넘버즈. 14장(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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잠시 고민하다 그걸 검은 칸에 내려놓았다.
상대의 비숍을 노린 것이었다.
“흐음. 제법이야.”
그렇게 말하며 망설임 없이 비숍을 집어 움직이는 것을 보고 다음 수를 생각했다.
보통은 두수 정도 앞을 내다보면 체스를 잘 둔다는 소리를 듣는다고 한다. 자신은 그 정도는 아니고 다만 각 말의 연계에 집중하는 쪽이었다.
피해를 적게 보고 많이 잡으면 이기는 게임. 상대의 중요한 말을 병사로 잡으면 그보다 큰 이익이 없었다. 보통 작은 것으로 유인해서 잡아먹는 방법을 선호했다. 그렇게 하나씩 바꾸다 보면 이기지는 못해도 비길 수는 있었으니까.
그런데 조금 두면서 느낀 거지만 이길만한 상대가 아니었다. 밥 먹고 체스만 뒀는지 이쪽의 수를 훤히 꽤 뚫어보는 듯 했다. 유인에도 안 걸리고 맞바꾸기도 잘 안 되고 말을 옮길 때 망설이지도 않는다.
그렇게 이익만 챙겨가면서 제법이라는 말은 왜 자꾸 하는지.
거기에.
“상대의 수를 읽어야지. 쯧쯧 그걸 움직이면 쓰나.”
하고 옆에서 말하는 이가 제일 신경 쓰였다.
참견하고 싶어서 근질거리는 모양인데 그럴 거면 자기가 계속 두지 자리는 왜 비켜준 건지.
길리안은 내색하지 않고 체스에 집중했다.
열심히 노력했지만, 시간이 지나 덩그러니 홀로 남겨진 킹을 보고 있자니 좀 씁쓸했다. 뭔가 제대로 해보지도 못하고 허우적거리다가 병력을 다 잃고 혼자 남은 것이다.
길리안은 킹을 집어 움직였다.
“허허 이 정도면 패배를 인정해야 하지 않겠나?”
상대의 말에 담담한 표정으로 대답했다.
“패배는 인정합니다. 하지만 끝날 때까진 끝난 것이 아니라 배웠습니다.”
“꽤 좋은 말이군. 홀로 남아도 적진에 용감하게 돌격하겠어.”
“그래야 한다면 그럴 것입니다.”
“그래. 그게 말만 앞세우는 게 아니길 바라네. 체스를 두다 보면 그 사람을 조금 알 수 있지. 때론 말로 대화를 나누는 것보다 훨씬 많은 얘기를 나눌 수 있다네.”
“음··· 죄송합니다. 제 실력이 부족해서 체스로 하시고자 하는 말씀이 무엇인지 이해하기가 힘듭니다.”
“괜찮네. 오늘은 대화하고자 함이 아니었으니까.”
길리안은 그저 말없이 가만히 있었다.
그냥 체스를 두자고 해서 뒀을 뿐이다. 이겨보려고 애썼을 뿐이지 대화는 무슨.
그럴 실력도 안 되거니와 상대가 자신에 대해 뭘 어떻게 판단했는지는 몰라도, 잘못된 판단이나 안 했으면 다행이란 생각이 들었다.
누군지 밝혀주면 답답함은 조금 풀릴 것 같은데 그럴 생각은 없어 보였고, 총장대리인 엔젤도 아무 말도 없었다. 그녀의 행동이 조심스러운 걸 보면 그저 높은 사람들이라고 짐작만 할 뿐.
“나는 볼일이 끝났소만···”
체스를 뒀던 상대가 옆에서 참견하던 이를 보며 한 말이었다.
“오늘은 그냥 악수나 한번 하고 가야겠소.”
그렇게 말하며 일어나 손을 내밀었다.
길리안도 얼른 자리에서 일어나 자신을 소개하고 상대가 내민 손을 잡으려다 멈칫하고 그의 손을 내려다봤다.
그냥 악수나 하자고 내민 손인데 느낌이 달랐다.
사람의 손이 아니라 마치 한 자루의 날카로운 검을 보는 기분. 저 손을 잡으면 자신의 손이 베일 것 같은 느낌이 들었다.
‘기사인 건가?’
카스트로가 생각났다.
그가 검을 통해 보여준 것을 지금 눈앞의 상대는 손으로 그러고 있었으니까.
기사라곤 생각 못했고 솔직히 아무것도 느끼질 못했다. 그저 체격이 다부지다고만 생각했을 뿐이다.
놀라긴 했지만 오래 기다리게 하는 건 예의가 아닌 것 같아 그의 손을 잡았다.
역시나 손이 베이진 않았다.
“감각도 좋고, 손을 보니 한시도 검을 놓지 않았구먼. 눈빛이 조금 흔들리는 게 아쉽지만, 생각이 많을 나이긴 하지. 혹시 미래에 대한 계획은 있는가? 예를 들면 어떤 가문의 기사가 되고 싶다던가 하는 계획 말일세.”
“아카데미에서 부족한 부분을 채워 졸업 후에는 왕실기사단에 들어가고 싶습니다.”
“그거 듣던 중 반가운 말이구먼. 몇 년 지나면 날개를 펴고 날아오르겠어. 혹시 일찍 졸업시킬 생각은 없는가?”
마지막 물음은 엔젤을 보고 한 것이었다.
그녀는 대답 대신 그저 미소를 지어 보일 뿐.
“며칠 내로 다시 보게 될 걸세. 그때까지는 내가 누군지 궁금해도 참게나.”
그리고 엔젤을 보고 말했다.
“그럼 그때같이 보세.”
말을 마친 그가 돌아섰고 체스를 뒀던 상대도 일어나 걸음을 옮겼다.
그 둘이 나가고 길리안이 엔젤을 바라봤지만, 그녀는 어깨를 으쓱해 보일 뿐. 뭐가 어떻게 돌아가는 상황인지 몰라 그저 한숨만 내쉴 뿐이었다.
“무슨 일이라도 있는 거냐?”
윌리엄의 물음에 길리안은 아까의 상황을 말해줬다.
잠시 생각하던 윌리엄이 길리안의 어깨에 팔을 두르며 말했다.
“네게 나쁜 일은 아닐 것 같구나.”
“나쁜 일이 아니라니?”
“내 동생이라서 하는 말이 아니라 네가 뛰어난 것은 사실이니까. 관심을 가지고 살피러 오는 건 당연한 거다.”
그 말에 길리안이 어색하게 웃었다.
“하하. 그런가? 그런데 형 너무 이상한 거 알지?”
“뭐가 이상한데?”
“영지에서는 칭찬도 잘 안 해주더니 요 며칠 계속 그러니까 이상하잖아.”
“그건 일부러 그런 거였다. 밖에서 항상 칭찬만 들으니 네 녀석이 교만해질까 봐. 이건 아버지 말씀이고, 난 솔직히 네가 강해지길 바랐다. 나처럼 되지 않게 하려고··· 뭐 지금은 괜히 그랬다는 후회가 들지만.”
형의 말에 씁쓸하게 웃었다.
항상 그랬다.
다른 이들은 칭찬 일색인데 정작 집에서는 칭찬을 못 받아봤다. 형은 그나마 좀 나은 편이었지만 아버지에겐 어릴 때 빼곤 칭찬을 들어본 기억이 없었다.
어머니와의 약속도 있었지만, 아버지에게 인정받고 싶어 더 노력한 것도 있었다.
형이 기사가 됐을 때 좋아하셨던 아버지의 모습을 봤기에 나중에 자신이 기사가 되면 그때도 그러실 거라고 생각하면서.
하지만 서운하지 않았다고 하면 거짓말.
형의 말을 들으니 조금은 이해가 갔지만 그래도 서운하기는 했다.
“그런데 너 수도에 영지라도 만들고 싶었던 거냐?”
“아하하하. 그, 그게. 음···”
이미 집까지 걸린 마당에 다른 것도 알 것 같아서 그동안 있었던 일을 다 얘기했는데, 아카데미에서 수업을 받는 동안 형이 둘러본 것 같았다.
“혼내려고 꺼낸 말이 아니다. 쓸데없는 곳에 쓴 것보단 훨씬 낫지. 기사가 될 거라고 해서 돈을 멀리해야 할 이유는 없어. 과거 기사도가 없던 시절의 기사들은 탐욕의 상징이라고 할 정도였다고 하더라.”
그건 길리안도 알고 있었다.
“물론 옛날 얘기지만 지금도 그리 다르진 않아. 목적이 그것이 되면 추해 보이고 또 그렇게 될 수도 있지만, 내 동생이 그런 자들과 같다고 생각하진 않는다. 여유가 있어서 나쁠 건 없으니까. 그런데 크라운 베이커리는 작은놈 잡아다 일을 시키면 딱 좋겠더라. 그 녀석 생각해서 이름 지은 거지?”
“응.”
“장사도 제법 잘되는 것 같고 사람들도 제법 잘 뽑았어. 그중에 집사는.”
윌리엄이 말 대신 엄지를 치켜세웠다.
형이 계속 칭찬해주자 머쓱했다.
“잘 관리해봐라. 그리고 형한테 또 털어놓을 게 있으면 말해봐.”
그 말에 잠시 생각하다가 입을 열었다.
“작은 형을 찾아보고 있어. 정보를 파는 사람들한테서.”
윌리엄은 묵묵히 고개를 끄덕였다.
한동안 입을 다물고 있다가 말했다.
“내년까지 기다려보고 소식이 없으면 제대로 찾아 나설 생각이다. 온 나라를 다 뒤져서라도 형이 찾아올 테니까 넌 아카데미에 집중해. 그리고 어디 가서도 잘 버틸 놈이니까 너무 걱정하지 마라.”
“응.”
그리고 대화가 멈췄다.
작은형의 얘기가 나오면 항상 이랬다.
소식이 없으니 그저 막연히 잘 있을 거라 믿는 수밖에.
“그런데 네가 왕실기사단에 들어갈 생각이라니까 상대가 반가운 말이라고 했다고?”
“어? 응. 그랬어.”
“흐음. 그럼 왕실에서 나왔다고 볼 수도 있는데···”
동생의 실력을 누구보다 잘 알고 있었다.
지금 당장 일선에 나서도 제 몫은 충분히 하고 남을 것이고, 어지간한 기사들은 발아래 둘 실력도 갖췄다.
아카데미를 다녀봐서 알지만, 거길 나온다고 동생이 크게 성장할 거란 기대는 하지 않았다.
그럼에도 아카데미를 권한 것은 서두를 필요가 없기 때문이다. 아직 부족한 면도 보이고 아카데미에선 그 나름대로 배울 것이 존재한다.
그리고 갑자기 세상에 던져지는 것보단 아카데미라는 틀 안에서 조금씩 큰 세상에 익숙해지는 것도 좋을 거로 생각했다. 또 거기서 좋은 인연을 만나 어머니에 대한 상처도 조금이나마 치유되길 바라기도 했다.
동생은 아직 어리다.
완성되지 않은 날개를 펴고 무리하게 날 필요는 없었으니까. 날개가 꺾인 것은 자신 하나면 충분하다. 동생은 충분히 자신을 갈고닦아 튼튼한 날개로 더 높이 더 멀리 날아오르길 바랐다.
총장대리도 만나봤다.
동생의 재능을 높이 평가하고 큰 기대를 걸고 있는 것도 알 수 있었다. 아카데미에서 신경 써서 관리해 줄 거란 생각도 들었다.
거기까지는 좋았다.
금방 동생에게 나쁜 일은 아닐 것 같다고 말해줬는데 다시 생각해보니 꼭 좋은 일도 아닐 것 같았다.
왕실에서 높은 이들이 보고 간 것 같았으니까.
왕실 기사를 가을에 있는 임관시험을 통해서만 뽑는 것은 아니었다. 어쩌면 생각보다 빨리 기사가 될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지만, 고개를 저었다.
동생이 뛰어나다곤 하지만 이제 입학한 신입생. 아무리 실력이 좋아도 설마 하는 생각이 들었으니까.
그러다 둘 중 한 명은 기사 같다고 한 말이 떠올랐다.
60이 돼 보이는 이들 중 동생이 실력을 짐작할 수 없는 왕실 기사. 총장대리가 조심스럽게 대하는 높은 신분의 기사.
누군가를 떠올렸던 윌리엄은 고개를 저었다.
넘버즈의 No.1은 왕의 최측근 기사다.
특별한 일이 없으면 그 곁을 떠나는 법이 없고 자신도 몇 번 본적이 있지만, 왕의 곁에 떠나있을 때는 크롬 요새에 있을 때뿐이었다. 그때는 그와 잠시 대화도 나눴고 국경을 넘어 뭘 하고 왔는지도 안다.
아무튼, 왕실엔 기사가 차고 넘칠 정도로 많다.
동생이 뛰어나다고 소문이 났다고 해도 보러올 만큼 한가한 인물이 아니었다.
“형. 왜 그래?”
“아니다. 그런데 길리안.”
“응.”
“만약에 말이다. 만약에 좀 더 빨리 기사가 될 기회가 오면 어떻게 할래?”
“음··· 글쎄. 그런데 어떤 식으로?”
“그러니까 예를 들면 왕실에서 네 실력을 높게 보고 기사의 작위를 주고 어떤 임무를 부여한다면 말이다. 그러면 어떻게 할래?”
“흐음. 형은 어떻게 했으면 좋겠는데?”
“네가 결정할 일이다. 내 생각보단 네 생각이 중요하지.”
“난··· 음.”
길리안은 바로 대답하지 않고 잠시 생각을 하다 입을 열었다.
“처음 올라올 때만 해도 나 자신 있었거든. 나보다 실력이 별로인 사람들도 기사랍시고 돌아다니고, 아카데미에 꼭 가야 하나 하는 고민도 했었어. 그런데···”
“그런데?”
“아직 스스로 부족하단 생각이 들었어. 형 말대로 서두를 필요는 없으니까. 스승님께서도 그러셨잖아. 언제 기사가 되는지 보다 어떤 기사가 되는지가 중요하다고.”
윌리엄이 웃으며 길리안의 머리를 쓰다듬었다.
“녀석 정말 많이 컸구나.”
“좋은 가르침을 많이 받았고 그걸 마음에 새기고 행동한다고 생각했는데 돌아보니 아닌 것 같기도 하고, 요 며칠 느낀 게 많아. 달라질 거고 도망치지 않을 거야. 그러니까 내 걱정은 하지 마. 난 형이나 아버지가 내 걱정하는 거 싫더라.”
“그게 참 웃기더라. 둘째 녀석은 몇 년째 소식이 없어서 걱정되면서도 잘 있겠지 하는데 이상하게 막내는 눈에 안 보이니까 더 걱정되고 그러더라. 아버지나 나나 널 못 믿어서가 아니라 그냥 그런 거라고. 뭐 지금 보니까 앞으론 네 걱정은 안 해도 되겠다만.”
윌리엄의 말에 길리안은 말없이 웃었다.
“그런데 형한테 보냈던 편지 기억하니?”
“글쎄.”
라고 말하며 슬쩍 일어나려는데 윌리엄이 목덜미를 잡아 주저앉혔다.
“형. 트롤 동굴에 마정석 몇 개 묻어 놨으니까 찾아서 보내 줘요. 라는 두 줄짜리 편지였지.”
“그, 그랬나?”
멋쩍게 웃는 길리안을 보고 윌리엄이 어이없다는 듯이 말했다.
“뭐? 동굴에 몇 개 묻어놔? 내가 마정석을 들고 무겁다고 느껴본 게 그때가 처음이다. 너 도대체 몬스터를 몇 마리나 잡은 거냐?”
“윽.”
도망치려 했지만 이미 목덜미를 잡혀 그럴 수가 없었다.
“솔직히 말해봐. 너 그게 끝이 아니지? 헌터들이 산맥에 갔다 오면 몬스터 씨가 말랐다고 투덜거리더라. 하다못해 맹수도 안 보인 다고.”
“아하하 그게 영지에 피해가 갈까봐서 눈에 띄는 대로 잡다보니··· 내가 그러고 돌아다닌 거 몰랐던 것도 아니잖아.”
“이 녀석아 어느 정도라는 게 있지. 헌터들 발길이 뚝 끊기겠더라.”
“금방 다시 생길걸? 몬스터는 툰족 영토에 가면 아직 많거든. 거기서 쫓겨나면 산맥으로 숨어드는 거야 당연하니까.”
“아 그렇구나. 그런데 형이 툰족 영토에 그렇게 가지 말라고 했는데 갔다는 말이네?”
“아하하. 그게 아주 잠깐 구경만 하고 왔어.”
“잠깐? 몇 달 만에 돌아와서 산맥에서 길 잃어버렸다고 했던 그때였던 것 같은데. 아니냐?”
“윽. 그, 그러니까 형. 그게 말이지··· 어쨌든 나 멀쩡하잖아. 지난 일이고 이제 걱정 안 한다며?”
“걱정 안 하는 건 그거고 지난 일이어도 잘못한 건 혼이 나야지? 오늘은 형한테 다 털어놓는 게 좋을 거다. 순순히 털어놓으면 용서해줄 수도 있고. 네 말대로 지난 일이니까.”
“정말?”
“형이 언제 거짓말하든? 그리고 갑자기 큰돈이 왜 필요한 거냐? 그 마정석 팔아서 어디다 쓸 건지도 털어놔 봐.”
눈을 똑바로 보며 말하는 형을 보고 길리안은 하는 수 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정말 거절할 생각인가요?”
엔젤의 물음에 길리안은 고개를 끄덕였다.
“흔히 있는 일이 아니에요. 아니 이런 일이 있었나 싶을 정도로 예외적인 일이지요. 그런데 정말 거절하겠다는 건가요?”
“영광스러운 일이란 걸 잘 알고 있습니다. 하지만 지금의 제겐 너무 과분한 제안입니다.”
“왕실기사단이 목표지만 지금은 싫다? 인정받을 기회는 쉽게 오지 않아요. 난 도무지 이해가 되질 않는군요.”
“높이 봐주시는 것은 감사하지만, 아직 부족하다 느끼고 있습니다. 제 마음이 바로 서면 그때는 무릎을 꿇고 청할 것입니다.”
“음··· 이럴 줄 알았으면 바로 왕궁에 데려갈 걸 그랬군요.”
“그렇다 해도 제 대답은 같았을 겁니다.”
“오~ 국왕께 지금처럼 말씀드릴 자신이 있단 말이군요?”
“그래야 한다면 그럴 것입니다. 자신감의 문제가 아니라 사실이니까요. 전 아직 준비가 안 됐고 기사 서약문의 내용을 지킬 자신이 없습니다. 그걸 알면서도 말을 꺼내는 것이 두려워 감추고 거짓된 서약을 하고 싶은 마음은 없습니다. 그게 무슨 의미가 있겠습니까?”
길리안의 말에 엔젤이 미소를 지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알겠어요. 군주가 기사의 작위를 줄 수 있지만 그걸 받아들이는 것은 기사가 될 자의 몫이죠. 스스로 부족하다 여겨 사양한다는데 강요할 수만은 없는 일. 하지만 이것도 명심하세요. 나중에 기사가 되고 싶다고 해도 그것을 받아들이는 건 군주의 몫이란 것을요.”
“알고 있습니다.”
“그리고 길리안 생도가 생각하는 것보다 기사라는 작위가 그리 대단하지도 또 영광스럽지도 않을 수 있다는 것을 염두에 두세요.”
“그 또한 알고 있습니다. 하지만 같은 구리동전이라고 해도 사람마다 그 가치는 다르겠지요. 누군가에게는 하찮을 수도 있지만, 누군가에게는 전부일 수도 있는 것입니다.”
길리안의 대답에 엔젤이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알겠어요. 이 문제는 내가 잘 해결 할 테니 신경 쓰지 말고 아카데미 생활에 집중하세요.”
“감사합니다.”
“이제 나가봐도 좋습니다.”
엔젤의 말에 길리안이 자리에서 일어나 고개를 숙이고 밖으로 나갔다.
그가 나간 후에 엔젤이 한숨을 내쉬며 소파에 등을 기댔다.
그러다 방금 길리안과의 대화를 떠올리다 피식 웃었다.
나이에 비해 실력만 남다른 게 아니라 생각도 남다르다고 할까?
아무리 실력이 뛰어나다고 해도 아직 나이도 어리고 이제 아카데미에 입학한 신입생. 그런 그에게 기사의 작위를 주고 임무를 맡기겠다고 했다.
그것도 그저 그런 귀족 가의 제안도 아니고 왕의 제안을 평민 꼬마가 거절한 것이다. 고민해보겠다고 할 줄 알았는데 잠시 생각하더니 일언에 거절해서 솔직히 자신이 더 놀랐다.
시종장인 아버지와 넘버즈 No.1인 드겔 경이 보고 갔다.
이런저런 조사도 다 끝냈을 테고 충분히 자격이 있다고 생각했으니 나온 말일 것이다. 물론 왕궁에 들어가 간단한 실력 검증은 해야겠지만, 지금까지 보여준 것만 봐도 그 정도는 충분히 통과하리란 생각이 들었다.
그에게 맡길 임무가 무엇일지는 듣지 않아도 알 수 있었다.
왕자의 호위를 맡길 생각일 테고 그렇다면 시크릿 가드가 되는 것이다.
비밀 호위로 신분도 숨겨야 하고 기사 서임을 받은 것을 대놓고 드러내지도 못할 것이다. 왕자가 아카데미에 다닐 동안 그도 같이 다녀야 할 것이기에 학업에도 큰 지장은 없을 것이다.
왕자의 호위는 아무에게나 맡기지 않는다.
왕의 기사 중 믿을 만한 이들만이 왕족을 가까이서 호위할 수 있다. 비밀이고 아니고를 떠나 개인적으로도 큰 영광이랄 수 있는 일. 그만큼 책임도 막중하다.
하지만 그걸 떠나 스스로 기사가 될 준비가 되지 않았다고 거절했으니 이젠 물 건너간 것.
“훗. 그나저나 해결해 준다고 했으니 가만히 있을 수는 없겠네.”
중얼거린 엔젤이 자리에서 일어나 줄을 잡아당겼다.
시크릿 가드는 아무나 하는 것이 아니다. 훈련도 다른 기사들과 다르고 충성심도 깊어야만 한다.
아무리 시종장인 아버지와 드겔 경이 좋게 보고 갔다고 해도, 충성까진 검증이 안 된 길리안을 왕자의 호위로 두기엔 무리가 있다.
그런데도 기사 작위를 주고 임무를 권한다는 건 누군가의 요청이 있어서일 것이다.
그 누군가를 만나 일을 마무리 지을 생각이었다.
추천과 댓글은 글쟁이에게 큰 힘이 됩니다.^^
- 작가의말
끝날 때까지는 끝난 게 아니다. 야구선수 요기베라의 명언이죠. 종종 나올지도...
그보다 이건 많이 쓰고 싶어도 하루 한편도 빠듯하군요.
어제 뭘 잘못 먹었는지 속이 영. 병원에 갔더니 다행히 그냥 장염이라더군요.
아직 여름철인데 음식 조심하시길. 아우 죽겠어요.ㅠ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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