넘버즈. 12장(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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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아...”
길리안은 창밖을 바라보며 한숨을 내쉬었다.
사고가 발생하고 4일 째.
그런데 아직까지 병실을 벗어나지 못하고 있었다.
기사학부의 훈련에서는 모두 제외됐고, 그나마 교양과목의 수업은 들을 수 있었지만 수업을 마치면 또다시 병실 행.
아카데미 입장에서 신경을 써주고 관리해주는 건 고맙긴 한데 이건 너무 지나치다 싶을 정도였다.
큰 사고였던 것도 맞고 잘못됐다면 목숨을 잃을 뻔 했던 것도 맞다. 하지만 결과적으로 큰 부상은 면했고 치료도 잘 받아서 아무런 이상도 못 느끼는데, 당사자가 아무런 이상이 없고 괜찮다고 해도 들어먹질 않았다.
병실이 싫다는 게 아니라 몸으로 하는 수련자체를 못하게 하니 그게 답답하다는 것이다.
자신이 무슨 귀족가의 자제도 아니고 평민에 아카데미생도일 뿐인데, 정식 기사가 호위하듯 따라다니며 일일이 제재를 하니 이것도 좀 웃긴 일이었다.
병실을 나가 돌아다니는 것 정도는 뭐라 하지 않았다.
하지만 산책정도지 뛰려고 하거나 수련이라도 해볼까하면 바로 제재가 들어왔다. 병실 안에서도 뭔가 좀 해보려고 쿵쾅거리면 문을 벌컥 열고 들어오니 뭐 그냥 죽은 듯이 지내는 수밖에.
그나마 실내에서 조용히 할 수 있는 수련인 하타가 있고, 간단한 체력단련이야 할 수 있지만 그것도 한두 번이지 하루 종일 그것만 하고 있을 수는 없는 노릇. 덕분에 책은 좀 많이 보게 됐지만.
‘스승님도 이 정도는 아니었는데...’
수련이 너무 과하다 싶거나 몸 상태가 좋지 않은데 뭔가 하려고하면 당연히 말렸지만 정말 이 정도는 아니었다.
솔직히 이보다 더한 위험도 겪어봤고 죽을 고비도 여러 번 넘겨봤다.
2년 전엔 라이라프 산맥 너머 툰족의 영토로 넘어갔다가 오우거한테 걸려서 정말 죽을 뻔했다. 그때에 비하면 이 정도는 다친 것도 아니었다.
그런 거 말고도 말 타다 떨어진 적도 많고, 마상전투를 연마하다 다친 적도 셀 수 없이 많았다.
누군가 자신을 노렸을 수도 있단 말을 들어 좀 찝찝한 것만 빼면 그리 신경 쓸 일이 아니라는 것이다.
그런 생각을 하다 피식 웃었다.
하긴 이들이 그런걸 알 리가 없었다.
난 이런 경험을 했고 이런 위험한 일도 겪어봤으니 그냥 놔두라고 말하기도 웃긴 것이니까.
영지에선 생각도 못할 정도의 극진한 대우와 과하다 싶을 정도의 치료.
솔직히 수련만 하게 해주면 다른 것엔 불만이 없었다.
불만이 쌓이니 답답하고 짜증도 나고, 수련을 못하니 뭔가 허전하기도 하고 이상하게 초조하기도 했다.
‘그러고 보니...’
사고 당일을 빼고 3일에 불과한 시간이지만, 기사가 되고 싶다는 생각을 하고 수련을 시작하고부터 이렇게 오랫동안 쉬어본 적이 없었다.
물론 몸을 움직이기도 힘들 정도의 큰 부상을 당했을 때는 쉬었지만, 그렇지 않은 상태에서 수련을 쉬어본적은 없었다.
길리안은 손을 들어 주먹을 쥐었다 폈다. 몇 번 그러다가 피식 웃었다.
‘나 지금 불안하구나.’
주먹을 쥐었다 펴는 행동을 계속하고 있었는데 스스로 인지하지 못하고 있다가 방금 알게 된 거였다.
처음엔 그냥 하고 싶은걸 못하게 해서 그런 거라고 생각했는데 가만 생각해보니 그게 불안해서 그런 것 같았다.
스스로가 생각해도 웃겼다.
불안감이라는 거 솔직히 익숙하지가 않아서기도 했지만 수련을 며칠 쉰 것뿐인데 이런다는 게 조금 웃겼다.
‘무엇 때문에 불안한 건가?’
스스로에게 물어보면 역시나 수련을 못해서다.
내일 당장 강적과 싸울 일이 있는 것도 아니고, 전쟁이 난 것도 아니다.
누군가 자신을 넘어서겠다고 이를 갈고 따라오는 것도 아니고, 오히려 자신은 앞서가 있는 이들을 쫓아가는 입장.
이미 정점에 있는 이들이 자신의 목표였으니까.
그들을 넘어서려면 노력은 당연히 필요한 것.
‘이런 것도 중독인건가?’
그런 건 항상 술을 달고 사는 사람들에게나 적용되는 말인 줄 알았다.
스승이 조금은 여유를 가지라는 말을 했지만, 그때마다 잘 조절해서 하고 있다고 대답했었다.
한번은 스승이 3일만 손에서 검을 놓아보면 알 것이라고 해서 그런 적도 있었다. 대신 다른 무기를 들고 수련을 했고, 그걸 본 스승은 허허 웃으며 고개를 저었다.
당시엔 그저 무리해서 수련하지 말라는 정도로 받아들였었다. 그리고 밥 먹고 수련만 하는 것은 아니었으니까 휴식은 충분히 취하고 있다고 생각했었다.
그런데 지금 보니 휴식을 취하고 말고의 문제가 아니라 마음의 문제인 것 같았다.
‘그런데 그게 꼭 필요한 건가?’
하는 생각이 들었다.
수련을 하면 그만큼 강해지고 마음도 편하다.
늘 하는 것이니 굳이 빼먹을 이유도 없고, 생활에 따라 수련의 시간과 양만 조절하면 된다.
그럼 되는 것이 아닐까?
“음... 마음의 여유라...”
길리안은 중얼거리며 고개를 저었다.
아직은 잘 모르겠다.
그게 꼭 필요한건지도 모르겠고, 수련에 관한 것만 빼면 다른 것은 충분히 여유를 가지고 있다고 생각했다.
‘이래서 수련을 해야 한다니까.’
괜히 이런저런 생각만 많아지고 불안하기도 했으니까.
병실에 검만 가지고 들어오게 해줬어도 몇 번 휘두르면 막힌 속이 뻥 뚫릴 것 같은데 그게 안 되니 그저 답답할 뿐.
‘내 다신 다치나봐라.’
다칠 때마다 이러면 못 견딜 것 같아서 아예 다치지 않는 것이 상책인 듯싶었다. 물론 그게 마음처럼 되진 않겠지만 주의를 기울이긴 해야 할 것 같았다.
책을 봐도 집중이 안 되니 간단한 체력단련과 하타수련이라도 해야 그나마 잠이 올 것 같았다.
자리를 잡고 막 자세를 취하려고 할 때 노크소리가 들렸다.
대답을 하자 들어오는 이를 보고 고개를 숙였다.
“이 시간에 어쩐 일이십니까?”
“지나는 길에 들렀단다. 몸은 괜찮은 거니?”
이베트의 물음에 길리안이 웃으며 말했다.
“다 나아서 이제 멀쩡합니다. 그러니...”
“앉아서 잠시 얘기 좀 나눌까?”
이베트의 말에 의자를 빼주며 자리를 권했다.
“차는 없어도 되니 앉아보렴.”
그 말에 맞은편에 길리안이 앉았다.
그런데 막상 앉으니 이베트는 아무 말도 하질 않았다.
지나다 들렀다고는 하는데 사고가 나고 나서 하루도 빠짐없이 병실을 찾아왔다.
첫날 치료받을 때 울면서 뛰어 들어온 그녀를 보고 솔직히 길리안이 더 놀랐었다. 거기에 큰 부상도 아닌데 첫날에는 밤새 자리를 지켰던 것도 알고 있었다.
후견인을 자처하고 이런저런 도움을 많이 받아 감사하기는 한데 내색은 안했지만 솔직히 부담스럽기는 했다.
그녀가 자처한 일이긴 했지만 그 때문에 사람들의 입에 오르내리는 것도 죄송스럽고, 자신을 어떤 식으로 생각하고 대하는지도 알기에 부담은 더 컸다.
그리고 그녀를 대할 때마다 자꾸 어머니가 떠올랐다. 이제는 기억도 많이 희미해져 얼굴도 잘 떠오르지 않는데 자꾸 어머니의 얼굴에 그녀의 얼굴이 겹쳐졌다.
그럴 때마다 생각을 털어버리려 노력할 뿐.
그렇다고 뭐라 말을 꺼내기도 민감한 부분이 있어 그저 이쪽에서 조금 거리를 두는 게 할 수 있는 전부였다.
그냥 쳐다만 보고 있는 그녀를 보고 길리안이 멋쩍게 웃으며 입을 열었다.
“무슨 하실 말씀이라도...”
대답대신 이베트가 손을 내밀었다.
길리안은 머뭇거리다 그녀의 손을 잡았다.
이베트가 다른 손을 길리안의 손등에 올렸다. 양손으로 길리안의 손을 잡은 그녀가 그때서야 입을 열었다.
“불안해 보이는구나.”
“제.. 제가요? 아하하하 아닙니다. 그냥 조금 답답할 뿐입니다.”
보통은 이러면 웃으면서 그렇구나 하며 미소를 보여주는데 오늘은 그렇지가 않았다.
“솔직히 말해보렴.”
담담한 표정으로 말하는 이베트를 보며 길리안이 낮은 한숨을 쉬었다.
“후... 솔직히 말씀드리면 그런 것 같습니다.”
그 말에 이베트가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
“카스트로 경의 말이 맞는 것 같구나.”
“무슨...”
“너는 하루만 수련을 못해도 무척 불안해 할 거라고 했단다. 지금이라도 수련을 할 수 있으면 하고 싶겠지? 솔직히 말해보렴.”
눈을 똑바로 쳐다보며 묻는 이베트를 보며 길리안이 하는 수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예...”
“카스트로 경이 말하길 너 정도 수준이라면 그런 기본적인 수련은 이제는 별 도움이 되지 않을 거라고 하더구나. 그건 네 스스로가 더 잘 알고 있을 거라고 하던데 왜 그렇게 수련에 목을 매는 거니?”
“음...”
지금까지 수련에 목을 맨다는 생각을 해본적은 없었다.
스승도 수련을 너무 많이 한다고 줄이라고는 했지만 스스로의 판단으로 무리가 가지 않는 선에서 하고 있었다.
그리고 솔직히 수도에 올라오는 동안이나 와서는 제대로 수련을 한 것도 아니었다.
“기사들의 갑옷무게 만큼의 쇠를 몸에 지니고 다닌다는 게 사실이니?”
“그건... 예. 하지만 아카데미에 입학하고부터는 수련할 때만 착용합니다.”
“다행이구나. 네가 특별한 아이라는 것은 알고 있단다. 하지만 지금같이 무리한 수련을 계속하면 몸이 버티지 못 할 거라고 하더구나.”
“누가 그런 말을...”
“널 가르친 엘런 경도 그랬다던데 아니니?”
“음... 가끔 그런 말씀을 하시긴 했지만... 제 스스로 잘 조절하고 있다고 생각했습니다.”
“길리안 넌 아직 다 자란 것이 아니란다. 네가 살아온 날보다 훨씬 많은 시간이 남아있으니 너무 서두르지는 마렴.”
“전... 음...”
“너는 무리하지 않고 있다고 말하지만 엘런 경과 카스트로 경은 그렇게 생각하지 않는단다.”
“그런데 어떻게 엘런 경의 얘기를...”
“이번에 내 뜻을 전하러 카스트로 경이 직접 네 고향에 다녀왔단다. 먼 곳이지만 말을 달리면 며칠이면 다녀올 수 있는 거리니까.”
“그러셨군요.”
“그리고 이번에 널 치료한 사제들과 의사들의 말을 들으니 제대로 치료했어야 하는데 그렇지 못했던 상처들도 많은 것 같다고 하더구나. 겉이 아물었다고 해서 속까지 괜찮은 것은 아니란다. 이번치료로 제대로 회복했다면 좋겠지만 그렇지 않을까봐 걱정이구나.”
“음...”
몸에 큰 무리가 있거나 딱히 통증이 있는 것은 아니어서 괜찮다고 생각했었다.
“수련을 하지 말라는 말이 아니란다. 지금 하는 것을 조금 줄이고 다른 방법을 찾아보자꾸나.”
“다른 방법이라면...”
“아카데미의 교육은 내가 관여할 일은 아니니 그대로 진행되겠지만, 그 외에 하는 수련에 대해서는 카스트로 경과 상의해보렴. 엘런 경과 많은 얘기를 나누고 온 것 같더구나. 훌륭한 기사니 좋은 방법을 제시해 줄 거란다.”
“네. 감사합니다.”
고개를 숙여 보인 길리안이 이베트를 보고 망설이다가 입을 열었다.
“한 가지 여쭤 봐도 되겠습니까?”
“말해보렴.”
“제게 왜 이리 잘해주시는 지 궁금합니다. 보통의 후견인들도 부인처럼 챙겨주시지는 않는다고 들었습니다. 혹시 절...”
말끝을 흐리는 길리안을 보고 이베트가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아들처럼 생각한단다.”
“음...”
이베트의 말에 딱히 할 말이 없었다.
그럴 것이라고 짐작하고 있던 것과 직접 듣는 것은 달랐으니까.
“하지만 착각하고 있지는 않단다.”
“네?”
“널 내 아들인 라미레스라 착각하고 있지는 않다는 말이지. 그러니 너무 부담 가지지는 마렴. 지금은 너의 꿈을 응원하는 후견인이고, 난 다른 후견인들처럼 이름만 등록하고 관심을 끌 생각은 없으니까. 그러니 조금 간섭하는 것은 이해해줬으면 하는구나.”
“하하 이해라니요.”
“후견인은 원래 부모와 같은 존재. 그러니 너무 부담 갖지 마렴.”
“네. 그런데 전 언제까지 여기 있어야 하는 건지요.”
그 말에 이베트가 웃으며 말했다.
“내일부터는 기사학부의 훈련에 참가하도록 얘기해 놓을 테니 한 가지만 약속해 주겠니?”
“말씀하십시오.”
“절대 무리하지 마렴. 알겠지?”
“네.”
“좋은 친구들을 많이 사귀고 수도에는 볼거리도 많으니 다른 것들도 둘러보며 여유를 가졌으면 좋겠구나. 강해지는 것은 모든 기사들의 목표겠지만 급하게 마음먹지 마렴. 시간은 충분하단다. 더 말하면 잔소리가 될 테니 이제 그만하마. 네 스스로 잘 알아서 하리라 믿는단다.”
“예. 앞으로는 걱정 끼치지 않도록 노력하겠습니다.”
그렇게 말하는 길리안을 보며 이베트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고도 한동안 둘의 얘기는 계속 됐다.
“하아.. 하아.. 후우...”
미네르바는 가쁜 숨을 고르며 검을 검 집에 넣었다.
그리고 수건을 집어 땀을 닦으며 바닥에 털썩 주저앉았다.
숨을 고르던 그녀가 어이가 없다는 듯 피식 웃었다.
“훗. 미치겠군.”
자꾸 파티에서 있었던 일이 떠올라서였다.
그 어린 녀석의 품에 안겨 춤을 출 때 얼굴이 붉어졌던 걸 생각하면 지금도 어이가 없었다.
“뭐 미인이 어째? 하아...”
그런데 이 녀석 말은 떨린다고 해놓고 춤만 잘 췄다.
순진해서 놀려먹는 재미가 있는 녀석이었는데 이제는 그것도 안 먹힐 것 같았다.
“열 살 차이나 나는 꼬마한테... 아 어이없어.”
짜증난다는 듯이 투덜거리며 다시 일어나 검을 빼들었다.
“이런 아름다운 레이디께서 그렇게 인상을 쓰고 계시다니.”
들려오는 목소리에 미네르바의 인상이 더욱 찌푸려졌다.
“분명 들어오지 말라고 경고했을 텐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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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 연재분은 밤 12시 전에 올리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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