넘버즈. 2장(2)
![DUMMY](http://cdn1.munpia.com/blank.png)
뭔가 생각하는 것 같은 길리안을 보며 라첼이 말을 계속 이었다.
“지금까지 한 말에 너무 실망할 건 없네. 이제부턴 조금 희망적인 얘길 해주지. 귀족들과의 작은 인연이라도 만들어 놓으면 나중에 조금이라도 도움이 될 걸세. 그리고 자네가 두각을 나타낸다면 오히려 그들이 그걸 이용해 자네를 품으려 할 수도 있고. 다만 그 처음이 힘든 것인데···.”
말끝을 흐리던 라첼이 길리안을 보면 씨익 웃어 보였다.
“자네 정말 운이 좋아. 저 녀석들이 그걸 만들어줄 거거든.”
라첼의 말에 길리안은 철창 안에 있는 현상범들을 보며 고개를 갸웃거렸다.
“사람은 은혜를 잊으면 안 된다고들 하지.”
“예. 당연한 것이 아닙니까?”
길리안의 대답에 라첼이 씁쓸하게 웃으면 말했다.
“뭐 당연하지만, 현실은 그렇지가 못해. 대부분은 은혜를 갚기보다 잊는 것이 빠르다네. 그게 사람이거든.”
“음···.”
“뭐 다 그렇다는 것은 아닐세. 그보다 대부분은 은혜는 잊어도 원수는 잊질 않아. 그리고 은혜를 갚는 것보다는 복수가 쉬울 때도 많다네.”
그 말에 길리안은 고개를 끄덕였다.
모두 인정하는 것은 아니지만 수긍할 수는 있었다.
“그리고 귀족들은 특히 더 그렇지. 그들은 원수를 절대 잊지 않아. 가문의 명성에 흠집을 낸 자들, 자신들의 명성과 명예에 잉크 칠을 한 자들을 결코 잊는 법이 없지. 우리네 같은 평민들은 귀족의 눈 밖에 나면 삶이 고달파져.”
그의 말이 틀리지 않았다.
지금은 귀족들의 세상이다. 그들이 가진 힘과 권력 앞에 힘없는 평민들은 무기력하게 당할 수밖에 없는 그런 세상이니까.
“그러니 자네도 조심하게. 기사가 되고 넘버즈를 꿈꾸는 자네는 특히 귀족들과 좋은 관계를 맺는 게 중요해.”
“네. 명심하겠습니다.”
“자네가 잡아 온 저놈들 중에 귀족들과 원한 관계인 놈들이 꽤 있어.”
“그렇습니까? 헌데 그게···.”
“무슨 상관이냐고?”
“예.”
“예를 들어주지.”
그렇게 말하며 라첼이 현상범 중 하나를 가리켰다.
“저기 저놈은 슈스펠 자작 가와 악연이 있는 놈이지. 2년 전쯤인가? 슈스펠 자작 가에서 운영하는 상단을 털었지. 귀족 가에서 운영하는 상단을 누가 털겠느냐 했는데 저놈이 저질러 버린 거야.”
그 일로 자작 가의 명예는 순식간에 땅에 떨어져 버렸고, 귀족들에게도 신뢰를 잃어서 엄청난 타격을 받았다고 한다.
명예회복을 위해 범인을 잡으려고 높은 현상금을 걸고 직접 나서기도 했지만 바로 잠적해버려서 잡는 게 쉽지 않았다.
“그렇게 2년이나 지나버렸는데 자네에게 잡혀 와 버렸군. 아 그리고 그때···.”
문을 벌컥 열고 안으로 들어서는 이들 때문에 라첼의 말은 끊겨버렸다.
“놈을 잡았다고 들었다.”
선두에 선 이가 라첼에게 다가와 물었다.
그의 목소리에서는 어떤 열기마저 느껴질 정도로 꽤 흥분한 것 같았다.
화려한 옷차림과 그런대로 준수한 외모였지만 왼쪽 뺨에 길게 나 있는 상처 때문에 인상이 좋게만 느껴지지는 않았다.
“이미 자백은 받았습니다. 직접 확인해보시겠습니까?”
사내가 고개를 끄덕이자 라첼이 알버트에게 눈짓을 했다.
그가 한 명의 현상범을 데리고 나오자 사내의 입가에 미소가 걸렸다. 하지만 웃는 얼굴과 다르게 눈빛은 사납게 빛나고 있었다.
사내가 현상범에게 다가가 머리채를 잡고 얼굴을 마주 보았다.
“크크··· 크하하하··· 맞아. 바로 이놈이었어. 반갑구나. 드디어 만났어.”
그러면서 다른 손으로 현상범의 뺨을 쓰다듬었다.
“내가 이날을 얼마나 손꼽아 기다렸는지 너는 아마 모를 것이다. 감히 내 얼굴이 씻을 수 없는 치욕을 남기고도 네놈이 무사할 줄 알았더냐? 조금만 기다려라. 아주 즐거운 시간이 기다리고 있으니까.”
그리고 일어나 현상범을 발로 찼다. 그가 쓰러지자 계속 발로 차고 밟아댔다.
재갈을 물려놔서 비명은 없었지만, 고통스러운 표정과 새어 나오는 신음에 길리안은 살짝 눈살을 찌푸렸다.
그렇게 무자비한 구타는 한동안 멈추질 않았다.
“하아, 하아··· 후우··· 조금 낫군.”
현상범이 정신을 잃을 때까지 폭력을 행사한 그가 미소를 지으며 돌아섰다. 그리고 옆에 있던 기사에게 손을 내밀었다.
기사가 건네는 자루를 받아 몇 번 흔들더니 그걸 라첼에게 던졌다.
“그 정도면 충분하겠지?”
묵직한 자루를 받아든 라첼이 안에 든 것을 보고 웃는 얼굴로 고개를 숙였다.
“물론입니다. 아 죄송스럽지만, 여기에 서명을 부탁드립니다.”
라첼이 내민 서류에 서명한 사내가 기분 좋다는 듯이 웃었다.
“이제 데려가도 되겠지?”
“그러시지요.”
그 말이 떨어지기 무섭게 사내와 같이 온 기사들이 현상범을 끌고 나갔다.
“이름은?”
“동부관청에서 일하는 라첼 프리만입니다.”
라첼의 이름을 들은 사내가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기억해두지.”
“감사합니다. 아 그리고···.”
“또 뭔가?”
사내가 귀찮다는 듯 인상을 쓰자 라첼이 길리안을 앞으로 밀며 재빨리 말했다.
“여기 이 아이가 놈을 잡아 왔습니다.”
라첼의 말에 사내의 시선이 길리안에게 향했다.
“오~ 그대가?”
뭔가 어떻게 돌아가는 건지 몰라 멀뚱멀뚱 서 있던 길리안이 머뭇거리자 라첼이 그의 발을 툭 찼다.
“기, 길리안 후버입니다.”
길리안이 고개를 숙이며 예를 취하자 라첼이 나서 입을 열었다.
“제 먼 친척뻘 되는 아이입니다. 놈을 잡았다는 소식을 제게 제일 먼저 알려서 경비대의 도움을 받아 이곳까지 급하게 데려왔습니다.”
“오오, 그랬는가?”
“이번에 아카데미에 입학하는 기사 지망생입니다.”
“정식기사도 아니고 현상금 사냥꾼도 아니란 말인가?”
“그렇습니다.”
“음··· 기사 지망생에게 당할 만큼 약한 놈은 아닐 텐데···.”
“운이 좋았습니다.”
길리안의 말에 사내가 다가와 얼굴과 몸을 훑어봤다.
“나이는?”
“열일곱 살입니다.”
“나이에 비해 상당히 좋은 체격이군.”
그러면서 길리안의 손을 잡아 손바닥을 살펴보는 등 꽤 관심을 보였다.
“수련을 많이 한 모양이군. 조금만 다듬으면 쓸 만한 기사가 되겠어.”
그 말에 길리안은 고개를 숙였다.
“감사합니다.”
“기사가 되는 길이 꼭 아카데미만 있는 것은 아니다. 자작 가에서 배운다면 더 뛰어난 기사가 될 수 있을 것이다.”
“말씀은 감사합니다만···.”
길리안이 뭐라 더 말하기 전에 라첼이 끼어들었다.
“이 녀석은 지금까지 시골영지에 살다가 오늘 막 수도에 도착했습니다. 어릴 때부터 아카데미에 들어가는 것이 꿈이었습니다.”
라첼의 말에 사내가 피식 웃었다.
“꿈이 너무 소박하군.”
그리고 길리안의 눈을 응시했다.
“뭐 좋아. 생각이 바뀌면 언제든 날 찾아오라. 난 인재에게 인색하지 않으니까.”
그렇게 말하고 돌아섰다.
“아 난 슈스펠 자작 가의 장남인 마누엘 폰 슈스펠이다. 길리안이라고 했던가?”
“예.”
“기억해두겠다. 어려운 일이 있으면 찾아오도록.”
그리고 길리안이 뭐라 말하기도 전에 밖으로 나가버렸다.
길리안은 잠시 멍하니 있다가 머리를 긁적였다.
“이건 무슨 상황입니까?”
그 물음에 라첼이 웃으며 말했다.
“자네에게 그리고 내게 좋은 상황이라네.”
“음···.”
“간단하게 말하면 저 죄수를 팔아 귀족에게 눈도장을 찍은 거지.”
그러면서 손에든 작은 자루를 흔들어 보였다.
“이건 부수입이고.”
그런 라첼을 보며 길리안이 살짝 인상을 찌푸렸다.
추천과 댓글은 글쟁이에게 큰 힘이 됩니다.^^
Comment ' 1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