넘버즈. 29장(1)
“으음? 이거 재미있네.”
서류뭉치를 뒤적거리며 말하는 미네르바를 로렌스와 드레드가 쳐다봤다.
“의외로 이런 일이 적성에 맞나보군.”
로렌스의 말에 미네르바가 피식 웃었다.
“적성을 떠나서 의외는 뭐야? 도대체 날 어떻게 평가하고 있었던 거지?”
대답이 없는 로렌스를 보던 미네르바가 드레드를 보고 말했다.
“나 너희한테 궁금한 게 있는데.”
그러면서 묶었던 머리를 풀고 고개를 세차게 저은 후 머리칼을 정리하며 물었다.
“나 어때?”
“어떤 의미로 묻는 거냐?”
“여자로 어때 보이냐고.”
“음, 솔직한 대답을 원하나?”
드레드의 말에 미네르바가 고개를 끄덕였다.
“불합격.”
“뭐? 합격의 기준은 뭔데?”
“내게 여자의 기준은 내 아내다. 네가 뭘 해도 나한테는 여자로 불합격이다.”
그 말에 피식 웃은 미네르바가 로렌스를 봤다.
“기사로선 합격!”
로렌스의 말에 미네르바가 크게 소리 내서 웃었다.
“하하 아~ 고마워.”
“네가 왜 그러는지는 모르겠다만, 다른 레이디들처럼 꾸미고 나간다면 모두의 시선을 사로잡을 수 있을 거다. 그러니 자신감을 가지도록.”
미소를 띤 채 말하는 로렌스를 보던 미네르바가 피식 웃고 말했다.
“고마워. 힘이 나네. 언제 술 한 잔 살게. 드레드 로렌스 좀 본받으라고.”
“합격!”
“뭐? 갑자기 왜?”
“술자리에 나도 끼워준다면···.”
“됐거든.”
그러면서 다들 웃을 때 루퍼드가 들어왔다.
“다들 무슨 재밌는 일이라도 있는 모양이군.”
“여자로서 미네르바는 어떤지 평가 중이었지.”
로렌스의 말에 의외라는 듯 미네르바를 보던 루퍼드가 말했다.
“내 취향은 아니라서 뭐라고는 못하겠군.”
“그래도 말한다면?”
미네르바의 물음에 루퍼드가 턱을 매만졌다.
“나쁘진 않다.”
“음, 아무래도 술은 로렌스에게만 사면되겠네.”
“정정하지. 아름답다.”
“됐거든. 고작 술 한 잔에 평가가 그렇게 변하나?”
“네가 사는 술은 특별하니까.”
“뭐?”
“우리는 종종 술자리를 갖는다. 생각해보니 네게 술을 얻어 마신 적은 없어서 말이지.”
루퍼드의 말에 미네르바가 잠시 생각한 후에 고개를 끄덕였다.
“생각해보니 그러네. 좋아. 내가 한잔 산다.”
그 말에 루퍼드가 웃으며 미네르바의 어깨를 툭툭 치고 자리에 가서 앉았다.
“술 생각이 간절하긴 하지만 지금은 그럴 때가 아니라서 아쉽군.”
“아! 갔던 일은 어떻게 됐어?”
미네르바의 물음에 루퍼드가 씨익 웃었다.
“간단하게 말하면 잘 됐다.”
“오~ 그거 다행이네.”
“상비군 체계까지 손보려면 할 일이 많아. 그래도 가장 시급한 것은 기사단의 체계를 다시 잡는 거다. 영주회의 전에 마무리해야 해. 혼란스러운 모습을 보일 순 없으니까.”
루퍼드의 말에 다들 고개를 끄덕였다.
“하지만 불만이 많을 거다.”
드레드의 말에 루퍼드가 고개를 끄덕했다.
“알아.”
불만이 많을 수밖에 없을 것이다.
기사단을 현재 100명에서 단장과 부단장을 포함 52명 체제로 바꿀 것이다.
그리고 기사들 간의 새로운 계급체계를 만들기로 했다.
현재는 다 같은 기사이고 단장과 부단장의 부재 시에는 선임 기사를 임명해 그 명령을 듣게 하는 식이었다.
그때그때 지휘자를 임명하는 건 확실히 비효율적이고 인선에 불만을 품고 따르지 않는 자들도 있다.
그리고 단장과 부단장이 모든 기사를 관리하기는 힘들기에 아예 확실히 계급을 나누려는 것.
좋게 생각하면 넘버즈의 체계를 일반 기사에게도 적용하는 것이지만, 그걸 더 강화한다고 할 수 있다.
드겔의 말처럼 기사는 군인이다.
군대가 효율적으로 움직이려면 명령체계는 중요하기에 그걸 확고하게 하려는 것.
지금 시행하려는 체계는 새로 만든 것은 아니었다.
칼랜베르크에서 이미 사용하고 있는 것을 왕국의 사정에 맞게 조금 바꿔서 도입하려는 것뿐.
문제는 역시나 출신 신분이었다.
평민 출신 기사들이야 별 불만이 없겠지만, 귀족 출신들은 다르다.
길리안의 경우야 그 실력을 확실히 보였고 넘버즈에 올랐으니 문제 될 것이 없다.
지금은 기사단장이나 부단장급 몇 명만을 위에 두는 거지만, 새로운 체계가 도입되면 귀족 출신 기사 위에 평민 출신 기사가 수십, 수백 명이 될 수 있고 명령도 받아야 한다.
쉽게 말해 기사로 살기 위해 남을 건지 귀족으로 살기위해 떠날 건지를 선택해야 하는 것이다.
그러니 공표된다면 불만이 많이 나올 것이다.
하지만 지금이 아니면 안 된다고 생각했다.
길리안이 기사들의 가슴을 울린 지금이 가장 좋다고 생각됐고, 넘버즈들의 의견도 모였다.
그리고 불만을 줄인 방법도 모색 중이었다.
기사의 길을 택한 이들 중 가문의 장남은 거의 없다. 귀족의 신분일 때보다 특별한 무언가가 있어야 하지만 생각해보면 방법은 있을 테니까.
어차피 모두를 만족하게 할 수는 없다.
그래도 많은 귀족 출신의 기사들을 이해시킬 수 있다면, 정말 기사의 시대가 열리는 시작이 될 것이다.
“모두 설득하고 다독일 시간이 없어. 그걸 받아들이고 말고는 기사 개인의 자유에 맡기는 수밖에. 그래도 넘버즈가 전부 한목소리를 내고 있으니 크게 불만을 표하는 이들은 없을 거다. 시작이 어렵지 자리만 잡고 나면 괜찮을 테니까.”
루퍼드의 말에 로렌스가 말했다.
“넘버즈가 모두 한목소리를 내는 건 아니지. 지금 수도에 3명이 없다는 걸 잊지 마라.”
“알아. No.6 펠릭스 경은 칼랜베르크에서 돌아오려면 오래 걸릴 거다. 그때는 영향을 주긴 힘들어. 일 왕자를 수행하고 있는 볼란트 경과 티란테 경은 이삼일 후면 도착한다. 우선은 내가 만나서 얘기를 나눠보겠다. 어차피 왕께서 허락할 일이니 둘이 반대한다고 해도 대세에 영향을 주긴 힘들어.”
“정말 그럴까?”
로렌스의 말에 루퍼드가 그를 봤다.
넘버즈들의 사이가 모두 좋은 것은 아니고 서로를 잘 알고 있는 것도 아니다.
거기에 자신은 그 둘을 밟고 올라서 지금의 자리에 있는 거라 거리감이 더 있었다. 그래서 그들이 어떤 사람들인지는 더욱 모른다.
하지만 로렌스는 다르다.
특별한 능력이 있고 그걸로 남들이 모르는 면을 많이 알고 있다.
그런 그가 저렇게 말하니 무척 신경이 쓰였다.
“대화 중에 미안한데, 내 말 좀 들어볼래? 어쩌면 지금 하는 얘기와 상관이 있을 수도 있으니까.”
미네르바의 말에 모두가 그를 봤고 루퍼드가 말해보라는 듯 고개를 끄덕했다.
“루퍼드 넌 나랑 같은 골든로드 출신이지.”
“그렇다. 그게 왜?”
“아, 이건 개인적으로 궁금했었는데 드니로프는 히스클리프 후작가 소유잖아. 너희 집안 소유 아카데미를 두고 왜 골든로드에 갔어?”
“그건 별다른 이유는 없었다. 히스클리프에서 뭘 가르치는지는 알고 있었으니까. 골든로드에선 뭔가 새로운 것이 있을까 해서 가봤을 뿐이다. 그게 무슨 상관이라도 있나?”
“좀 더 들어봐. 지금 골든로드 출신이 죽은 크리스는 빼고 너랑 나 볼란트 경 이렇게 셋이지. 로렌스와 드레드 펠릭스 경은 히스클리프 출신이고, 티란테 경은 베네딕트 출신이지.”
“그래서?”
“혹시 휘하기사 중에 같은 출신 아카데미의 기사가 몇 명이나 되는지 아는 사람?”
미네르바의 물음에 다들 생각을 하는지 말이 없었다.
“잘 모르겠군. 기억나는 건 한 20명 정도다.”
루퍼드의 말에 다들 생각나는 대로 대답을 했다.
보통 20~30명 수준.
그들의 말에 미네르바가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나도 잘 기억이 안 나지만 너희와 비슷할 거야. 그런데 말이지 내가 재미있는 걸 발견했거든.”
“말해봐라.”
미네르바가 서류뭉치를 들고 말했다.
“볼란트 경이 이끄는 제3 중앙기사단 전원이 골든로드 출신이야.”
“그런 게 가능한가?”
드레드의 물음에 미네르바가 피식 웃었다.
“이번에 내부정리를 하면서 느낀 거 없어?”
“하긴.”
막상 뚜껑을 열고 잘라내려고 보니 문제가 너무 심각해서 다들 놀랐었다.
그러니 그렇게 하려고 하면 못할 것도 없었다.
“더 재밌는 건 티란테 경은 베네딕트 출신인데 기사단 전원이 골든로드 출신이지. 이렇게 하기도 힘든데 무슨 이유에서 그렇게 기사단을 조직했는지는 모르지만, 그냥 웃고 넘길 문제는 아니잖아?”
“확실히 그냥 넘길 문제는 아니다.”
“어차피 그 둘이 이끄는 기사단에도 정리해야 할 기사가 많아. 대충 절반 가까이 되지 않던가?”
“그 정도 된다.”
“곧 직영지에 도착하면 수도의 상황을 알 수 있을 거야. 그런데 그들이 오고 싶을까?”
“오지 않으면?”
“글쎄. 뭐 도망치거나 음···. 볼란트 경과 티란테 경이 다른 마음을 먹지 않는다면 왕자는 무사하겠지. 하지만 휘하기사들이 이탈하는 건 막지 않을 지도 모르지. 물론 그 둘을 잘 몰라서 뭐라고 확실히 말은 못 하겠지만, 이걸 보고나니 그런 생각이 드는 건 사실이야. 솔직히 내 생각이 그냥 지나친 거였으면 좋겠어.”
미네르바의 말에 다들 아무 말이 없었다.
루퍼드는 깍지를 낀 채 눈을 감고 의자에 기댔다.
기사들 간에 출신 신분도 문제지만, 출신 아카데미 문제도 있다.
이건 일종의 파벌이라고 볼 수도 있고 기사들만의 문제는 아니었다.
그 문제가 크게 부각되지는 않았지만, 이번에 처벌된 자들 중 출신 아카데미끼리 서로 밀어주고 봐준 경우도 있다.
하나하나 가려내려고 하면 무척 많을 거라는 생각도 들었다.
솔직히 볼란트나 티란테가 무슨 의도로 그렇게 했는지는 몰라도, 저건 아니라는 생각이 들었다.
물론 넘버즈이니 휘하 기사에 누구를 둘지는 어느 정도는 선택할 수 있다지만, 정상적으론 그렇게 할 수가 없었다.
파보면 또 뭔가가 나올 것 같았다.
솔직히 무척 짜증이 났다.
정리하고 새로운 걸 시작하려는데 또 발목을 잡힌 느낌이랄까?
“루퍼드 어떻게 할 거냐?”
로렌스의 말에 루퍼드는 바로 대답하지 않았다.
원래는 두 넘버즈를 믿고 기다리려 했다.
하지만 미네르바의 말을 듣고 보니 그럴 수는 없을 것 같았다.
눈을 뜬 루퍼드가 넘버즈들을 보며 말했다.
“당연히 그냥 지나칠 수 없지. 일단은 자료를 모아. 시간이 없으니 되도록 빨리. 두 넘버즈는 둘째 치고 처벌을 받아야 할 기사들이 올 때까지 기다릴 수는 없을 것 같다. 왕께 보고하고 마중을 가야겠지. 그런 일은 벌어지지 않았으면 좋겠지만, 같은 주군을 섬기는 기사들끼리 검을 겨누게 될 수도 있다.”
그 말에 다들 심각한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그런 그들을 보며 루퍼드가 피식 웃었다.
그러고 보니 다들 며칠 잠도 제대로 못 잤다.
“자료를 모으는 건 다른 이들을 시키겠다. 보고는 내가 할 테니 다들 쉬도록 해. 내일이라도 출동할 수 있으니까. 그리고 길리안은···.”
“아직 명령받은 휴식이 끝나지 않았어. 이번 일에선 빼도록 하지. 여기 있는 넘버즈로도 차고 넘친다.”
로렌스의 말에 루퍼드가 고개를 끄덕였다.
“하긴 그가 실망하는 건 크리스로 끝났으면 좋겠군. 나도 그러길 바라고.”
그렇게 말하고 한숨을 내쉬며 다시 눈을 감았다.
추천과 댓글은 글쟁이에게 큰 힘이 됩니다.^^
- 작가의말
늦어서 죄송합니다.
드디어 고구마를 다 캤네요. 하하하...
제 주말은 끝났네요 ㅠ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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