넘버즈. 29장(7)
톡톡톡톡···
왕좌에 앉아 팔걸이를 손가락으로 톡톡 치는 에런 왕을 보던 드겔이 피식 웃었다.
저건 에런 왕이 뭔가 생각하거나 불안할 때 하는 행동.
어쩌면 지금은 둘 다일 수도 있었다.
“불안한가?”
하고 드겔이 물었지만 아무런 대답 없었다.
“이보게 에런.”
“응? 날 불렀는가?”
그때야 고개를 돌리는 에런을 보고 씁쓸하게 웃은 드겔이 다시 말했다.
“불안하냐고 물었네.”
“아~ 그랬는가? 불안하기는···. 그저 생각이 좀 많아서 그런 것뿐이네.”
“쯧쯧. 속일 사람을 속여야지. 자네와 함께한 세월이 얼마인데 그걸 모를까 봐 감추는가? 이보게 크락시스. 경이 보기에는 어떤가?”
“음, 조금 불안해 보이십니다.”
“마르콘 자네가 보기에는 어떤가?”
드겔의 물음에 서류뭉치를 살피던 마르콘이 고개도 돌리지 않고 말했다.
“많이 불안해 보이는군. 신경 쓰이니 그 소리 좀 그만 내게.”
그 대답에 에런 왕이 피식 웃었다.
역시 오랜 시간 자신의 곁은 지켜온 이들이란 생각이 들었다.
“그래, 나의 왕께서는 무엇이 그리 불안하신가?”
드겔의 물음에 에런 왕이 한숨을 내쉬고 말했다.
“영주 회의가 일주일도 남지 않았네.”
그리고 아무 말도 없자 잠시 기다리던 드겔이 말했다.
“왜 막상 칼을 뽑아 든 것이 걱정되는가?”
그 말에 에런 왕이 고개를 저었다.
“그건 아니네. 다만···. 하나도 오지를 않는군.”
“음?”
“먼 곳에 있는 영주들에게는 빠듯한 시간이지. 하루 이틀 늦을 수도 있고. 하지만 가까운 곳에 있는 이들은 아니지 않나? 수도에 머물고 있던 몇 명을 제외하면 아직 한 명도 도착하지 않았네. 이게 말이 되는 일인가?”
“갑자기 소집된 영주 회의네. 전쟁이 났으니 군대를 끌고 오라는 것도 아니고 안건을 알려주지도 않았네. 그러니 그들도 이유를 알아볼 테고 알고 나면 생각이 많을 테지. 왜 모두 군대라도 끌고 올까 봐 걱정되는가?”
“설마 그러기야 하려고···.”
“그럴 일은 없을 것이네. 영주들이 힘을 모아 군대를 일으키는 것이 쉬운 것도 아니고 그럴만한 이유도 없네. 그래도 끼리끼리 모여 이런저런 의견은 나누겠지. 핑계를 대고 대리인을 보내는 이도 있겠지. 어찌 됐든 오기는 올 테니 걱정하지 말게. 오지 않는 이도 있을 테지만 몇 명 되지 않을 거라고 보네. 자네가 걱정해야 하는 것은 그들이 언제 오느냐가 아니라 왔을 때 어떤 모습을 보일 지라네.”
“음···.”
“기왕에 큰 결심을 하고 뽑아 든 검이네. 마음을 세웠으니 자네가 얻고 싶은 결과를 만들게. 누가 왕좌의 주인인지, 누가 이 나라의 왕인지를 영주들에게 똑똑히 각인시키란 말이네. 왕권을 강화하고 하고 싶은 걸 하려면 지금 밖에는 없네.”
“알고 있네. 내 이번엔 마음을 굳혔으니 걱정하지 말게나.”
그렇게 말하는 에런 왕을 보며 드겔은 미소를 지었다.
그때 서류 더미에 파묻혀 있던 마르콘의 목소리가 들렸다.
“무슨 대단한 고뇌라도 하고 있나 했더니 고작 아무도 안 와서 삐진 것이 아닌가? 쯧쯧쯧.”
혀를 찬 마르콘이 다시 말했다.
“그보다 이곳에 사람이 4명이나 있는데 왜 일을 하는 사람은 나뿐인 건가? 여보시게 크락시스 경. 이곳에선 딱히 호위도 필요 없지 않은가? 나 좀 도와주시게.”
“크흠, 저는 이게 일입니다.”
“거 매일 그렇게 서 있으면 힘들지 않나. 앉아서 쉰다 생각하고 여기 앉아서 조금 도와주시게나.”
“전 궁내의 경비태세를 점검하고 오겠습니다. 영주들이 왔을 때 얕보일 수는 없으니···. 그럼.”
그리고 빠른 걸음으로 대전 밖으로 향했다.
“허허, 이보게 드겔.”
마르콘의 부름에 드겔이 자리에서 일어났다.
“나는 기사들을 격려하고 오겠네. 요즘엔 잠시 궁둥이를 붙이고 앉아있을 시간도 없으니. 이것 참.”
그러면서 크락시스의 뒤를 따랐다.
둘의 뒷모습을 보며 인상을 쓰던 마르콘이 에런 왕을 쳐다봤다.
“어디 갈 생각 말게.”
“음, 내가 어딜 가겠는가? 할 일이 산더미처럼 쌓였는데.”
“그렇지. 잘 아는군.”
그때 근위기사가 대전에 들어와 말했다.
“라이라프 남작 령의 영주. 로드 베스터가 왕을 뵙길 청하고 있습니다.”
그 말에 에런 왕이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지금 라이라프의 영주라고 했는가?”
“그렇습니다.”
“허허. 동부 끝에서 이렇게나 빨리? 어서 들라 하게. 아니지. 접견실로 안내하게. 차라도 한잔하고 싶으니.”
기사가 나가자 에런 왕이 마르콘을 보고 말했다.
“이거 미안하게 되었네. 내 잠시 그를 보고 오지.”
그 말에 마르콘이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나도 가겠네. 왕이 가는데 시종장이 이런 곳에서 서류나 보고 있을 수는 없지. 나도 원래 내 일을 하겠네. 이건 나중에 자네가 밤새도록 검토하고 인장을 찍든지 말든지 알아서 하게.”
그 말에 에런 왕이 피식 웃으며 말했다.
“그냥 두게. 어차피 내 일이고, 내가 알아서 할 터이니.”
“그럼 도와 달라는 소리나 하지 말든가. 아무튼, 먼저 가게. 차를 준비해서 갈 테니.”
“라이라프의 영주, 베스터 폰 크라이프가 왕을 뵙습니다.”
“어서 오시오. 베스터 남작. 오랜만이오.”
“작위를 인정받을 때였으니 15년 만입니다.”
“그렇군. 세월이 참 빠르오. 아, 이리 앉으시오.”
감사를 표한 베스터가 자리에 앉자 에런 왕이 말했다.
“라이라프면 동쪽 끝인데 이렇게 빨리 오다니. 솔직히 놀랐소.”
그건 그랬다.
수도에서 출발한 전령이 왕국의 가장 먼 곳까지 가는 데 삼일이 걸리지 않는다.
그건 각 영지나 중요 교통요지에 설치된 전령국 때문에 가능한 일.
출발한 전령이 목적지까지 가는 것이 아니라 전령국 까지 가서 전달하면 다른 전령이 또 말을 타고 다른 전령국으로 전달하는 방식이다.
그렇게 목적지까지 말이 쉬지 않고 계속 달리는 것이나 마찬가지라 빠르게 소식을 전할 수가 있었다.
타노스 3세 때 만들어진 것이고 지금까지 잘 운영되는 편이었다.
이건 전령의 경우고 영주들은 직접 오는 것이니 시간이 오래 걸릴 수밖에 없었다.
“소식을 받고 다음날 바로 출발했습니다. 전쟁이 난 것이라면 군대를 준비하느라 시간이 걸리겠지만, 그냥 회의라면 제 몸 하나 움직이면 그뿐이니 오래 걸릴 이유가 없습니다.”
“설마 혼자 온 것이오?”
“호위로 기사 둘을 데려왔습니다. 루튼에서 배편을 이용해 시간을 좀 더 줄일 수 있었습니다.”
수도 북쪽에 있는 티모스 강은 왕국의 동과 서를 잇는 큰 강.
배를 이용하면 확실히 육지로 오는 것보다 빠르기는 했다.
에런 왕은 고개를 끄덕이며 씁쓸하게 웃었다.
동쪽의 가장 멀리 있는 영주가 가장 일찍 도착한 이 상황이 그리 기분 좋은 것은 아니었으니까.
물론 베스터 남작에겐 아무런 불만도 없었고, 빨리 와준 그에게 고마운 마음이 들었다.
보통 이렇게 왕이 영주를 소집하면 왕의 직영지에 들어섰을 때 사람을 먼저 보내 도착을 알리는 경우가 많았다.
그건 다른 이유보다 대우를 받고 싶어서라고 하겠다.
왕도 그 작위에 따라 사람을 보내 의전을 해주는 것이 보통이다.
그런데 그는 그것도 없었다.
아무리 작은 영지의 영주라지만 기사 두 명만 데리고 이렇게 올 줄은 몰랐으니까.
“먼 길 오느라 고생이 많았소.”
“별말씀을. 아, 그보다 오는 길에 좋지 못한 소문을 들었습니다.”
“좋지 못한 소문?”
“예. 이번 영주 회의는 왕께서 영주들을 모아 놓고 죽이기 위한 함정이라는 소문이었습니다.”
베스터의 말에 에런 왕의 인상이 찌푸려졌다.
“내가 영주들을 죽이려 한다?”
“예. 그 소문을 들은 것이 리폰에 배가 정박했을 때였으니 지금쯤은 루튼까지는 퍼졌을 것 같습니다.”
“음, 그런데 남작은 그 소문을 듣고도 수도에 오고 싶었소?”
“저는 헛소문이라고 생각했습니다.”
“이유는?”
“모든 영주를 모아 놓고 죽인다는 게 가능할지는 몰라도 감당할 수는 없는 일이라 생각했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제가 잘못한 것이 없기 때문입니다. 영주의 의무를 다 해왔으니 왕께서 절 죽일 이유가 없지 않겠습니까. 해서 이렇게 온 것입니다.”
그 말에 에런 왕이 미소를 지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모든 영주가 그대 같다면 내 걱정할 것이 없겠소. 허나 그렇지 못한 것이 문제겠지. 난 남작의 말대로 영주들을 죽일 생각이 없소. 물론 몇 명은 벌하고 싶기는 하지만 그건 회의 때 말을 할 것이고···. 어째 영주들이 움직이질 않더라니. 그게 소문 때문이었나 보군. 허허, 이것 참.”
인상을 쓰며 한숨을 내쉬는 에런 왕에게 베스터가 말했다.
“그리 걱정하실 일은 아니라고 생각합니다.”
“걱정할 일이 아니라 하였소?”
“그렇습니다. 혹시나 하여 리폰의 영주를 만나봤습니다. 그가 어떻게 생각하는지 궁금해서였습니다. 그는 소문의 진원을 밝히려고 노력하고 있었고 정리가 되는 대로 며칠 내로 회의에 참석하러 온다 하였습니다.”
“음, 적어도 한 명은 더 온다는 말이로군.”
“좀 더 영주들을 믿으십시오. 영주들은 왕의 봉신들이고 왕께선 영주들의 군주이십니다. 혹여 그런 말도 안 되는 소문에 흔들려 왕명을 어기는 영주가 있다면 벌하시면 그만입니다.”
“그게 간단한 것이 아니지 않소?”
“어려울 것은 또 무엇입니까?”
“만약 내 명을 어긴 영주가 듣는 영주보다 훨씬 많다면 어떻게 해야 하겠소?”
“그 정도로 왕과 영주 사이의 신뢰가 깨졌다면 더는 왕국의 존립이 어렵다는 말입니다. 당연히 왕을 따르는 영주들과 힘을 합쳐 그들을 벌하고 질서를 바로잡아야 하겠지요.”
“음···.”
“그건 고민할 일이 아니라 당연히 해야 하는 일입니다. 왕국의 질서를 유지하는 것은 왕가의 책임이고 왕의 의무입니다. 군주와의 관계를 떠나 왕국에 일이 생기면 영주로서 의무를 다해야 하는 것도 마찬가지입니다. 이딴 소문에 휘둘려 회의에 참석조차 못 하는 영주가 전쟁이 났을 때 군대를 끌고 오리라 생각지 않습니다.”
고개를 끄덕이는 에런 왕을 보며 베스터가 계속 말을 이었다.
“왕께서 걱정하시는 것은 이해합니다. 하지만 말씀하신 것은 만약의 경우입니다. 그런 자들이 전혀 없을 거라고는 저도 말씀드리지 못하겠습니다. 그래도 참석하지 않는 영주보다는 참석하는 영주가 훨씬 많을 거로 생각합니다. 그러니 걱정하지 마십시오.”
“그대의 말을 들으니 마음이 든든하오. 그럼 내가 어떻게 대처를 해야 하겠소?”
“무슨 대처를 하신다는 말씀입니까?”
“그 헛소문에 대해서 말이오.”
“이미 퍼진 소문을 어찌 막겠습니까? 영주들 개인의 판단에 맡기시고 결과에 따라 행동하시면 될 것 같습니다.”
에런 왕은 미소를 지으며 그를 봤다.
특별한 대안을 제시해 주는 것도 아니고 누구나 알고 누구나 할 수 있는 말이었다.
그냥 원리원칙에 충실한 말만 하는데 듣고 나니 마음이 편했다.
“내 남작에게 듣고 싶은 말이 아주 많소. 먼 길을 와서 피곤하겠지만, 좀 더 이야기를 나누고 싶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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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작가의말
쉬는 날이 더 바쁘군요.
쉰 것 같지도 않고.
음... 전 몇 편이 밀린 거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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