넘버즈. 6장(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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슈발리에 아카데미의 입학시험은 모든 아카데미중 제일 먼저 시작하고, 그 후에 수도에 있는 아카데미들의 시험도 순차적으로 시작이 되는데, 이건 일종의 전통이라 할 수 있었다.
지금은 최초로 세워진 아카데미라는 역사가 무색할 정도로 명성이 많이 떨어지기는 했지만 아직 그 전통은 유지되고 있었다.
“시험에 참가하는 이들이 상당히 많아서 경쟁률이 20대1이 넘는다고 합니다.”
계속되는 집사의 말에 길리안은 고개를 끄덕였다.
100명을 뽑는데 2천명이 넘게 지원했다는 말이다. 확실히 지원자의 수는 다른 아카데미에 비해 엄청나게 많은 편이기는 했다.
하지만 속을 들여다보면 실속은 별로 없었다.
지방의 작은 아카데미조차 입학시험을 치르려 등록하려면 다만 얼마라도 비용이 들어가는데, 슈발리에는 그런 것이 없었다.
평민이상이라면 누구나 지원이 가능하고 시험을 치르는데 돈이 들지 않는다.
그리고 다른 아카데미에는 없는 제도가 있었다.
1등으로 합격하면 모든 교육과정을 무료로 받을 수 있는 특권을 주는 것이 그것이다.
그리고 시험성적은 우수하지만 당장 형편이 어려워 등록금을 낼 수 없는 이들은 아카데미에서 후원자를 모집해서 지원해주거나 졸업 후 기사가 되어 갚겠다는 계약서를 쓰고 입학할 수도 있었다.
다만 모두에게 그렇게 해줄 수는 없고 성적이 우수한 상위 몇 명에게만 주어지는 기회였지만, 그것만 해도 엄청난 것이라 할 수 있었다.
이것 또한 처음 아카데미가 설립됐을 당시부터 있었던 것이고 아직 그대로 유지하고 있는 것이다.
이런 이유로 형편이 어려운 평민들 중 기사를 꿈꾸는 이들의 지원이 몰릴 수밖에는 없었다.
신분상승의 꿈을 이룰 수 있는 좋은 기회이기는 했지만 그만큼 진입의 장벽은 높았다. 많은 이들이 지원은 하지만 합격자가 정원미달인 경우도 생길 정도니까.
그래도 희망을 가지고 매년 아카데미의 문을 두드리는 이들이 많았다.
“주제넘지만 한 가지 여쭤 봐도 되겠습니까?”
“말씀하세요.”
“도련님께서는 슈발리에가 아니라도 다른 곳에 가실 여유가 충분하십니다. 헌대 왜 굳이 슈발리에를 고집하시는지요.”
길리안은 웃으면서 입을 열었다.
벌써 이런 질문은 한두 번 받아본 것이 아니었으니까.
“제 형님이 그곳을 나오셨습니다. 그리고 제게 많은 가르침을 주시고 제가 가장 존경하는 영지의 기사장님도 그곳 출신이십니다. 어릴 때부터 그곳의 얘기를 많이 들었고, 저도 슈발리에에서 배우고 익혀 그분처럼 되고 싶었으니까요.”
“그러셨군요.”
“그런데 그건 왜 물으시죠?”
“기사로서의 성공은 출신아카데미도 중요하다고 들었습니다. 그리고 많은 귀족들과 부유한 이들의 자제들과 친분을 쌓으신다면 사업에도 도움이 될 것입니다.”
집사의 말에 고개를 끄덕였지만 길리안의 표정은 좀 씁쓸해보였다.
그도 그럴 것이 벌써 한두 번 듣는 얘기가 아니었기 때문이다. 수도에 와서 알게 된 이들은 죄다 같은 말을 하고 있었으니까.
그리고 수도로 오기 전 큰형도 비슷한 말을 했었다.
길리안이 학비를 댈 능력이 없다면 형이 대주겠다고 했었다. 그래서 모아 놓은 마정석을 보여줬더니, 형이 웃으면서 꼭 슈발리에는 고집할 필요는 없다고 했다.
그걸 팔면 더 좋은 아카데미에서 더 좋은 교육을 받을 수 있는 기회가 얼마든 있으니, 굳이 자신의 뒤를 따를 필요는 없다는 말이었다.
그때는 그냥 생각해보겠다고 하고 넘어갔었는데, 이곳에 와서 저런 말을 자주 듣다보니 정말 심각하게 고민을 해보기도 했었다.
더 좋은 아카데미에서 더 좋은 교육을 받는다?
물론 좋다.
비싼 학비에 유명가문의 자제들이 모이는 곳이니 만큼 그에 걸맞게 환경도 좋고 교육의 질도 높다고 한다. 유명한 학자에 유명기사들이 대거 포진하고 있었으니 그건 당연한 것일지도 모른다.
하지만 그렇다고 아카데미의 양대 산맥이라 할 수 있는 골든로드나 드니로프 출신의 기사들은 모두 뛰어난가?
그건 아니란 생각이었다.
교육환경과 질은 물론 중요하다.
하지만 그보다 배우는 이의 자세와 마음가짐이 더 중요하다는 생각이었고, 스승인 엘런에게도 그렇게 배웠다.
아무리 뛰어난 기사가 검을 가르치고 학자들이 지식을 전수해도 받아들이는 이가 그걸 소화하지 못하면 소용없는 것이니 말이다.
그리고 어떻게 하면 성공한 기사가 되는 것일까?
성공의 기준은 개인마다 다르다고 생각한다.
물론 사회에서 보는 보편적인 성공의 기준이 있겠지만, 스스로가 만족하지 못하면 성공이라 할 수 없다는 생각이었다.
많은 사람들이 유명 아카데미만 들어가면 기사작위는 거저 나오는 줄 알고, 무조건 왕실기사단이나 대귀족의 휘하로 들어가는 줄 아는데 현실은 그렇지가 못하다.
아카데미는 기사의 자질을 갖추고 성장을 도와주는 곳이지 작위를 수여해주는 곳은 아니니까.
자신은 넘버즈를 꿈꾼다.
기사가 되려는 모든 이들이 넘버즈를 꿈꾸는 것은 아니다. 저마다의 정한 목표와 기사가 되려는 이유는 다 다를 테니까.
아무튼 자신의 꿈을 아는 이들의 조언은 항상 같았다.
너도나도 넘버즈가 되기 위해선 당연히 골든로드나 드니로프로 가야한다는 듯 말하니까. 바꿔 말하면 다른 아카데미는 나와 봤자 넘버즈가 될 수 없다, 내지는 무척 힘들다는 말이 될 것이고 실제로도 그렇게 들렸다.
넘버즈는 아카데미가 없던 시절부터 존재했고, 꼭 그 두 아카데미를 나와야 넘버즈가 될 수 있다는 법도 없는데 말이다.
라첼은 첫 만남에서 인맥의 중요성을 강조했다. 특히 귀족들과의 관계를 무척이나 강조했었다. 그는 그걸 실력보다 더 중요한 요소로 꼽는 듯 했었다.
그때도 어느 정도 수긍은 했지만 그 말에 전부 동의하지는 않았었다.
재밌는 건 아카데미를 추천해주고 인맥을 쌓으라는 등의 말은 많이 들었지만, 그 누구도 기사로서의 마음가짐과 기사가 갖춰야할 정신의 중요성에 대해 언급하는 이가 없었다는 것이다.
스승인 엘런에게 넘버즈가 되고 싶다고 말했을 때 제일 먼저 들었던 말이 그전에 진정한 기사가 되라는 것이었다.
진정한 기사가 되면 넘버즈에 올라있거나, 적어도 그 꿈에 가까워져있을 것이라 했다.
어떻게 하면 진정한 기사가 될 수 있냐고 물었을 때 그 대답은 의외로 간단했다.
“기사도를 지키고 그걸 행하는 기사가 될 수 있다면 넌 진정한 기사가 될 수 있을 것이다.”
이게 엘런의 대답이었다.
그 당시에는 어렸었고 그렇게 하겠다고 서슴없이 고개를 끄덕였었지만 지금이라면 그러지 못했을 것 같았다.
기사도는 기사는 이러이러해야 한다는 일종의 행동양식이라 할 수 있었다.
하지만 그것도 법적으로 기사는 이래야 한다, 이것이 기사도다, 라고 딱 명시해놓은 것은 아니다.
보편적으로 쓰이는 기사서임식의 선서의 내용을 토대로 한 기사가 지켜야할 덕목정도로 생각하면 될 것이다.
그중 첫 번째로 꼽을 수 있는 것이 무용이다.
기사의 시작은 고대의 기병에서부터라고 하는데 지금에 이르러서는 일반 기병과 기사의 차이는 엄청났다. 전투기술과 무장에서 비교가 되질 않는다.
일단 뛰어난 전투기술이 없다면 기사로서의 자격자체가 없었고, 언제 어떤 적을 만나더라도 물러나지 않고 섬기는 이를 위해 목숨을 바쳐 싸우겠다는 내용도 서약문에 있었다.
뭐니 뭐니 해도 기사는 싸우는 존재인 것이다.
뛰어난 실력은 물론 죽음을 두려워하지 않고 적진에 돌격할 수 있는 용기는 필수.
기사라면 당연한 것이 아니냐고 할 수 있겠지만, 말뿐인 용기야 누구든 낼 수 있는 것.
정말 그것이 필요한 상황이 닥치지 않는 한 확인할 수 없는 것이 용기 아니던가?
역사속의 수많은 전쟁에서 무용을 뽐낸 기사들도 많지만, 적에게 등을 보인 기사의 수도 일일이 헤아리지 못할 테니까.
두 번째는 성실이라고 할 수 있었다.
보편적인 기사서약문에는 모든 일에 정성과 최선을 다하여 노력하고, 거짓을 입에 담지 않으며 항상 진실 됨을 추구하겠다는 맹세가 있었다.
어찌 보면 무척이나 지키기 어려운 것이라 할 수 있었다.
전투기술은 수련을 해서 익혀도 되고 노력만 하면 일정수준에 오를 수 있다. 그리고 용기를 발휘하는 상황은 특정한 때이지만, 성실은 일상생활에서 보여야 하는 모습니다.
사람이 항상 최선을 다하고 진실 되기는 무척 힘든 일이니 말이다.
그 외에도 기사로서의 명예를 지키고, 항상 예의를 지키며, 경건한 마음으로 주군을 섬기고, 힘을 앞세우지 않고 겸손하며, 약자를 보호하고, 불의와 절대 타협하지 않는다는 등의 내용들도 있었다.
약간은 애매모한 말들도 있고, 쓸데없이 거창한 것들도 있었다. 시대에 따라서 조금씩 변하기도 했고, 해석에 따라 개인마다 생각하는 기사도도 조금씩은 차이가 있는 경우도 있었다.
그럼에도 수많은 기사들이 기사도를 입에 담고, 기사도를 지킨다는 말도 많이 한다.
그리고 기사서임을 받으며 서약을 했으니 열거한 것들을 모두 지키겠다고 맹세한 것이다. 기사도를 떠나 맹세한 것은 당연히 지켜야 하는 것이 아니냐고 하겠지만 말이 좋다.
어떤 철학자는
“기사들이 말하는 기사도를 다 지킨다면 그는 기사가 아니라 성인일 것이다.”
라고 말하기도 했고.
“기사들의 서약도 어차피 계약이 아닌가? 상인들의 그것과 다를 것이 무엇인가?”
라고 비하하는 이도 있었다.
그만큼 기사도를 지키고 서약한 대로 행하는 것이 어렵다는 말이다.
물론 모범적인 모습을 보이고 기사도를 지키려 노력하는 기사들도 많겠지만 그렇지 않은 이들도 많다는 것이다.
그리고 어느 순간부터 기사는 신분상승과 개인의 안녕을 추구하는 직업으로서의 인식이 강해지기도 했다.
아무튼 스승인 엘런도 자신도 항상 노력하고 있다고 했다. 기사도를 지킨다는 것은 항상 자신과의 싸움이고, 그 싸움에서지지 않는 것이 진정한 기사가 되는 길이라고도 말했었다.
스승인 엘런의 말을 듣고 그 가르침에 따르려 노력했다. 그런데 이곳에 와서는 기사도라는 말은 들어보지도 못했다.
엘런이 잘못된 가르침을 주고 거짓을 말했다고는 생각지 않았다.
그가 제시한 길이 이상을 추구하는 길이라면, 근래에 들은 조언들은 현실적인 것에 가까울 것이다. 다만 그 둘 사이에서 느껴지는 괴리감이 크다.
그리고 자신이 꿈꾸는 넘버즈의 모습이 어쩌면 동경하던 모습과는 상당히 다를 지도 모른다는 생각도 들었다.
“제가 괜한 말을 꺼낸 것 같습니다.”
집사의 말에 길리안은 상념에서 벗어났다.
“아 아니에요. 잠시 딴생각에 빠졌네요. 집사님의 말대로 확실히 그럴 수도 있겠죠. 하지만 그게 꼭 좋은 점이라고는 생각하지 않습니다. 귀족들이 너무 많으면 불편하거든요. 차별도 심하고 수업도 따로 받는다더군요.”
“음... 확실히 그런 면은 있을 겁니다.”
“전 배울게 많습니다. 그 많은 돈을 내고 배우는 건데 귀족들의 눈치를 보고 차별을 받고, 그렇게 지내기는 싫거든요. 뭐 슈발리에에도 귀족들은 있겠지만, 그래도 다른 곳에 비해 차별이 덜하다고 하더군요.”
“제가 거기까지는 생각을 못해서 괜한 말씀을 드렸습니다.”
“아니에요. 저도 여기 와서 심각하게 고민해봤던 겁니다. 앞으로도 하실 말씀은 언제든 해주세요. 집사님 얘기는 도움이 많이 되거든요.”
“그렇게 생각해주셔서 감사합니다. 그리고 한 가지 논의 드릴 것이 있습니다.”
“말씀하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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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작가의말
원래는 이거 전에 있었던 거랑해서 소제목을 바꾸고 했어야했는데... 연제분량에 맞추다보니 장 나누기도 실패했고... 뭐 소제목 따위 패스!
그리고 기사도에 관한 것은 알고 계신 것과 다르다고 해도 그냥 넘어가 주십사하는 바람입니다. 하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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