넘버즈. 28장(4)
“이쪽이 내 동생 플로리아다. 플로리아 오늘은 친구들과 함께 왔다.”
플로리아가 놀란 표정으로 두리번거리는 걸 본 안톤이 씁쓸한 표정으로 친구들을 보며 말했다.
“우선은 들어가서···.”
쾅! 소리가 나며 닫힌 문.
“죄, 죄송합니다. 잠시만, 잠시만 기다려 주세요.”
안에서 들리는 플로리아의 목소리에 안톤이 친구들을 보며 말했다.
“음, 미안. 동생이 조금 당황한 모양이다.”
“그럴 수도 있지. 그런데 문을 잠그는구나”
프란트의 말대로 다시 문을 잠그는 소리가 들렸다.
“아, 죄송합니다. 습관이 돼서. 잠시만 기다려 주세요.”
다시 안에서 들리는 플로리아의 말에 프란트가 안톤을 툭 치며 작게 말했다.
“많이 당황한 모양인데 네가 먼저 들어가라. 우린 괜찮으니까.”
그 말에 안톤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때 다시 문이 열리면서 얼굴만 내민 플로리아.
“오라버니.”
작은 목소리로 안톤을 부르며 손짓하는 그녀.
안톤이 피식 웃으며 집 안으로 들어갔다.
닫힌 문을 멍하니 보던 케빈이 가슴을 쓸어내리고는 길리안의 어깨를 툭툭 치고 뒤쪽으로 걸음을 옮겼다.
“사람이 저렇게 귀여워도 되는 거냐? 천사인 줄 알았네.”
“응?”
“아, 이게 아니지. 안톤이랑 너무 안 닮았다고.”
“많이 닮았던데?”
“그, 그런가? 음··· 그러니까 눈이 안 보이는 거 같지?”
작은 목소리로 말하는 케빈.
길리안이 말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아~ 이런 안타까운 일이. 어쩐지 저 녀석이 꼬박꼬박 집에 간다 했더니···. 하긴 저런 동생이 있으면 나 같아도 그러긴 하겠다. 그런데 저 집 꼭 감옥 같지 않냐?”
“자기가 없는 동안 보호하고 싶었겠지. 저렇게라도 해놓지 않으면 안심이 되지 않았을 테니까.”
“그렇기는 하다만 저런 곳에 갇혀서 얼마나 답답할지. 가슴이 아프다.”
“갇혀있는 건 아니겠지. 앞이 안 보이는데 혼자 돌아다니기는 위험하잖아.”
길리안의 말에 케빈이 고개를 주억거렸다.
“그렇지. 이런 곳에서 저런 미모의 아가씨가 혼자 돌아다니는 건 위험하지. 아, 그런데 어떡할 거냐? 저 녀석 때문에 오늘 이러고 돌아다닌 건데. 아니냐?”
“꼭 그런 건 아니야. 덕분에 다들 어떻게 사는지도 봤고.”
“어쨌든 저 녀석이 가장 큰 이유였잖아. 지금 보니 저 상태로는 기사는커녕 아카데미 졸업하기도 버거워 보인다. 저런 동생을 두고 마음 편하게 뭘 하겠냐. 불쌍한 녀석.”
“워~.”
옆에서 들리는 그렉의 목소리에 케빈의 고개가 획 돌아갔다.
“뭐? 왜?”
“아니, 그냥. 네가 언제부터 안톤을 걱정했다고. 수상해서.”
그렉의 말에 케빈의 인상이 팍 구겨졌다.
“뭐? 수, 수상해?”
“친동생 걱정도 안 하는 게 남의 동생 걱정은.”
“야, 내가 클라라를 얼마나 아끼는데. 맹수 우리에 들어갔다가 혹여 잡아먹히지는 않을까 얼마나 걱정하는 줄 아냐? 그리고 안톤도 친구인데 당연히 걱정하지. 이게 사람을 뭐로 보고.”
“눈깔 네 개 달린 돈벌레?”
“이 자식이!”
케빈이 발끈할 때 길리안이 그의 어깨를 툭 쳤다.
“우선 들어가자.”
집안에 들어서자마자 보이는 것은 사방에 연결된 줄과 벽에 붙어있는 난간.
그게 왜 필요한지는 굳이 말해주지 않아도 알 수 있었다.
그 외에 걸리적거리는 건 모두 없앴는지 별다른 장식도 없고 무척 단순한 내부.
안톤이 플로리아의 양어깨를 살짝 잡고 친구들 앞에 섰다.
“다시 소개하마. 이쪽은···.”
“제가, 제가 직접 하고 싶어요.”
약간 상기된 얼굴로 말하는 동생을 보고 안톤이 옆으로 물러났다.
그녀가 치마를 잡고 무릎과 고개를 살짝 숙이며 말했다.
“플로리아 폰 페트리치입니다. 조금 전에는 큰 결례를 범했습니다. 너무 경황이 없어서 그런 것이니 너그러이 이해해 주시기 바랍니다.”
그런 그녀에게 다들 괜찮다고 말하며 자기소개를 했다.
그때마다 마주 인사하는 그녀.
자신의 차례가 오자 프란트가 안톤을 보며 자신을 손가락을 가리켰다.
“알고 있다.”
는 대답에 웃는 얼굴로 자신을 이름과 신분을 밝혔다.
“오라버니가 이처럼 대단한 친구분들을 두고 계시다는 게 믿기지 않습니다.”
그녀의 말에 그렉이 케빈을 툭 치고 작게 말했다.
“야, 우리도 대단한 거냐?”
“음, 일단 나는 곧 대단해질 건데 넌 모르겠다.”
“나도 대단해질 거거든?”
“그러던가. 시끄러우니까 입 좀 다물어라.”
속닥거리는 걸 들었는지 플로리아가 둘 쪽을 보며 풋 하고 웃음을 터트렸다가 손으로 입을 막았다.
“듣던 대로 사이가 좋으신 것 같아서 그만··· 실례를 범했습니다. 죄송합니다.”
“아하하하. 죄송하실 것 없습니다. 들으신 대로 그렉과 저는 엄청나게 사이가 좋습니다. 어릴 때부터 쭉 함께했지요. 그렇지?”
라고 말하며 케빈이 그렉의 옆구리를 찔렀다.
“어? 어 으응.”
“늘 혼자였던 오라버니가 걱정이었는데 두 분이 오라버니 곁에 있어서 정말 다행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런 플로리아에게 뭐라고 말하려던 안톤이 그냥 입을 다물었다.
“언제까지 이렇게 서 계실 수는 없지요. 우선 앉으십시오. 대접할 것이 마땅치는 않지만, 차라도 내오겠습니다.”
그렇게 말한 플로리아가 돌아서서 손을 뻗었다.
손에 잡힌 줄을 잡고 이동하는 그녀에게 안톤이 말했다.
“내가 하마.”
“아닙니다. 이웃 사람들을 빼면 처음으로 맞이하는 손님들이십니다. 제가 대접하게 해주세요. 할 수 있어요.”
“하지만···.”
“그럼 부탁드립니다.”
안톤의 말을 가로막은 길리안이 그를 잡아끌어 자리에 앉혔다.
다들 자리에 앉아 플로리아를 쳐다봤다.
혼자 불을 피우고 떠놓았던 물을 주전자에 붓고 찻잔을 준비하는 등 분주하게 움직였다.
얼핏 봐서는 앞이 안 보인다는 걸 모를 정도.
그렇게 차를 끓이던 플로리아가 돌아서며 말했다.
“혹시 다들 절 보고 계시는가요? 아, 미처 말씀을 못 드렸는데 전 앞이 보이질 않습니다.”
“알고 있습니다.”
길리안의 대답에 고개를 끄덕인 플로리아가 밝게 웃었다.
“그래도 혼자서 이 정도는 할 수 있습니다. 보이지는 않지만, 다들 쳐다보시는 것 같아 부끄럽습니다. 제 모습이 어떻게 보이는지도 모르겠고···.”
“아름다운 모습에 눈이 떨어지지 않아 실례를 범했습니다. 용서하십시오.”
라는 케빈의 말에 그녀가 얼굴을 붉혔고 다들 케빈을 쳐다봤다.
“어? 왜 그렇게들 보냐? 사실이잖아?”
“그, 그렇게 말씀하시면 제가 부끄럽습니다.”
“하하하 부끄러워하실 것 없습니다. 사실이니까요.”
“저, 정말입니까?”
“정말입니다.”
“제 입으로 이런 말씀 드리기는 부끄럽지만, 이웃 사람들이나 오라버니는 절 예쁘다고 합니다. 그런데 정말 그런지 알 수가 없어서··· 사실 정말 궁금했습니다. 다른 분들 눈에 저는 어떻게 보이는지, 또래의 다른 여자들과 비교하면 어떤지···.”
자신이 없는 듯 말끝을 흐리는 플로리아를 보던 길리안이 옆에 있던 프란트를 툭 쳤다.
“응?”
길리안의 눈짓에 잠시 생각하던 프란트가 미소를 머금고 입을 열었다.
“백합처럼 청초하고 순결한 레이디 플로리아···.”
로 시작된 프란트의 말.
산맥에서 라데카에게 했던 것처럼 입에 버터를 바른 듯 술술 나오는 찬사.
그걸 듣던 그렉이 케빈에게 속삭였다.
“우리 집 버터가 상했나 봐. 어떻게 저런 말이 술술 나오는 거냐?”
케빈은 아무 대답 없이 가만히 듣고 있다가 프란트의 말이 끝나자마자 벌떡 일어났다.
“그 정도로는 레이디 플로리아의 아름다움을 다 표현했다고 할 수 없습니다. 천상에만 존재하는 그린 로즈 같은···.”
케빈의 찬사를 듣던 그렉이 이번엔 프란트에게 속삭였다.
“쟤 이상해.”
프란트는 아무 말 없이 재미있다는 눈빛으로 케빈을 보다가, 날카로운 눈빛으로 케빈을 보는 안톤을 번갈아 보며 미소를 지었다.
케빈의 긴 찬사가 끝나자 얼굴이 붉어진 플로리아가 양 볼을 손으로 감싸고 돌아섰다.
“태어나서 그런 말은 처음 들어봤습니다. 너무 부끄럽고 어지럽습니다.”
그런 동생을 보던 안톤이 낮은 한숨을 내쉬곤 케빈과 프란트에게 눈을 부라렸다.
“내 동생에게 장난치지 마라.”
“진실 된 마음에서 우러나온 내 말을 장난으로 치부하지 마라.”
라는 케빈의 말에 인상을 찡그렸다.
그런 안톤에게 길리안이 말했다.
“장난이 아닌 거 알잖아. 아름다운 건 사실이고.”
“음, 너마저.”
그러는 동안 준비가 다 됐는지 쟁반을 들고 오는 플로리아를 보고 케빈이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제가 도와드리겠습니다.”
“아닙니다. 혼자 할 수 있습니다. 앉아 계십시오.”
라고 말하고는 뜨거운 차를 찻잔에 부었다.
보이지도 않는데 흘러넘치지 않게 정확히 따르는 것을 보고 모두가 놀란 눈으로 그녀를 봤다.
찻잔이 모두 채워지자 그녀가 미소를 지었다.
“그럼 말씀 나누세요.”
“함께 대화를 나눴으면 합니다.”
“제가 있으면 방해가···.”
“방해라니요.”
자리에서 일어난 케빈이 의자를 빼 그녀가 앉도록 도왔다.
그리고 옆에 앉으며 말했다.
“사실 저도 눈이 무척 안 좋아서 두꺼운 안경을 씁니다. 어느 정도 안 보이시는 건지···.”
“전 안경으로는 안 됩니다. 지금은 낮과 밤 정도만 구분할 수 있고, 그것도 시간이 더 지나면 힘들 거라는 말을 들었습니다.”
“음, 죄송합니다. 조금 전에 차를 따르는 모습이 너무 자연스러워서 혹시나 하고···.”
“죄송하실 것 없습니다. 보이지 않는 건 사실이고 지금은 신경 쓰지 않습니다. 언젠가 이런 날이 오지 않을까 하고 조금씩 연습했는데, 자연스러워 보였다니 정말 기쁩니다.”
“집안에만 있는 게 답답하지는 않으십니까?”
케빈의 물음에 플로리아가 고개를 저었다.
“전 괜찮습니다. 별 차이가 없으니까요. 가끔은 나가고 싶기는 하지만 혼자 바깥에 나가는 건, 저도 무서우니까요.”
“음···.”
“너무 저만 얘기하는 것 같지만, 몇 마디만 더 하겠습니다. 보셨다시피 보이지 않아도 이 집안에서는 불편함 없이 생활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 오라버니의 걱정이 너무 지나칩니다. 특히 방화사건 이후로는···.”
“플로리아.”
그런 안톤의 어깨를 길리안이 잡으며 고개를 저었다.
“계속 얘기해 보세요.”
“네.”
플로리아가 크게 숨을 들이마셨다가 내쉬고 다시 말했다.
“저 때문에 아카데미에 입학하는 것도 늦었고 지금도 저 때문에 매일 집에 오가느라 힘들다는 것도 알고 있습니다. 오라버니는 늘 저 때문에 많은 것을 희생해왔습니다. 항상 짐이 되는 것 같아 마음이 무거웠습니다.”
“널 짐이라고 생각해본 적 없다.”
“알고 있습니다. 그래도 그런 오라버니를 보면 그렇게 느껴질 때가 있습니다. 절 정말 짐이라 생각하지 않으신다면 좀 더 학업에 전념하시고 하시고 싶은 일을 하세요. 그럼 저도 그런 생각을 하지 않겠습니다.”
“널 돌보는 건 내겐 당연한 일이고 네가 말한 것도 전부 하고 있다.”
안톤의 말에 플로리아가 고개를 저었다.
“제가 이 자리에서 이런 말씀을 드리는 건 항상 같은 결론에 도달하기 때문입니다. 친구분들이 오라버니를 설득해주세요. 전 정말 혼자서도 잘 지낼 수 있습니다.”
“확실히 그래 보입니다. 하지만 안톤을 설득시키는 건 무척 힘든 일이지요.”
그렇게 말한 길리안이 자리에서 일어나 안톤의 뒤에 가서 양쪽 어깨에 손을 올렸다.
“오라버니는 고집쟁이니까요. 힘들어도 내색하지 않고 항상 혼자서 모든 걸 짊어지고 해결하려 하니까요. 제 눈을 고쳐주겠다고 힘들게 번 돈을 모두 쓰고, 아카데미에 합격하고도 돈을 받는 조건으로 포기했습니다. 그 사람은 오라버니가 포기해서 아카데미에 들어갔지요. 그게 다 저 때문이었습니다.”
“그건···.”
“오라버니는 기사의 길을 가실 분이잖아요.”
“기사의 길은 직업으로 좋기 때문에 선택한 것뿐이다.”
“그래도 기사가 될 분이 그러시면 안 되잖아요. 기사가 돼서도 그러실 건가요? 그렇게 해서 제가 앞이 보이게 되면 마음이 기쁠까요? 저 때문에 오라버니가 망가진다면 차라리 죽는 것이 낫습니다.”
“플로리아!”
안톤이 자리에서 일어나려고 했지만, 길리안 때문에 그러지 못했다.
“그러니 친구분들이 도와주세요. 오라버니가 기사의 길을 갈 수 있게 설득해주세요.”
고개를 숙이며 말하는 플로리아를 보고 길리안이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곧 왕실 기사를 뽑을 겁니다. 그리고 안톤은 그 시험을 칠 겁니다.”
그 말에 플로리아가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정말인가요?”
“길리안 난 아직···.”
“네. 정말입니다. 그리고 안톤은 기사가 될 겁니다.”
양손을 꼭 쥔 플로리아가 환하게 웃었다.
“정말, 정말 그렇게 됐으면 좋겠어요.”
“아마 며칠은 안톤을 보기 힘들 겁니다. 훈련을 해야 하니까요.”
“전 괜찮습니다.”
그렇게 말한 플로리아가 무릎을 꿇고 안톤의 손을 잡았다.
“오라버니 꼭 기사가 돼주세요. 네?”
“나는, 나는 음···.”
대답을 못 하는 안톤을 내려다보던 길리안이 말했다.
“아무래도 이 상태로는 아무 결정도 못 내리겠구나. 억지로 훈련을 시켜도 잘 안 될 것 같고···.”
“생각할 시간을 다오.”
“시간이 많지 않아. 그리고 시간은 기다려 주지도 않아.”
“음.”
“네가 이러니까 동생도 짐이 된다고 느끼는 거다.”
“그렇지 않아. 기사는 몇 년 후에 된다고 해도 상관없다.”
“그럴지도 모르지만, 굳이 몇 년 후를 기약할 필요는 없지. 네 말대로 기사는 직업으로도 좋아. 지금보다 훨씬 나아질 거다.”
“나는···.”
“역시 저 때문이시군요?”
“아니다.”
“거짓말. 돌봐줄 사람을 구해도 되는데 그러시지도 않잖아요. 그것도 마음을 못 놓으시겠죠?”
아무 말도 없는 안톤을 보고 플로리아가 다시 말했다.
“제가 그렇게 짐이 된다면 지금 당장 시집이라도 가겠어요. 그럼 걱정이 덜 되겠죠. 저 같은 여자를 받아줄 사람이 있을지는 모르지만.”
그 말에 케빈이 벌떡 일어났다가 길리안이 고개를 젓는 걸 보고 다시 앉았다.
“플로리아 너 때문이 아니다.”
“그럼 왜 망설이시는데요?”
“그건···.”
그런 안톤을 보고 길리안이 고개를 저었다.
“안톤 언제까지 같은 얘기를 반복할 거냐? 아무래도 설득은 여기까지 해야겠구나.”
그 말에 플로리아가 일어서며 말했다.
“포기하시는 건가요?”
“아니요. 단지 설득을 포기할 뿐입니다.”
“그럼 어떤 방법을···?”
“안톤이 망설이는 이유를 제거해야겠지요.”
“그럼 절···.”
한걸음 물러서는 플로리아를 보며 길리안이 씨익 웃었다.
“네. 레이디 플로리아를 납치할 생각입니다.”
추천과 댓글은 글쟁이에게 큰 힘이 됩니다.^^
- 작가의말
집에 좀 일찍 왔습니다. 으 일하기 싫네요.
다음 편은 오늘 중으로 올라갈 겁니다.
어쨌든 납치범 길리안! 다음 편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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