넘버즈. 2장(1)
“그래, 어떻던가?”
라첼의 물음에 길리안은 씨익 웃었다.
“보는 것만으로도 가슴이 뛰었습니다. 평생 잊지 못할 기억이 될 것 같습니다.”
“아마 수도에 있는 동안에는 종종 볼 기회가 있을 거야. 그보다 자네 생각보다 물건이구먼.”
“예? 무슨 말씀이신지···.”
“저것들 말일세. 대부분 자백도 받았고, 자네가 증거품들도 잘 챙겨 와서 처리하는 데 문제가 없겠어.”
“그렇다면 다행입니다.”
길리안은 다시 동쪽 성문으로 돌아와 검문소 안쪽으로 들어와 있었다.
검문소라고는 하지만 말만 그렇지 성벽 안에 있는 실내 통로 같은 공간이었다.
성문 경비병들이 대기하거나 휴식을 취할 수 있는 곳과 임시로 죄수들을 수용해 놓을 수 있는 철창도 있었다.
길리안이 잡아 온 현상범들은 재갈을 물려 철창 안에 있었고, 라첼의 말을 들어보니 확인이 끝난 상태인 듯싶었다.
“이 녀석들 말고도 더 있었다던데 다 데려오지 그랬나.”
그 말에 길리안은 오면서 있었던 일을 설명했다.
지나오는 영지에서 빠르게 확인이 가능했던 현상범들이나, 한패였던 조무래기들은 모두 넘겼다. 여기까지 끌고 온 녀석들도 솔직히 말하면 데리고 오고 싶어서 그런 것이 아니었다.
확인하는 데 시간이 오래 걸리거나 현상금 지급에 난감해할 때도 있어서 어쩔 수 없이 수도까지 끌고 온 놈들이었다.
“그럼 제 일은 다 끝난 겁니까?”
길리안의 물음에 라첼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럼 전 이만 가보겠습니다. 묵을 곳도 찾아야 하니까요.”
“그건 내가 괜찮은 곳을 소개해주지. 그보다 이곳에 있으면 좋은 일이 생길 거야.”
“감사합니다. 그런데 좋은 일이라니요?”
“자네 넘버즈가 되고 싶다고 했지?”
“예.”
“그게 얼마나 힘든 길인 줄은 알고 있나?”
“네. 알고 있습니다.”
라첼은 대답을 하는 길리안을 보면서 고개를 저었다.
“아니 모르고 있을 걸세. 그저 막연히 힘들다고 생각하는 것과 현실의 차이는 크네. 앞으로 넘어야 할 벽과 난관은 훨씬 높고 험할 거라는 거지. 이제 발걸음을 내디딘 어린 자네에게 할 말은 아니네만···”
말끝을 흐리는 라첼을 보며 길리안이 말했다.
“아닙니다. 제가 부족하다는 건 누구보다 제가 제일 잘 알고 있습니다. 좋은 말씀 계속 들려주십시오.”
길리안의 말에 라첼이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좋은 마음가짐이군. 넘버즈가 된 이들을 한번 보게. 실력은 당연하고 신분, 가문, 재력, 권력까지 뭐하나 빠지는 것이 없어. 우리 같은 이들은 감히 상상도 할 수 없을 정도지. 자네하고 그들은 출발선 자체가 너무 달라.”
길리안도 인정한다는 듯이 고개를 끄덕였다.
넘버즈의 대부분은 고위귀족 가문 출신이다. 어릴 때부터 받은 교육의 수준이나 지원 자체가 자신과 비교하면 하늘과 땅 차이다.
“매년 기사아카데미에서 수많은 졸업생이 나온다네. 하지만 왕실에서 기사서임을 받을 수 있는 이들은 아주 소수일 뿐이지. 그게 다가 아니야. 이미 기사인 이들과 앞으로 기사가 되는 이들까지 모두가 자네의 경쟁자라고 봐야겠지.”
길리안도 생각은 하고 있었다.
아카데미가 활성화되고 현재에 이르러선 기사의 수가 엄청나게 많아진 것이 사실이다. 그 수많은 기사의 정점이 바로 넘버즈다.
이미 그 자리에 올라서 있는 이들, 넘버즈를 꿈꾸는 이들이 모두 경쟁자였다. 같은 꿈을 품고 같은 길을 간다고 해서 출발선이 같은 것은 절대 아니다.
“그 많은 기사가 딱 열 자리밖에 안 되는 넘버즈에 들고 싶어 하지만 대부분은 엄두도 못 내는 자리지. 중요한 건 넘버즈가 되는 것보다 그에 도전할 수 있는 자격을 갖추는 것. 그것 자체도 엄청나게 힘든 일이라는 걸세."
“도전할 수 있는 자격··· 음···.”
“허허 그런 것도 몰랐는가?”
라첼의 물음에 길리안은 멋쩍은 듯 머리를 긁적였다.
“허허, 이거 큰일이군. 생각해보게 아무나 그 자리에 도전할 수 있다면 넘버즈 열 명이 아무리 강하다고 한들 버텨낼 재간이 있겠나?”
그 말에 고개를 끄덕였다.
하긴 개나 소나 도전할 수 있는 자리라면 넘버즈들은 결투를 하느라 아무것도 못 할 것이다.
“쯧쯧. 이거 생각보다 모르는 것이 너무 많군.”
혀를 차며 말하는 라첼을 보며 길리안은 쓰게 웃었다.
솔직히 말하면 아는 것이 부족하기는 했다.
시골영지이다 보니 접할 수 있는 정보엔 한계가 있었고, 영지의 기사들에게 들은 얘기들도 오래된 이야기들이었으니까.
그리고 그들도 넘버즈는 감히 넘보기 힘든 자리다 보니 어떤 과정을 거쳐 넘버즈에 오르는지 자세히 아는 이들은 없다시피 했다.
스승인 엘런 경은 좀 더 많은 정보를 알고 있는 듯했지만, 그런 얘기를 해주기보다는 실력을 키우라고 말해줬었다.
“뭐 실망할 것은 없다네. 자네는 젊어. 아니 아직 어리다고 할 수 있지. 앞으로 주어진 시간은 많으니까. 다만 중도에 포기하고 날개를 펴기도 전에 꺾이는 것이 걱정돼서 하는 말이네.”
“감사합니다. 하지만 적어도 저 스스로 포기하거나 무너지는 일은 없을 겁니다.”
자신감에 찬 목소리로 말하는 길리안을 보면서 라첼은 미소를 지었다.
“그럼 좀 더 현실적인 얘기를 해도 되겠군.”
“예. 많이 해주십시오.”
“내가 티롤 님께 들은 얘기도 있고, 잡혀 온 놈들에게 들은 얘기를 종합해보면 자네는 나이에 비해 확실히 실력이 뛰어난 것 같긴 해. 지금 당장 왕실에서 열리는 기사임관시험을 봐도 합격할 가능성이 있을지도 모르지. 하지만 말했듯이 실력이 다는 아니라네. 그건 필수이긴 하지만 전부가 될 수 없어. 그러니 자네는 아카데미에서 많은 것을 배워야 할 걸세.”
“예. 그럴 생각입니다.”
“배워서 익힐 수 있는 것은 스스로 노력으로 해결하면 된다네. 하지만 그 외에 필요한 것은 인맥, 그리고 신분일세. 자네에게 가장 부족한 것이지.”
그 말에 길리안은 씁쓸하게 웃었다.
“그건 어쩔 수 없는 거라네. 신분이야 뭐··· 기사가 되고 운이 좋아 전쟁이라도 나서 공을 세우면 귀족이 될 수도 있고··· 아니면 귀족 가와 맺어지면 해결될 수도 있지. 물론 쉬운 일이 아니야. 그걸 해결해줄 수 있는 게 바로 인맥이네. 그러니 지금부터라도 기회를 잡고 노력을 해서 인맥을 만들어야 해.”
라첼의 말에 길리안은 고개를 끄덕였다.
“하지만 인맥이란 것은 한순간에 생기는 것이 아니야. 귀족들은 우리와 같은 세상에 살고 있지만 그러면서도 다른 세상에 살고 있지. 내 말뜻은 알겠지?”
“예.”
“귀족들에게는 귀족들만의 세상이 있어. 그 세상에 평민이, 평민 출신의 기사가 끼어든다는 것은 무척이나 힘든 일이지. 그 빌어먹을 신분과 혈통, 정통성이라는 것들 말일세. 아마 자네가 엄청난 성공을 거둔다고 해도 평생 따라다닐 꼬리표 같은 거라네.”
길리안은 쓰게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평민이 오를 수 있는 신분에는 한계가 있다. 실력을 인정받으면 기사는 될 수 있지만, 그 이상 올라서려면 노력만으로는 되지 않는다는 걸 알고는 있었다.
하지만 넘버즈가 되기 위해서는 귀족의 작위가 아닌 기사의 작위가 필요하다. 평민 출신으로 그 자리에 올랐던 이들도 있었기에 자신도 가능하리라 생각했었고 꿈을 품었다.
하지만 그건 자신이 너무 쉽게 생각한 것 같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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