넘버즈. 25장(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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달리는 루퍼드의 인상은 한껏 찌푸려져 있었다.
‘무슨 구조가.’
2층 복도를 다 지나야 3층으로 갈 수 있고, 3층 복도를 다 지나야 4층으로 갈 수가 있었다.
희귀한 몬스터라던 웨어울프의 시체만 얼핏 본 게 수십.
자신이 웨어울프 두 마리랑 대형몬스터 하나를 상대하는 동안 드겔이 처리한 숫자가 그랬다.
‘이렇게 많을 줄 알았으면.’
좀 더 빨리 처리 하고 올라왔을 테니까.
5층에 도착하자마자 문을 부수고 안으로 뛰어 들어갔다.
바닥을 구르는 19호의 모습과 그를 쫓는 웨어울프.
그사이를 막아섰다.
휘두르는 손톱을 검으로 막고 파고들며 어깨로 녀석을 밀어내고 바로 검을 찔러 넣었다.
긴 턱을 뚫고 들어갔던 검을 뽑으며, 5마리의 웨어울프를 상대하고 있는 드겔이 있는 쪽으로 몸을 날렸다.
그때 드겔이 웨어울프 한 마리를 발로 차자 녀석 뒷걸음질을 쳤다.
루퍼드는 녀석의 뒤에서 다리를 차서 넘어트리며 검을 거꾸로 쥐어 가슴에 찔러 넣고 손목을 틀며 검을 빼냈다.
일어선 루퍼드가 쓰러진 웨어울프의 목에 다시 검을 찔러 넣으며 말했다.
“좀 늦었습니다.”
“딱 좋을 때 왔네.”
말소리에 드겔에게 붙어있던 4마리 중 2마리가 자신에게 달려드는 것을 보고 씨익 웃었다.
한 마리의 손톱을 쳐내고 다른 녀석을 찌르려할 때, 녀석의 미간에 박히는 화살.
루퍼드는 19호를 돌아보며 인상을 썼다.
눈이 마주치자 흉측한 얼굴을 일그러트리는 19호.
저게 웃는 거다.
물러났던 웨어울프가 양팔을 휘두르려는 것을 보고 그보다 빨리 파고들어 벌린 입속으로 검을 박아 넣었다.
검을 빼자 웨어울프가 털썩 쓰러졌고 돌아서니 드겔은 이미 문을 열고 안으로 들어서고 있었다.
그 뒤에 남겨진 것은 사지가 달린 웨어울프의 시체.
루퍼드는 쓰게 웃으며 드겔의 뒤를 따랐다.
큰 문을 들어서자 보이는 것은 넓은 홀.
양 옆에 전시돼 있는 수십 벌의 기사 갑옷이 인상적이었다.
그 끝에는 로브를 입은 노인이 앉아있었다.
하얀색 로브에는 금실로 기하학적인 문양이 수놓아져있었다.
주름이 자글자글한 얼굴.
몇 번 본적이 있는 마탑주였다.
그가 앉아있는 의자는 벽에 붙어있었는데, 등받이가 높은 천장 끝까지 이어져있었다.
거기에도 이상한 문양이 새겨져 있었는데 희미한 빛을 발하고 있었다.
그보다 이상 한 것은 자신들과 마탑주의 사이.
그 빈 공간에 보이지 않는 뭔가가 있는 것 같은 느낌이 들었다.
“어서 오시오. 드겔 경.”
“오랜만이오. 치르디 자작.”
“몰골이 말이 아니시오.”
마탑주의 말에 자신의 몸을 훑어본 드겔이 피식 웃었다.
갑옷은 올라오면서 벗어던졌다. 옷은 여기저기 찢어져있었고 자잘한 상처들도 보였다.
“키우는 개가 꽤 사납더이다.”
“몇 년을 공들였는데 역시 경에게는 그저 사나운 개로 보였나보오.”
“나름 재미있었소. 그보다 내 궁금한 것이 있소만. 도대체 뭐가 부족하여···.”
“아아!”
마탑주가 손바닥을 보이며 드겔의 말을 가로 막은 후에 다시 말했다.
“나와 얘기를 나누고 싶다면 아직 멀었소.”
그러면서 옆에 기대놨던 지팡이를 들고 작은 목소리로 중얼거리기 시작했다.
그걸 본 19호가 그에게 활을 쐈지만 날아가던 화살은 중간에서 벽에 부딪친 듯 둔탁한 소리를 내며 바닥에 떨어졌다.
그걸 본 루퍼드의 눈이 가늘어졌다.
‘마법실드인가?’
기사들의 방패와 같은, 마법사들의 보이지 않는 방패.
일단 펼치기만 하면 어지간한 공격은 다 막을 수 있다. 마탑 마법사들의 시현을 본적도 있었다. 물론 이렇게 넓은 홀을 반으로 가를 정도로 크게 펼친 것은 처음 봤다.
믿는 구석이 있으니 저렇게 주문을 외울 수 있는 것.
마법사에게 직접 공격을 당할 일이 거의 없었다.
마법은 준비시간이 오래 걸려서 그렇지 발동만 되면 방어하기가 쉽지 않다. 멀리 떨어져서 몸에 불을 붙일 수도 있고, 얼릴 수도 있는 것이 마법사다.
괜히 마법처리가 된 좋은 갑옷과 무기에 돈을 쏟아 붇는 게 아니다. 그걸로 어느 정도는 마법이나 마법물품에 대비할 수가 있으니까.
하지만 지금 드겔이나 자신은 달랑 검 한 자루뿐.
약간은 초초함을 느끼는 자신에 비해 드겔의 표정은 담담했고, 검조차 뽑지 않은 상태.
기사들의 갑옷이나 방패처럼 마법사들이 펼치는 실드도 무적은 아니다.
상대가 마탑주고 미리 준비했겠지만, 뚫거나 깨려면 그럴 수 있을 것 같다는 생각에 앞으로 나섰다.
“조금 기다려보게. 저리 애를 쓰는데 한번 봐주는 것도 좋지 않은가? 마법을 볼일이 흔한 것도 아니니 마나의 흐름이라도 느껴보게. 그 흐름을 읽을 줄 알면 마법도 그리 무서운 것은 아니네.”
느낌이라면 아까부터 있었다.
심상치 않은 기운이 마탑주에게 모여들어 움직이려 한 것이니까.
루퍼드는 내색하지 않고 말없이 뒤로 한걸음 물러났다.
그때 마탑주가 주문을 다 끝냈는지 지팡이로 바닥을 쳤다.
그리고 그에게 모여 있던 기운이 흩어졌다.
아니 다른 곳으로 향했다.
그곳으로 고개를 돌린 루퍼드는 인상을 찌푸렸다.
인상적이라고 느꼈던 기사의 갑옷들.
장식인줄 알았는데 눈구멍에 붉은 불빛이 일렁이더니 움직이기 시작했다.
“이거 실망이군. 난 또 대단한 마법이라도 펼치는 줄 알았소만, 이런 장난감이나 움직이려고 그리 애썼소?”
드겔의 말에 마탑주가 웃으며 깍지를 끼고 의자에 몸을 기댔다.
“나름 애써서 만든 골렘이라오. 그걸 다 처리하면 나랑 얘기를 나눌 수 있을 것이오. 그리고 역사에 길이 남을 마법도 보여드리리다.”
“그럽시다.”
별것 아니라는 듯 말한 드겔이 오른쪽으로 향했다.
양쪽에 20씩 도합 40기의 골렘.
왼쪽에 있는 20기는 자신의 몫. 그저 장식용 갑옷일 때랑은 얘기가 달랐다.
루퍼드는 슬쩍 옆으로 이동했다.
움직임을 따라 고개도 돌리고 방향도 바꿨다.
골렘을 멈추게 하는 방법은 아카데미에서 배우긴 했다.
골렘에는 핵이 있다. 인간으로 따지면 심장 같은 것.
그걸 파괴하거나 아니면 다 부셔야 한다.
주인을 죽이면 멈추는 골렘도 있다는데, 골렘이 흔한 것이 아니라 별 신경은 쓰지 않았다.
공성 골렘을 왕국마다 몇 기씩은 가지고 있지만, 실제 전쟁에서 사용된 일은 거의 없다시피 했다.
만약 저쪽에서 공성 골렘을 사용하면, 이쪽도 골렘을 내보내거나 공성병기를 동원해 파괴해야 한다는 게 정설.
사람이 파괴하기에는 버겁다는 말이다.
하지만 이정도 크기라면 가능해보였다.
‘문제는.’
어떻게 처리하느냐는 것.
딱 봐도 옛날 갑옷.
두꺼워서 검으로 뚫기는 힘들어보였다.
‘일단은.’
부딪혀보기로 하고 제일 앞에 오는 골렘에게 달려들었다.
휘두르는 무기를 피하며 검으로 찔러 봤지만, 역시 뚫는 것은 포기해야 할 것 같았다. 투구에 뚫려있는 구멍에 검을 찔러 넣고 헤집어 봐도 아무것도 걸리는 게 없었다.
마땅히 처리할 방법이 떠오르지 않았다.
다행인 것은 뛰지는 않는 다는 것. 걸어오니 움직임이 느리고 공격도 단조로워서 피하는 것은 쉬웠다.
‘갑옷만 입고 있었어도.’
하는 생각이 들었다.
드겔은 어떡하고 있나 고개를 돌려보니 골렘이 들고 있던 방패와 둔기를 뺏어들고 사정없이 두들기고 있었다.
꽤 효과는 있어보였지만, 투구가 떨어져나가고 팔다리가 떨어져나가도 다시 날아와 붙어버렸다.
“이건 정말 텅 빈 인형이군.”
“어떻소? 꽤 쓸 만하지 않소?”
그렇게 말하는 마탑주를 보니 그의 주변에 붉은 구슬 같은 것이 둥둥 떠다니고 있었다.
골렘의 숫자와 같았다.
그걸 본 루퍼드의 미간에 주름이 잡혔다.
저게 골렘의 핵이라면 이건 드겔의 말대로 텅 빈 인형.
저런 것도 가능한가? 하는 의문이 들었다.
“경은 언제까지 검만 고집할 텐가? 이것들은 사람이 아니네. 굳이 기사들처럼 상대해줄 필요도 없지.”
확실히 그의 말이 맞았다.
마상전투는 랜스, 랜스가 부러지면 마상무기, 말에서 내려서는 검. 자신이 무기를 사용하는 순서였다.
마상전투가 거의 없다보니, 평소에는 검만 들고 다니고 검만 써왔다.
가장 자신 있게 다룰 수 있는 무기도 역시나 검.
습관처럼 검부터 뽑게 되고 뭐든 검으로 해결해왔다.
자신에게 먹히지 않는 공격을 고집하던 크리스를 보고 한심하다고 생각했었는데, 지금은 자신이 그러고 있었다.
검으로 어쩔 수 있는 것들이 아니었으니까.
일단 검을 검 집에 넣고 골렘들의 무기를 뺏기 시작했다. 힘은 생각이상으로 강했지만 무기를 뺏는 건 그리 어렵지 않았다.
빼앗은 무기는 바로바로 뒤로 던져버렸다.
다행히 똑똑하지는 않았다.
무기를 뺏기자 그냥 맨손으로 공격해왔지만, 그런 느린 공격에 당할 리가 없었다.
그때 창문이 깨지는 소리에 고개를 돌려보니 19호가 뒤로 던진 무기를 밖으로 던지고 있었다.
그걸 보자 좋은 생각이 떠올라 웃음이 났다.
“처리만 하면 되는 것 아닙니까?”
“그렇지.”
드겔의 대답에 루퍼드가 다가오는 골렘들을 밀어내고 창가로 향했다.
창을 등지자 역시나 자신에게 걸어오는 골렘들.
맨 앞에선 골렘이 자신을 잡으려고 팔을 뻗었고, 그 팔을 잡아 그대로 넘겨버렸다.
옛날 갑옷은 무거운 편이다.
그래봐야 40~50kg정도.
사람이 들어있지 않으면 갑옷을 입지 않은 기사 한명의 무게도 안 된다.
집어던지는 건 일도 아니라는 말.
“괜찮군.”
골렘 하나가 창밖으로 날아가는 것을 본 드겔이 한 말이었다.
루퍼드는 웃으며 빠르게 움직였다.
부수는 것도 아니고 밀고 던지는 것은 쉬웠다.
19호까지 나서서 돕자 순식간에 40기의 골렘을 밖으로 떨어트릴 수가 있었다.
루퍼드는 밖을 봤다.
밖에 있던 몬스터는 거의 정리된 상태.
갑자기 떨어진 골렘들을 포위하고 위를 쳐다보는 기사들에게 손으로 목을 그어보였다.
고개를 끄덕인 기사들이 골렘들에게 달려드는 것을 보고 웃으며 돌아섰다.
“잘 처리될 것 같습니다.”
그 말에 웃으며 고개를 끄덕인 드겔이 의자하나를 들고 중앙에 놓고 앉았다.
인상을 찡그리고 있는 마탑주를 보며 웃으며 말했다,
“차라리 사나운 개들을 이곳에 모아놨다면 더 위협적이었을 것이오.”
루퍼드는 수십 마리의 웨어울프가 달려드는 걸 상상하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게 많은 수를 한꺼번에 상대하는 건 정말 쉽지 않을 테니까.
“내 다음에는 그렇게 해드리리다.”
“하하하, 다음이 가능하겠소?”
빈정거리는 드겔의 말에 마탑주가 웃어보였다.
“충분히.”
“가만히 있는 것을 보면 다른 마법도 쓰기 힘들다는 말인데···. 그래 어디 또 뭘 준비했는지 봅시다. 아, 그전에 이제 대답해 주시오. 도대체 뭐가 아쉬워서 그런 자들의 개가 된 것이오?”
“이런, 내가 누군가의 명령이나 듣는 하수인으로 보이시오?”
드겔이 당연하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내 그대의 이름을 알게 된 게 마탑주가 되고 나서지. 내 뒤에 있는 자는 적어도 20년 넘게 훈련을 받았다고 하더군. 20년 전에 그대는 일개 마법사였소. 그러니 그대가 저런 이들을 키웠다는 게 말이 되질 않지.”
마탑주가 고개를 끄덕였다.
“확실히 저들은 내가 키운 자들이 아니요. 허나 나는 명령을 받는 존재는 아니라오. 다만 내게 필요한 것을 얻었고 그 때문에 잠시 손을 잡은 것 뿐. 나도 뭔가 말해주고 싶으나 그자에 대해 아는 것은 그리 많지 않소. 허나···.”
마탑주가 손가락을 까딱하자 책장에 꽂혀있던 책 한권이 날아와 바닥에 떨어졌다.
“작은 단서는 될 것이오.”
웃는 얼굴로 말하는 마탑주를 보는 드겔의 눈은 차갑기 그지없었다.
“그런 눈으로 쳐다보실 것 없소. 어차피 그자와 지킬 의리도 없고, 그쪽에서 날 팔았는데 가만히 있을 이유가 없으니. 그리고 그건 내 작은 선물이라오. 그거로도 그자를 쫓는 건 쉽지 않을 것이오. 생각보다 무서운 자이니.”
저쪽에서 팔았다고 말하지만, 이정도면 마탑주도 보여주기 위해 기다렸다고 봐도 좋았다.
“손도 대지 않고 코를 풀려고 하는 것을 보면, 확실히 도망칠 방법이 있나보군.
“허허 도망이라니.”
그렇게 말한 마탑주가 자리에서 일어났다.
“확실히 그자는 나에게도 껄끄러우니 서로에게 좋은 일이 되지 않겠소? 뭐 싫다면 그냥 두시오. 어차피 그자도 경도 마도시대가 열리는 것을 막지는 못할 테니.”
그이 말에 드겔이 크게 웃었다.
“하하하하. 마도시대? 그래 그쪽이 마도시대를 열겠다는 건가?”
“지금은 그리 비웃지만 다음에 또 보게 되면 그때는 그리 웃지 못 할 것이오. 오늘 본 것들은 내가 가진 힘의 일부일 뿐이니.”
그 말에 드겔이 피식 웃었다.
“내 약속은 지키는 사람이니 역사에 길이 남을 마법을 보여드리리다.”
마탑주가 지팡이로 바닥을 쿵 소리가 나게 찍었다.
그와 동시에 바닥에 기하학적인 문양이 나타나며 빛을 발했다.
드겔은 이런 상황에서 벗어날 수 있는 마법이 하나 떠올랐다.
“텔레포트라도 하려는가?”
미소 띤 마탑주의 얼굴을 보며 고개를 저었다.
“미쳤군.”
“하하하하하. 지금 그리 말하겠지. 하지만 다음에 내가 이곳으로 오면 그땐 이곳이 마도왕국의 수도가 될 것이오. 마법사가 자유로운 세상. 마법사가 신이었던 세상. 마도시대를 이곳에서 열 것이오. 아무도 나를 막을 수 없소.”
그런 마탑주를 보는 드겔의 눈이 차갑게 빛났다.
추천과 댓글은 글쟁이에게 큰 힘이 됩니다.^^
- 작가의말
한편 더 써야 끝나겠네요.
이번일 끝나면 다시 길리안 중심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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