넘버즈. 29장(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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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9 중앙기사단의 본부.
길리안은 부단장 콘라드의 안내를 받으며 그곳을 둘러보고 있었다.
기사단 전부가 머물 수 있는 건물과 수련과 훈련을 위한 공간과 시설을 모두 둘러봤다.
“이곳이 단장님께서 머무르실 곳입니다.”
단장과 부단장의 숙소만 따로 마련돼 있었는데 단장의 숙소는 지금 사는 저택과 비교해도 차이가 없을 만큼 컸다.
“건물의 구조는 조금씩 다르기는 하지만 큰 차이는 없습니다. 듣자 하니 이제는 넘버가 올라도 장소를 바꾸지 않는다고 하더군요.”
콘라드의 말에 길리안은 고개를 끄덕했다.
초창기에는 넘버즈만 서로 옮겨 다니고 기사단은 그대로 있었다고 한다. 그러다 언제부턴가 넘버즈는 물론 기사단 전체가 위치를 바꿔왔다.
2개 기사단 200명의 짐을 옮기기도 쉽지 않은 일. 물론 다른 사람들이 하는 일이지만 며칠은 걸렸다.
그러다 이번에 그런 불필요한 것을 없애자는 말이 나왔고 드겔을 비롯한 넘버즈 7명의 동의하에 이동하지 않고 그냥 번호만 바꾸는 것으로 결정이 됐고 왕의 허락도 받았다.
“그러니까 이곳이 제가 계속 머물 곳이군요, 넘버즈로 있는 동안에는.”
“그렇습니다. 크리 음···. 전 단장의 개인 물품은 모두 그의 가문으로 보냈습니다. 가구가 마음에 안 드시거나 필요하신 것은 말씀하시면 왕실에서 지급될 겁니다.”
“잠만 편히 잘 수 있다면 별 상관없으니 그냥 두세요.”
숙소에 배치된 고용인들의 인사를 받으며 걸음을 옮기는 길리안에게 콘라드가 말했다.
“일하는 이들이 마음에 들지 않으시면 다른 사람으로 언제든 바꿀 수 있습니다.”
“그건 지내봐야 알겠죠. 어차피 일과시간엔 거의 밖에 있을 테니, 별 상관없을 것 같습니다.”
그렇게 말하며 내부를 대충 둘러보고 침실로 가서 침대에 드러누워 잠시 눈을 감았다가 뜬 길리안이 웃으며 말했다.
“좋네요. 만족합니다.”
라고 말하는 그를 보며 콘라드는 웃을 수밖에 없었다.
크리스가 넘버즈가 돼서 왔을 때는 정말 난리였다.
오자마자 넘버즈 숙소가 이게 뭐냐고 불평을 늘어놓더니 내부를 아주 싹 뜯어고치고 가구도 새로 들여놨다.
그 정도는 아니더라도 보통 자신의 취향에 맞게 변화를 주기 마련인데 길리안은 그런 게 아예 없었다.
하긴 크리스는 자신의 숙소부터 점검했지만, 길리안은 기사들의 숙소와 훈련시설부터 꼼꼼하게 살폈다.
그와 비교해보면 사람이 달라도 너무 다른 느낌.
하긴 비교하는 것 자체가 그에게 실례가 되는 일이었다.
지금 가장 존경받는 기사가 그다.
나이나 출신 신분을 떠나서 가장 기사다운 기사를 꼽으라면 당장 그의 이름부터 나올 것이다.
그가 크리스를 이기고 정식 번호를 달고 이렇게 와줘서 고마울 정도였다.
이번 내부정리에서 수도에 있던 7개 중앙 기사단 중 인원이 제일 적어진 것이 제9 중앙기사단이다.
아직 도착하지 않은 제3 중앙기사단도 정리 대상이 63명이라지만 그보다 많았다.
처벌을 받은 이만 67명으로 모든 기사단 중 가장 많다는 건 정말 수치였다.
거기에 마탑주의 저택에서 튀어나온 오크들을 정리하며 35명의 기사가 사망했다. 그중에 제9 중앙기사단 소속 기사가 9명으로 수가 가장 많았다.
그 또한 수치라고 할 수 있었다.
그렇게 100명의 기사단이 24명으로 줄어버려서 더는 기사단이라고 할 수 없는 상황.
기사단의 사기가 바닥이었는데 크리스는 신경 쓰질 않았다. 그 상황에서 자신은 다른 곳으로 떠날 결심도 굳혔었다.
하지만 지금은 그 마음이 바뀌고 있었다.
바로 눈앞에 있는 젊은 단장 때문이었다.
“정말 이대로 만족하십니까?”
라는 콘라드의 물음에 길리안이 웃으며 말했다.
“네. 지내면서 불편하면 그때 조금씩 바꾸도록 하죠.”
“하하, 그러십시오. 그리고 혹시 이 버튼에 대해서는 들으셨습니까?”
벽에 있는 붉은색, 파란색. 흰색의 세 개의 버튼.
“못 들어 봤습니다. 그러고 보니 다른 곳에도 있었던 것 같군요.”
“보통 저택에 설치 돼 있는 줄이라고 생각하시면 됩니다.”
그 말에 길리안이 고개를 끄덕였다.
자신의 저택에서도 방에 있는 줄을 당기면 집사가 온다.
그러니 저 버튼도 누르면 사람이 온다는 말.
“파란색은 시중을 드는 고용인을 부르시는 겁니다. 고용인들의 숙소는 따로 있지만, 밤에도 한 명은 남아있으니 언제든 부르시면 됩니다.”
“그렇군요.”
“붉은색은 문을 지키는 병사를 부르는 겁니다. 명령을 내릴 일이 있으시면 부르시면 됩니다.”
“네.”
“그리고 흰색은···. 음, 한번 눌러보시지요.”
그 말에 길리안이 흰색 버튼을 꾹 눌렀다.
따로 소리가 나거나 그러지는 않았는데 잠시 후 사람 하나가 방안으로 들어왔다.
여자였고 상당한 미인이었다.
풍만한 가슴을 드러낸 상의는 그렇다고 쳐도 치마가 무릎까지만 내려올 정도로 짧았다.
“이쪽은 왕실에서 제공되는 노예입니다. 이곳에 상주하며 목욕시중이나 밤에 잠자리 시중을 들 겁니다. 마음에 안 드시면 다른 노예를 부르시거나 직접 고르셔도 됩니다만, 왕께서 꽤 신경 쓰신 거로 압니다.”
“음···.”
길리안은 노예를 쳐다보며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콘라드의 말은 왕의 호의이니 가급적 받아들이라는 말로 들렸다.
잠시 생각하던 길리안이 말했다.
“전 혼자 씻는 게 편하고 혼자 자는 게 편합니다.”
“크흠, 뭐 꼭 잠을 같이 잘 필요는 없지요.”
그 말에 길리안이 피식 웃었다.
무슨 뜻인지는 알고 있었으니까.
“혹시 할 줄 아는 다른 일은 없습니까? 글을 읽고 쓴다든지, 계산이라든지 뭐 그런 것 말입니다.”
그 말에 그녀가 할 줄 안다고 대답했다.
그리고 콘라드가 옆에서 설명을 해줬다.
노예에게도 등급이 있다.
넘버즈에게 아무 노예나 주지 않는다.
미모야 기본이고 상당한 교육도 받은 이런 고급 노예는 거의 몰락한 귀족 가 여식인 경우가 많았으니까.
그건 길리안도 어느 정도 알고 있는 부분.
“할 줄 아는 외국어는 있습니까?”
“칼마한 왕국 태생입니다. 14살까지 그곳에 있었습니다.”
“아, 이름을 안 물어봤군요.”
“제나입니다.”
“며칠에 한 번 한스라는 사람이 장부와 서류를 가져올 겁니다. 그걸 살펴보고 보고 계산이 틀리거나 이상한 부분이 있으면 내게 말해주면 됩니다. 그리고 시간이 날 때 칼마한의 말을 가르쳐주면 됩니다. 따로 시킬 일이 또 생기면 그때 말하겠습니다. 일하는 게 마음에 들면 계속 둘 겁니다. 그리고 원한다면 노예의 신분에서도 벗어나게 해주겠습니다. 물론 몇 년 후의 일이겠지만요.”
놀라서 눈을 크게 뜨고 대답을 못 하는 제나를 두고 길리안이 침실을 나왔다.
그 뒤를 따르던 콘라드가 말했다.
“노예에게 배우신다는 말입니까?”
“내가 모르는 것을 아는 사람에게 배웁니다. 그건 당연한 것이 아닙니까?”
“노예는 가축으로 돼 있습니다.”
“압니다. 법에 가축이라고 해서 그렇게 대하라고 명시돼 있지는 않습니다. 어떻게 대할지 어떤 일을 시킬지는 주인이 정하는 것 아닙니까. 전 2개 국어를 하는 가축을 본 적이 없습니다. 혹시 가축과 대화도 하고 욕정도 풀고 그러십니까?”
“하하 그럴 리가요.”
“제가 이상해 보이실 수도 있지만, 제가 살던 곳에선 죽을 때까지 노예인 자도 농노인 자도 없었습니다. 노력만 하면 단계를 거쳐 평민이 될 수 있었지요.”
“그런 곳이 있습니까?”
“네. 라이라프 영지는 그렇습니다.”
“음.”
“그리고 사람을 함부로 대하라고 배운 적이 없습니다. 신분이 낮아도 사람은 사람입니다.”
콘라드는 길리안의 말에 고개를 끄덕였다.
물론 길리안의 말을 다 수긍하고 받아들일 수는 없었지만, 그가 어떤 사람인지는 알 수 있었다.
“부단장님께도 배우고 싶은 것이 많습니다.”
“하하하, 전 단장님을 가르칠 실력이 못 됩니다.”
“부단장님과 겨루면 제가 이길 겁니다. 하지만 그렇다고 배울 점이 없는 것은 아니지요. 또 부단장님은 저보다 훨씬 많은 경험을 가지고 계십니다. 전 혼자 싸우는 것은 자신이 있습니다. 하지만 기사단을 이끌고 지휘를 해본 적은 없습니다. 그러니 많이 도와주십시오.”
그 말에 콘라드가 미소를 지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최선을 다하겠습니다.”
“노예를 농노로 만들고 농노를 평민으로 만든다고 하였소?”
“그렇습니다.”
베스터의 대답에 에런 왕은 고개를 갸웃했다.
“그래서 얻는 이익이 무엇이오? 농노로 만드는 것까지는 이해를 하겠소만···.”
라이라프의 사정은 그에게 들어서 좀 알게 됐다.
일단 인구가 적고 외부에서 유입되는 인구도 적으니 노예를 농노로 만드는 것은 어느 정도 수긍할 수 있었다.
물건 취급을 받는 노예와 다르게 사람으로 취급받고 자립적인 존재지만 이주의 자유는 없다.
영주와 예속 관계인 그들은 영주가 대여해준 땅에서 농사를 짓는 이들이다. 가정을 이루고 재산을 모은 것도 허락되고 공납과 부역의 의무를 진다.
대부분의 영지의 근간을 이루는 것이 바로 농노다.
“노예 중 열심히 일하는 자들은 농노로 만듭니다. 그리고 그것이 끝입니다. 농노에서 평민이 되는 것은 그들의 노력에 달려있습니다. 저는 단지 기회를 줄 뿐입니다.”
“음.”
“그리고 어떤 이익을 위해서라기보다는 영주로서 의무를 다할 뿐입니다.”
“영주로서 의무?”
“영지 민을 보호하는 것이 영주의 의무입니다. 그것이 가장 기본이요 첫 번째입니다. 다음은 그들을 배불리 먹이고 걱정 없이 살게 해주는 것입니다. 하지만 제가 일하지 않는 자를 먹여 살릴 수는 없지 않겠습니까?”
“그야 당연하지.”
“어차피 일하는 것은 사람입니다. 아무리 열심히 해도 벗어날 수 없는 굴레에서 사람은 포기하기 마련입니다. 노예에게 일을 시키고 한번 지켜보십시오. 볼 때는 열심히 일할지도 모릅니다. 하지만 보지 않는 곳에서는 그들은 일하지 않습니다. 그들은 딱 매질을 당하지 않을 만큼 일합니다.”
에런 왕은 고개를 끄덕였다.
그런 에런 왕을 보며 베스터의 말은 계속됐다.
“농노도 마찬가지입니다.”
따지고 보면 영주와 농노의 관계도 쌍무적인 계약의 관계이다.
물론 시작은 그랬다.
그 예속에서 벗어난 것이 바로 평민이지만, 예속에서 벗어나는 것이 말처럼 쉽지가 않았다.
농노가 영주의 직영 농장에서 행하는 부역은 영지마다 다르지만 주 3일에서 4일. 그러면서 자신들의 농사도 지어야 하고 추수 후에는 토지를 대여한 세금도 내야 한다.
돈을 모으기는커녕 생계유지도 빠듯하고 흉작이라도 들면 영주에게 식량을 빌릴 수밖에 없다.
그걸 또 갚는 것도 만만치 않고 그러다 보면 악순환이 반복되는 것이다.
“그런 농노들의 삶은 변화가 없습니다. 아무리 노력해도 손에 쥘 수 있는 것이 별로 없기 때문입니다.”
“그렇겠군.”
“영지 민을 배불리 먹이려면 그들이 열심히 일해 생산량을 늘려줘야 합니다. 그러니 저는 그들이 열심히 일할 수 있게 해줘야 하지 않겠습니까?”
“흐음.”
“결국 모든 것은 그들의 손에 달려있습니다. 그들이 잘 살면 영주인 저도 잘살게 됩니다. 영주가 그들을 보호한다고는 하지만 영주와 기사들만 나가서 싸우는 것은 아닙니다. 그들은 전쟁에도 동원되고 결국 같이 싸우는 것입니다.”
“그건, 그렇군.”
“제 가문의 시조가 이렇게 말했습니다. ‘희망이 없는 세상은 발전이 없다. 발전이 없는 사회는 고인 물처럼 썩기 마련이다.’라고 했습니다. 지금까지 제 선조들도 그 말을 되새기며 영지를 발전시키기 위해 노력했습니다. 그리고 그건 저도 마찬가지입니다.”
“음.”
“저는 단지 적당한 세금을 걷으며 기회를 줄 뿐입니다. 열심히 일한 자는 재산을 모으고 땅을 가질 수 있습니다. 공짜로 주는 것이 아니라 그들에게 제가 파는 것입니다. 자기 땅을 일구는 자와 남의 땅을 일구는 자는 마음부터다 다릅니다.”
“그렇겠군.”
“그리고 농노는 군역의 의무는 지지 않습니다. 그들을 전쟁에 동원하는 것은 부역을 대신해서입니다. 하지만 평민은 군역의 의무를 집니다. 그들은 자신의 재산과 가족을 보호하기 위해 전장에 나섭니다. 강제로 동원된 자와 싸워야 할 이유가 있는 자는 다릅니다.”
“그렇지.”
“그 때문에 그들이 평민이 될 수 있는 기회를 주는 것이기도 합니다. 열심히 노력한 자가 그에 대한 보답을 받아야 하는 것은 당연한 것이 아닙니까? 저는 적어도 그렇게 생각하고 제 영지에서는 그게 당연한 겁니다.”
그의 말에 에런 왕은 고개를 끄덕이며 생각에 잠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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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작가의말
보면 아시겠지만 라이라프의 영주는 생각이 좀 다른 사람입니다.
보통 영지 물의 주인공급이랄까요.
길리안은 그런 영지에서 자라며 기사를 꿈꾸던 캐릭터죠.
그렇게 이 이야기가 시작된 겁니다.
아 참고로 저 노예는 길리안 줄 거 아닙니다. ㅎㅎ;;;
하루분이 계속 밀리네요.
11월 연참 공지가 떴는데....
당연히 참가할 겁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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