런 식으로 시험을 보기 전에 제대로 된 방법을 알려줘서 원활하게 진행도하고, 실수로 탈락하거나 하는 것을 방지하기 위함이었다.
“아 재수 없게 하필 이거부터냐. 시작부터 힘 빠지게.”
그렉의 투덜거림은 시험장에 와서도 계속됐다.
주변에서 면박을 주고 뭐라고 해도 전혀 들어 먹히질 않았다. 이제는 거의 녀석을 포기한 분위기랄까?
그건 길리안도 마찬가지였다.
처음에는 무척이나 화도 나고 마음에 안 들었었는데 생각을 조금 바꾸니 나름 괜찮았다.
‘이것도 일종의 수련이라 생각하자.’
이게 길리안의 생각이었다.
오랜만에 고난이도의 정신훈련을 하는 기분이었지만 말이다.
아무튼 지금처럼 바벨을 들어 올리는 것을 시험에 넣은 것은 몇 년 되지 않았다.
기사는 평상시에도 항상 수련을 통해 몸을 단련한다. 일정시간은 검을 휘두르고 마상전투를 연마하는 등의 훈련 말고도 많은 것들을 한다.
그중에서 필요한 것 중 하나가 바로 근력운동이다.
갑옷의 무게가 가벼워졌다고는 하나 일반인이 입으면 움직이기 힘들 정도로 무겁다. 거기에 기사들은 워 해머나 철퇴 전투도끼 등등 무거운 중 병기를 많이 다루기 때문에 힘은 필수.
그래서 근육을 키우고 힘을 기르는 운동은 지속적으로 해줘야 하는 것이었다.
지금은 기사의 시대의 정점이라고 말할 정도로 기사들을 위한 많은 것들이 만들어지고, 그중에는 운동법도 있었다.
체계적인 운동과 훈련을 통해 몸을 단련하는 방법.
예전에는 그런 것도 공유하거나 하지 않았지만 아카데미가 활성화 되고나서부터는 더 이상 비밀스러울 것도 없었기 때문에 많이 알려지게 됐다.
그중에 바벨을 이용한 운동법이 나온 지는 십년도 채 되지 않았지만, 상체의 근육 특히 팔과 어깨 가슴 등의 근육을 키울 수 있는 바벨을 통한 운동법은 많은 기사들이 필수적으로 하는 운동 중 하나였다.
길리안도 영지에 있을 때 지속적으로 했었고, 저택을 사고 수련장을 꾸밀 때 당연하게도 들여놓은 것이 저것이었다.
보통의 아카데미 시험은 전혀 비밀스럽지 않다.
정답을 적어야만 하는 필기시험의 경우는 비밀유지를 하지만, 지금과 같은 시험은 일반에도 공개되는 것이었으니까.
매년 조금씩 바뀌기는 하지만 그리 큰 변동은 없기 때문에 그에 맞게 훈련을 하고 오는 경우가 대부분이다.
그리고 이런 시험을 일반에 공개하는 이유는 과거부터 해온 전통의 일종이었다.
지금이야 꽤 많은 오락거리가 있었지만 아카데미가 처음 세워졌던 백여 년 전만 해도 서민들이 즐길만한 오락거리는 많지 않았다.
때문에 아카데미의 시험은 나름의 볼거리였다.
특히 4일차 이후의 시험은 아주인기가 좋았다. 대부분 결투나 마상전투 등의 시험이 진행됐기 때문이다.
정식기사들에 비해 수준은 떨어진다고는 하나 기사 지망생들의 경쟁은 그 나름의 볼거리를 재공하기에 충분했다.
오늘같이 별것 없는 기초 체력시험에도 꽤 많은 인파가 아카데미 안에 모여들어 구경하고 있었다.
“아 사람들은 왜 이렇게 많이 모인 거냐? 옷도 거지같이 입고 있는데. 아 신경 쓰여. 그래도 귀족 놈들은 우리가 입은 것보단 좀 낫네. 차별이 없기는 대우해줄건 다해주면서....”
길리은 그렉의 투덜거림에 시선을 돌렸다.
다른 코스에 모여 있는 100여명의 지원 생들. 그들이 입고 있는 옷은 그나마 조금 나았지만 뭐 크게 차이는 없었다.
어떻게 보면 귀족인 그들이 자존심을 버리고 저런 옷을 준다고 입고 있는 것만 해도 칭찬해줄 일이긴 했다. 물론 그들의 표정도 썩 좋진 않았지만 말이다.
“여자들 옷은 완전 고급이네. 우리들 옷은 이게 뭐냐 정말? 차별도 이런 차별이 없어요. 이런 남녀불평등에 대해서 넌 어떻게 생각 하냐?”
한쪽에 다른 코스를 진행하고 있는 여자들이 20여명 보였다.
기사는 남자들의 전유물로 여겨졌다.
과거에도 그랬고 지금도 그건 마찬가지였다. 하지만 역사에 여기사가 아주 없었던 것은 아니었고, 에스왕국의 건국 사에 이름을 올린 유명한 여기사도 있었다.
카렌 폰 에머슨이란 이름의 그녀는 독립전쟁이 발발하기 전만해도 별 주목을 받지 못하던 귀족가의 영애일 뿐이었다. 독립전쟁 당시 아들이 없고 노쇠한 아버지를 대신해 기사들을 이끌고 참전했다.
같은 진영에서도 상대진영에서도 그녀를 무시하는 이들은 많았지만, 그것을 비웃기라도 하듯 그녀는 수많은 전투에서 승리를 거머쥐었다.
뭇 남성들보다 뛰어난 지략과 무용으로 수많은 공을 세우고, 에스왕국의 독립을 이루었을 때는 왕국 최초의 여기사이며, 여 백작으로 역사에 이름을 남겼다.
그녀이후로도 여기사들은 종종 있었지만 이렇다 할 큰 활약은 없었다. 하지만 다시 여기사의 가능성을 세상에 알린 이가 있으니 바로 미네르바 폰 발렌슈타인이었다.
여성 최초로 3년 전에 넘버즈에 이름을 올린 여기사였다.
하지만 아직도 세상은 그녀의 실력을 낮게 보고 있었다. 발렌슈타인 백작가의 후광을 입고, 최근 늘어나는 추세인 여기사들에게 형식적으로 한자리 내준 것이 아니냐는 말들도 많았다.
그리고 현재의 넘버즈들은 예전만 못하다는 평가도 많았다. 전체적인 연령도 낮아졌고 여성까지 끼어있어 이제는 넘버즈도 예전 같지는 않다는 평이었다.
아무튼 최근에는 다시 여기사들이 늘어나는 추세였지만 역시 아직은 남자들의 세계가 맞았다.
2천여 명의 지원자중 고작 20여명에 불과한 숫자만 봐도 알 수 있었다.
여자는 꼭 치마를 입어야 하고 대부분의 귀족가의 여성들이 사교계에 진출해서 좋은 집안과 짝을 맺는 것을 목표로 하는 세상이다.
거기에 여성인지라 분명 남성들에게 힘에도 밀리고 여러 가지로 제약도 많았으니까.
그럼에도 대를 이을 아들이 없는 집안에서 기대를 걸고 검을 가르치는 경우가 종종 있었고, 그 외에 다른 개인적인 이유로 여자의 몸에도 불구하고 기사가 되려는 이들도 있었다.
그래서 여기사가 되려는 이들이 소수라도 꾸준히 매년 아카데미의 문을 두드렸다.
“와 정말 여기사치고 미인 없다더니 그 말이 딱 맞네. 저게 어딜 봐서 여자냐. 여자동물이지. 안 그러냐?”
하는 그렉의 말은 역시나 무시했다.
“1111번에서 1120번 앞으로.”
그 말에 길리안은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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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작가의말
제사라서 하루 거를까하다가 올립니다.
조카들 크리로 오탈자 확인도 대충 했지만...
저 시대에 벤치프레스가? 그냥 재미로 봐주시길.. 쿨럭.
즐거운 주말되시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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