넘버즈. 4장(1)
![DUMMY](http://cdn1.munpia.com/blank.png)
마차를 타고 도착한 자작부인의 저택은 엄청나게 컸다.
드넓은 정원과 길 양옆으로 서있는 커다란 나무들, 입구에서부터 저택까지의 거리도 꽤 됐다.
중앙 광장에 있던 커다란 분수만큼은 아니었지만 저택 바로 앞에 솟아오르는 분수도 상당히 인상적이었다.
이런 큰 저택에 들어와 보는 것은 처음이었다.
“잡아주지 않겠어요?”
마차에 내려 저택을 보고 감탄하던 길리안은 뒤에서 들리는 이베트의 목소리에 돌아섰다.
‘그냥 내리셔도 되겠는데...’
하는 것은 생각이고 마차에서 내리는 부인의 손을 잡아주었다.
그녀가 마차에서 내리자 어느새 다가온 기사가 고개를 숙였다.
“다녀오셨습니까.”
“네. 이쪽은 한번 보셨죠?”
그녀의 말에 카스트로가 고개를 끄덕였다.
“다시 뵙게 되서 반갑습니다. 카스트로님. 길리안 후버입니다.”
“잠시 저택구경을 시켜주시겠어요? 옷을 갈아입고 나오겠어요. 아. 손님으로 온 거니 잘 대해주세요.”
그렇게 말한 이베트 자작부인이 저택 안으로 들어가자 카스트로와 길리안 둘만이 남았다.
한동안 무심한 눈으로 길리안을 쳐다보던 카스트로가 돌아섰다.
“따라오도록.”
길리안은 그의 뒤를 따랐다.
난생처음 들어와 본 커다란 저택에 두리번거렸다.
구경을 시켜주려면 설명도 좀 해주고 하면 좋은데 궁금한 게 있고 신기한 게 보여도, 앞만 보고 걷는 카스트로에게 뭐라 말을 붙이기가 힘들어 따라서 걷기만 했다.
‘여기에 비하면 영주님 저택은 그냥 집이구나.’
영지의 가장 큰 저택을 그냥 조금 큰집쯤으로 보이게 하는 규모와 화려함이었다.
그렇게 한동안 말없이 걷기만 하던 카스트로가 멈춰 섰다.
그가 멈춰서 벽에 있는 그림을 보기에 길리안도 그 그림을 보았다.
“검은 언제부터 배웠지?”
“6살부터입니다.”
“괜찮군.”
뭐가 괜찮다는 건지 몰라도 그냥 흘려듣고 넘어갔다.
“그림을 볼 줄 아나?”
그 물음에 길리안은 그림을 뚫어져라 쳐다봤다.
그러다 쑥스럽다는 듯 머리를 긁적였다.
“보이긴 잘 보입니다만... 따로 보는 법이 있는 겁니까?”
“눈으로 보면 된다.”
너무도 당연한 대답에 길리안은 다시 그림으로 시선을 돌렸다.
“뭘 그린 건 줄은 아나?”
“바다... 인겁니까?”
“본적이 있나보군.”
“예...”
“의외로군. 영지를 벗어난 것이 처음이라 들었다.”
“예 어쩌다보니 운 좋게... 헌데 그건 어떻게 아셨습니까?”
“바다를 보지 못한 자는 이 그림을 봐도 바다인줄 모른다.”
질문은 잘근 씹어버리고 자기할 말만하는 카스트로였다.
“그럴 수도 있겠군요.”
충분히 그럴 수 있었다.
에스토 왕국에는 바다와 인접한 영토가 없었다.
내륙에 위치한대다 주변에 둘러싸고 있는 왕국들 때문에 영토의 확장도 쉽지가 않았다. 때문에 바다를 보지 못한 이들이 거의 대부분이다.
보통 말로 듣거나 책을 통해 알게 되고, 바다라는 게 뭔지 모르고 사는 사람들도 부지기수다.
“그림을 본 소감은?”
계속되는 일방적인 말과 질문이 별로 마음에 들진 않았지만 내색하지 않고 입을 열었다.
“음... 제가 본 바다와는 다릅니다. 사실적인 것 같지는 않습니다.”
“그건 보이는 것이고, 그림을 보고 네게 느껴지는 것을 물었다.”
잠시 더 그림을 보던 길리안이 고개를 돌렸다.
“죄송합니다만 꼭 뭔가를 느껴야하는 겁니까?”
“그렇지는 않다. 아무것도 느낄 수 없다면 어쩔 수 없는 일.”
그러고 잠시 말이 없던 그가 다시 입을 열었다.
“사람은 아는 만큼 볼 수 있고 아는 만큼 생각할 수 있다. 그리고 그만큼 느낄 수 있다고 생각한다.”
그 말에 길리안은 고개를 끄덕였다.
“이 그림의 가격은 네가 상상하기 힘들만큼 엄청나다. 모두가 탐내는 그림이지.”
그 말에 다시 그림을 보았지만 그에게는 그저 바다가 그려진 풍경에 불과했다.
“이 그림을 본 귀족들은 저마다 자기의 느낌을 말하고 환상적이라고 칭송한다. 이 그림에 얽힌 이야기, 배경, 화가에 관한 이야기 등등. 그림 한 점에 얽힌 이야기로 밤을 새울 수도 있을 거다.”
“음...”
“언젠간 너도 이 그림 앞에서 사람들과 이야기를 주고받아야 할 날이 올지도 모른다. 그때도 지금처럼 말한다면 아무도 널 쳐다보지 않을 것이다. 솔직한 것은 좋지만 무지한 것은 나쁜 거다.”
카스트로에 말에 길리안은 머리를 긁적였다.
“좋지 못한 습관이군. 고치도록.”
“예?”
고개를 돌리지도 않고 말하는 카스트로를 보며 길리안은 손을 내렸다.
“아... 예.”
“기사는 어떤 순간에도 당당함을 잃지 말아야한다. 그것이 죽는 순간이라도 말이다.”
“예.”
“많이 배워라. 적어도 검만 휘두를 줄 아는 바보는 되지 말도록.”
그의 말에 길리안이 고개를 숙였다.
“좋은 말씀 감사드립니다. 카스트로 경.”
카스트로는 대답을 하지 않고 돌아서 걸음을 옮겼다.
길리안은 다시 한 번 그림을 쳐다보고 그의 뒤를 따랐다.
“구경은 잘했나요?”
“예. 좋은 경험이 됐습니다.”
그 말에 미소를 짓던 이베트가 테이블 위에 있던 종을 흔들었다.
그러자 시종이 차를 내왔다.
차가 따라지고 그걸 들어 향을 맡는 이베트를 길리안은 멍하니 쳐다보고 있었다.
“그렇게 빤히 쳐다보는 것은 예의에 어긋난답니다.”
“죄... 죄송합니다.”
“나에게 묻고 싶은 말은 조금 참아주겠어요? 향이 아주 좋은 차랍니다.”
그녀의 말에 길리안은 입을 다물고 묵묵히 앉아있었다. 차를 몇 모금 홀짝이던 이베트가 다시 종을 흔들었다.
시종이 은쟁반을 들고 들어와 그녀의 옆에 섰다.
쟁반위에 올려 진 하얀 손수건.
이베트가 손수건을 들어 길리안에게 건넸다.
“그날은 정말 고마웠어요.”
“아닙니다.”
손수건을 받아들고 이상함에 살짝 냄새를 맡았다.
아까부터 어머니가 쓰시던 향수냄새가 나서 이상하다했는데 손수건에서도 그 향기가 났다.
틀림없었다.
개 코라고 할 정도로 후각이 예민하지는 않지만, 이 향기는 언제 어느 곳에서라도 가려낼 수 있었다.
“어머니의 취향이 나와 비슷했나 봐요. 물론 싫증을 빨리 내는 편이라 오래 쓰진 않았지만요.”
그녀의 말이 끝나자 옆에 있던 시종이 탁자위에 향수 한 병을 올려놨다.
어머니가 쓰시던 것과 똑같은 모양의 병에 담긴 향수.
“옛 생각이 나서 조금 뿌려봤어요. 기분이 상했다면 사과할게요.”
어쩐지 손수건을 받기 전에도 어머니의 향수냄새가 계속 난다했었다.
“아... 아닙니다.”
지금 그에겐 그게 중요한 것이 아니었다.
길리안의 시선은 향수병에 고정돼있었다.
“이 목걸이를 기억하나요?”
그 말에 길리안이 시선을 옮겼다.
이베트의 목에서 빛나고 있는 목걸이.
“이건 내게 당신이 아끼는 손수건이나 향수와 같은 거랍니다.”
길리안은 고개를 끄떡였다.
사람들이 인정하는 가치를 넘어 개인에게 무엇보다 소중한 것이 있다.
길리안에게 손수건과 향수는 돌아가신 어머니를 느낄 수 있는 유일한 수단이었고 가장 아끼는 물건이었다.
충분히 공감할 수 있었다.
“그 향수는 가져가세요. 다행히 향이 약해지진 않았네요.”
“저.. 정말이십니까?”
미소를 지으며 고개를 끄덕이는 이베트를 보고 고개를 숙였다.
“가... 감사합니다. 정말 감사합니다.”
길리안은 일어서서 연신 고개를 숙였다.
정말 고마웠다.
말로 표현할 수 없을 만큼 고마웠다.
오는 동안 향수가게는 이 잡듯이 뒤져도 못 구하고, 수도에서도 구하기 힘들다는 말을 들어 엄청 실망하고 있었는데 하늘에서 한줄기 구원의 빛이 내려온 것 같았다.
“내게 소중한 것을 찾아준 보답을 할 수 있어서 기쁘군요. 이제 그만해요. 너무 그러면 민망하니까요.”
“네... 알겠습니다. 다시 한 번 감사드립니다.”
그런 길리안을 보던 이베트가 온화한 미소를 띠고 말했다.
추천과 댓글은 글쟁이에게 큰 힘이 됩니다.^^
- 작가의말
그렇지 않아도 홍보 글에 포탈을 열어 주십사 요청하려했는데...
사애(捨愛)님 감사합니다.
Comment ' 2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