넘버즈. 22장(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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왕비는 주변을 둘러봤다.
오른쪽에는 빈민들이 왼쪽에는 자신이 이곳에 있음을 듣고 온 귀족들과 귀족가의 부인들이 있었다.
기사들에게 미리 명을 내려 귀찮은 귀족들의 접근을 막아 그들은 꽤 오래 기다리고 있었다.
이럴 때가 아니면 이곳을 찾아보지도 않을 이들.
왕도 돌보지 않는데 어차피 그들에게 뭔가를 기대하긴 힘들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귀족들을 쳐다보던 그녀가 고개를 돌렸다.
“재판관 모두 확인하였습니까?”
“그, 그것이 너무 많습니다.”
“당연히 많겠지요. 수천 명의 탄원을 받아 작성한 것이니까요. 그래서 여러 명을 부른 것이 아닙니까?”
“자, 잠시만 더 기다려주시면···.”
“오늘 중으로 끝내고 싶으니 우선 확인한 이들부터 소환하세요.”
그 말에 다른 재판관이 자리에서 일어나 말했다.
“이건 한쪽의 얘기만 듣고 진행하실 일이 아니라 생각됩니다.”
“그래서 그대들을 부른 것이 아닙니까? 양측의 얘기를 듣고 판결을 내리라고. 그게 그대들의 일이 아닙니까?”
“하지만 대부분이 귀족이고 작위와 영지를 가진 귀족도 있습니다. 폐하의 기사들과 관리들도 있으니 좀 더 신중하게···.”
“지금 내가 신중하지 못하다는 겁니까?”
“그런 뜻이 아니라 재판을 진행하기위한 절차라는 게 있으니···.”
“지금 그 절차를 밟고 있는 것이 아닙니까? 그저 시간을 좀 단축하자는 것인데 무슨 문제라도 있습니까?”
“그것이 재판을 진행한다고 하여도 충분한 증거가 없어 죄의 유무를 판단하기 힘듭니다. 그러니 대상을 선정할 만한 시간적 여유를 조금 주셨으면 합니다.”
“지금 그럴 여유가 있어 보입니까? 지금 상황이 그대들에게는 아무렇지 않게 느껴지는 겁니까? 왕성 앞에 수만의 사람들이 모여 야유를 한다는데 그걸 모르는 겁니까? 알면서도 아무것도 느끼지 못하는 겁니까?”
“하지만 이렇게 하신다 하여···.”
“됐습니다. 어차피 재판을 하고 판결을 하는 것도 나도 할 수 있고, 그 권한도 있으니.”
그리고 옆에 있던 기사들을 보며 말했다.
“경들은 명단을 받아 거기 적힌 이들을 이곳으로 데려오세요.”
기사들이 대답을 하고 재판관들에게 다가가 명단을 받아 확인했다.
“정말 이들을 데려옵니까?”
“도대체 몇 번을 말해야 하는 건가요?”
“하지만 여기엔 넘버즈인 크흠. 기사도 있습니다만···.”
“그래서요?”
기사들이 아무 말 없이 서로를 쳐다보는 것을 본 왕비가 언성을 높였다.
“그래서 데려오지 못하겠다는 말입니까!”
“영지를 가진 영주의 이름도 있습니다. 무지하고 하찮은 이들의 말만 들으시고 그들의 명예에 흠을 내면 오히려···.”
“데려오라 하였습니다.”
“하지만···.”
왕비가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하지만, 하지만, 하지만!!”
차가운 눈으로 기사와 재판관들을 본 왕비가 걸음을 옮겼다.
“그대들의 눈에는 내가 왕비로 보이지 않는 겁니까? 옷을 이렇게 입으니 평민의 아낙정도로 보이는 겁니까? 왕비인 내가 주관하는 재판이면 내가 책임을 진다는 말입니다. 그런데 뭐가 문제인겁니까?
“영지를 가진 영주나 넘버즈의 기사는 아무래도···.”
“왜요? 내가 그들보다 밑에 있다는 겁니까? 도대체 그대들은 누구를 섬기는 사람들입니까? 폐하의 기사이고 폐하를 대신해 법을 집행하는 자들이, 왕가의 녹을 먹는 자들이 어떻게 나의 말에 움직일 생각조차 하지 않는 것입니까?”
“그런 것이 아니라.”
“닥치세요! 그런 것이 아니면 무엇입니까? 도대체 그대들은 누구의 사람인겁니까? 도대체 누구의 명을 따르는 사람들이냔 말입니다. 왕가를 위해 일하는 이들이 맞기는 한 것입니까? 하아~.”
깊은 한숨을 쉰 왕비가 빈민들이 있는 쪽으로 돌아섰다.
“내 이 나라의 왕비이나 힘이 없어 그대들의 탄원조차 들어주지 못함이 부끄럽고 또 미안합니다.”
그리고 고개를 숙였다.
고개를 든 왕비가 손수건을 꺼내 눈가를 훔치며 빠른 걸음으로 막사로 들어가 버리자 당황한 기사와 재판관들이 서로를 쳐다봤다.
“지, 지금이라도 원하시는 대로 해드려야 하지 않겠소?”
“하지만 그랬다가 정말 큰일이 날 수도 있습니다.”
“그래도 왕비가 책임을 진다하지 않습니까?”
“아무리 그래도 어찌 천한 자들의 말만 듣고 이들을 데려온다는 말입니까?”
“왕비입니다. 폐하의 귀에 들어가겠지요.”
“폐하께서도 당연히 그들의 손을 들어주시겠지요. 저런 천민들과 비교가 될 거라 생각합니까?”
“우리가 움직이지 않겠다는 것이 아니었지 않습니까? 무조건 명을 따랐다고 나중에 잘못될 수도 있는 것이니.”
“그건 그렇지만.”
“음.”
“이것 참.”
“괜찮으십니까? 어머님.”
“난 괜찮아요.”
“울지 않으셨습니까?”
왕비는 담담한 얼굴로 고개를 끄덕였다.
“조금만 더 호통을 치셨으면 분명 명에 따랐을 겁니다.”
노엘리아의 말에 왕비가 고개를 저었다.
“그런 문제가 아니에요. 그리고 그렇게 해서 저들을 움직여도 소용없는 일이니.”
그러면서 반지를 빼 옆에 있는 여기사에게 건넸다.
“이걸 폐하께 전하고 방금 본 것을 소상히 말씀드리세요.”
기사가 뭐라 대답도 하기 전에 아레샤가 후다닥 달려와 기사의 손에 든 반지를 집었다.
“제가, 제가 다녀오겠습니다.”
그리고 대답도 듣지 않고 막사 밖으로 달려 나갔다.
노엘리아가 따라 나가려 하자 왕비가 그녀를 말렸다.
“그냥 두세요. 아레샤가 가는 것이 더 나을 테니.”
“그럼. 일부로 그러신 겁니까?”
왕비는 고개를 저었다.
“이렇게까지 내말이 통하지 않을 줄은 몰랐어요. 하지만 이런 상황도 어느 정도는 생각해 두었으니.”
그런 왕비에게 노엘리아가 걱정스러운 듯 다시 말했다.
“아버님이 움직이지 않으시면 어쩌려고 그러셨습니까?”
“그러면 어쩔 수 없는 일이지요. 그래도 뜻있는 이들이 움직이고 많은 백성들의 원성을 들으셨을 테니 한번 지켜봐요. 어떤 결정을 내리시는지.”
“하하. 언제까지 도망치기만 할 셈이냐!”
루퍼드는 크리스의 공격을 피할 뿐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보는 이가 있었다면 크리스의 말에 수긍해 고개를 끄덕일 지도 몰랐다.
그만큼 크리스의 공격은 매서웠고 루퍼드는 간발의 차이로 피하거나 검을 쳐내며 물러설 뿐.
하지만 일방적으로 밀리는 것처럼 보이는 루퍼드의 눈빛과 표정에는 여유가 있었다.
‘확실히 그와는 다르군.’
루퍼드는 크리스와 길리안을 비교해보는 중이었다.
눈에 독기를 품고 살기를 내뿜으며 검을 휘두르는 크리스는 집요하게 얼굴을 노리고 있었다.
자신의 왼쪽 뺨에 난 상처를 똑같이 갚아주겠다는 의도가 눈에 보일 정도.
그래서 공격을 피하는 것도 막는 것도 그리 어렵지가 않았다.
그렇지 않다고 해도 별 차이는 없었겠지만.
여차하면 자신을 죽일 생각도 품고 있을 것이다.
그만큼 보통 기사들은 막거나 피하기 힘들 정도의 매섭고 날카로운 공격이지만 자신의 입장에서는 딱 그 정도였다.
‘그러고 보니.’
크리스와 직접 검을 맞대보는 것은 처음이었다.
넘버즈는 서로 경쟁하는 관계.
번호가 곧 강함의 순서다.
그래서 밑에서 도전해서 이기면 그 번호를 넘겨줘야한다.
서로 대련을 통해 실력을 키운다면 좋겠지만, 그건 번호가 낮은 이들에게나 좋은 것이지 높은 쪽에서는 오히려 손해이니까.
자신도 처음에 넘버즈에 도전해서 이 자리에 올라올 때까지 겨뤄본 것을 빼면 따로 붙어본 적이 없었다.
관계가 좋은 미네르바나 로렌스, 드레드 같은 이들과도 마찬가지.
그중 로렌스와는 목숨을 걸고 싸운 적이 있지만 그 이후로 검을 맞대보지는 않았다. 그리고 당시에도 로렌스가 달려들지 않았다면 아마도 지금까지 붙어보지 않았을 것이다.
크리스의 경우도 그가 넘버즈에 오를 때 본 것과, 워낙 이런 저런 대회에 참가하는 것을 좋아해서 그때 본 것이 전부였다.
그래도 당시에는 꽤 한다고 생각했었다.
아니 얼마 전에도 실력은 확실히 있다는 평가를 하고 있었는데 비교 대상이 길리안이 되니 그가 뛰어나단 생각이 들지 않았다.
크리스는 눈에 띄고 주목받는 것을 좋아한다.
그래서인지 보는 이들이 탄성을 자아낼 만큼 그의 검술과 움직임은 화려하다.
다르게 말하면 동작이 크고 불필요한 움직임도 많다 것.
그에 비해 길리안은 투박하다 싶을 정도로 단순하고 불필요한 움직임이 없었다. 그의 동작이 클 때는 그만큼의 힘이 실려 있을 때 뿐.
루퍼드는 크리스의 검을 쳐내고 바로 다시 검을 뻗어 그의 복부를 찔렀다.
큰 타격 음은 없었지만 크리스가 서너 걸음 물러났다.
“도망치는 게 아니다. 너에게 기회를 줬을 뿐이지.”
“훗. 그 정도로 되겠나?”
복부를 손바닥으로 툭툭 치며 말하는 그를 보고 루퍼드가 피식 웃었다.
“확실히 좋은 갑옷이구나. 하지만.”
말을 마침과 동시에 크리스의 얼굴을 향해 검을 뻗었다.
순식간에 확대되는 루퍼드의 검에 크리스는 급히 검을 휘둘러 쳐냈다.
“갑옷으로 모두 가릴 수는 없지. 여기저기 구멍도 있고.”
그 말에 크리스가 검으로 자신의 투구를 툭툭 쳤다.
“마음껏 노려봐라.”
“원한다면.”
그렇게 말한 루퍼드가 검을 뻗었고 크리스도 맞받아쳤다.
그렇게 한동안 서로의 얼굴을 노린 공방이 이어졌다.
루퍼드는 크리스가 검을 쳐내자 그대로 빠르게 몸을 회전하며 검을 거꾸로 쥐고 찔렀다.
타격부위는 아까와 같은 복부.
푹 소리가 나며 크리스가 뒤로 쭉 밀려났다. 이번엔 서너 걸음이 아니었다.
루퍼드가 돌아서며 그런 크리스를 보고 웃으며 말했다.
“역시 좋은 갑옷이야.”
“이 개자식!”
성난 크리스가 빠르게 거리를 좁히며 검을 높이 쳐들었다. 얼굴에 상처를 내기보단 베어 죽이겠다는 듯 검을 휘둘렀다.
루퍼드는 맞받아 칠 생각이 없는 듯 뒤로 물러나며 몇 번을 피했다.
“이제야 제대로 할 마음이 생겼나보군.”
“으아아아!”
크리스가 고함을 지르며 높이 검을 쳐들었을 때 루퍼드의 검이 일직선으로 쭉 뻗어나갔다.
크리스는 검을 든 자세 그대로 멈춰 섰다.
“동작이 너무 커.”
말을 마친 루퍼드가 검을 거두며 한번 털자 땅에 핏자국이 새겨졌다.
“크윽.”
크리스가 검으로 땅을 짚으며 한쪽 무릎을 꿇었다.
복부에 손을 대었다 떼니 손에 묻은 피가 보였다.
“너의 좋은 갑옷도 세 번이면 뚫리는 구나. 그보다 엄살이 너무 심하군.”
그러면서 투구의 눈구멍을 향해 검을 찔렀다.
그걸 피해 바닥을 구른 크리스가 일어나며 말했다.
“나한테 왜 이렇게 까지 하는 거냐?”
“뭐. 좋은 경험을 시켜주려는 의도지.”
검을 찔러오는 루퍼드를 보며 크리스는 이를 악 물었다.
다시 시작된 공방.
하지만 크리스는 이전에 비해 현저히 밀리고 있었다.
“엄살이 정말 심하구나.”
“죽여 버리겠다.”
“그렇게 느린 검으로 과연 그럴 수 있을까?”
크리스가 연신 고함을 지르며 미친 듯이 달려들었다.
한동안 뒤로 피하기만 하던 루퍼드가 피식 웃으며 말했다.
“눈앞에서 그만큼 머물러 줬는데도 옷자락 하나 베질 못하는구나.”
말이 끝나자마자 루퍼드의 움직임이 변했다.
빠르게 움직이는 그를 따라 크리스도 이리 저리 방향을 틀었다.
크리스가 루퍼드를 노리고 검을 쭉 뻗었을 때 그의 모습이 갑자기 눈앞에서 사라졌다.
그리고
“크윽.”
이번에는 손을 잡고 물러나는 크리스.
검을 놓친 그의 오른 손에서 피가 뚝뚝 떨어지고 있었다.
검을 잡고 있는 손바닥부분.
그곳을 루퍼드가 찌른 것이다.
“기사가 검을 놓치면 쓰나.”
바닥에 있는 검을 크리스 쪽으로 날려주니 그가 왼손으로 검을 잡았다.
“왼손으로도 검은 휘두를 수 있지 않은가?”
“날 죽일 셈이냐?”
“그럴 마음은 없다만.”
루퍼드가 또다시 움직였다.
“가만히 있으면 죽을 수도 있지.”
장난이 아니라는 듯 살기를 내뿜으며 달려드는 루퍼드.
크리스는 이를 악물고 대항했다.
하지만 오른 손으로도 베지 못한 루퍼드를 왼손으로 베기는 역시나 힘들었다.
거기에 갑옷을 입지 않은 만큼 자유롭고 빠른 움직임에 시야에서 놓치기 일 수.
검 손잡이 끝으로 뒤통수를 맞아 앞으로 꼬꾸라지기도 했다.
크리스는 악을 쓰며 일어나 다시 검을 휘둘렀다.
하지만 얼마가지 않아 왼손도 상처를 입고 검을 놓치고 말았다.
그 모습에 혀를 찬 루퍼드가 바닥에 떨어져 있는 크리스의 검을 왼손으로 집었다.
크리스는 갑옷을 입은 이점을 전혀 살리지 못했다.
그리고 끝까지 검으로 승부를 보려고 했기에 지금과 같은 상황이 된 것이다.
루퍼드는 왼손에 든 검을 바라보며 말했다.
“참 좋은 검이구나. 네게 아까울 정도로.”
양손에 검을 든 루퍼드가 다시 크리스에게 달려들었다.
크리스가 팔로 쳐내고 피하려고 안간힘을 썼지만 두 자루의 검이 갑옷을 입은 몸 여기저기를 난타했다.
한동안 쇠로 쇠를 두드리고 긁는 소리가 울려 퍼지고 크리스가 바닥에 털썩 무릎을 꿇었다.
갑옷 여기저기서 흘러나오는 피.
“그만. 크윽. 졌다. 그러니···.”
“하하, 이런. 설마 날 이길 생각이었나?”
아무 말도 없는 크리스의 앞에 그의 검을 꽂았다.
“이게 너와 나의 차이다. No.2와 No.9의 차이. 아까 내게 뭘 해야 하냐고 물었지? 지금 대답해주마. 아무것도 하지마라. 그게 네가 할 일이다.”
그렇게 말하고 돌아선 루퍼드는 개운한 표정으로 기지개를 폈다.
원래 이렇게까지 할 생각은 아니었다.
적당히 실력 차이만 보여주려고 했지만 그래서는 영 알아먹지 못할 녀석이니까.
어설프게 했다가는 딴 데 가서 화풀이를 할 테니 일부러 좀 심하게 한 것도 있었다. 저 정도면 오늘 하루정도는 치료를 받고 쉬어야 할 테니까.
걸음을 옮기던 루퍼드는 대전 쪽을 바라보다 피식 웃었다.
‘그나저나 우리 왕께선 언제쯤 움직이시려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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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작가의말
다음 편부터 슬슬 정리가 시작될 겁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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